그 다음 목적지는 샌안토니오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유적이자, 미국사에 대해 지식이 있으신 분이라면 한번쯤 들어보았을 바로 그곳, 알라모 요새입니다. 사실 샌안토니오를 방문하기로 결정한 이유의 상당부분이 이것 때문이기도 했구요.
미국인들의 텍사스 이주, 그리고 이어진 스페인으로부터 멕시코의 독립, 멕시코 내의 정치적 격변과 '텍시안' 대 멕시코의 갈등이 분출하여 결국 알라모 포위전에 이르까지의 역사에 대해서는 지난번 포스팅에서 이미 간략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굳이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알라모 요새는 샌안토니오 다운타운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리버센터 몰에서 걸어서 금방입니다.
금세 영화를 통해서 익숙한 형체가 눈앞에 나타납니다. 샌안토니오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답게 사람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흔히 '알라모 요새'로 알려져 있으나 본래 군사용 요새는 아니었습니다. 원래의 명칭은 샌 안토니오 데 발레로 선교원. 18세기에 스페인 제국이 세운 선교원이었습니다. 그러나 1793년에 종교용 목적은 폐기되었고, 곧 건물 자체가 버려지게 됩니다. 그 이후로는 군사적 요새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현재 알라모의 모습에서 1836년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이후 개발과 도시화의 물결로 인해 한때 제법 컸던 알라모 요새의 대부분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위 사진의 교회 건물은 얼핏 보면 요새의 정문인가 싶지만 실제 당시에는 요새의 제일 후방이었고, 텍시안 방어군 최후의 거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당시의 역사를 느끼고자 한다면 역사적 지식 못지 않게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우선 저 교회 건물로 들어가기 전에 완전히 몸을 돌려서 반대편을 한번 바라보겠습니다.
자, 지금 알라모 교회 건물을 등지고 섰습니다. 얼핏 보면 그냥 도시 광장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 여기가 요새의 연병장 자리입니다. 정면에 건물이 늘어선 곳이 원래 요새의 외벽이 있던 곳이고, 사진 왼쪽에 요새의 정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요새의 규모가 어땠는지 대략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당시 요새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가면서 교회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교회 내부는 사진촬영 금지입니다. 이곳은 아까도 말했지만 방어군에게 마지막 거점이었으며, 따라서 알라모 공방전 중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였습니다.
교회 뒤로 나왔습니다. 여기서부터 제법 멋지게 꾸며놓은 공원이 시작됩니다. 물론 1836년 당시에는 여기까지가 요새였고, 현재 조성된 공원은 요새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롱 배럭도 함락되고, 최후의 생존자들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알라모 교회에 모여서 저항하였고, 멕시코군은 18 파운드 포로 교회 문 앞의 모래주머니를 날려버린 뒤에 문을 부수고 안으로 돌입했습니다. 여기서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고, 방어군은 가차없이 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공격군을 지휘하던 카스트리욘 장군이 개입하여 무의미한 살상을 중단시켰고, 사실상 공방전은 막을 내렸습니다.
산타 안나가 입성하자 카스트리욘 장군은 포로들을 인계했습니다. 이 멕시코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 장군은 산타 안나에게 전투도 끝난 마당이니 무력한 포로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했으나, 한 마디로 거절당했습니다. 산타 안나는 그 자리에서 모든 포로의 처형을 명령합니다. 고결한 성품을 가진 신사였던 카스트리욘은 차마 그 광경을 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트레비스, 보위와 함께 방어군의 중요 인물이었던 데이비드 크로켓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알라모의 함락과 함께 그 역시 죽었다는 사실 뿐입니다.
'서부의 나폴레옹' 산타 안나는 알라모 전투를 통해서 텍시안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자신의 위엄을 떨치려 하였으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알라모를 통해서 산타 안나는 그때까지 사분오열되어있던 텍시안들을 가장 확실하게 일치단결시켜주었거든요.
결국 채 2달이 지나기도 전인 4월 21일. 샌하신토 전투에서 샘 휴스턴 휘하의 텍사스군은 "알라모를 기억하라"를 외치며 산타 안나의 군대를 도륙했습니다. 알라모에서 멕시코군이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것처럼, 샌하신토에서도 눈이 뒤집힌 텍시안들은 무차별 학살을 감행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알라모에서 높은 도량을 보여주었던 카스트리욘 장군도 샌하신토 전투에서 희생되었습니다. 텍시안 장교는 이 멕시코 장군을 포로로 잡으려 하였으나, 이미 통제불능 상태였던 병사들은 장군을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습니다.
알라모 전투 당시 멕시코 '솔다도스'의 모습. 여긴 근처 쇼핑몰 내 아이맥스 영화관 앞의 기념품점입니다. 여기서 알라모 전투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데, 나름 볼만 합니다. 당시 멕시코군은 스페인군과 프랑스군 스타일의 편제와 복장이 혼합된 식이었으며, 무기는 주로 영국제 브라운 배스 머스켓을 사용하였습니다. 유럽식 복제를 갖추었기 때문에 군화도 당연히 지급되었지만, 농민 출신의 병사들은 익숙하지 않은 군화를 내다버리고 맨발이나 샌들로 행군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물론 알라모 전역에서 그 병사들은 그것을 뼈아프게 후회해야 했습니다. 그 해 텍사스의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거든요.(심지어 텍사스에서 그 드물다는 눈까지 내렸습니다 -_-)
쇼핑몰에 들렀다 나오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습니다.
문 닫은 시간이라 다시 찾은 알라모 앞은 한산합니다. 이 모습도 마음에 들어서 카메라에 담아보았습니다.
미국인들의 텍사스 이주, 그리고 이어진 스페인으로부터 멕시코의 독립, 멕시코 내의 정치적 격변과 '텍시안' 대 멕시코의 갈등이 분출하여 결국 알라모 포위전에 이르까지의 역사에 대해서는 지난번 포스팅에서 이미 간략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굳이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알라모 요새는 샌안토니오 다운타운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리버센터 몰에서 걸어서 금방입니다.


그러나 유명한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현재 알라모의 모습에서 1836년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이후 개발과 도시화의 물결로 인해 한때 제법 컸던 알라모 요새의 대부분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위 사진의 교회 건물은 얼핏 보면 요새의 정문인가 싶지만 실제 당시에는 요새의 제일 후방이었고, 텍시안 방어군 최후의 거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당시의 역사를 느끼고자 한다면 역사적 지식 못지 않게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우선 저 교회 건물로 들어가기 전에 완전히 몸을 돌려서 반대편을 한번 바라보겠습니다.

그러면 이 요새의 규모가 어땠는지 대략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당시 요새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가면서 교회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알라모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전시물


군사적 기능이라는 면에서 봤을 때, 알라모 요새는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곳입니다. 지금도 도시 한복판에 있지만, 특별히 지리적인 이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방벽이 견고하다고는 하지만, 정작 요새 정문의 좌측의 포대는 허술한 나무 울타리로 방어되는 등 오래 항전하기는 무리가 있는 곳이었지요. 거기다가 텍시안들 입장에서는 지원군이 빨리 도착할 가망도 없었습니다.
물론 산타 안나와 멕시코군 입장에서도 나름 고충은 있었던 것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에워싸고는 있었지만 산타 안나도 겨울철에 강행군을 해왔기 때문에 요새 공격용 중포들이 부족했습니다. 보유하고 있던 경포로는 요새의 석벽에 돌파구를 내기 힘들었지요. 덕분에 알라모 방어군은 포격을 당하면서도 13일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사실 텍시안들에게 가까운 시일 내에 지원군이 도착할 가망이 없는 마당에서, 산타 안나가 굳이 요새에 정면공격을 가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어쨌든 방어군은 방벽 위에서 지키고 있다는 이점이 있었으며, 텍시안들은 특히 사격술도 뛰어났습니다. 따라서 정면공격을 가한다면 멕시코군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멕시코 장군들은 정면 공격을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산타 안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포위해서 말려죽이는 것보다는 당당한 정면공격으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어야지만 텍사스에 제대로 된 본보기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물론 병사들의 목숨이 상당수 희생되긴 하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멕시코군은 대낮에 밀고 들어가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멕시코군이 정한 공격시점은 1836년 3월 6일, 새벽 3시였습니다. 포격으로 지친 방어군이 잠들어있을 시간, 멕시코군은 야음을 틈타 조용히 요새로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게 전쟁이고, 전장은 항상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넘쳐나는 법이지요. 곧 벌어질 전투의 공포, 그리고 사방을 휘감고 있는 밤의 고요에서 오는 긴장을 오히려 멕시코군이 이겨내지를 못했습니다. 결국 긴장을 떨쳐내기 위해 한 멕시코 '솔다도스(soldados)'가 목청껏 전투구호를 외치고 말았습니다.
"비바 산타 안나(Viva Santa Anna)! 비바 라 레푸블리카(Viva la Republica)!"
산타 안나 입장에서는 '산타 안나 만세'라는 외침이 이렇게 반갑지 않은건 아마도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을런지(...) 아무튼 산타 안나는 화가 나서 펄펄 뛰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멕시코군 수백명이 산타안나 만세와 공화국 만세를 따라서 외쳤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 소리는 잠들어있던 방어군을 깨웠습니다.
알라모 방어군의 지휘는 텍사스 정규군 지휘관이던 윌리엄 배럿 트레비스 중령과, 민병대를 이끌던 유명한 모험가 제임스 보위 대령이 맡고 있었지만, 당시 보위는 열병으로 쓰러져서 지휘권은 트레비스가 단독으로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트레비스가 담당하고 있던 북쪽 포대가 멕시코군의 첫 공격목표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트레비스는 벌떡 일어나 산탄총을 집어들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일어나라 제군들. 멕시코군이 오고 있다. 우리는 놈들에게 지옥을 맛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방벽 위에서 쏟아지는 방어군의 맹렬한 사격이 멕시코군의 선두 대열을 산산이 찢어놓았습니다. 방벽 밑의 상황은 거의 고속도로 정체를 방불케 했습니다. 멕시코군의 선두는 이미 대열이 허물어진 상황에서, 후속 부대가 계속 밀려들면서 엄청난 혼란이 야기되었지요. 그 와중에 상당수 멕시코군 병사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나 멕시코 병사들도 응사하기 시작하면서 알라모 방어군도 피해가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북쪽 포대를 지휘하면서 계속 산탄총을 쏘아대던 트레비스가 머리가 총격을 받고 전사했습니다.
멕시코군은 요새의 사방을 돌면서 빈틈을 노렸지만, 여의치 않았고 혼란과 피해만 가중되었습니다.(산타 안나가 이 시점에서 명령한 후방 지원사격은 오히려 대부분 멕시코군에게 떨어졌습니다) 결국 방법은 뭐 우세한 수를 이용한 정공법밖에 없었지요. 멕시코 병사들은 사다리를 놓고 방벽을 기어올랐습니다.
결국에는 수적우세가 상황을 결정지었습니다. 한번 돌파구가 만들어지자 멕시코 병사들이 점점 더 많이 요새로 밀려들어갔고, 전황은 조금씩 멕시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이제 방벽 위의 방어군들은 요새 안으로 후퇴하여 최후의 저항을 시도하든지, 밖으로 탈출하든지 두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밖으로의 탈출 시도는 미리 대비하고 있던 산타 안나에 의해 수포로 돌아갑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멕시코군이 자랑하던 창기병대가 대기하고 있었거든요. 사방으로 흩어져 탈출을 시도하던 텍시안들은 추격해온 기병대의 창에 꿰뚫렸습니다. 이제 남은 수순은 요새 내부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혼전이었습니다.
교회와 함께 남아있는 몇 안되는 옛 건물인 '롱 배럭(Long Barrack)'입니다. 이 안의 방들은 당시 가장 처절한 근접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였습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산타 안나와 멕시코군 입장에서도 나름 고충은 있었던 것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에워싸고는 있었지만 산타 안나도 겨울철에 강행군을 해왔기 때문에 요새 공격용 중포들이 부족했습니다. 보유하고 있던 경포로는 요새의 석벽에 돌파구를 내기 힘들었지요. 덕분에 알라모 방어군은 포격을 당하면서도 13일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사실 텍시안들에게 가까운 시일 내에 지원군이 도착할 가망이 없는 마당에서, 산타 안나가 굳이 요새에 정면공격을 가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어쨌든 방어군은 방벽 위에서 지키고 있다는 이점이 있었으며, 텍시안들은 특히 사격술도 뛰어났습니다. 따라서 정면공격을 가한다면 멕시코군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멕시코 장군들은 정면 공격을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산타 안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포위해서 말려죽이는 것보다는 당당한 정면공격으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어야지만 텍사스에 제대로 된 본보기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물론 병사들의 목숨이 상당수 희생되긴 하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멕시코군은 대낮에 밀고 들어가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멕시코군이 정한 공격시점은 1836년 3월 6일, 새벽 3시였습니다. 포격으로 지친 방어군이 잠들어있을 시간, 멕시코군은 야음을 틈타 조용히 요새로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게 전쟁이고, 전장은 항상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넘쳐나는 법이지요. 곧 벌어질 전투의 공포, 그리고 사방을 휘감고 있는 밤의 고요에서 오는 긴장을 오히려 멕시코군이 이겨내지를 못했습니다. 결국 긴장을 떨쳐내기 위해 한 멕시코 '솔다도스(soldados)'가 목청껏 전투구호를 외치고 말았습니다.
"비바 산타 안나(Viva Santa Anna)! 비바 라 레푸블리카(Viva la Republica)!"
산타 안나 입장에서는 '산타 안나 만세'라는 외침이 이렇게 반갑지 않은건 아마도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을런지(...) 아무튼 산타 안나는 화가 나서 펄펄 뛰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멕시코군 수백명이 산타안나 만세와 공화국 만세를 따라서 외쳤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 소리는 잠들어있던 방어군을 깨웠습니다.
알라모 방어군의 지휘는 텍사스 정규군 지휘관이던 윌리엄 배럿 트레비스 중령과, 민병대를 이끌던 유명한 모험가 제임스 보위 대령이 맡고 있었지만, 당시 보위는 열병으로 쓰러져서 지휘권은 트레비스가 단독으로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트레비스가 담당하고 있던 북쪽 포대가 멕시코군의 첫 공격목표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트레비스는 벌떡 일어나 산탄총을 집어들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일어나라 제군들. 멕시코군이 오고 있다. 우리는 놈들에게 지옥을 맛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방벽 위에서 쏟아지는 방어군의 맹렬한 사격이 멕시코군의 선두 대열을 산산이 찢어놓았습니다. 방벽 밑의 상황은 거의 고속도로 정체를 방불케 했습니다. 멕시코군의 선두는 이미 대열이 허물어진 상황에서, 후속 부대가 계속 밀려들면서 엄청난 혼란이 야기되었지요. 그 와중에 상당수 멕시코군 병사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나 멕시코 병사들도 응사하기 시작하면서 알라모 방어군도 피해가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북쪽 포대를 지휘하면서 계속 산탄총을 쏘아대던 트레비스가 머리가 총격을 받고 전사했습니다.
멕시코군은 요새의 사방을 돌면서 빈틈을 노렸지만, 여의치 않았고 혼란과 피해만 가중되었습니다.(산타 안나가 이 시점에서 명령한 후방 지원사격은 오히려 대부분 멕시코군에게 떨어졌습니다) 결국 방법은 뭐 우세한 수를 이용한 정공법밖에 없었지요. 멕시코 병사들은 사다리를 놓고 방벽을 기어올랐습니다.
결국에는 수적우세가 상황을 결정지었습니다. 한번 돌파구가 만들어지자 멕시코 병사들이 점점 더 많이 요새로 밀려들어갔고, 전황은 조금씩 멕시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이제 방벽 위의 방어군들은 요새 안으로 후퇴하여 최후의 저항을 시도하든지, 밖으로 탈출하든지 두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밖으로의 탈출 시도는 미리 대비하고 있던 산타 안나에 의해 수포로 돌아갑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멕시코군이 자랑하던 창기병대가 대기하고 있었거든요. 사방으로 흩어져 탈출을 시도하던 텍시안들은 추격해온 기병대의 창에 꿰뚫렸습니다. 이제 남은 수순은 요새 내부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혼전이었습니다.


'롱 배럭' 내부의 병원을 재현해놓았습니다. 내부로 밀려든 병사들은 한 병실의 침대에 누워있던 '반란군' 한 명을 발견합니다. 그 병자는 너무 쇠약해서 일어나서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밤새 시달려서 악에 받힌 멕시코 병사들은 자비를 베풀 기분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짐 보위는 총검에 난자당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바깥에서 본 롱 배럭의 모습. 물론 '바깥'은 지금 기준으로 말씀드린 것이고, 1836년으로 돌아가면 바로 여기가 요새의 내부입니다. 요새 마당(사진 좌측)을 점령한 멕시코군은 '롱 배럭'으로 뚫고 들어와 내부에서 저항하던 방어군을 제압했습니다. 참고로 사진 정면에 보이는 건물은 관공서인데, 바로 저기가 당시 위에서 설명한 북쪽 포대가 있던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트레비스 중령이 전사한 곳이 바로 저 위치인 셈입니다.

알라모 방어군 부조
롱 배럭도 함락되고, 최후의 생존자들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알라모 교회에 모여서 저항하였고, 멕시코군은 18 파운드 포로 교회 문 앞의 모래주머니를 날려버린 뒤에 문을 부수고 안으로 돌입했습니다. 여기서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고, 방어군은 가차없이 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공격군을 지휘하던 카스트리욘 장군이 개입하여 무의미한 살상을 중단시켰고, 사실상 공방전은 막을 내렸습니다.
산타 안나가 입성하자 카스트리욘 장군은 포로들을 인계했습니다. 이 멕시코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 장군은 산타 안나에게 전투도 끝난 마당이니 무력한 포로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했으나, 한 마디로 거절당했습니다. 산타 안나는 그 자리에서 모든 포로의 처형을 명령합니다. 고결한 성품을 가진 신사였던 카스트리욘은 차마 그 광경을 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트레비스, 보위와 함께 방어군의 중요 인물이었던 데이비드 크로켓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알라모의 함락과 함께 그 역시 죽었다는 사실 뿐입니다.
'서부의 나폴레옹' 산타 안나는 알라모 전투를 통해서 텍시안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자신의 위엄을 떨치려 하였으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알라모를 통해서 산타 안나는 그때까지 사분오열되어있던 텍시안들을 가장 확실하게 일치단결시켜주었거든요.
결국 채 2달이 지나기도 전인 4월 21일. 샌하신토 전투에서 샘 휴스턴 휘하의 텍사스군은 "알라모를 기억하라"를 외치며 산타 안나의 군대를 도륙했습니다. 알라모에서 멕시코군이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것처럼, 샌하신토에서도 눈이 뒤집힌 텍시안들은 무차별 학살을 감행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알라모에서 높은 도량을 보여주었던 카스트리욘 장군도 샌하신토 전투에서 희생되었습니다. 텍시안 장교는 이 멕시코 장군을 포로로 잡으려 하였으나, 이미 통제불능 상태였던 병사들은 장군을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습니다.

쇼핑몰에 들렀다 나오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습니다.









최근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