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의 기원 (번외편)-엘리노어 크로스 논란 History-근동, 서양사



들어가며

1641년, 잉글랜드의 여론은 절반으로 쪼개졌다. 그 분열상은 무엇보다도 정치의 중심지인 런던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 예전의 교과서적 서술은 찰스 1세와 의회가 극심하게 갈등했고, 런던의 민심은 의회 쪽으로 쏠려있었기 때문에 결국 찰스가 런던을 탈출하여 내전이 시작되는 식의 내러티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내전에 대한 최근 서술들이 강조하듯, 이 시기의 특징은 소위 국왕과 국민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잉글랜드의 정치적 인민(political nation)의 분열과 양극화다.

런던과 같은 당대 대도시들은 이러한 정치적 갈등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곳이면서, 정치적 지형도가 가장 뚜렷하게 잘 드러나는 곳이었다. 중세 이래 서유럽의 도시들은 정치적으로 능동적인 시민들의 거주지이면서, 급진사상들의 모태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극심한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이른바 '엘리노어 크로스(The Eleonore Crosses)'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이다.







엘리노어 크로스란?

그렇다면, 이 논란의 근원인 '엘리노어 크로스'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는 에드워드 1세가 영국 전역에 남긴 12개의 중세 석조 기념물을 말한다. 중세 잉글랜드의 군주들 중 유명하기로는 단연 탑급에 속하는 '롱생크' 에드워드 1세는 그의 왕비 카스티야의 엘리노어(레오노르 데 카스티야)를 깊이 사랑했다. 그런 까닭에 36년의 결혼생활 끝에 엘리노어가 사망하자, 왕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당시 에드워드가 남긴 글은 그의 무너진 마음을 절절하게 전해준다.

(스코틀랜드에게)차가운 잉글랜드의 왕. 그러나 내 왕비에겐 따뜻하겠지


에드워드는 죽은 왕비를 기리기 위해, 링컨에서 런던까지 그녀의 장례행렬이 머무른 곳마다 십자가 기념물을 세우게 했다. 모양은 대체로 피라미드 형태에 맨 위에 십자고상이 올려진 형상이었다. 기단부는 여러 성인과 천사, 위인들의 조각으로 화려하면서도 정교하게 장식되었다. 여러모로 절정기를 맞이한 중세 잉글랜드의 국력과 문화적 성취가 온전히 담긴 중세 예술의 걸작이었다.

따라서 문화, 예술적 가치로 보나 역사적 가치로 보나, 잉글랜드 입장에서 이는 단연 국보급 문화재들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후대 왕들은 정성들여 이를 보존하고, 손질하고, 때로는 장식문들을 더 추가하면서 가꿔왔다. 이 십자가들은 그것이 세워진 도시의 아이덴티티이자 자랑거리이면서, 동시에 (주요 도로 중앙에 세워졌기 떄문에)상업과 문화의 중심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중세가 저물고 종교개혁과 종파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 십자가들에 시련이 찾아왔다. 퓨리턴을 위시한 강경파 개신교도들에게 천사와 성인들이 조각된 이 십자가들은 문화재가 아니라 얄짤없이 옛 종교의 잔재이자 우상숭배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엘리자베스 시대때부터 이 십자가를 때려부숴야 한다는 강경파들의 주장이 빗발쳤다. 그러나 왕실은 열심히 이를 보호했다.







논란과 파괴

1641-42년의 양극화 시대에 와서 이 십자가들은 다시 한번 논란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특히 여론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런던 중심부에 위치한 '칩사이드 크로스'와 '채링 크로스'가 논란의 핵심이었다. 지금은 둘 다 런던의 지명으로 남아있지만, 사실 엘리노어 크로스가 서있던 곳이다.

1641년 6월, 퓨리턴 헨리 버튼은 하원에서 설교하면서 '이 우상숭배의 유산을 때려부숴라!"라고 요구하였다. 순식간에 이 중세 십자가는 잉글랜드인 각각의 종교적 아이덴티티를 결정하는 척도가 되버렸다. 퓨리턴과 강경파들은 이 기념물이 '교황주의자들의 위안이며,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는 수단'이라고 부르며 강경하게 파괴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지난 수백년 동안 이 십자가는 시민 활동의 중심지였다. 많은 주민들은 "미쳤냐, 우리 랜드마크를 왜 때려부숴?"라고 반응하였다. 이에 이 십자가가 우상숭배인지, 아무런 해될게 없는 단순한 장식물인지를 두고 벌어지는 신학적 논쟁부터, 자극적인 언어를 동원한 엘리노어 크로스와 '교황주의자들'에 대한 비난, '단순한 기념물에 미친듯이 집착하는 퓨리턴들'을 풍자하는 글들이 홍수를 이루었다.

사태는 급기야 글과 말싸움을 넘어 물리적 폭력 사태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퓨리턴들은 밤중을 틈타 수시로 망치를 들고 이 십자가를 파괴하려 시도한 바 있었다. 1642년 2월에는 아예 집단을 이루어서 이 우상숭배의 물건을 때려부수겠다고 파괴 원정대가 출동하기에 이른다. 물론 파괴 반대측도 가만히 있지 않아서, 십자가 수호대(문자 그대로 스스로를 defenders of cross라고 불렀다)를 조직하여 맞섰고, 두 집단은 물리적으로 충돌했다.

즉, Braddick 선생이 지적하듯, 이 시기에 엘리노어 십자가는 잉글랜드 개신교회의 분열상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결국 내전이 터지고, 찰스 1세가 런던을 떠나서 지지자들을 결집하면서 런던은 의회가 장악하게 된다. 이에 강경파들은 다시 한번 이 기념물들의 파괴를 추진하였다. 결국 의회 내 강경파 주도로 '우상숭배와 미신 척결 위원회'가 만들어졌고, 13세기부터 제 자리를 지켜온 이 기념물들은 파괴되고 말았다.

한 왕당파 여성은 이 파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우리 조상들의 때부터 살아온 옛 십자가
아홉 위인 못지 않은 명성을 누렸으며
어떤 해도 끼치지 않고, 누구도 다치게 한 적 없으며
오로지 평화와 고요 속에 존재해왔건만

(중략)

그러나 그 평화로운 본성도 겸손한 마음도
무지하고 맹목적인 이들의 공격을 막아주지 못하였구나

(중략)

그리하여 이 십자가, 불쌍한 십자가를
그들은 분노 속에 무너뜨렸다.
오직 시대가 죄 있을 뿐이로다







후일담

엘리노어 크로스는 노스햄턴과 헤리퍼드셔, 허트포드셔의 세 개만 살아남고 모두 파괴되었다. 내전 중에 런던에서 파괴된 칩사이드 크로스와 채링 크로스는 파편들만 박물관에 보관되어 전성기 때의 화려함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이후 왕정이 복고된 후 찰스 2세는 채링 크로스가 서있던 자리에 부왕 찰스 1세의 기마상을 세웠고, 그 기마상은 아직도 그 자리(현재 트라팔가르 광장 앞쪽)에 서 있다.

빅토리아 시대에 와서 옥스퍼드 운동이 일어나고 중세 애호 유행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영국인들은 "우리 조상들은 대체 무슨 짓을..ㅠㅠ"이라고 후회하면서 이때 부서진 스테인드 글라스들과 성상들을 복구하는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채링 크로스가 복원되어 현재 채링 크로스 역 앞에 서 있다. 현존하는 세 개의 십자가와 박물관의 파편들, 그림자료들을 참고하여 열심히 복원하긴 했지만, 레플리카는 어디까지나 레플리카일뿐, 중세의 실제 유물들은 이미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채링 크로스, 빅토리아 시대의 복원


영국 내전의 기원 (12)-대분열 History-근동, 서양사

왕당파의 형성

지난번 글에 설명했듯이, 찰스 1세에게는 최악의 시기였다. 패전으로 위신은 추락했고, 신뢰할수 있는 측근 대신들은 처형되거나 감옥에 갇혔다. 의회는, 정도는 달랐지만, 그의 정책에 대한 반대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 위기를 탈출하고 어느정도 정치적 힘을 회복하려면 그에게는 두 가지 수단밖에 없었다. 첫째는 무력을 동원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지지세력을 규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첫째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잉글랜드는 대규모 상비군이 없는 나라였고, 그나마 모아놓은 군대도 빈약한 재정 때문에 유지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나마 제대로 된 군대를 동원할 능력이 있었던 스트래퍼드 백작은 제거당했다. Cust 선생이 지적했듯이, 찰스 1세가 진짜 무능하기만 한 군주였다면 이 시점에서 완전히 허수아비로 전락했을 것이고, 내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히 놀랍게도, 이 시기부터 찰스 1세는 꽤 힘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 원인이 있었다. 우선, 찰스 1세가 정치가로서 단점도 있었지만 또 나름대로 능력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두번째 원인으로는, 이 시기부터 의회 내의 그의 적대자들이 급격히 분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의회는 찰스 1세의 몇몇 정책들에 대한 반대로 결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번 글에 서술했듯이 그 반대의 이유는 각각 달랐다. 퓨리턴을 위시한 강성 칼뱅파에게는 종교정책이 가장 문제였고, 누군가에게는 의회가 아닌 국왕의 대권에 의거한 재정정책이 문제였다. 따라서 찰스 1세의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로 묶였지만 그 외에는 공통점이 별로 없는게 이 당시 의회의 여러 파벌이었다. 그리고 '찰스 1세의 권력을 제한하자'라는 목표 때문에 이들을 국왕의 절대주의에 맞서는 헌정주의의 대표자들로 보는 시각 역시 현재는 별로 통용되지 않고 있다. 가령,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했듯이, 존 핌을 비롯한 퓨리턴이 찰스 1세의 권력을 제한하려 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찰스 1세가 퓨리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찰스 1세가 퓨리턴과 종교적 의견을 같이했다면, 이들은 기꺼이 국왕의 절대권 강화에 찬성했을 이들이었다.

어찌되었건, 이러한 배경을 이해한다면, 당시 의회의 공동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한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스트래퍼드의 처형과 로드 주교의 투옥 등으로 의회 구성원들 대다수가 반대하던 국왕의 정책들 상당수는 무효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많은 이들에게 더이상 공동전선을 유지할 필요가 점점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퓨리턴을 비롯한 급진파 프로테스탄트 상당수는 말 그대로 이제 자기 세상이 열렸다고 받아들였다. 이들은 대놓고 나서서 반달리즘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는 많은 중도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갈등을 봉합하려는 마지막 시도로 의회는 영국 프로테스탄트 국교회를 수호하겠다는 맹세를 모든 성인 남성에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는 갈등 봉합은 커녕 더 큰 분열을 낳았다.

Braddick 선생의 설명대로 급진파와 퓨리턴들은 이 맹세를 "이제 성상 파괴를 마음대로 해도 좋다"라는 허가로 받아들였다. 이에 성찬 테이블과 스테인드 글라스, 성상을 무차별 박살내는 행위는 갈수록 심해졌다. 몇몇 급진주의자들은 성직자들의 전례복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제의실의 문을 잠가버리기도 하였다.

이미 여러번 설명하였지만, 퓨리턴와 급진파는 의회에서나 영국 사회에서나 다수가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퓨리턴은 국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다양한 세력들 가운데서 가장 목소리가 크고 행동력이 있는 집단이었고, 덕분에 이들에게 유용한 동맹자였다. 그러나 이제 공동전선이 허물어지면서 이들의 유용성도 떨어지고 있었다. 대다수 의원들과 영국인들은 로드 주교 식의 고교회파 정책에도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전례를 죄다 파괴하는 것 역시 찬성하지 않았다. 더욱이 퓨리턴이 저지르는 파괴 행위는 많은 이들에게 무질서와 무정부 상태로 받아들여졌다.

파괴 행위와 함께 당시 퓨리턴들이 내뱉던 극단적인 용어들도 엘리자베스 이래의 잉글랜드 국교회 전통을 중요시하고 자랑스러워하던 중도파들에게는 대단히 불쾌한 것이었다. 가령, 당시 한 퓨리턴 목사가 국교회가 사용해오던 일반 기도서에 대해 평하던 말을 들어보자.


"이 기도서는 하느님의 콧구멍에 악취를 풍기는 물건이며, 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는 수단이다."

결국 중도파, 온건파를 중심으로 퓨리턴과 급진파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 급격히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노릇이었다.

따라서 이 무렵부터 상당수의 의회 내 중도파들은 퓨리턴과의 연합에 회의를 느끼고 찰스 1세를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이후 내전기 왕당파의 지휘관들과 구성원들 중 제법 많은 수가 본래 찰스 1세와 대립하던 의회 의원들이었다. 이때 퓨리턴의 만행에 학을 떼고 떨어져나간 이들이 왕당파의 주요 구성원들이 되었던 것이다.

찰스 1세도 자파 세력 결집에 상당히 능란한 정치력을 발휘했다. 그는 과거 시행하던 아르미니우스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대신, 자신이야말로 퓨리턴이 초래할 무정부 상태에 맞설 수 있는 질서와 안정의 구심점이라고 내세우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본래부터 혼합정과 균형정치의 신봉자였으니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시기 그는 그 어떤 때보다도 자기PR을 효과적으로 했으며, 이러한 선전은 당시 중도파 상당수를 포섭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해서 1641년 말이면 국왕은 제법 힘을 회복한다.

실제로 퓨리턴의 파괴행위에 대한 반발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으며, 22개 주에서 "우리는 일반 기도서의 유지를 원한다" 는 청원이 일어났다. 이 청원에 서명한 이들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있었으며, 그중에는 꽤 개혁적인 프로테스탄트들도 있었다. 이는 당시 잉글랜드 국교회에 대한 지지와 애착이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퓨리턴에 대한 반감도 꽤나 컸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들 역시 찰스 1세의 세력 기반이 되었다.







두려움 대 두려움

이제 영국 사회는 완전히 반으로 쪼개졌다. 예전 휘그파적 해석은 이 시기의 분열상을 국왕의 절대주의 대 의회의 헌정주의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정말 찰스 1세가 절대주의를 천명했고 이를 이루려 했다면, 중도파 의원들이 대거 왕쪽으로 몰려간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와 대립하던 이들도, 앞서 설명했듯, 민주투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시기 영국 사회를 양분한 것은 음모론에 가까운 공포심리였다.

우선 이 시기 찰스 1세에게 적대적인 세력을 형성했으며, 이후 내전기 의회파의 주축이 되는 이들은 역시 'godly'한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 퓨리턴과 강경파 프로테스탄트 세력이었다. 이들중에는 종교적 열정 외에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그 누구보다 보수적인 이들도 많았다. 이들을 왕을 상대로 한 전쟁에 뛰어들게 만든 것은 바로 "교황주의자의 음모(Popish Plot)"에 대한 공포였다.

이들은 교황청과 예수회 등이 주축이 되어서 잉글랜드 개신교를 파괴하려는 거대한 음모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들이 보기에 찰스 1세 역시 비밀 가톨릭이 분명했다. 가톨릭 비슷한 전례를 좋아하고, 가톨릭 신자들을 잡아죽이지 않는다는게 그 근거였다. 찰스 1세가 비밀 가톨릭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던 이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최소한 사악한 가톨릭 신하들에게 왕이 휘둘리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 사악한 대신들로부터 왕을 구출하는게 충성스러운 신민의 의무라는 것이었다. 이 두번째는 종교적으로는 퓨리턴과 비슷하지만 정치사회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이들이 의회파에 가담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물론 그런 음모 따위는 없었다는건 분명하지만, 중요한건 사실이 아니라 잉글랜드 개신교도들 중 많은 이들이 이런 음모론에서 유래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 음모론을 찰스 1세가 절대왕정을 꿈꾸고 있다는 믿음과 결부시켰다. 따라서 개신교회와 잉글랜드 헌정에서 의회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찰스 1세의 절대주의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Cowar와 Gaunt 선생은 이러한 의회파의 이데올로기를 '헌정적 의회주의(Constitutional Parliamentarism)'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에 대비되는 왕당파 세력은 잉글랜드의 헌정이 '교황주의자의 음모'가 아니라 '퓨리턴의 음모(Puritan Plot)'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이들도 대부분 한때는 왕과 대립했던 의원들이었지만, 퓨리턴들의 파괴행각을 보고 난 뒤 이들은 영국의 전통적인 헌정(ancient constitution)과 균형정치에 가장 큰 위협은 이제는 왕이 아니라 퓨리턴 포퓰리즘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이들이 보기에 절대주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은 왕이 아니라 퓨리턴이 주도하는 의회였다.

이들이 보기에 영국 국교회는 이미 충분히 개혁된 프로테스탄트 교회였으며, 동시에 좋은 전통을 잘 간직한 교회였다. 이미 로드 주교의 고교회파 개혁안을 저지한 이상, 더이상 퓨리턴과 연합할 이유도 없거니와 오히려 퓨리턴의 무차별적 파괴는 반드시 막아야 할 위험이었다. 일반 기도서와 주교제의 유지가 이들의 대표적인 목표였다. Coward와 Gaunt 선생은 이러한 왕당파의 이데올로기를 '헌정적 왕정주의(Constitutional Royalism)'이라 명명하였다.

잉글랜드 국교회의 일반 기도서

즉, 이 시기의 대립과 이후의 내전은 단순히 절대주의와 헌정주의의 대립이 아니었다. 이는 두 개의 서로 다른 헌정주의의 충돌이었으며, 두 진영은 서로가 절대주의를 추구한다고 비난하였다. 물론 둘 다 오해와 음모론이 큰 역할을 하였으나, 중요한 것은 이미 진실이 아니었다. 어찌되었건 중도파가 대거 찰스 1세 쪽으로 몰려간 이후, 영국의 여론은 둘로 분열되었고, 왕당파와 의회파의 세력, "교황주의자의 음모"와 "퓨리턴의 음모"를 확신하는 세력은 대략 비등비등하게 나뉘었다.








소결론

1640년 말의 영국인들은 모두 군주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귀족들과 의회 구성원들 대다수는 왕의 정책들 중 하나 이상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서두에 설명했듯, 그것은 로드 주교의 개혁이거나 왕의 재정 정책이거나, 가톨릭 음모론이거나, 특정 대신들에 대한 불만이었다. 의회는 이러한 불만들을 가지고 왕과 맞섰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641년 무렵, 영국인들은 여전히 모두 군주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여론은 크게 분열되었다. 1년전에 그들이 불만을 가졌던 사항들은 사실상 모두 과거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두려움이 생겨나고 있었다. 특히 이전에 없던 '퓨리턴 포퓰리즘'에 대한 두려움이 광범위하게 나타나 본래부터 퍼져있던 가톨릭 공포증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Braddick 선생의 지적대로, 이는 단순히 중앙 귀족이나 부유한 자들, 보수주의자들이 가진 두려움이 아니었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가한 공동 기도서에 대한 청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1630년대로의 회귀가 아니라 잉글랜드의 전통적인 균형 헌정으로의 복귀였다. 그리고 퓨리턴에게 불만이나 두려움을 품은 이들에게 찰스 1세는 이제 이 '균형'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이것이 이후 내전 발발시 찰스가 꽤 오랫동안 상당한 지지자를 확보한 배경이 되었다.


어찌되었건, 이제 잉글랜드의 여론이 두쪽이 난 상황에서 어떻게 나라가 내전으로 치닫게 되는지를 다음 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



영국 내전의 기원 (11)-파국의 시작 History-근동, 서양사

제2차 주교전쟁과 왕권의 붕괴


물론 찰스 1세도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이 무렵 국왕의 최고 측근은 로드 주교에서 토머스 웬트워스로 옮겨가있었다. 본래 찰스 1세에게 대항하던 의원이었던 그는 왕이 권리청원을 받아들인 뒤 국왕의 편이 되었다. 그 뒤로 그는 찰스를 대신하여 아일랜드를 통치하다 1639년에 잉글랜드로 돌아와 핵심 측근이 되었다. 찰스 1세는 그를 새로이 스트래퍼드 백작에 봉하였다.

토머스 웬트워스, 1대 스트래퍼드 백작


그는 아일랜드에서 국왕의 권한을 확대하기 위해 상당히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펼쳤으며, 잉글랜드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국왕의 권위를 재건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스코틀랜드군의 침공으로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다시 한번 찰스는 의회의 도움 없이 군대를 모아야 했다. 잉글랜드의 여론은 전례없이 양극화되고 있었다. 이는 징집된 병사들의 형편없는 규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단 부족한 자금에서 비롯된 봉급과 빈약한 보급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종교적으로 과열된 상황이 가장 컸다. 한 장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퓨리턴 불한당들이 병사들에게 우리 연대의 모든 지휘관들이 다 교황주의자들이라고 선동하고 있다."


반가톨릭주의는 퓨리턴이 아니더라도 잉글랜드 개신교도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선동은 그 근거없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쉽게 먹혀들어갔다. 이는 심각한 폭력과 하극상으로 이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두 장교가 병사들에게 처참하게 맞아죽은 사례로, 병사들은 이들이 교황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하며 살해했다.


반달리즘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퓨리턴의 영향을 받은 병사들은 행군중에 교회를 습격하여 성찬식 테이블과 스테인드 글라스를 부수고 성상을 모욕한뒤 파괴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습격과 약탈이 아니라 조직적인 '의식'이었다. 이들은 성상과 기물을 형틀에 매달거나 재판을 치른 뒤 화형에 처하듯 불태웠다.


군대의 기강이 이 모양이 됬으니, 싸움이 잘 될리가 없었다. 스코틀랜드가 2차 침공을 감행한 것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상 그때까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은 대부분 홈그라운드에서 싸웠을때였다.(스털링 브릿지, 배녹번 등) 그러나 단기의회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분열상을 제대로 파악했고 때문에 자신있게 침공해올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어진 뉴번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찰스의 위신은 가장 낮은 지경으로 추락했다. 이 시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이 지상의 일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고 믿던 시기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전투의 승패는 그 대표적인 예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찰스가 패했다는 사실은 국왕의 정책이 하느님의 뜻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투가 벌어진 바로 그 날, 열두 명의 귀족들이 의회를 열어야 한다는 청원서를 올렸다. 국왕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북부로 진주한 상태였고, 배상금 지불을 위해서는 의회 외에 방법이 없었다.




장기의회(The Long Parliament)


새로 소집된 의회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있었다. 찰스 1세 정부에 반대하는 이유도 다양했다. 철저한 퓨리턴 모델의 개혁을 이룰때까지는 그만둘수 없다는 강성 퓨리턴들, 왕의 권한이 의회의 권한을 위협하려 든다는 위기감을 가진 이들, 왕의 종교정책에는 동의하지만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이들 등등 다양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이들은 아직까지는 공동의 목표로 묶여있었기 때문에 그 차이점이 크게 드러나질 않았고, 그 덕분에 퓨리턴들이 주도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일단 가장 목소리가 크고 행동력이 있는 집단인데다가,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동의하지 않는 의원들에게도 퓨리턴은 왕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유용한 동맹자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뭉친 의회가 주된 타겟으로 삼은 이는 국왕의 최측근인 스트래퍼드 백작, 로드 주교, 그리고 기타 1630년대 찰스 1세의 정책을 상징하는 몇몇 대신들이었다. 또한 핌을 비롯한 퓨리턴들의 주도로 주교제 폐지를 비롯한 강경하고 급진적인 종교정책을 밀어붙였다.


문제는 제대로 된 대안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의회 내의 대부분의 세력들은 로드의 국교회에서 가장 가톨릭적으로 보이는 부분들을 수정하다는데까지는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이를 대체할 모델에 대해서는 합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핌을 비롯한 강경파 퓨리턴은 목소리는 높았으나, 이들의 주교없는 교회 모델에 동의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더욱이 흔히 과소평가되지만 사실 영향력이 막강했던 귀족원들의 구성원들은 더더욱 주교제 폐지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스코틀랜드라는 변수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꼬아놓았다. 잉글랜드 내로 진주해있던 스코틀랜드군도 주교제를 폐지하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개신교의 안정된 미래를 위해서는 잉글랜드 교회를 스코틀랜드 교회 비슷하게 만들어놔야 안심이 되겠다" 라는게 이들의 계산이었다. 애초에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교회 전례를 잉글랜드 교회와 유사하게 만들려는 시도에 반발해서 봉기한 양반들이, 잉글랜드에 교회를 자기들처럼 바꾸라는 요구를 해온다는게 어불성설이지만,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종교'라고 굳게 믿고 있던 강경파 칼뱅주의자 입장에서는 전혀 모순이 아니었을 것이다. 훗날의 일이지만, 이후 내전기에 스코틀랜드는 의회와 참전을 교섭하면서 줄기차게 '잉글랜드 국교회의 스코틀랜드화'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Cust 선생의 지적대로, 삼왕국의 관계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일단 종교가 단일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찰스와 스코틀랜드 맹약파가 똑같았다. 그리고 잉글랜드 내 퓨리턴은 여기서 자기들과 믿음이 비슷한 스코틀랜드의 손을 들어주었을 뿐이다. 이룰 놓고 친 퓨리턴 성향의 후대 역사가들은 종종 찰스를 폭군으로, 퓨리턴을 자유의 투사로 그려냈지만, 제3자 입장에서 보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표현이 떠오를 뿐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의회가 일치단결해서 스코틀랜드와 퓨리턴의 편을 든 것은 아니었다. 그중 제법 비중이 있는 중도파가 있었고, 이들은 이번에도 왕과 강경파 의원들 사이에서 중재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

프랜시스 러셀, 4대 베드포드 백작


그중 대표격인 인물은 베드포드 백작이었다. 그는 여러 면에서 중재 역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일단, 그는 정책 면에서 찰스 1세와 대립각을 세워왔다. 그러나 퓨리턴의 급진적인 주장(특히 주교제 폐지)에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는 주교제를 지지하는 칼뱅주의자였다. 사실 이런 경우는 모든 세력에게 미움 받을 수도 있지만, 그는 다방면에 걸친 인맥 덕분에 그러지도 않았다. 그는 국왕 주변의 궁정인들 가운데에도 연줄이 있었으며, 동시에 하원의 대표적인 급진파 존 핌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국왕의 주변인물들과 관계가 있으면서 동시에 하원과 귀족원 모두에게 폭넓게 존경받는 중도파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의 주도 하에 타협안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었고, 1641년 1월에서 3월 사이에 상당한 전진을 보였다. 실제로 스코틀랜드측의 주교제 폐지 요구에 상당히 많은 의원들이 불쾌감을 보였고, 반스코틀랜드 감정이 뒤늦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귀족원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는 "로드 주교의 고교회파 모델도, 퓨리턴의 난동도 모두 문제가 있다" 라는 양비론 비슷한 성명을 내놓았다.




스트래퍼드 탄핵 사건


그러나 타협이 이루어지려면 한가지 결정적인 난관이 있었다. 의회는 타협의 조건으로 스트래퍼드 백작과 로드 주교를 비롯한 몇몇 인사들의 탄핵을 내걸었다. 1630년대식의 정책과 아르미니우스적 교회개혁이 복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대신들이 왕 주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베드포드와 핌이 의견을 같이했다. 특히 탄핵은 현재 실세인 스트래퍼드에게 집중되었다. 무엇보다도 스트래퍼드는 아일랜드 주둔군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 편에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사였기 때문이었다.


찰스 1세는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대로 여기서 찰스 1세가 양보하고 스트래퍼드를 내쳤다면, 타협은 성사되고 결과적으로 스트래퍼드의 목숨까지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면에서 왕의 비타협성이 또 한번 문제를 악화시켰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찰스 입장에서 이는 원칙과 명예의 문제였다. Cust 선생이 지적하듯, 찰스는 자신에게 충성한 죄밖에 없는 스트래퍼드를 버릴 수 없었다. 그는 당당히 법정 투쟁으로 나가 스트래퍼드의 무죄가 입증되기를 원했다.


실제로,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이어진 재판에서 스트래퍼드의 탄핵자들은 백작의 반역죄를 입증할만한 명백한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스트래퍼드의 군사력에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법리적 상황이야 어떻듯, 의회파 지도자들은 그를 제거해야만 했다. 결국 의회파는 사권 박탈법(bill of attainer)을 동원했다. 이는 반역자로 규정된 이를 재판 없이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뜻한다.


쉽게 표현해서, 이들은 스트래퍼드 백작의 유죄 여부를 입증하지 못한 채,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반역자이므로 재판 없이 처벌하겠다'라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물론 이게 실효성을 가지려면 국왕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의회 지도자들은 전방위로 찰스를 압박했다. 이 시기의 특징인 온갖 루머를 동원한 대중선동이 이어졌다. 찰스가 사실 가톨릭 교도라 그의 치세중에 교황주의자와 예수회가 잉글랜드에서 번영했다는 헛소문부터, '프랑스군이 스트래퍼드를 구하러 온다'는 소문들이 런던을 휩쓸었다.

스트래퍼드의 처형


급기야 무장한 이들까지 포함한 수천 명의 군중들이 궁전까지 쳐들어와 데모를 벌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추밀원은 사태를 진정시키려면 스트래퍼드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고 조언했다. 결국 왕은 마지못해 법안에 서명하고 말았다. 그는 죽는 날까지 이로 인해 괴로워했다. 스트래퍼드는 런던탑 앞에서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타협의 붕괴


애초에 의회 내 급진파는 타협의 전제조건으로 스트래퍼드의 제거를 요구했다. 그러나 Braddick 선생의 지적대로, 스트래퍼드의 처형은 타협 가능성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베드포드 백작의 계획은 여기서 관속에 들어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사법살인에 지나지 않았다. 국왕 편에서 무력을 쓸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유죄 입증도 하지 않은채 서둘러 대신을 사형시킨 것의 정당성에 대해서 의회 내에서도 의구심을 품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로 인해 영국의 정계와 여론은 극단적으로 분열하기 시작한다.


두번째로, 이는 찰스 1세에게 큰 원한을 심어주었다. Hutton 선생의 지적대로, 즉위 이래 그때까지 단 한번도 정치적 이유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자랑스러운 기록이 깨지고 말았다. 더욱이 그 희생자는 자신의 충신이었다. 그는 스트래퍼드의 죽음을 용인한 자기 자신을 죽을때까지 용서하지 못하였고, 그를 죽이도록 몰아간 이들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왕과 의회 내 급진파들의 관계는 이로서 돌아가지 못할 강을 건넜다.


게다가 그 직후, 베드포드 백작이 사망해버렸다. 이로서 관속에 들어간 타협 가능성에 대해 못질까지 끝난 셈이 되었다. 이제 중재 역할을 할 사람도, 모두가 만족할만한 중재안을 만들 사람도 없었다.


찰스 1세는 위신도 깎이고, 정치적으로는 고립무원이었으며, 대중들의 여론도 좋지 않았으며, 자신을 위해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측근 신하까지 잃었다. 이렇게 되니 한가지 의문이 들게 된다. 찰스 1세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고립되고, 모든 면에서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면, 대체 내전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내전이 일어나려면 적어도 나라를 양분할 정도의 자기 세력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닐까? 게다가 잉글랜드는 국왕이 통제할수 있는 상비군을 갖춘 나라도 아니지 않은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번 글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해보도록 할 것이다.



영국 내전의 기원 (10)-개인통치의 붕괴 History-근동, 서양사

주교 전쟁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 이상, 찰스 1세는 이제 군대를 모아야만 했다. 게다가 의회의 협조 없이, 국왕의 대권(royal prerogative)에만 의지하여 모아야만 했다. 교과서적인 서술로는 찰스 1세와 로드 주교의 국교회 정책 때문에 잉글랜드의 여론이 대스코틀랜드 전쟁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다고 나오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사실 찰스 1세의 정책은 나름대로 지지자들이 많았다. Braddick 선생이 잘 지적했듯이,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개인통치를 잘 끌고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찰스 1세의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이 없었다는게 아니라, 대스코틀랜드 전쟁으로 인해 잉글랜드의 여론이 극심하게 분열되었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퓨리턴들은 잉글랜드 국교회보다 스코틀랜드 교회와 그들의 대의에 더 공감했기 때문에 찰스 1세의 정책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또한 스코틀랜드 맹약파의 종교적 견해와 주장에는 공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전쟁에 나서고 싶어하지는 않는 중도파들이 있었다. 잉글랜드의 여론은 이렇게 분열된 반면, 스코틀랜드는 맹약파를 중심으로 훨씬 더 잘 연합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스 1세는 나름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모으는데 성공했다. 물론 엘리자베스 시대 이래 잉글랜드 민병대 체제의 고질적인 문제는 많은 개혁 노력에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무기 생산과 공급은 일원화되어있지 않았으며, 장교단은 경험이 부족했다. 그러나 Cust 선생이 지적하듯, 국왕군은 맹약파 군대보다 잘 무장되어 있었고, 수도 많았다. 찰스 1세가 대담하게 나갔다면 맹약파 군대를 격파하고, 왕의 위신도 회복되고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스코틀랜드군을 지휘하던 알렉산더 레슬리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유럽 대륙에서 경험을 쌓은 노련한 군인이었던 그는 일부러 군세를 과시하면서 허세를 부렸다. 그와 마주하던 잉글랜드군 지휘관인 홀랜드 백작은 스코틀랜드군의 수가 실제보다 훨씬 더 많다고 착각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이에 찰스와 잉글랜드 지휘부는 모두 전의를 상실했다. 찰스 1세는 신중한 성격이지만, 결코 겁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전경험의 부재와 역시 경험이 부족한 장교단의 보좌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 뼈아프게 작용하였다.


기세가 꺾인 국왕군은 협정을 맺고 물러섰다. 그러나 이 협정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협상 조건과 달리 맹약파 군대는 해산하지 않았으며, 스코틀랜드 의회는 주교제를 비롯해서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종교정책을 모조리 폐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국왕의 권위에 대한 심대한 타격이었다. 물론 찰스도 두번째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돈을 제공할 수 있는 기구는 의회뿐이었다. 현재 재정 시스템으로는 또다른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무리였다. 이에 1640년 4월 13일, 찰스는 의회를 소집하였고, 이렇게 해서 국왕의 개인통치기는 막을 내렸다.




단기의회(Short Parliament)


물론 찰스 입장에서 의회 소집의 목적은 군비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지난 1630년대에 쌓인 모든 불만들을 일제히 터뜨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찰스를 상대로 일치단결해서 맞선 것은 아니었다. Coward와 Gaunt 선생의 지적대로 그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각 지역별로 선출된 의원들은 자기 지역의 문제들을 해결하는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국왕을 상대로 한 공동전선을 구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세력도 분명히 있었다. 특히 대다수의 귀족원 의원들은 군비 제공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하원 의원들 중에도 기꺼이 국왕과 화해하려는 의원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에 비하면 타협의 여지는 상당히 있었던 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의회 내의 친스코틀랜드 파였다. Cust 선생이 잘 지적했듯이, 리더격인 존 핌(John Pym)을 비롯한 친스코틀랜드(즉 친퓨리턴) 파벌은 이렇게 생각했다.


"국왕과의 화해→전비제공→스코틀랜드 문제 해결→왕의 권력강화→퓨리턴들의 인생이 피곤해진다"


따라서 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국왕과 의회의 화해를 막아야 한다고 단단히 결심하고 있었다.


존 핌


실제로 의회가 열리고, 스코틀랜드 문제의 심각성이 거론되자, 이들은 "스코틀랜드 문제보다 국내문제가 더 시급하다"며 국왕측의 입을 막아버렸다. 존 핌은 아예 대놓고 "우리 나라를 교황에게 팔아먹으려는 음모가 있다"는 근거없는 전제를 들이대면서 1630년대 아르미니우스주의 종교정책을 비롯한 불만사항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장광설을 폈다. 그러면서 왕의 군비 요청에 응하기 이전에, 이런 문제점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콘라드 러셀 선생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이것은 애초에 타협을 바라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물론 하원에는 여전히 진지하게 국왕과의 화해를 바라는 의원들이 상당수 있었기 떄문에 핌의 음모론과 주장이 전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여론몰이 덕분에 우선 국내의 문제점들에 대한 논의가 군비 문제에 선행되어 이루어어져야 한다는 결론은 받아들여졌다.


이때부터 의회의 논의는, 의회측의 "우리 불만을 들어주면 돈을 주겠다"와 국왕 측의 "돈을 주면 불만을 들어주겠다"가 팽팽히 맞서는 상황이 되었다. 의회는 지난 일들을 보건대, 왕의 약속을 믿을수 없으니 먼저 불만사항을 들어달라고 주장했고, 이들의 불만은 크게 선박세와 종교문제로 압축되었다.


그러는 사이 국왕과 의회 내 온건파 사이에 막후교섭이 이어졌다. 온건파 의원들은 일단 '선박세를 포기하는 것으로 왕의 선의를 보여달라'고 이야기했고, 국왕측은 여기에 긍정적인 답을 주었다. 그러자 똥줄이 탄 것은 핌을 비롯한 친스코틀랜드 퓨리턴 의원들이었다. Cust 선생의 표현대로, 이들은 타협을 결렬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선박세만 가지고는 안돼. ~~도 포함시켜야 돼!"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논제를 추가시켜 협상을 질질 끄는 방식이었다.


한참의 교착 상태 끝에 찰스 1세가 약간의 타협안을 제시했다. 일정량의 보조금을 지급받는 조건에서 선박세를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계산을 해보니 폐지되는 선박세보다 찰스 1세에게 지급해야 하는 보조금의 총량이 훨씬 더 많았다. 찰스는 의회의 말대로 선의를 보여줬으니 큰 양보를 한 것이라고 믿었지만, 모든 의원들이 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Cust 선생의 말대로 찰스도 그것을 다 받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의 입장을 대표하는 대신은 일단 큰 액수를 부른 다음에 타협을 통해 조금씩 깎아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이 추가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퓨리턴파는 계속해서 새로운 불만사항을 추가하면서 어떻게든 타협을 저지하려 들었다.


찰스는 더 이상의 지연은 거절로 받아들이겠다고 통보했고, 의회 내 퓨리턴파는 안건을 다시 투표에 붙이자고 주장함으로서 지연전술에 성공했다. 결국 더이상의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었던 찰스는 의회를 해산시켰다. 짧은 시간에 해산된 이 의회는 그때부터 '단기의회(Short Parliament)'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소결론


사실 단기의회는 실패가 예정된 의회는 아니었다. 앞서 보았듯 귀족원은 찰스에게 동정적이었고, 하원에서도 왕과의 화해를 바라는 세력은 여전히 많았다. 찰스의 입지는 적어도 스코틀랜드에서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런 면에서 이 의회는 왕과 의회가 화해를 이룰 수 있었던 사실상 마지막 기회일수도 있었다.


결국 실패의 근원은 종교 문제와 돈 문제였다. 존 핌을 비롯한 퓨리턴 세력은 어찌되었건 퓨리턴에 적대적인 찰스가 성공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선박세든 보조금이든 찰스는 다량의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은 대다수 의원들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았다.(다시 말하지만, 이 시기 대다수의 잉글랜드인들은 엘리자베스 이래로 재정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망가져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협상이 결국 무너진데 있어서 찰스 1세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는 흔히 말하는 것처럼 일체 타협을 하려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늘 지나치게 오래 고민하다가 뒤늦게 결단을 내렸다. 그가 선박세 폐지를 일찍 결심했다면 의회 내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더이상 지연시키면 거절로 받아들이겠다'는 통보도 실수였다. 사실 선박세 폐지를 환영하는 의원들도 많았기 때문에 토론이 벌어졌다면 존 핌 일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협이 성사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단, Cust 선생의 지적대로, 당면한 군사작전을 눈앞에 두고 찰스가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는 점과 이때문에 의회 내 지연전술에 격분할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감안해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존 핌을 비롯한 친스코틀랜드 파벌 퓨리턴 의원들의 방해공작도 대단히 큰 요소였다는 점은 말할 나위가 없다. 찰스 1세가 협상에 있어서 매끄럽지 못한 태도를 보였다면, 이들은 아예 초장부터 협상의 결렬을 목표로 하고 나왔다. 과거 친퓨리턴 사관이 지배하던 역사서술은 이들을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결국 협상이 무너진데 있어서 이들의 책임은 상당히 크다.


어찌되었건, 이렇게 해서 단기의회는 성과없이 막을 내렸고, 이제 잉글랜드에서도 극단적인 갈등의 막이 오르게 된다.



영국 내전의 기원 (9)-스코틀랜드에서 생긴 일 History-근동, 서양사

찰스 1세와 "브리튼 문제"


지난번 글에서 다뤘듯이 찰스 1세의 개인통치는 폭정도 아니었고, 생각보다 많은 성과를 낸 시기였다. 물론 봉합되지 않은 갈등과 긴장은 여전히 있었으나 그런건 어느 시대에든 있는 것이었다. 그 상태가 쭉 이어졌다면, 찰스 1세는 성공적인 치세를 마쳤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대체 왜 결국 내전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문제의 근원은 찰스 1세가 잉글랜드의 왕만이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그는 지난 역사와 관습과 종교가 판이하게 다른 세 왕국의 왕이었다. 이 부분이 최근 학자들, 특히 콘라드 러셀 선생이 "the Brisith Problem"이라고 부르며, 중요시하게 된 부분이다. 첫번째 문제는 스코틀랜드에서 왔다.





스코틀랜드 문제


문제의 근원은 잉글랜드 못지 않게 복잡다난했던 스코틀랜드의 종교적 환경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전반적으로 잉글랜드보다 강경한 칼뱅파 국가가 되어있었지만, 한순간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흔히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를 논하면서 개신교 개혁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이 개혁을 이루어냈다는 식의 서술이 많지만, Braddick 선생이 지적하듯, 이는 후대의 이상화에 불과하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몇몇 영향력 있는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주도하여 왕실 권력에 대항한 쿠데타에 가까웠다. 이 와중에 주도권을 발휘한 존 녹스가 칼뱅주의적 개혁방향을 설정하였으나, 이는 단번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고 개혁된 교회에 대한 분명한 청사진인 존재했던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스코틀랜드 의회가 칼뱅파 개신교를 국교로 선포하는 그 순간에도 스코틀랜드 내 칼뱅파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클랜의 중요성이 강한 사회였기 때문에, 하이랜드의 몇몇 씨족을 중심으로 가톨릭 세력은 생각보다 많이, 오래 남아있게 되었다.


성 자일스 대성당(스코틀랜드 국교회)


그렇기 때문에 잉글랜드 정도는 아니었지만, 스코틀랜드도 현실적 타협을 통해 국교회를 만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스코틀랜드 사제들과 주교들은 미사를 드리는 것을 금지당했으나, 주교제 자체는 폐지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스코틀랜드 국교회도 생각외로 상당히 하이브리드 교회의 모습을 띄게 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스코틀랜드 교회, '커크(kirk=교회의 스코틀랜드식 표현)'는 명확한 규례도 없었고, 세속정부와의 관계도 매우 애매모호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스코틀랜드 내의 강경 칼뱅파들은 스코틀랜드 커크의 안정화를 위해서는 세속권력으로부터 더 많은 독립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는 16세기 후반부터, 제네바 망명을 마치고 돌아온 앤드류 멜빌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의 주장은 스코틀랜드 교회를 좀더 제네바 장로회처럼 만드는 것이었으며, 교회를 왕권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과 주교제 폐지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스코틀랜드의 왕들, 특히 제임스 1세는 이에 적대적이었다. 사실 제임스나 찰스가 아니라 이 시대의 그 어떤 왕이라도 왕국 내에 독립적인 권위를 갖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이론에 호의적일 리가 없다. 물론, Braddick 선생의 말대로, 제임스와 찰스가(칼뱅주의 강경파가 주장하듯) 스코틀랜드 개신교의 전통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독립된 존재라는 주장과 교회도 왕권 아래에 있다는 주장은 둘 다 세력이 비등비등했다.


어찌되었건 이런 상황은 스코틀랜드 왕에게는 충분히 골치아픈 상황이었는데, 제임스가 잉글랜드의 왕관까지 쓰면서 문제가 더욱 복잡해졌다. 앞서 설명했듯, 한 왕국 내에 세속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었음을 주장하는 집단이 있다는 것은 통치자에게 결코 유쾌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판이한 형태를 가진 종교적 환경을 가진 두 나라를 한꺼번에 통치한다는 문제까지 더해졌다. 이 당시 사람들의 마인드에서 종교의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왕의 입장에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사는 격이었다. 이것은 현대적 의미에서 종교적 관용-불관용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대 초 유럽 국가들이 돈과 에너지가 남아돌아서 그토록 애써서 종교적 통일성을 추구하고, 리슐리외가 그렇게 라 로셸을 비롯한 위그노 집단을 무장해제하려고 했던게 아니다.


이 상황에서 제임스 1세에게 가장 어려운 난제이면서도 꼭 필요한 개혁은 두 왕국의 교회를 좀 더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제임스 1세의 능란한 정치력으로도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결국 제임스는 불안불안한 현상유지에 그쳤을 뿐, 목표 달성에는 실패하였다.


찰스 1세의 정책목표도 부왕과 동일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 시도를 단순히 찰스 1세가 가만히 있는 스코틀랜드를 건드려서 뻘짓했다고 봐서는 안된다. 그랬다면 현명했던 제임스 1세가 이 목표에 그토록 매달렸던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Braddick 선생의 설명대로, 종파주의 시대에 종교가 다른 연합 왕국은, 언제든 그 중 한 왕국이 통치자를 버리고 종교가 같은 쪽에 붙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문제는 정책의 목표가 아니라, 실현 가능성에 있었다. 상황은 제임스 1세때보다 훨씬 더 안좋아져있었다. 지난번에 설명했듯, 칼뱅파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부상으로 분열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예정설에 매달리던 정통 칼뱅파는 더욱 강경해지고 있었다. 이들은 특히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영향력이 강해지던 이 시기 잉글랜드 교회와 아르미니우스주의에 호의적이던 찰스 1세를 극도의 의구심을 품고 바라보았다. 스코틀랜드 장로파의 많은 이들에게 잉글랜드 교회는 더 이상 개신교 형제가 아니라 '교황 없는 가톨릭'으로 보였다.


또한 이런 일은 폭넓은 의사소통과 치밀한 설득, 정치력이 필요한 일인데, 앞서 보았듯 찰스 1세의 능력과 성향은 그런면에서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애초에 제임스 1세의 언변과 정치적 스킬로도 실패한 문제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국, 찰스 1세의 잉글랜드 개인통치 11년이 정치가로서 그의 장점이 가장 잘 발휘된 경우였다면, 스코틀랜드 사태는 그의 결점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사례였다.




스코틀랜드 기도서 반란


그러나 Cust 선생이 지적하듯, 이 시기 찰스 1세는 즉위 초기의 말없고, 주저하는 성격의 군주가 아니라 상당히 자신있게 정책을 추진하는 역동적인 군주로 변해있었다. 그동안 관록도 제법 붙은데다가, 생각보다 성공적이었던 개인통치 시기 덕분에 생긴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Hutton 선생의 표현대로, 에드워드 1세와 헨리 8세와 같은 수많은 선배들이 발견했던 점들, 즉 잉글랜드 정치에서 잘 통한 것들이 스코틀랜드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자신의 왕국에 존재하는 통일성 없는 교회를 좀더 일원화하고, 관리하기 쉬운 형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외향이라도 조금 비슷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새 기도서의 도입은 그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 기도서는 완성되기 이전부터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앞서 설명했듯 스코틀랜드의 강경파 프로테스탄트들은 잉글랜드 교회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포기했다고 간주하고 있었다. 그런 잉글랜드 교회에서 스코틀랜드의 예배 형태를 규정지으려는 행위는 영락없이, 개혁으로부터의 후퇴 내지는 가톨릭의 귀환으로 보였다.


물론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Braddick 선생이 지적하듯, 이 기도서 자체는 물론 잉글랜드 기도서를 기반으로 했지만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인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상당히 조심을 했다. 무려 2년간의 수정기간동안 국왕은 로드 주교 및 스코틀랜드 주교단과 상당히 많은 상의를 통해 기도서 내용을 만들었다. 로드 주교는 실제로 스코틀랜드 교회의 전례를 완전히 앵글리칸 모델로 바꾸기를 원하긴 했다. 그러나 흔히 생각되던 것과 달리 찰스 1세는 로드에게 휘둘리지도 않았고, 그의 말을 무작정 들어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찰스는, Kishlansky 선생의 지적대로, 스코틀랜드 성직자들로 구성된 위원회에게 기도서 제작을 대부분 위임했다. 이 기도서는 약간의 전례를 수정했을 뿐, 칼뱅파 주류 신학은 그다지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스코틀랜드 강경파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Coward와 Gaunt 선생의 지적대로, 이 시기에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스코틀랜드 강경파 프로테스탄트들은 찰스의 목적은 '진정한 개혁된 교회'를 파괴하는데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떤 설명도 먹혀들지가 않았다. Braddick 선생이 잘 지적했듯이 '대다수의 스코틀랜드인들은 기도서를 한번 읽어보지도 않은채 그것이 악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1637년 봄부터 이미 스코틀랜드의 급진파 목사들과 신자들은 기도서 도입에 따른 격렬한 소요를 기획하고 있었다. 7월 23일, 에든버러의 성 자일스 대성당에서 새 기도서를 사용한 예배가 열렸다. 그러나 주임사제가 처음 기도서를 읽기 시작하자, 회중들이 일제히 욕설을 퍼부으며 의자와 지팡이와 온갖 것들을 단상을 향해 집어던졌다. 새로운 전례에 따라 예배를 집례하려 했던 스코틀랜드 성직자들은 모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탈출했으며, 흥분한 군중들은 그들을 향해 마구 돌을 던져댔다. 이것이 1637년의 에든버러 기도서 소요사태였다.


"교인들의 폭력성을 시험하기 위해 새 기도서를 읊어보았습니다.

순간적인 예배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곳곳에서 욕설과 함께 격한 반응이 터져나옵니다"



이것은 우발적인 폭력사태가 아니라, 급진파 지도자들에 의해 미리 치밀하게 계획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정부는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아니면, Kishlansky 선생의 추정대로, 파악했더라도 자기들이 수도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기 싫었든지. 어찌되었건 이들은 찰스 1세에게 이것은 '몇몇 무지한 불량배들'이 주도한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보고하였다. 멀리 잉글랜드의 찰스로서는 이들의 보고밖에는 정황을 파악하기가 어려웠고, 그 잘못된 보고에 기반하여 대처 명령을 내렸다.


찰스가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파악했을 때에는, 이미 사태의 규모가 걷잡을수 없이 커져있었다. 이 일련의 사건은 왜 이 시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앙집권국가가 불가능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스코틀랜드의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었지만, 정보를 보고받고 대책을 세워서 시행을 명령하는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그러다보니 대책은 늘 상황보다 한발 늦게 나왔다. 그러나 정부의 대책은 느렸지만, 기도서 반대자들의 군중동원은 매우 빨랐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강경파들은 갈수록 더욱 격앙되어갔다.


사실 에든버러의 이 소요 사태는 주교의 권한이 분명하고, 성직자의 위계질서가 살아있는 잉글랜드 국교회 인사들과 찰스 1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이 찰스의 의도를 오해했듯이, 문화적으로 잉글랜드인이나 다름없는 찰스도 스코틀랜드 교회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류의 전면적인 도전은 스코틀랜드의 특수한 환경에서 가능했던 것이나, 근대 초 군주의 위신에 치명타를 입힐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 서술했듯이, 강경파 칼뱅주의자들도 정치적으로는 철저히 보수적이었으며 군주에 대한 복종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군주가 소위 '진정한 종교'의 수호자가 아닐 경우엔 이야기가 달랐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대립은 극한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찰스 1세는 기도서 반대자들이 또다시 모임을 가질 경우 반역으로 간주하겠다고 통보하였으며, 반대자들은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엄숙한 서약을 맺었다. 이것이 바로 '국민 맹약(National Covenant)'이다.





타협의 실패와 전쟁


찰스 1세는 강온양면책을 구사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군사적 대비를 하면서, 동시에 타협을 시도했다. 물론 군사적 대비를 지시했다는 사실을 들어 당시 강경파 개신교도들은 찰스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애초에 그들이 한번이라도 찰스를 믿은 적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서약파와의 타협을 위한 에이전트로 찰스는 해밀턴 후작을 선택했다. 이는, Braddick 선생이 잘 서술했듯이, 사실 상당히 훌륭한 인선이었다. 그는 찰스 1세의 궁정에서 가장 유력한 스코틀랜드 귀족이었으며, 왕의 신임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30년 전쟁의 베테랑으로, 구스타프 아돌프 왕 휘하에서 싸웠던 용사였다. 이 점도 그렇고 정책적인 면에서 그는 흠없는 개신교 신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교조적이지 않고, 가능한한 최선의 선택지를 고를 줄 아는 현실적인 정치가였다. 어떤 면에서 봐도 그는 왕과 스코틀랜드 칼뱅파 양쪽의 신뢰를 받을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스코틀랜드 강경파들이 이미 왕의 타협 의지를 믿을 수 없다고 단정짓고 나왔다는 점이었다. 오랫동안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후대 역사가들도 찰스 1세가 이미 군비를 준비하고 있었으니 정말 타협의 의지가 없었을 것이라고 보아왔다. 그러나 Kishlansky 선생의 지적대로, 한참 뒤에도 찰스 1세가 자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망설였다는 점을 볼때, 과연 그랬는가는 의문스럽다. 물론 스코틀랜드 강경파도 이 초유의 사태에서 극도로 불안했을테니 의심이 들었던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어찌되었건, 이 시기는 양측의 진심이 문제가 아니었다.


협상을 위해 도착한 해밀턴 후작은 이런 분위기를 충분히 감지했다. 왕의 신하였지만, 동시에 대단히 독실한 스코틀랜드 개신교 신자로서 그만큼 타협을 바랐던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거의 체념한듯 왕에게 보낸 보고는 다음과 같았다.


"어서 전쟁 준비를 하시는게 나을 것 같습니다"


양자 간의 긴장감은 팽팽했고, 어느 쪽도 이미 제시한 것 이상의 양보를 하려 들지 않았다. 사실 해밀턴 후작이 할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결국 9월 9일, 찰스가 한번 더 타협안을 제시했다. 기도서 도입을 포기하고 '부정고백'이라 불리는 1581년의 스코틀랜드 개신교 신앙고백을 승인하는, 사실상의 패배 선언이었다. 위신에 생명이 걸린 근대 초 국왕으로서는 엄청난 양보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Braddick 선생의 말대로 차라리 그해 여름에 바로 이 대책을 내놓았다면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스코틀랜드 서약파는 대중들을 동원한 상태였고, 이후 근대 혁명사가 증명하듯 한번 지펴진 불은 쉽게 끌 수 없었다. 이미 모든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해밀턴 후작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제 남은 것은 무력충돌뿐이었다.






소결론


이렇게 해서 그동안 꽤 성공적이고 효율적이었던 찰스 1세의 개인통치를 무너뜨리게 될 스코틀랜드 사태가 막을 올렸다. 이 부분에서 찰스의 대처는 분명 좋지 못했다. 스코틀랜드 교회에는 강경파만 있었던것이 아니라, 온건파들도 제법 있었다. 찰스의 뜻을 받들어 기도서를 만들어낸 이들도 엄연히 스코틀랜드 교회의 성직자들이었다. 그러나 기도서 소요사태 초반에 찰스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적극적으로 온건파를 규합해서 자기 세력을 만들지도 못했고(사실 잉글랜드에서는 그가 제법 잘 했던 일이다), 강경파에게 단호하게 대처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너무 박하게 비난할 필요도 없다. 앞서 말했듯, 잉글랜드식 정치와 종교문화에 익숙한 찰스에게 스코틀랜드에서 있었던 일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었다. 또한 거리와 통신의 문제로 초장 대처에는 한계가 많았다. 그렇다고 더 중요한 잉글랜드를 장기간 비우고 스코틀랜드로 간다는 것도 사실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근대 초는 중세와 달리 국왕이 오래 나라를 비워도 되는 체제가 아니다. 거기다가 전통적인 시각을 견지한 역사가들은 찰스가 고집불통에 타협을 몰랐다고 비난했으나 사실 찰스는 타협을 나름대로 여러번 시도했다. 물론 지나치게 우물쭈물하다가 적기를 놓친 점은 그의 실책이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강경파들도 하등 타협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확인된 바다.


어찌되었건 이렇게 해서 17세기 잉글랜드에서 가장 평온하던 시기는 막을 내렸다. 이제 역사는 최악의 상황을 향해 치닫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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