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근동의 군대-그들의 진짜 목소리 History-근동, 서양사

들어가며

고대 근동의 군사사를 연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이들의 군사활동에 대한 기록들, 문헌자료와 도상학적 자료들 중 현재 살아남아 전해지는 것들의 대다수는 군주의 영광을 찬양하는 분명한 프로파간다적 목적을 띄고 있다. 그리고 그 상당수는 신화적 모티브를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과연 얼마만큼 현실을 반영하는가에 있어서 심각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면에 있어서 상당히 예외적이면서도 드문 사료가 마리의 중기 청동기 시대 문서들이다. 무려 2만 개가 넘는 쐐기문자 텍스트가 여기서 발견되었는데, 그중 상당부분은 저 유명한 마리의 왕 지므리-림에게 각 지역 군 지휘관들이 보고한 문서들이다. 따라서 이 문서들은 고대 근동 텍스트 중에서는 매우 드물게도 생생한 현장의 문서를 담고 있는 귀중한 사료다. 물론 이 텍스트들도 상당히 단편적이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 온전히 그 시대의 군사사를 복원하는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정치적, 종교적 프로파간다에 의해 걸러지거나 정제되지 않은 당시 군인들의 목소리와, 이들이 매일의 현실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고민거리를 그대로 들려준다는데서 그 가치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료들은 과연 함무라비 시대의 군대에 대해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까? 이하의 내용은 William J. Hamblin 선생의 저서 Warfare in the Ancient Near East to 1600 BC: Holy Warriors at the Dawn of History (Abingdon, 2006), 제 7장의 내용을 발췌번역한 것이다.







징병과 기록(번역)

각 지역이 담당해야 할 정확한 의무를 파악하기 위해, 메소포타미아의 통치자들은 인구조사를 실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상세한 기록이 남아잇는 것은 마리의 지므리-림이 실시한 조사다. 이 조사는 tebibtum이라고 불렸는데, 직역하면 '정화(purification)'라는 뜻이다. 아마도 인구조사와 연관된 종교적 의식과 연관이 있는것으로 생각된다.

백성들은 조사를 받기 위해 모이도록 요구받았다. 평민들은 당연히 이 인구조사를 싫어했다. 이 조사가 그들이 국가에 부담해야 하는 경제적 의무와 군역, 부역의 양을 결정하기 때문이었다. 지므리-림의 인구조사 기록은 많은 이들이 집계되는 것을 피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한 관리는 조사를 거부하는 주민들을 겁주기 위해 처형된 죄수들의 잘린 머리를 들고 행진하는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군복무를 위해 징병, 모병된 병사들은 크게 세 범주로 나뉘었다. 직업군인, 민병대, 용병이 그것이다. 징모병은 정교한 군사 관료조직에 의해 시행되었다. 각 부대에는 초급 장교에 해당하는 봉급을 받는 서기관이 배속되어 있었다. 이 군사 서기관들은 모든 병사들의 이름과 고향에 대한 상세하고 온전한 리스트를 보관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사상자와 탈영병 리스트를 만들어냈다.

각 마을의 촌장(suqaqum)은 자기 마을의 징집을 총괄하고, 할당량을 채워야 할 의무가 있었다. 신병들은 "다간 신(혹은 다른 신들)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였고, 그 직후 그들의 이름은 점토판에 기록되었다. 한 사본은 부대 서기관이 보관하고, 다른 사본은 중앙 기록보관소로 보내졌다.

소집령이 내리면 신병들은 검사를 받고, 복무에 부적합한 이들(아프거나 너무 늙었거나)은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그러나, 이 복무 부적격자들에게 복무를 시키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한 장군은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제대로 된 병사들은 지금 나에게 없다 (L400)"


다른 장군도 비슷한 불만의 소리를 전해준다.


"멀쩡한 이들은 돌려보내고, 그 자리를 경험도 없는 어린 아이들로 채워놨으니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L300)"


평화시에 병사들은 종종 휴가(patirum)를 받은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휴가병들은 역시 리스트로 작성되어서 정부로 보내졌다. 한 지휘관이 지므리-림에게 보고하는 것을 들어보자.


"저의주군께서는 죽은 이들과 도망병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저의 주군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명단을 작성해서 나에게 보내라!"  저는 여기서 병사들을 잘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20일 전에 휴가를 떠난 병사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이 병사들이 돌아올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면 점토판에 기록된 명단을 자세히 조사해서 누가 여기 있으며, 누가 탈영을 했는지 알아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 주군께 온전한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L 297)"


살아남아 전해지는 한 휴가병 리스트 점토판은 병사 개개인을 소속 부대, 이름, 고향별로 분류해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L 464) 어떤 텍스트는 50명의 병사들 중 16명이 휴가중이라고 기록하고 있고(L224), 다른 어떤 부대는 25명이 휴가중이고, 22명만이 근무중인 부대도 있다.(L 312)

전쟁이 터지면 이 휴가병들은 즉시 소환되었다.(L 243) 그러나 때때로 지휘관들은 필요한 병력을 모두 소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장교는 정원인 1000명 대신 800명만 있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L 487)

세상 모든 군대가 다 그렇듯이, 장교와 병사들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는 장기복무에 염증을 냈다. 한 도시 주둔군의 지휘관은 왕에게 다음과 같은 문서를 보냈다.


"저는 이 도시 일란 수라(Ilan-Sura)의 주둔군에서 5년을 보냈습니다. 이제, 제 주군께 간청하오니, 제발 교대 좀 시켜주십시오!" (L. 310)


일반 병사들 역시, 일정시기의 근무기간이 지나면 교대할 것을 기대하였다.


"제 주군께서는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가서 그곳에 석달을 있어라" ..... 이제 저희는 석달을 다 채웠습니다. .... 제 주군께서는 이 병사들을 교체할 병력을 보내주셔서, 제 병사들을 집에 보내주십시오." (L 312)


만일 근무 조건이 심하게 나빠진다면, 병사들은 반항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식량이 불충분하게 공급되자 50명이 탈영한 예도 있었고(L213), 다른 이들도 그러겠다고 협박한 적도 있었다. (L 314) 한 지휘관은 자신의 병사들의 불만이 늘어가고 있으며, 병사들이 다음과 같이 불평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어째서 우리는 전쟁에 나섰는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우리 임금님께로 돌아가지를 않는가?(라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 병사들의 마음은 화가 났고, 결국에는 탈영해서 다른 곳으로 떠날 것입니다.... 임금님께서는 그들에게 식량을 보내주셔야 합니다. 이 병사들을 교대시켜 주셔야만 합니다!" (L 313-14)


또한 병사들은 겨울에 복무하게 될 경우 불평하였다. 이는 당시 병사들이 특정 계절에만 복무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L185, 192-3)

명령 불복종이나 비겁함을 보이는 병사들에 대한 처벌은 상당히 가혹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은 벌거벗겨지고 묶인채 매질을 당하고 전군이 보는 앞에 조리돌림을 당하는 것이었다.(L 463)







나오며-위 번역한 내용에 덧붙이는 생각

이상이 Hamblin 선생의 저서 192-193페이지를 발췌해 번역한 내용이다. 사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현대인과 다른 면이 매우 많다. 그들이 이해하는 전쟁은 결코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같지 않았다.(그들은 근본적으로 전쟁을 혼돈에 빠진 신적 질서를 회복하는 행위로 보았다) 싸움에 나서는 이유, 승리의 원인, 전쟁 윤리 등도 현대의 그것과 대단히 다르다. 필자가 예전에 한번 언급했듯이, 과거와 과거인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다름'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 다름은 그들이 살아가던 환경, 사회적 맥락이 현대와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여기서 우리에게는 낯설수밖에 없는 다른 문화와 세계관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라는 면에서 그들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긴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살아남은 위의 문서들은 그것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수천년 전에 살았던 그들도 우리가 똑같이 감정과 기본적인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로마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2) History-근동, 서양사

초기 로마의 사회-파트리키와 플레브스의 문제

로마 공화정 초기 역사서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귀족과 평민간 대립'으로 이해되는 파트리키와 플레브스 간의 투쟁이다. 그런데 이들이 초기 로마에서 정확히 어떤 집단이었으며, 어디서 기원했는가에 대해서는 대단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사실 고대 로마인들 스스로도 이를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Cornell 선생이 지적하듯, 공화정 초기의 소위 '신분간 투쟁'의 핵심 쟁점들은 로마의 1세대 역사가들이 태어나기 한참 전에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고대 로마의 저자들은 이 두 신분의 구분이 로물루스 시대부터 존재한 영구적인 것이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 즉 로마 사회는 시작부터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의 이원적 구조로 출발했다는 관념은 비교적 근래까지 받아들여졌다. 특히 19세기에는 이러한 관념이 그대로 이론으로 굳어졌다. 19세기의 역사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두 신분을 규정하려 했다. 파트리키가 본래의 로마의 원 시민들이었고, 이들 씨족이 쿠리아를 주도했으며 플레브스는 아무런 법적 권리가 없는 하류층이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몸젠은 플레브스가 각 파트리키 씨족에 종속된 이들이었다고 보았고, 니부어는 이들이 로마의 본래 공동체였던 파트리키와 대조되는 아웃사이더 출신들이었다고 보았다.

19세기 후반에는 당시 추세에 맞추어 인종주의적 해석까지 등장했다. 파트리키와 플레브스가 아예 처음부터 구분되는 두 인종집단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즉, 파트리키는 본래의 라틴 공동체 원주민에서 기원하엿고, 플레브스는 이주민, 포로, 외국 출신 클리엔테스 등등에서 기원했다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 이러한 이론들은 사실상 사장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De Sanctis를 필두로 한 20세기의 학자들은 파트리키 신분은 로마 역사의 초장부터 명확히 정의된 집단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상고시대에 걸쳐 대단히 점진적으로 형성되었음을 주장하였다. 플레브스의 정체성과 '신분간 투쟁' 역시도 그때그때의 당면한 이해관계의 작용과 변화, 역사의 전개에 따른 결과물임에 대해서도 상당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일단 고고학적으로 봤을때, 지난번 글에서 언급했듯이, proto-urban 시기인 기원전 10세기부터 라티움 지역은 전반적으로 정착지가 확대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정착지들의 특징은 상당히 높은 동질성이다. 매장지나 부장품 등에서 신분의 분화를 가리키는 증거는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즉, 이 시기까지는 사회가 비교적 평등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기원전 8세기부터 점진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인구의 증가와 함께 물질문화 역시 양적, 질적으로 팽창하는 징조가 뚜렷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구조에 있어서 변화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몇몇 무덤들에서 드러나는 상당한 부의 흔적은 이 시기에 나타나는 영구적인 사회 계층화와 지배적인 귀족 계층의 등장을 가리킨다. 특히 중요한 점은 몇몇 무덤들이 함께 그룹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초기 이탈리아의 사회 구조에 있어서 클랜, 혹은 씨족(gens)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계층의 분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씨족의 등장을 이후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와 어떻게 연결지을 수 있을까? 여기서 다시 한번, 로마 초기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의 정의 자체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내러티브는 로물루스가 뽑은 원로원 의원들이 파트리키 귀족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파트리키, 파트리쿠스'라는 단어 자체가 아버지라는 뜻의 라틴어 파테르에서 온 것이고, 그동안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원로원 의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왔다. 따라서 '로물루스의 원로원'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원로원이 파트리키만으로 구성되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상당히 초기부터 원로원이 patres와 conscripti라는 두 그룹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파트리키를 '원로원 계급'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게다가 최근 몇몇 학자들은 오비니아 법 (기원전 339년경) 이전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집단으로서 원로원이 과연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고 있다.

또한 파트리키-플레브스는 귀족-평민 개념하고도 또 다르다. 사실 로마의 귀족(노빌리타스)는 파트리키 귀족과 플레브스 귀족을 함께 포함하는 집단이다. 또한 Forsythe 선생이 지적하듯, 로마의 플레브스는 가난한 프롤레타리아트와 자급자족이 가능한 자영농, 도시 수공업자,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비-파트리키 시민들을 모두 포함하는 상당히 이질적인 집단이다. 그리고 한때는 파트리키만이 씨족이 있었다고 생각되기도 했지만, 현재는 파트리키와 플레브스가 모두 각각의 씨족이 존재했음이 분명해졌다. 이러한 점들을 모두 고려해볼때,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의 기원을 명확히 정의하는 것은 상당히 골치아픈 문제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전사단과 정착민

그런면에 있어서 가장 최근에 J. 암스트롱 선생이 내놓은 주장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 주장은 사실 기존 학자들이 전반적으로 합의를 이룬 또다른 전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바로 상고시기 이탈리아 지역이 수평이동과 수직이동이 모두 활발한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중요한 요소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무장한 전사 집단의 존재다. 이들은 용맹과 리더십을 자랑하는 강력한 전사와 그에게 의지하는 이들(일가 및 클리엔테스)로 이루어진 소규모 사병집단이었다. 이들은 여러 도시국가들의 경게를 비교적 자유롭게 넘나들었고, 필요에 따라 충성의 대상도 자주 바꾸었다. Cornell 선생은 이들이 중세-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용병 집단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보고, 그 명칭을 따와 이들을 '콘도티에리'라고 부른바 있다.

초기 로마-이탈리아의 전사단


1997년 일군의 고고학자들은 대단히 흥미로운 명문 하나를 발견한다. 어떤 기념물의 하부였을 것으로 보이는 이 돌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새겨져있었다.


ieisteterai Popliosio Valesiosio suodales Mamartei
(포플로스 발레시오스의 동지들이 마르스 신께 건립하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suodales라는 단어였다. 그것은 이후 로마 사회에서는 일종의 종교적인 사회단체였다. 특정 신을 모시면서 친목을 다지고 밥도 같이 먹고 그러는 단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단어의 의미에 '맹세'라는 뜻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 기원은 무언가 같은 목적을 가진 구성원들로 조직된 집단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발레리우스의 집단이 특히 마르스 신에게 봉헌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 기능은 군사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그 이전부터 그 시대의 정황증거와 문헌사료 등을 종합하여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 씨족을 중심으로 한 전사단이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로마 공화정 초기까지도 이들의 사적인 전쟁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제기하던 이론이었다. 그러나 Forsythe 선생이 지적하듯, 이 명문의 발견으로 이 이론은 확고한 정설이 되었다. 적대적인 다른 집단과의 충돌, 가축 등을 노리는 약탈 전쟁, 사냥, 가축 방목 등이 이들의 일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암스트롱 선생의 주장에 따르면, 라티움의 사회가 본격적으로 분화되기 시작하던 proto-urban 시대에 사회경제적으로 더 많은 부를 차지한 씨족 집단들 간의 경쟁이 점점더 심해지는 추세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의 무덤의 부장품에 군사 장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난다. 이는 이 시기에 엘리트 씨족들이 점점 더 위에서 언급한 전사집단이 되어갔음을 암시한다.

호라티우스 코클레스의 전설

반면에 사회경제적으로 이들보다 덜 부유한 이들은 이전 시대와 그리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새로운 proto-urban 사회에 적응하여 정착하였다. 마침 급격히 발전하던 로마는 상업과 교통의 요지였다. 이들 정착민들은 농민, 상인, 혹은 수공업자로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삶을 영위하는 지역의 지리적 조건에 의해 통합되었고, 암스트롱 선생은 이러한 요소가 이들을 특정 지역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강력한 정체성을 부여했다고 설명한다. 암스트롱 선생에 따르면, 이들이 바로 훗날의 로마 플레브스의 기원이다.

이들 도시 공동체는 일종의 정부를 구성했는데, 바로 상고시대의 쿠리아(curiae)다. 예전에는 쿠리아를 파트리키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해석하였으나, 근래 들어 Smith 선생 등에 의해 상고시대 쿠리아에 농업적 성격이 뚜렷함이 지적되었고, 결국 기본적으로 플레브스를 대표하는 기관이었다는 것이 최근의 해석이다.

전사집단으로 발전한 엘리트들은 달랐다. 이들은 칼로 먹고 사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앞서 서술한 농민이나 상공업자들처럼 특정 지역 및 토지와 강력한 유대는 없었다. 대신에 이들은 친족 관계 전사단의 리더와 부하 관계에서 강한 소속감을 가졌다. Forsythe 선생이 지적하듯, 호메로스의 영웅들 내지는 게르만족의 족장과 그 전사단의 관계와 대단히 유사하다. 암스트롱 선생은 이 전사집단의 우두머리들이 로마 파트리키의 기원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특정 지역에 큰 애착이 없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무력으로 벌어먹을 수 있는 곳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수평이동이 활발했다는 면에서 상당히 '열린 사회'였다.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엘리트들은 새로 이주한 도시에서 매우 쉽게 유력자의 위치를 얻었다. 그들의 세력 기반이 자체 무력과 거기서 오는 경제력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지난번 글에서 언급한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전설은 이러한 예를 비교적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에트루리아 출신이 로마로 이주하여 유력자가 되는 이야기를 예전에 에트루리아 지배로 해석했던 것이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해석임이 다시 한번 명확해진다.

Cornell 선생은 이러한 모험가적 전사집단의 대장들이 후기 로마 왕정에서 왕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암스트롱의 해석도 비슷하다. 이 해석에 따르면 이 시기 로마의 왕, rex는 결국 여러 전사단이 족장들 중 가장 능력 있고 뛰어난 이들이 돌아가면서 하는 최고 족장 내지는 위원장 같은 존재였다는 뜻이 된다.

이들 강력한 씨족장들은 각각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때때로 모여야 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원로원의 매우 비공식적인 기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모임에 유력한 플레브스 대표들이 참여하면서 원로원은 보다 공식적인 국가기구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원로원을 구성하는 patres와 conscripti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왕과 원로원은 모두 전사귀족들과 도시민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협조를 이끌어내는 기구로 작동하게 되었다.

로마와 그 주변지역에 정착해서 살아가던 이들은 강력한 무력의 보호가 필요했다. 더욱이 이 시기에 이들이 로마의 지리적 이점 덕분에 점점 더 부유해지고 있었고, 동시에 이탈리아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전사단들로 가득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 보호의 필요는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로마라는 도시에 매력을 느끼고 다가오는 몇몇 전사단과 일종의 계약관계를 맺었다. 그 정점에 rex, 왕이 있었다. 이들은 왕에게 로마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인 '임페리움'을 부여하고, 대신에 보호를 얻었다. 암스트롱 선생의 가설에 따르면, 이 시기 로마 왕정의 본질은 흔히 생각하는 군주정보다는 오히려 이후 로마 사회의 '파트로네스-클리엔테스'관계와 더 유사했다.

그러나 초기까지도 '로마'라는 국가 아이덴티티보다는 씨족 아이덴티티가 훨씬 더 강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시기 로마와 '로마인' 개념은 결코 이후 공화정 중후기 시절의 그것과 같았다고 볼 수 없다. 로마는, 가능성이 풍부하지만, 아직은 중부 이탈리아에서 성장하던 여러 공동체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즉, 더 나은 조건이 보이면 얼마든지 다른 도시국가로 이주할 수 있던 시기였다. 이 다양한 씨족들이 점차 점진적으로 로마 사회에 통합되어가면서 비로소 파트리키와 플레브스 씨족들 모두에게 로마시민이라는 정체성이 조금씩 형성되어간 것이다. 그러나 씨족 주도의 전쟁은 공화정 초기까지도 여전히 남아있었고, 일부 씨족집단의 유동성은 최소한 기원전 5세기까지는 남아있었다.








나오며

지금까지 로마 상고사의 몇몇 쟁점에 대한 최근 논의들을 다소 장황하고 복잡하게 살펴보았다. 사실 이것도 다소 단순화시켜서 정리한 것일만큼 이 시기 관련한 논쟁은 대단히 어렵다. 가장 마지막으로 암스트롱 선생의 최신 논의를 살펴보았는데, 아직 이 논의가 얼마나 잘 받아들여질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몇몇 학자들은 전사집단과 정착민이라는 이분법이 당시 이탈리아의 복잡한 다양성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은 아닌가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고 있으나, 어찌되었건 이 이론이 상당히 흥미로우며 앞으로 더 많은 생산적 논의를 촉발할 것이라는데에 기대를 표하고 있다.

문헌자료가 부족하고 고고학적 자료는 여러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확고한 주장을 펼치기 대단히 어려운 시기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라는 중요한 문명의 여명기에 대한 이 최신 논의들은 대단히 흥미로우며,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이 시기에 대해 예전보다 상당히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참고문헌

Jeremy Armstrong, War and Society in Early Rome: From Warlords to Generals (Cambridge, 2016).
-----------------, Early Roman Warfare: From the Regal Period to the First Punic War (Barnsley, 2016).
Mary Beard, SPQR: A History of Ancient Rome (London, 2015).
Francesca Fulminante, The Urbanization of Rome and Latin Vetus: From the Bronz Age to the Archaic Era (Cambridge, 2014).
Christopher John Smith, The Roman Clan: the Gens from Ancient Ideology to Modern Anthropology (NewYork, 2006).
Jean-Claude Richard, "Patricians and Plebeians: The Origin of a Social Dichotomy", Kurt Raaflaub (ed.) Social Struggle in Archaic Rome (Oxford, 2005).
Gary Forsythe, A Critical History of Early Rome: From Prehistory to the First Punic War (Berkeley, 2005).
Tim Cornell, The Beginnings of Rome: Italy and Rome from the Bronze Age to the Punic Wars (London, 1995).


로마는 어떻게 시작했을까? (1) History-근동, 서양사

들어가며

사료의 부족은 고대사 연구의 숙명이지만, 그중에서도 로마의 상고사는 아마도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중 하나일 것이다. 로마인들이 처음으로 자국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기원전 200년 경이다. 로마의 건립으로부터 이미 수백년이 흐른 시점이라는 뜻이다. 리비우스를 비롯한 역사가들은 대단히 제한된 정보만 가지고 로마의 초기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 서술들 중 과연 어떤 것이 신뢰성이 있는 것인지는 알아내기가 대단히 힘들며, 특히 신화적인 이야기가 가득한 로마 건국 이야기는 더욱 그러하다.


이런 문헌 자료의 신빙성을 둘러싼 치열한 논란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Tim Cornell 선생의 경우 로마 상고사에 대한 문헌 자료들이 일말의 역사적 진실들을 담고 있다고 보는 반면에 Gary Forsythe 선생은 Cornell이 이러한 고대 사료의 신빙성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비판한바 있다.(사실 로마의 기원을 둘러싼 이 논쟁은 구약성서와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 논쟁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현대 학자들에게 로마 상고사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로 고고학이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고고학적 조사 결과 자체만으로는 문헌사료의 사실성을 입증하기가 어려우며, 사실 해석하기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들로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 고고학적 조사다. 따라서 이는 로마 상고사에 대해 대단히 다양한 해석과 치열한 논쟁을 낳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로마의 기원과 초기 역사에 대한 최근 해석 몇 가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도시의 탄생-신화와 역사

'로마 시민'들의 공동체로서 도시국가 '로마'는 과연 어떻게 탄생했을까?  매우 잘 알려져있다시피, 전설은 트로이 유민들의 후손들로부터 시작해서 정치적 음모에 의해 버려진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 젖을 먹고 자라나 결국 로마를 건국하기까지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준다. 로물루스가 건립해서 이름도 '로마'라는게 이 신화적 내러티브의 결론이다.

고대 이탈리아 전사의 모습으로 복원한 로물루스와 레무스 상상도

그러나 문헌사료의 사료가치에 대해 좀더 긍정적인 학자들과 보다 회의적인 학자들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신화가 말 그대로 '신화'일 뿐이라는데 동의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를 종합해볼때, 한명의 영웅적인 건국자가 어느날 갑자기 로마를 세운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로물루스는 거의 모든 면에서 허구적인 캐릭터임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그 이름부터, 메리 비어드 선생이 재치있게 표현했듯이, 말 그대로 '미스터 로마'라는 뜻에 불과하다. 로물루스가 세워서 로마가 아니라, 로마라는 이름에서 로물루스라는 신화적인 건국영웅이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또한 Cornell 선생이 지적하듯, 특별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궁중음모로 인해 죽도록 버려진 고귀한 혈통의 왕자가 기적적인 도움을 받아 살아남고 평범하게 성장한 뒤, 본래의 왕권을 회복하러 돌아온다는 이야기는 고대 지중해 세계, 아니 동서를 막론하고 너무나도 흔해빠진 신화적 모티브다. 당장 유사한 프레임의 예만 찾아보더라도 사르곤, 키로스, 페르세우스, 오이디푸스, 모세, 궁예 (넓게 보면 마태오 복음의 성탄 이야기도 여기 들어간다)등등 수도 없이 많지 않은가?

사실 이런 모티브는 상반된 문화권에서 매우 쉽게 발견되기 때문에, 특정 민족만의 신화라든지, 베끼거나 영향을 주고받았다기 보다는 Cornell 선생의 지적대로 인류보편적인 감성에 해당된다고 보는편이 더 합당할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 점은 로물루스와 레무스 이야기가 로마의 토착 신화이며 꽤 오래된 신화였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말 그대로 '신화'다.

따라서 앞서 서술했듯, 로마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에 상당부분 의지할수밖에 없다. 발굴조사결과, 로마의 중심지역에 사람이 사는 흔적이 나타나는 것은 초기 청동기 시대, 혹은 그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수 있다. 그러나 영구적인 정착지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중기 청동기 시대, 즉 기원전 17세기의 일이라는 것이 현재 많은 학자들의 중론이다. 증거가 여전히 매우 빈약해서 가설 수준이긴 하지만, 대체로 이 시기에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정착지가 등장했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어서 청동기 시대 말, 대략 기원전 13세기에 이르면 팔라티누스 언덕에서도 확실한 정착의 흔적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때까지를 pre-urban 시기라고 부른다.

초기 철기시대가 개막되면서 로마는 proto-urban 시기라고 불리는 시대로 돌입한다.(기원전 10세기 후반-9세기) 이때의 주요 증거는 장례와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이 시기에 퀴리날리스 언덕과 에스퀼리누스 언덕으로 정착지가 확대되는 경향이 보인다. 그리고 기원전 9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에 이르러 그동안 매장지로 이용되던 현재 로마의 중심부 지역이(현재의 아우구스투스의 포룸과 카이사르의 포룸) 더이상 그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다. 대신에 매장지는 훨씬 외곽으로 밀려나는데, 이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은 로마의 거주지역과 인구가 이 시기에 크게 확장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로마의 본격적인 도시화가 이루어지는 '왕정 시대'가 막을 올린다.(기원전 7세기 말-6세기)





로마 왕정의 신화

신화에서 초기 로마는 전설적인 일곱 왕들이 다스렸다. 앞서 로물루스가 철저히 신화상의 인물임은 이미 언급했지만, 나머지 왕들도 역사성을 판단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Forsythe 선생은 어쩌면 나머지 6왕의 이름 자체는 실존인물들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그들의 실제 통치에서 신뢰할만한 디테일이 전해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우선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와 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Cornell 선생이 지적하듯이, 매우 정형화된 캐릭터들이다. 누마는 전형적인 사제-왕 내지는 현자-왕이고, 툴루스는 역시 전형적인 전사-왕이다. 사실 '누마'라는 이름 자체가 신성한 힘을 뜻하는 라틴어 numen에서 왔고, 호스틸리우스는 적개심이나 호전성으로 해석될수 있는 단어다. 이런 전형성은 이들이 실존인물이었는가에 대해 의심을 품게 만든다. 아니면 Forsythe 선생이 추측하듯, 후세에서 '누마'와 '호스틸리우스'라는 이름만 보고 이들의 치세를 각각 이름에 어울리는 스토리로 만들어낸 것일수도 있다.

그 다음인 안쿠스 마르키우스부터는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가 등장한다.(순도 100% 폭군으로 묘사되는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제외) 그러나 여전히, Cornell 선생이 지적하듯, '실제 그런 이름의 왕들이 로마를 다스렸을지도 모른다' 이상의 추론은 불가능하다.

왕들의 치세와 수명도 문제다. 로물루스는 37년, 누마는 43년, 툴루스는 32년 안쿠스는 24년,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38년,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44년,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25년을 통치했다고 나오는데, Forsythe 선생이 지적하듯, 상고시기 중부 이탈리아의 평균 수명을 고려해볼때, 대부분의 왕들이 너무 안정적으로 오래 통치하고 있다. 더욱이 Forsythe 선생의 분석에 따르면 이 숫자들 상당수는 상징수로 보인다.(고대 지중해의 텍스트에서 상징수는 드문 일이 아닌데, 특히 구약성서에서 많이 찾아볼수 있다)

가령, 로물루스와 누마의 재위기간을 합치면 80년이 되는데, 이는 한 세대가 온전히 지나갔음을 상징하는 40년(성서에서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40년, 다윗의 치세가 40년이고, 예수는 광야에서 40일을 보냈다)의 두배다. 로물루스는 40-3이고 누마는 40+3인데, 40과 3은 모두 특별한 의미를 갖는 숫자이다. 로물루스가 전사-왕이고 누마는 평화로운 치세를 보냈다는 스토리상 각각 더하기빼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툴루스와 안쿠스의 치세는 모두 8의 배수이며,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치세는 각각 로물루스와 누마의 치세에 1년씩을 더한 수다. 따라서 이 치세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많이 따르며, 후대 역사가의 수비학(numerology)적 창안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Lapis Niger

그러나 초기 로마의 정치체제가 왕정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899년에 포로 로마노에서 한 석비가 발견되었다. Lapis Niger라고 불리는 이 석비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라틴어 명문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여기에는 RECEI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왕을 가리키는 라틴어 rex의 오래된 형태로 보인다. 이 비문은 대단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19세기의 회의주의적인 학자들은 '로마 왕정' 자체가 허구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비문의 발견으로 로마가 어떤 형태든 '왕'이라고 불린 이들에 의해 다스려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해진 셈이었다.

물론 이 시기의 왕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국왕은 아니다. 후대 역사가들은 사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군주의 이미지로 로마 왕정을 묘사했지만, 사실 이 시기 로마 왕들은 부족장 내지는 부족 위원장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에트루리아 왕정의 신화

신화에 따르면 로마 왕정 후반부는 에트루리아 출신의 왕들이 다스렸다고 한다. 이에 신화에서 어떻게든 합리적인 역사를 재구성하려 시도하던 학자들은 로마가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받았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한때는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실제로 모 위키는 지금도 이게 정설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학계에서 '에트루리아 지배'설은 많은 비판을 받아 설득력을 상당부분 상실하였다.

에트루리아 지배설의 근거로 생각되는 첫번째는 로마 7왕의 신화 중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이야기다. 에트루리아가 이 시기에 로마를 지배했던 것이 후대에 한 에트루리아 출신의 개인이 자유로운 도시국가인 로마의 왕으로 선출된 것으로 윤색되었다는 주장이다(...라고 모 위키 '로마 7왕' 항목에 쓰여있다)

그러나 이미 Cornell 선생이 이 주장의 허점에 대해 상세히 반박한바 있다. 고고학적 자료는 이 시기 로마 사회의 상류층에 에르투리아인들이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공화정 초기에도 이주민의 후손들이 고위 관직을 차지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수의 잘 자리잡은 개인들을 제외하면, 에트루리아가 로마를 점령하고 지배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시기에 발견되는 명문들의 대다수는 라틴어이며, 에트루리아어는 소수(로마 상류층으로 자리잡은 에트루리아 이주민들의 흔적으로 해석 가능하다)에 불과하다. 이는 실제로 다수의 에트루리아어 명문이 발견되는 캄파니아의 비그리스계 도시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상고시대 이탈리아는 집단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로마는 물론이고, 에트루리아도 상당히 다양한 집단들로 구성되었다. 특히 귀족 가문과 개인들의 도시국가간 이주는 전혀 드문 현상이 아니었다. 로마에 상당한 수의 에르투리아 인들이 이주해와서 자리잡은 것은 특이한 현상이 아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신화를 에트루리아 지배의 증거로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두번째로, 직접적인 식민지는 아니더라도 막대한 문화적 영향력을 받았으니 이 시기 로마는 사실상 '에트루리아 도시'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증거가 빈약하다. 사실 예전에는 이 시기에 로마에서 예전과 다른 관습이나 문화가 발견되면 그것을 죄다 에트루리아 기원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가령, 로마의 종교와 신들은 본래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후 로마의 신이 인간화된 것을 에트루리아로부터 전달받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에트루리아 종교와 로마 종교는 둘 다 나란히 그리스 종교의 영향을 받아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Forsythe 선생이 지적하듯, 로마는 그 지정학적 위치상 라틴 문화와 에트루리아 문화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둘은 당연히 상당한 수준의 문화적 상호작용을 하며 발전했다. 그러나 두 문화는 동시에 중부 이탈리아 티레니아해 문화권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로마와 에트루리아는 공통된 문화적 요소를 공유하면서 상호작용했으며, 동시에 둘 다 그리스 문화를 수용하여 나름의 문화를 만들어나간 것이다. 따라서, 로마가 이 시기에 철저히 에트루리아 문화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은 현재까지 밝혀진 증거와 잘 부합하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최근의 많은 학자들이 비교적 동의하는 로마 상고사의 대체적 흐름이다. 그렇다면 이제 보다 논쟁적인 주제로 들어가야 하다. 이 시기 로마의 사회구성은 어떠했으며, 하나의 공동체로서 로마는 과연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이것이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주제들을 다뤄보도록 하겠다.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최근 평가 History-근동, 서양사

들어가며

역사상의 군주들을 평가할때 우리는 '좋은 왕 vs 나쁜 왕' 프레임에 빠지기 매우 쉽다. 가령 모 위키에 들어가보면 왕들을 암군 명군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분류해놓은걸 볼 수 있는데, 이런 극도로 단순한 이분법적 평가는 역사를 학문적으로 접근함에 있어서 결코 좋은 태도가 아니다. 소위 '무능과 유능'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맥락에서가 고려되지 않으면 지극히 추상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아무리 군주 개인의 역할이 중요한 군주제 사회더라도 그 개인이 모든 것을 통제할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가 지금까지 써온 글들에서 여러번 언급한 바이지만, 이런 단순한 이분법이 통하기에는 인간사회와 역사가 너무나도 복잡하다.

그런 맥락에서 지금까지 몇번 영국사의 몇몇 군주들에 대한 최근의 학술적 논의들을 소개한 바 있는데, 그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어떤 군주의 치세를 평가하는게 이러한 암군 vs 명군 프레임이나 선악 구도로 바라보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함이었다. 특히 지난번에 썼던 메리 1세에 대한 최근 학계 평가는 이러한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같은 의미에서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최근 평가도 이러한 복잡함 내지는 명쾌한 평가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20세기 중반까지 엘리자베스 1세는 말 그대로 명군 중의 명군이자 영국의 국민영웅으로 극찬을 받아왔다. 기존 평가는 엘리자베스를 앞뒤로 한 일련의 폭군과 무능한 왕들 사이에서 엘리자베스 홀로 빛나는 식이었다. 물론, 대중적 레벨에서 이러한 평가는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다. 한번 형성된 국민영웅의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대중적 시각은 사실 <먼나라 이웃나라> 등에서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즉,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겨 강대국의 기틀을 닦았으며, 소박하고 검소하게 생활해서 재정을 튼튼히 했고(그래서 사치, 방탕한 제임스 1세와 달리 의회와 충돌할 일이 없었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등등이었다.

그러나 현재 영국 사학계의 평가는 매우 다르다. '종교적 관용'과는 거리가 먼 여왕의 가톨릭 탄압과 아일랜드 학살은 이미 메리 1세 관련 글에서 다루었으므로 넘어가고 이번 글에서는 주로 국정운용과 관련된 부분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재정문제

근대 초의 정부를 논하려면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 시기는 근본적으로 현대적인 개념에서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중앙에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도 상당히 제한되어있었고, 중앙의 의지를 신속하게 각 지역으로 전달할 수 있는 수단도 제한되어있었다. 따라서 16-17세기의 군주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대응책을 세워나가는게 최선이었다. 따라서 정부의 구조 변화나 개혁은 점진적일수밖에 없었고, 그것도 어떠한 장기적인 비전에 따라 진행해 나가기가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엘리자베스 이전까지 튜더 군주들은 비교적 행정 시스템을 잘 만들어온 편이었다. 헨리 8세는 본인이 끊임없이 대외전쟁에 나서고 싶어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치세 중에 비교적 효육적인 전비 조달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러나 무리한 전쟁으로 인해 전반적인 재정을 상당히 악화시켰다. 지난번 글에 서술했듯이, 메리 1세는 이 망가진 재정을 비교적 잘 재건했고, 동시에 대외교역에 대한 효율적인 징세 체제와 관세 세스템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엘리자베스가 물려받은 정부였다.

엘리자베스는 이 체제와 메리 시대의 재정 정책 기조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헨리 8세 말년과 에드워드 6세때 파산 직전까지 간 재정 회복을 마무리지었다는 것은 분명한 성과였다(물론 기반은 메리 1세가 만들었고, 시작도 메리 1세가 했지만). 그러나 그 이상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는 재위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더 심각한 문제를 노출하게 된다.

16세기 말-17세기 초는 유럽 각국의 경쟁이 과열되던 시기고 각국은 어떻게 해서든 자국의 물력를 제대로 파악하고 동원하기 위한 체제 정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동시에 이 시기는 인플레이션의 시대였다. 헨리 8세와 메리 1세의 재정 시스템은 그 당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만든 체제이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설명했듯이, 어디까지나 16세기 초중반의 필요에 맞춘 적합한 체제였다. 상황이 바뀌면 이 체제도 수정을 해나가야 했다. Ronald Hutton 선생의 지적대로, 엘리자베스의 정부는 이 '업데이트'에 실패했다. 인플레이션의 시대에 부의 측정은 여전히 헨리 8세 시대에 만들어진 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납세자들은 재빠르게 탈세 스킬을 늘려갔다. 엘리자베스 치세 대표적인 실세 중 하나였던 윌리엄 세실 경은 심지어 자기 연수입이 고작 133파운드라고 신고한 적도 있었다(조사에 따르면, 실제로는 4000파운드에 달했다). Hutton 선생 지적대로 가장 큰 책임은 이 체제를 건드릴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은 엘리자베스 자신에게 있었다.

그 결과는? 당연히 심각한 경제적 문제였다.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돈 나갈 일은 많은데, 수입은 늘지를 않았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인플레이션 시대라 왕실 자산으로부터 들어오는 수입은 사실상 더 줄어든 셈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부족한 수입에 대한 보충을 재정개혁이 아니라 왕실 자산 매각과 빚이라는 임시방편으로 해결해나갔다. 그녀의 치세 중에 무려 900,000 파운드에 달하는 가치를 가진 왕실 영지가 매각되었다.

그러나 이것까지고는 전쟁 비용 대는데 어림도 없었다. 나머지는 의회에서 거두는 특별세에 의존할수밖에 없었다. 본래 잉글랜드 정치에서 의회 세금은 왕의 정식 수입(앞서 언급한 왕실 자산, 관세 등)으로 해결할 수 없는 비상사태때 거두는 것이었다. 이것이 엘리자베스 치세때에 거의 상설세금화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나마도 앞서 언급했듯 재정 시스템 '업데이트'가 안되다보니, 정확히 산출된 국가의 부에 따라 과세가 되지를 않았다. 수입원을 둘러싼 의회와 이후 스튜어트 왕가의 왕들 간의 갈등은 유명하지만, Barry Coward 선생과 Peter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그 갈등은 이미 엘리자베스 치세 후반부에 생겨난 것이었다.





'검소한 여왕'의 진상

교양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등과 같은 대중교양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흔히 나온다. "엘리자베스는 돈 한푼 쓰는것도 아껴썼기 때문에 의회에 손벌릴 일도 별로 없었고, 왕권도 강했지만 제임스 1세는 호화사치한데다가 측근들에게 마구 베푸는 기분파라 돈이 딸려서 의회와 갈등을 빚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매우 다르다.

첫째. 엘리자베스가 의회에 손 벌릴 일이 없었다는 것이 사실과 매우 다르다는 것은 이미 앞 문단에서 확인한 바 있다. 특히 재정 구조의 문제점이 점점 드러나는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엘리자베스는 의회 세금에 더 많이 의존해야 했다. 따라서, 엘리자베스 치세 후기의 의회에 대한 J. E. Neale의 연구에 드러나듯이, 엘리자베스에 대한 의회의 불만은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심지어 여왕이 죽기 전에도 '잉글랜드 의회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엘리자베스가 이 모든 문제점을 스튜어트 왕가의 왕들에게 모두 떠넘기고 사망하는 바람에 당장 큰 욕을 먹지 않았을 뿐이다.

둘째. 엘리자베스의 궁정 정치가 상당히 검소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조건 찬양할 일이 아니다. 이 점은 근대 초의 정치 매커니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근대 초의 궁정은 단순히 왕과 귀족들이 사교행사를 하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정치 토론이 이루어지는 공론의 장이었고, 국정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왕에게 전달되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한 정치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의 궁정-이런 엔터테인먼트만이 궁정의 기능은 아니었다

또한 중요한 기능은 근대 초 정치의 중요한 요소인 왕의 후원(royal patronage)이 분배되고, 베풀어지는 장소였다. 이건 현대적 관점으로 '정실인사'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근대 초의 유능한 군주들은 모두 이 '후원'이라는 요소를 적시에 제대로 베풀어서 자기 세력을 만들고 그것을 정책 입안 및 추구의 힘으로 삼았다. 사실 동서를 막론하고 이시기 관료들의 봉급은 대단히 빈약했다. 따라서 궁정귀족들은 왕이 챙겨주는 연금이나 후원금 없이는 생존에 상당한 곤란을 겪었다. 사실 조선시대 정치사를 봐도 이와 유사한 매커니즘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공식적 챙겨주기' 없이 정식 봉급을 늘리면 될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근대 이전의 재정 구조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런데 엘리자베스의 '검소함'은 이러한 후원에도 상당히 인색했다는 점을 수반한다. 어쩔수가 없는게, 엘리자베스 자신이 재정 구조를 손대지를 않아서 왕실 수입이 빈약하니 챙겨주고 싶어도 챙겨줄 돈이 없었다. 결국 엘리자베스의 검소함은 본인이 돈이 많은데도 검소함을 실천한게 아니라, 근본적인 재정 개혁을 하지 않은 탓에 돈이 부족해서 검소하게 살수밖에 없었던 것이 더 진상에 가깝다.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여왕의 후원이 부족하니, 빈약한 봉급에만 의존하게 된 귀족과 관료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탈세와 부패에 의존하게 되었다.

반면에 그동안 사치하고 방탕했다고 비판받아온 '기분파' 제임스 1세는 오히려 근대 초 군주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후원'이 중요하다는 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Coward and Gaunt, 2017) 이는 근대 초 국가의 운영에 필수적인 주요 귀족들과 국왕의 협력관계를 이루어내기 위해서 필수적이었고, 그래서 제임스 1세는 이를 아낌없이 베풀었다.(물론 제임스 1세는 어렵게 평화를 재구축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때처럼 대외전쟁에 들어가는 비싼 돈을 절약할 수 있었다) 후대에 비판받은 것과 달리, 제임스 1세의 이러한 관대한 후원은 스튜어트 초기 시절 정부 시스템이 매끄럽게 돌아가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엘리자베스 행정부-성과와 한계


행정부 운용에 있어서 엘리자베스는 기민한 정치력과 본인이 가진 카리스마를 통해 적어도 헨리 8세보다는 더 안정적인 정부를 이끌어나갔다. 이 부분은 Hutton 선생을 비롯해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도 마냥 칭송만 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우선 이 시기 중앙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추밀원(Privy Council)과 왕의 궁정(Court)이다. 이 둘의 기능한 사실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둘 다 정치와 토론의 장이면서 행정의 역할을 동시에 했다.

스페인 대사와 회담하는 추밀원

이런 중앙정부 운용과 지방 통치에 있어서 엘리자베스는 모두 자신이 총애하는 측근들을 이용한 통치를 했다. 소수의 측근들에 의존하다보니 그녀의 추밀원은 점점 더 규모가 작아졌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은 대를 이어서 집무했다. 한번 신임을 받아 추밀원의 구성원이 되면 거의 죽을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으니, 일단 정부는 헨리 8세때와 같은 급격한 변동 없이 안정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는 다른 많은 귀족들의 정치적 기회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드러나게 된다. 소수의 측근 정치를 하다보니 엘리자베스는 아무리 총애하는 신하라도 온전히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항상 추밀원의 멤버들이 자신 모르게 증거를 조작하거나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했는데, 상당부분 사실이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에 대한 한결같은 충성의 표본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졌던 세실 경의 문서 조사 결과 그는 상당히 더러운 정치적 술수를 써가면서 여왕을 속이고 때로는 조종하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비측근 귀족들의 불만도 빼놓을 수 없다, 한 측근이 총애를 얻으면 그의 분파가 추밀원, 혹은 궁정을 사실상 지배했는데, 이 역시도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정치가로서 엘리자베스

이쯤 되면 현대 학자들이 엘리자베스 1세를 정치가로서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대략 드러날 것이다. Hutton 선생에 따르면 정치가로서 엘리자베스의 큰 특징은 거의 '병적인 보수성'이다. 이것은 단지 옛 정책을 고수하거나 신중하다는 뜻이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즉위한 뒤, 일단 익숙해진 상황을 바꾸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엘리자베스 치세의 성과와 한계점들은 모두 여기서 나왔다.

우선 제일 먼저 언급한 재정 문제가 그것이다. 그녀는 메리 1세의 정책을 이어받아서 상당한 성과를 냈다. 그러나 한번 이렇게 재정을 안정화시키자 그것을 추가로 개혁하는 것은 끝까지 피했다. 둘째로, 한번 익숙해진 사람을 바꾸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의 관료들이 대부분 죽을때까지 근무하고, 그 아들들이 대를 이어 관직을 이어가는 것은 이 보수성에서 기인한다.

앞서 보았듯, 이러한 점들이 그녀의 능란한 정치술과 결합하여, 그 치세가 근대 초 영국사에서 보기 드문 정치적 안정기를 누리는데 일조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이 이후 내전과 혼란기를 겪은 영국인들이 엘리자베스 시대를 황금시대로 회고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안정성은 필요한 개혁까지도 뒤로 최대한 미루거나 임시변통으로 해결하도록 해서 만든 것이라는 커다란 한계점을 갖고 있었고, 그 덤터기는 후대 왕들이 죄다 뒤집어썼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정치가로서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해 "후대 군주들을 희생시켜서 단기적인 성공을 거둔 군주"라는 평가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국민의 사랑을 받은 여왕?

사실 엘리자베스에 대한 최근 평가가 학계에서 다소 박해진 것은, 정확히 메리 1세에 대한 평가가 상승한 이유와 겹친다. 한두 세대 뒤 역사가들의 칭송 및 비난이 아니라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과 행정문서를 뒤져보니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것과 상당히 다른 면모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동시대인들의 기록들을 조사하던 학자들은 온갖 불만 사항이 가득 적힌 문서들을 발견했다. 여왕의 총애에서 제외된 궁정인들의 불만(엘리자베스가 소수의 측근에게 조종당한다는)과 퓨리턴의 불만, 탄압당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목소리 등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엘리자베스의 측근이라 할수 있는 관료들이 남겨놓은 문서였다. 여기에는 여왕에 대한 불만과 때때로는 불경한 표현까지 가득 담겨있었다. 

사실 '블러디 메리'의 이미지가 동시대 평가라기보다는 상당히 후대 개신교 사가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바로 윗 문단에 서술했듯, 엘리자베스의 '황금시대'도 마찬가지다. 엘리자베스 치세 후반의 불만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것은 여러 동시대 자료가 증명한다.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1603년 여왕이 사망했을때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최근 학계에 의해 제기된 비판점만 보면 엘리자베스 1세가 상당히 형편없는 군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여성 군주라는, 그것도 남편이 없는 여성 군주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즉위하여 대단히 어려운 시기에 안정적으로 정국을 장기간 이끌었으며, 한정된 자원만 가지고 상당한 치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여왕 개인도 대단히 명민하고 능란한 정치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에 의해 지적된 점은 그녀의 시대가 문제가 없는 '황금시대'는 결코 아니었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그녀는 분명 임기응변에 강하고, 가지고 있는 자원을 최대한 끌어내서 당면한 문제들을 극복해나가는 능력은 강했지만, 이를 위해서 장기적인 안정성을 너무 많이 희생시켰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특히 그녀의 보수성은 임기응변적 해결을 넘어서 근본적이고 시스템적인 접근을 크게 방해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후 세대에게 큰 짐을 던져준 셈이 되었다. 그런면에서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수정주의적 연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Chrisopher Haigh 선생의 평 "멀리 떨어져서 보면 뛰어난 자질이 많아보이는데 가까이서 보면 결점 투성이인 군주"는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또한 그녀의 치세를 '황금시대'로 만들기 위해, 그녀 못지 않게 능력이 있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앞뒤의 다른 군주들이 그동안 지나치게 폄하되어왔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엘리자베스가 명군이냐 암군이냐'라고 묻는다면 필자는 할 말이 없다. Hutton 선생의 말대로 튜더 시대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현재 엘리자베스에 대한 합의된 평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필자가 말하고자 싶은 바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 이분법적 평가는 이제 극복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엘리자베스의 치세는 당시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군주의 역할에 대한 시각 또한 얼마나 다양해질수 있는가를 대단히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Barry Coward and Peter Gaunt, The Stuart Age England 1603-1714 (London, 2017).
Ronald Hutton,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London, 2010).
Susan Doran and Thomas Freeman (eds), The Myth of Elizabeth (basingstoke, 2003).
Christopher Haigh, Elizabeth I (Harlow, 1999).
John Guy (ed.), The Reign of Elizabeth I (Cambridge, 1995).

역사를 공부할때 잊지 말아야 할 점 De historia

"역사를 합당하게 다룬다는 것은, 우리와 과거의 대상 사이에 놓여있는 세월의 간극을 인정하는 것을 요구한다. 우리에게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들이 과거의 그들에게도 똑같이 의미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뒤를 돌아보듯 역사를 보는 것은 또다른 지적 위험을 내포한다. 같은 소설을 두번 읽는 독자나 같은 영화를 두번 보는 관객처럼, 우리는 당연히 알아야 할 것 이상을 알고 있다. 따라서, 과거의 '다름을 인정하는 훈련 못지 않게, 우리는 학문적으로 우리가 마치 현재 알고 있는 것보다 덜 알고 있는 것처럼 과거를 들여다보는 지적 훈련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역사학은 본질적으로 회고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의 시점에서 시작하여, 상상된 과거로 돌아간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현재에서 과거를 보며 쓰여지지만, 삶은 오직 앞으로 움직일 뿐이다.우리는 항상 현재로부터 전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움직인다.

만일 역사적 연구를 통해 과거 사람들의 삶의 경험을 복원하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급된 지식을 버려야 한다. 그 지식들 덕분에 우리는 과거인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절대 알 수 없었을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과거를 들여다보고 있는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다. 그들의 시대에서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던 그들은 그것을 알수 없었다.

즉, 과거 사람들을 그들이 남겨놓은 증거를 통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억지로라도 무지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미래의 결과에 대해 모른다고 가정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지만 우리는 과거인들을 그들의 역사적 배경 안에서 사실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 과거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존중해야지만 우리는 우리가 연구하는 대상들의 인간적인 면모들을 엿볼 수 있다."



종교사학자인 Paula Frederiksen 선생의 저서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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