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자 비전공자 관련해서 짧게 몇마디.. 일상잡담

저 역시 인문학부와 사학과에 대한 자부심이 쩌는 사람이라 할 말이 없는 바도 아닙니다만..

1. 미국에서 한달째 놀고 먹다보니 만사가 귀찮다 -_-;

2. 도대체 둘이 왜 싸워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우선 '전공자'와 '비전공자'는 대단히 다양한 프레임의 사람들로 구성되어있으며, 따라서 그걸 인격화하여 대결구도를 형성할수는 없다고 봅니다.

둘째로 전공자와 비전공자는 상호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인 관계죠. 그리고 둘이 다루는 영역이나 관심사는 매우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싸우지 말고 서로 존중하면 됩니다. 끝.


This is Houston 일상잡담

요즘은 집 근처에 인터넷 되는 곳이 있어서 그래도 가끔씩 들여다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ㅎㅎ

12월 27일에 미국에 도착해서 미시시피 주 옥스퍼드에서 며칠을 보낸 뒤에
텍사스 주 휴스턴에 도착해서 지내고 있습니다,

미국 남부는 한국에서 일부러 여행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지만
저는 아무래도 남부하고 운명의 관계인 모양입니다 ㅋㅋ


간만에 인터넷질.. 일상잡담

이번주에 새로운 장소로 이동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이 안되는군요.

현재 집앞 스타벅스에 나와서 며칠만에 인터넷 하는 중입니다 ㅎㅎ

늦게나마 신년인사 드립니다.

Happy New Year!!


사실 또 나와있습니다. 일상잡담

넵.. 그간 바빠서 제대로 글을 쓰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해외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지난 여름처럼 방랑벽이 도져서 그런건 아니고
집안 일 때문입니다.

아무튼 저는 지금 이틀 전부터 미국에 와있습니다.
지금은 예전에 살았던 동네에 있는데 곧 다시 이동해야 할 듯..

인터넷 환경도 부실하고 책도 못 가져왔고..
고로 부득이하게 스코틀랜드-잉글랜드 투쟁사 연재는
한달 정도 쉬어야 할 듯 합니다.. 죄송

스코틀랜드-잉글랜드 투쟁사 (22)-플로든의 들판 History-근동, 서양사

결전

9월 8일-9일 이틀동안 잉글랜드군은 상당히 먼 거리를 행군하였다. 목표지점은 플로든 에지에 자리잡고 있는 스코틀랜드군의 측후방이었다. 축축한 날씨에 빈속으로 먼 길을 걸어야 하는 병사들은 괴로웠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튜더 왕가의 깃발을 휘날리며 행군하는 2만 6천여 군사의 모습은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9월 9일 정오, 스코틀랜드군은 여전히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잉글랜드군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후가 조금 지나자 마침내 정찰병들이 잉글랜드군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제임스 4세는 말을 가져오게 하여 직접 적군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이제 잉글랜드군의 의도는 분명해졌다. 그들은 스코틀랜드군의 측후방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잉글랜드군과 결전을 택하려면, 현재 위치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팔이 길게 울리고 스코틀랜드군 진영이 부산스러워졌다. 스코틀랜드군은 일제히 뒤로 돌아서 북쪽으로 행군하여 브랙스턴 에지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는 전진해오는 잉글랜드군을 정면으로 맞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도 높은 지역이었고 따라서 지형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부대의 방향을 완전히 뒤로 돌리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특히 상당한 수의 대포를 옮기는 것까지 포함된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도 스코틀랜드군은 너무 늦지 않게 이 기동을 해낼 수는 있었다. 스코틀랜드군은 여전히 자신에 넘쳤다. 이곳의 지형도 잉글랜드군이 공격하려면 스코틀랜드군의 포격을 뚫고 올라와 창날의 벽과 마주해야 하는 지형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언덕 아래는 통행이 어려운 습지였다.

가장 먼저 전장에 도착한 잉글랜드군은 서리 백작의 아들인 토머스 하워드 제독이 이끄는 전위부대였다. 하워드는 눈앞에 보이는 스코틀랜드군의 모습에 낙담하였다. 더욱이 본대와 멀리 떨어진 상황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선제공격이라도 한다면 막대한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그는 본대의 부친에게 전령을 급파하였다.

급보를 받은 서리 백작도 단번에 상황을 파악하였다. 그의 본대와 아들의 전위부대 사이의 거리는 1마일이 넘게 떨어져 있었다. 그는 병사들을 재촉하여 서둘러 행군하였다.

한편 제임스 4세의 포병대장은 국왕에게 나아가 공격명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저들이 들판에 다 모일때까지 기다려라."

물론 이것은 적이 진을 칠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 송양지인기사도의 표현이 아니라, 적군이 최대한 밀집했을 때 포격을 개시해야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리 백작의 본대가 도착해서 잉글랜드군이 완전히 전투대형을 갖춘 것은 오후 4시경의 일이었다. 전체적인 상황만 보면 잉글랜드군이 후방기동을 시작하기 전의 상황이 재현된 듯 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여전히 높은 지대에서 잉글랜드군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수적으로 열세한 잉글랜드군은 평지에 있었다. 그렇다면 잉글랜드군은 쓸데없이 시간과 체력만 낭비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스코틀랜드군의 진용은 겉보기에는 견고해 보였으나, 실제로는 잉글랜드군의 기동 소식을 듣고 급히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새로 배치된 지형에 대한 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따라서 플로든 에지에 펼쳤던 견고한 방어진에 댈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 잉글랜드군이 자리잡은 지형에 대한 파악은 더더욱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양군이 배치를 끝냈고, 마침내 양군의 대포가 불을 뿜으면서 플로든의 결전은 막을 올렸다.



플로든의 들판에서

전투는 포격전으로 시작되었다. 약 6백 야드가 떨어진 상태에서 양군은 서로 포격을 주고받았다. 앞서 제임스 4세는 잉글랜드군이 다 모이지 않았을 때 먼저 포격을 시작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 결정으로 그는 종종 무모하다는 비판을 받지만, 이것은 제임스 4세 입장에서는 상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당시의 전술교리상, 적군이 최대한 집중되었을때가 포격이 가장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때였다. 그리고 포병전력과 지형면에서 스코틀랜드군은 우위에 있었다. 제임스 4세는 이를 감안해서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해서 그 결과까지 합리적으로 나오지는 않는 것이 전쟁이다. 두 가지 사실이 제임스 4세의 기대를 빗나갔다. 우선 잉글랜드군의 기동으로 인해 스코틀랜드군은 위치를 바꾸어야 했고, 그 때문에 지형에 대한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스코틀랜드군의 화력 우위가 사실 부메랑이 될 수도 있었다는 점이었다.

당시의 화포는 현재와 같이 폭발하는 탄을 쏘는 것이 아니다. 대포에서 발사된 육중한 구형탄이 적군의 대형에 떨어지고 되튀면서 적군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당시의 포격이었다. 그런데 잉글랜드군이 배치된 곳은 습지였다. 처음에는 기동이 불편한 습지에 배치된 것이 잉글랜드군에게 불리한 요소인 줄 알았는데, 포격전이 시작되보니 그 반대였다. 스코틀랜드군이 발사한 포탄들은 죄다 이 습지에 푹푹 처박혀버렸다. 포탄이 다시 튀어오르지를 않으니 잉글랜드군에게 입힐 피해도 크게 감소되었다.

그리고 제임스 4세가 심혈을 기울여 충당한 스코틀랜드군의 거대한 화포들도 기대를 저버렸다. 이러한 중포들은 위력도 막강하지만 대신 장전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잘해야 1분에 한 발 정도로, 사실은 야전보다 공성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되어있었다. 반면에 잉글랜드군의 경포는 그보다 2-3배는 빠르게 포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약점을 상쇄시킬 수 있는 것이 스코틀랜드 중포의 막강한 위력이었는데, 그나마 그 위력마저도 습지 때문에 크게 감소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잉글랜드군의 경포는 민첩하게 스코틀랜드군의 대열을 난타하였다.

결국 포격전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코틀랜드 대포와 포병들은 잉글랜드의 포격에 하나 둘 나가떨어졌다. 효과적으로 스코틀랜드군의 위력적인 대포를 침묵시킨 잉글랜드 포병들은 스코틀랜드 보병부대쪽으로 포구를 돌렸다.

스코틀랜드 징집병들은 이미 귀를 찢을듯한 포성과 포탄이 날아오는 무시무시한 모습에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리고 포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훈련받은 바 없었다. 그들 대열에 포격이 집중되고, 팔다리와 몸통이 산산조각나는 지옥 같은 광경이 펼쳐지자 이들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잉글랜드군은 급할 것이 없었다. 스코틀랜드군의 대포를 제거한 이상, 굳이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며 언덕 위로 쳐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 상황이 완전히 반전된 것이었다. 반면에 스코틀랜드군은 급히 결정을 내려야 했다. 현위치에 머물러 있으면 모두 잉글랜드 대포의 밥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런 상황에 처했을때 당시의 전술교리가 내놓는 답은 하나 뿐이었다.

제임스 4세는 공격명령을 내렸다. 하이랜더들로 구성된 스코틀랜드 좌익이 먼저 전진하였다. 곧이어 다른 4개 부대가 모두 공격에 합류하였다. 스코틀랜드군은 파이크 밀집대형을 구성하며 언덕 아래로 내려왔다. 다만 일제히 전진한 것은 아니고 사선대형을 취하며 전진하였다. 스위스 보병의 기동 방식이었다.

이러한 유럽대륙식 보병전술은 잉글랜드군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서리 백작의 군대에 종군하는 노병들도 그들이 겪었던 전투 방식은 모든 대형이 일제히 충돌하는 장미전쟁 당시의 전술이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군의 기동에 이들은 적지 않게 당황하였다.

사선대형은 기대했던 효과를 발휘했다. 홈 경과 헌틀리 백작이 지휘하는 스코틀랜드 좌익이 제일 먼저 에드워드 하워드의 부대와 격돌하였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 부대는 전체 잉글랜드군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었다. 부딪치기도 전에 이미 흔들리고 있던 하워드의 부대는 스코틀랜드군의 돌격을 오래 버텨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스코틀랜드 좌익의 지휘관들은 스위스 방식의 유용성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기사의 명예를 끝까지 지킨 잉글랜드인들도 있었다. 브라이언 턴스톨 경은 무릎을 꿇고 최후의 기도를 드린 뒤에 스코틀랜드군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말콤 맥킨 경을 비롯한 다수의 적군을 쓰러뜨린 후에 스코틀랜드군의 창에 꿰뚫려 최후를 맞았다. 그와 함께 상당수의 잉글랜드 기사들이 쓰러졌다.

잉글랜드 우익의 지휘관인 에드먼드 하워드는 그의 기수와 가신들과 함께 버티고 서서 싸웠다. 그의 가신들 대부분이 결국 쓰러졌지만 하워드는 용감하게 싸웠다. 스코틀랜드군은 몸값 때문에 그를 죽이기보다는 사로잡으려 했다. 그때문에 그는 세번이나 땅에 넘어졌지만 그때마다 일어나서 싸웠다.

에드먼드 하워드의 저항


우익이 붕괴하자 그 틈을 메우기 위해 기병대가 이동하여 빈자리를 채웠다. 이제는 스코틀랜드 보병과 잉글랜드 기병간의 싸움이었다. 스코틀랜드 보병의 파이크와 날 넓은 칼에 의해 잉글랜드 기병 160명 가량이 말에서 떨어졌지만, 역시 상당한 수의 스코틀랜드 보병도 잉글랜드 기병의 랜스에 꿰뚫렸다. 격렬한 백병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존 헤런이 혈로를 뚫고 들어가 절망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던 하워드를 구출하였다.

잠시 후 스코틀랜드 좌익과 잉글랜드 우익은 퇴각나팔을 불고 병사들을 물렸다. 양군은 각기 조금씩 물러난 상태로 대치하였다. 이 지역의 싸움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혈투

한편 이제 스코틀랜드 사선진의 중앙을 구성한 에롤, 크로포드, 몬트로스 백작의 부대가 잉글랜드 중앙에 위치한 토머스 하워드 제독의 부대와 충돌할 차례였다. 그들 역시 파이크 밀집대형을 구축한 상태로 잉글랜드군의 포격을 뚫고 전진하였다. 세 백작의 부대는 역시 스위스 전술교리에 따라 이동하였다. 그러나 언덕을 내려오자 습지와 진흙탕이 길을 가로막았다. 많은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미끄러지지 않게 신발을 벗어야만 했다.

이 시점은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장궁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는 때이기도 했다. 시위를 당기고 한참 노리고 있던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일제히 화살을 발사했다. 1298년 폴커크 전투 이래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돌격해오는 스코틀랜드 보병대를 셀 수 없이 격파하였다.

그러나 이날 플로든에서 장궁은 결정적인 무기가 되지 못했다. 바람이 강하고 습한 날씨가 장궁의 위력을 크게 감소시킨 탓도 있었고, 제임스 4세의 착실한 준비 탓도 있었다. 예전에 언급했듯이 제임스 4세는 잉글랜드 장궁에 대응하는 방편으로 스코틀랜드군을 좋은 갑옷으로 잘 무장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군의 상당수는 판금갑옷으로 중무장하였고, 선두 대열은 육중한 목제 파비스를 들고 있었다. 이때문에 잉글랜드의 장궁은 스코틀랜드군의 대열에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스코틀랜드군의 전진을 가로막은 가장 큰 장애물은 장궁이 아니라 진흙탕이었다. 파이크 밀집대형의 생명은 응집력 있는 대형이었다. 그러나 힘겹게 진흙탕을 뚫고 나가는 동안 대열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잉글랜드군의 포탄과, 물리적 피해는 주지 못해도 날아오는 화살 역시 혼란에 일조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군이 비틀거리며 나아오자 잉글랜드 궁수들은 뒤로 물러가고, 잉글랜드 보병들이 미늘창을 휘두르며 뛰어나왔다. 전투는 이제 파이크와 미늘창의 대결이 되었다. 스위스식 파이크는 분명 위력적인 무기였고, 스코틀랜드군이 채택한 신형전술에 어울리는 무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밀집대형이 유지되는 한에서였다. 지금처럼 대열이 흐트러진 상황에서 개인 대 개인의 싸움이 벌어지면 단연 미늘창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은 이어진 난투전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스코틀랜드군의 긴 파이크는 개인전에서 취약했을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찌르는 무기였다. 잉글랜드군의 미늘창은 훨씬 짧아서 다루기 쉬웠고, 동시에 찌르고 벨 수 있었다. 거기다 스코틀랜드군이 좌익을 가장 강화한 사선대형을 취한 탓에 중앙에서는 잉글랜드군이 수적으로도 우세했다.

제임스 4세가 직접 지휘하는 스코틀랜드 우익도 전진하여 서리 백작의 잉글랜드 좌익과 충돌했지만 양상은 비슷했다.

별 도리 없이 제임스 4세는 좌익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좌익 지휘관인 홈 경이 지원을 거부한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싸울 거 다 싸웠고, 앞의 적군도 패퇴시켰으니까 그쪽 일은 그쪽이 알아서 하셔야죠."

한마디로 이런 식의 답변을 보냈다고 한다. 물론 전투 후에 전해진 이야기라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아직 잉글랜드 기병이 앞에 남아있었다지만 1만명 가까운 병력으로 고작 2천 여 명 정도의 잉글랜드 기병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전혀 지원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는지는 의문이다. 이후 이쪽 부대는 전투가 완전히 끝날때까지 싸움에 더이상 끼어들지 않았고, 홈 경이 잉글랜드쪽과 사전에 모의가 있었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이 소문은 3년 뒤에 홈 경이 반역죄로 처형될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_-;

지원군은 오지 않고, 싸움은 점점 더 스코틀랜드 쪽에 불리해졌다. 스코틀랜드군은 이제 아무 쓸모가 없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파이크를 던져버리고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미늘창 하나와 칼 하나의 싸움이라면 해볼만 했어도, 잉글랜드 창병대가 대열을 이루고 미늘창을 휘두르면 짧은 칼로는 더욱 불리할 뿐이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군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덤벼들었고 전투는 처절한 근접전의 양상으로 계속되었다.

플로든 전투

전세가 잉글랜드쪽에 유리하게 바뀌어도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았던 것은 양군의 갑옷 착용 비율이 높았고, 특히 스코틀랜드 젠트리들이 질 좋은 갑옷으로 중무장한 탓도 있었다. 질 좋은 판금갑옷은 미늘창으로 서너번 찌르고 베어도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양군의 중무장병들은 서로 뒤엉켜서 한쪽이 완전히 탈진해 쓰러질때까지 난투를 벌였다. 끝내 힘이 다해 쓰러진 쪽에게는 갑옷의 이음새와 투구의 눈구멍을 통해 단검이 파고들었다.

세 백작의 부대 우측에서 싸우던 제임스 4세의 부대는 조금 상황이 나았다. 세 백작이 지휘하던 중앙보다 진흙탕에 조금 덜 고생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아직 서리 백작의 부대를 밀어붙일 체력이 남아있었고, 스코틀랜드군의 맹렬한 전진에 결국 서리 백작의 부대가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그 덕분에 스코틀랜드군은 좁은 종대를 이루어 잉글랜드군 안에 갇혀버린 셈이 되었다. 어쩌면 잉글랜드군 일부가 뒤로 물러난 것도 스코틀랜드군을 아군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을 가능성도 높다. 이제 스코틀랜드군은 삼면에서 공격받기 시작하였다. 스코틀랜드군이 더이상 전진하지 못하자 잉글랜드군은 삼면에서 미늘창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이제 전투는 가장 처절하고 야만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양군 모두 포로를 잡을 생각도 하지 않았고, 따라서 귀족 기사들도 수없이 쓰러졌다. 스코틀랜드의 귀족 맥스웰 경과 해리스 경이 난전중에 제일 먼저 살해되었고, 잉글랜드의 귀족 존 가워 경과 리처드 하버틀 경이 전사하였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보병의 측면에 서서 화살을 날렸다. 아까는 별 효과를 보지 못했으나, 지근거리에서 발사할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기사도는 전장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병사들은 기계적으로 살육을 수행하였다. 스코틀랜드 병사들 중 가볍게 무장한 이들은 미늘창에 무참히 베여 쓰러졌다. 판금갑옷으로 단단하게 무장한 중무장병에게는 잉글랜드군 세 명씩 달려들었다. 한 명이 미늘창으로 스코틀랜드 중무장병의 무기를 막아내는 동안 다른 한 명은 적병을 붙잡아 꼼짝 못하게 하거나 바닥에 넘어뜨렸다. 그리고 또다른 한 명이 단검이나 기타 찌르는 무기로 무력화된 적병의 갑옷의 취약부위에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제임스 4세는 전투의 한복판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는 창을 휘둘러 몸소 다섯 명의 적병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곧 그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승패는 거의 결정되었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남아있던 단 하나의 길을 택했다. 스코틀랜드의 국왕은 가신들을 불러모은 후에 서리 백작의 깃발을 목표로 맹렬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적장을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승패를 뒤집을 실낱같은 희망이 있을 것이고, 실패한다면 명예롭게 죽을 작정이었다.

플로든 전투-제임스 4세의 최후

그러나 서리 백작은 호위대에 의해 철통같이 둘러싸여 있었다. 결국 최후의 돌격에서 제임스 4세의 가신들은 차례로 쓰러져나가고 왕 혼자만 남았다. 국왕은 서리 백작과 창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갔으나 거기까지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한대가 제임스 4세의 아래턱을 꿰뚫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잉글랜드 병사가 휘두른 미늘창이 칼을 쥔 그의 손목을 거의 절단해 놓았다. 그리고 또다른 미늘창병이 그의 목을 향해 마지막 공격을 가했다.

제임스 4세의 죽음은 그날 쓰러진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오후 7시까지 스코틀랜드군의 마지막 저항도 모두 잠잠해졌다. 어둠이 내리는 플로든의 들판에는 수많은 시체와 부상자들이 뒤엉켜서 지옥같은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들판은 피로 물들었고, 습지를 흐르는 시냇물 역시 문자 그대로 붉게 변했다.

처절한 싸움을 온종일 치러낸 잉글랜드군은 여전히 포로를 잡을 기분이 아니었다. 간간히 잉글랜드 기사들이 몸값을 받기 위해 병사들을 제지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많은 경우 스코틀랜드 부상자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스코틀랜드군의 잔존병력은 콜드스트림을 건너 퇴각하였다. 철수길에도 포로를 노리는 잉글랜드군이 종종 습격하여 이들을 괴롭혔지만 잉글랜드군의 조직적인 추격은 없었다. 

기록은 12,000 여 명에 달하는 스코틀랜드군이 이날 쓰러졌다고 전한다. 과장이 좀 들어갔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패배였던 것은 부정할 길이 없다. 더욱이 국왕과 고위귀족 대부분이 이날 플로든의 들판에 쓰러졌다. 스코틀랜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참사였다. 잉글랜드군은 1,500 여 명 가량의 피해를 입었다.

생각해보면, 제임스 4세는 이 전역을 최선을 다해 준비하였고 실제로도 초반에는 승승장구하였다. 플로든 전투 직전까지도, 꼭 싸워야만 했는가에 대한 논의를 제외한다면(그것도 당위성이 전혀 없지는 않았고), 그의 판단력은 크게 나무랄 데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전술운용은 상당히 교과서적이었다. 따라서 기민한 대응으로 상당히 불리했던 조건을 역전시킨 서리 백작의 전술적 임기응변이 더욱 빛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플로든에서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뒤에도 잉글랜드군에게 위험한 상황이 연출될뻔 하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플로든의 승리는 잉글랜드로서도 결코 쉽게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잉글랜드군은 전장에서 제임스 4세의 시신을 찾아냈다. 화살에 꿰뚫리고 미늘창에 베인 처참한 모습이었다. 잉글랜드군은 그의 시신을 방부처리하고 관에 담아 런던으로 보냈다. 섭정여왕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던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는 제임스 4세의 피투성이 서코트를 프랑스의 헨리 8세에게로 보냈다.

헨리 8세의 명령에 따라 9월 25일 투르네의 대성당에서는 승리를 축하하는 테 데움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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