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어떤 외교전 History-근동, 서양사

들어가며

성 토머스 베켓은 주군인 헨리 2세와의 애증이 얽힌 관계와 그로 인한 드라마틱한 최후로 인해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서 그가 캔터베리 대주교의 자리에 오르기 이전까지 헨리 2세의 대신으로서 활약했던 부분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그는 외교관이자 행정관, 법관으로서 그야말로 다방면에서 헨리 2세의 손발이 되어 활약했다.

그중 1158년 그가 헨리 2세의 명을 받고 프랑스에서 수행한 외교업무는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중세 당시의 외교와 정치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1158년의 돈쓰기 외교

1150년대 내내 헨리 2세는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에 걸친 방대한 앙주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동시에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불편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행보에 맞춰서 베켓도 분주하게 도버 해협을 오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베켓에게 헨리 2세의 명령이 하달되었는데, 내용인즉 루이 7세의 막 태어난 딸 마르그리트와 헨리 2세의 장남인 헨리(훗날의 청년왕 헨리)와의 약혼을 성사시키라는 것이었다.

모든 세부 내용은 베켓에게 일임하면서, 헨리 2세는 딱 한가지 지령만 내렸다.

헨리 2세: 돈 팍팍 써라

즉, 비용을 아끼지 말고 그의 앙주 제국이 얼마나 자원이 풍부한지를 프랑스의 왕과 귀족과 백성들에게 아낌없이 과시하라는 것이었다. 이게 뭔 돈X랄인가 싶을수도 있겠지만. 양국의 미묘한 신경전을 생각하면 기선제압의 좋은 방법이었다.

아무튼 주군으로부터 아낌없이 돈을 뿌리며 가라는 지령을 받은 베켓은 이를 매우 충실하게 이행한다. 우선 그는 길가에서 마주치는 구경꾼들을 압도할 수 있을만큼 위풍당당한 사신 행렬을 꾸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를 필두로 한 잉글랜드 사신단은 말탄 사람만 200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기사들과 서기관들, 시종들, 스콰이어들 등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각각의 지위에 어울리되, 무지하게 비싼 옷들로 차려입었다. 그는 사냥개들과 매와 기타 멋지게 생긴 새들까지도 이 행렬에 참여시켰다. 한마디로 길에서 구경하는 프랑스인들에게 현대 테마파크의 퍼레이드 비슷한 호화 엔터테인먼트를 선보인 셈이다.

그의 아이디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 임무를 위해서 특별히 돋보이는 옷들을 수십벌 준비했다. 그리고 파리까지 가는동안 이를 차례차례 바꿔입었다. 그 횟수는 무려 24번에 달했다. 한번 갈아입은 옷들은 죄다 길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물로 뿌렸다. 당연히 그 가난한 사람들이 평생 만져보기도 힘든 비싼 옷들이었다. 이 행렬은 일반 옷뿐만이 아니라 겨울용 털옷이라든지, 고급 비단이라든지, 심지어 태피스트리와 침대 커튼 같은것까지 마구 적선하면서 지나갔다. 말 그대로 베켓이 대표하는 잉글랜드 왕이 얼마나 관대하고 자비심이 넘치는 왕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기 위한 행사였다.

이런 대규모 사신단을 유지하려면 당연히 짐수레도 엄청나게 뒤따라야 했다. 이 수레들에도 온갖 화려한 집기와 생활용품들이 실려서 구경꾼들의 얼을 빼놓았다. 그 중 몇 대의 수레에는 최고급 맥주가 잔뜩 실려있었는데, 행렬이 파리까지 가면서 통과하는 마을마다 몰려나온 구경꾼들에게 이 맥주를 공짜로 아낌없이 배포했다.


잉글랜드 사신단이 이렇게 스케일 크게 돈을 뿌리며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루이 7세는 긴장했다. 회담이 시작되기도 전에 분위기가 완전히 잉글랜드 쪽으로 넘어갈까 염려한 그는 즉시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포고령을 내렸다.

루이 7세: 지금부터 왕명으로 잉글랜드 사신들에게 그 어떠한 식료품도 파는 행위를 금지한다.
상인들: 네??? 어째서...???
루이 7세: 내가 다 사줄거거든. 나는 손님이 자기 돈 쓰는 꼴 못보는 관대한 왕이라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베켓이 아니었다.

토머스 베켓: 훗... 루이, 제법이군. 그러나 그 정도 수는 이미 예상했다

그리고 부하들을 불러서 이렇게 지시했다.

베켓: 너희들은 지금부터 순도 100퍼센트 네이티브 프랑스인으로 위장을 한 다음에 파리 인근의 시장이란 시장은 다 돌면서 필요한 물품들을 사오너라

파리 입성 이후 베켓의 돈뿌리기 전략은 절정에 달했는데, 프랑스 궁정의 최고위 귀족에서부터 가장 비천한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뭔가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베켓은 자기가 다녔던 학교까지 찾아가서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또 돈을 뿌리고 왔다.


일단 잉글랜드의 외교전략은 소기의 효과를 달성했다. 협상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심리적 효과는 그 이상이었다. 베켓의 위풍당당한 행렬을 구경하고, 선물도 받고 술도 얻어먹은 주민들은 그 행렬에 다가가서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어떤 높으신 양반이기에 행차가 이리 대단한거요?"


질문을 받은 수행원은 "잉글랜드 왕의 대신으로, 당신네 왕을 만나서 회담하러 가는 길이오" 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주민들은 서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일개 대신의 행차가 이 정도라면, 그 주군이라는 왕은 정말 얼마나 대단한 양반이란 말인가?"


물론 이 반응이 정확히 헨리 2세의 노림수였다.




나오며

물론 현대인이 보기엔 이런 행동이 단순히 유치한 돈자랑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외교와 정치의 매커니즘은 결코 지금과 같지 않다는 점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 외교전에서는 기선제압을 위한 헨리 2세의 노림수도 있었지만, 사실은 중세의 모든 왕과 귀족들이 국내외를 돌아다닐때 원래 하던 일을 대폭 업그레이드된 스케일로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세의 정치구조에서 왕과 영주들은 끊임없이 자기 왕국과 영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일을 처리해야 했는데, 그때 이런식으로 돈을 쓰는 것은 그들에게 당연하게 기대되던 의무였다. 이동중 왕이 밤을 보내기 위해, 마을이나 성이나 수도원 등지에 들어가면 반드시 해당 지역의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자신이 관대한 왕임을 과시하는 장치임과 동시에 당시 나름대로 부가 재분배되던 매커니즘이기도 했다.










그리고 굳이 중요하진 않은후일담

얼마 뒤에 헨리 2세가 직접 파리를 방문해서 루이 7세와 회담했다. 이 방문의 주 목적은 지난번에 베켓이 논의해서 성사시킨 혼담을 최종적으로 비준하기 위함이었다. 루이 7세는 지난번에 베켓에게 당한 것을 제대로 되갚아주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루이 7세: 지난번엔 어설퍼서 실패했다만, 이번에야말로 나의 관대함을 제대로 보여주지

그리고는 그동안 공들여 준비해온 호화찬란한 각종 이벤트를 헨리 2세에게 선보이려 하였다. 그러나 헨리 2세의 반응은..

헨리 2세: 허허 뭐 이런걸 다.. 제가 원래 좀 취향이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이런 사치는 좀 부담스럽군요

루이 7세: 아니 이 새X가?





참고
John Guy, Thomas Becket, Warrior, Priest, Rebel, Victim: A 900-Year-Old Story Retold (London, 2012).


영국 Exeter, 지난 12월 풍경 ㄴ유럽생존기 2014~

올해도 변함없이 연말연시 북적북적한 시즌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쪽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좀더 길게 치기 때문에, 아직도 분위기가 조금은 남아있는 편입니다. 지난 학기가 유독 혼을 빼놓을만큼 바뻐서 근황 업데이트가 전혀 없었는데, 12월 한달 동안 찍은 동네 연말 모습 사진이나 몇장만 올려볼까 합니다.


올해도 변함없이 크리스마스 마켓이 섰습니다. 

12월 내내 여기 들락거리면서 참 잘 먹었는데 이제 닫아서 아쉽네요.



아무래도 밤에 와야 분위기가 좀더 살긴 하죠

동네 곳곳에 트리가 들어섰었는데, 사진 올리는게 늦어서 이젠 철거할 시점이네요


시내 쇼핑가도 화려하게 장식을 달았습니다

어린이 합창단이 캐롤도 부르고

구세군 자선냄비도 나왔습니다. 거리에 음악이 많아서 밖에 나갈때 귀가 즐거운 한달이었습니다.

펠리페 2세의 흔한 하루 History-근동, 서양사


들어가며


역사상의 인물들에 대해 한줄평가를 지양하고, 복합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현대 역사학의 당연한 추세이기도 하고, 필자도 여러번 글을 통해서 강조해온 바이다. 특히 왕들을 명군, 암군, 폭군 식으로 작위적으로 딱지를 붙이는 식의 평가는 전통시대 역사서술에서나 통하는 경우가 많다. 재위기간이 긴 왕일수록, 평가의 복잡성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저 유명한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도 한줄평가의 어려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군주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암군이냐, 유능한 군주냐를 놓고 모 위키 등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높이를 것을 볼 수 있는데, 40년이 넘게 재위한 왕을 그렇게 한마디로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다른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그렇듯이, 펠리페는 업적도 많고 실책도 많고,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복합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체로 유능하고 똑똑한 군주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Maltby, 2009) 다만 유능함도 어떤 분야냐에 따라 크게 다른 것이고, 어떤 상황과 환경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다. 역사적 인물을 한줄평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사실 펠리페 2세에 대해 총체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회가 되면 다음에 본격적으로 다루어보고 싶은 주제다. 다만, 펠리페 2세의 치세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간에, 딱 하나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의 지나칠 정도로 근면성실한 집무태도다.


이 글은 펠리페 2세의 하루를 따라가면서, 근대 초 유럽 군주로서 그가 과연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간접적으로 체험해보고자 한다.










왕의 하루


펠리페는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통치하던 아버지 카를로스와는 다른 종류의 왕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있다. Maltby 선생은 카를로스가 전사 군주였다면, 펠리페는 행정가형 관료 군주였다고 설명한다. 사실 아버지가 벌려놓은 일도 매우 많아서 그는 관리형 군주가 될수밖에 없었다. 이는 당연히 광대한 제국 전역에서 날아드는 보고와 관련 업무들을 처리하는 일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의 별명인 '서류 왕'은 여기서 탄생했다.


펠리페는 상당히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을 살았다. 일반적으로 그는 일찍 일어나는 유형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의 기상시간은 일반적으로 아침 8시였으며, 그 이전에는 왠만해서는 일어나지 않았다.(물론 학교 안 가는 날 필자 기준으로는 매우 일찍 일어나는 거지만 그건 넘어가도록 하자) 그는 이 기상 시간을 상당히 열심히 사수했는데, "아침 8시까지는 시끄러운 소리 내지 마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수염과 머리를 정돈하고 옷을 입은 다음 그날의 첫 업무를 시작한다. 전날 밤부터 도착해서 비서관들이 준비해놓은 서류들을 읽고 결재하는게 그의 첫 일과였다. 워낙 큰 제국이니 한시도 서류가 도착하지 않는 때는 없었다.


그 다음 일과는 가톨릭 국가의 국왕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인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었다. 당대 사람들의 표현에 따르면 이 시간은 펠리페가 "왕의 일을 하느님께 설명하는 시간"이었다. 그게 끝나면 오전 11시까지 대신들을 접견하거나 남은 서류를 결재했다.


다음은 점심시간이다. 왕은 하루 두끼를 먹었는데, 대부분 혼자 먹었다. 밥먹고 나면 스페인 사람답게 시에스타(낮잠)를 즐겼다. 물론 그가 부려먹는 대신들은 이 시간에 못자고 일했다. 하지만 펠리페 입장에서 이 낮잠은 필수였을 것이다. 이 시간이 지나면 그의 진짜 하루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전 업무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왕이 일어나면 이제 본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온갖 서류가 홍수처럼 왕의 책상으로 몰려드는데, 대신들이 작성한 소견서들을 비롯해서 국정과 관련된 모든 문서들이 쏟아져들어왔다. 왕은 이것들을 모두 꼼꼼히 읽고 결정을 내린 뒤 그것을 작성해서 돌려보내야 했다. 왕의 오후 시간은 이렇게 모두 국정에 바쳐졌으며, 해가 져도 큰 변화 없이 계속되었다.


이 시점부터는 기계적인 일상이 깨지는 일도 종종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왕은 밤 9시까지 서류작업을 하다가 저녁을 먹었는데, 물론 업무가 많으면 상황이 달라졌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서류에 '더이상 볼 시간도 기력도 없다'며 결국 두 손을 들고 나온 밤도 있었다. 그날 일에 대해 펠리페는 참으로 인간적인 호소를 내뱉었다.




"지금 시간이 밤 열시가 넘었는데, 짐은 아직 저녁도 못 먹었단 말이오."




사실 최근 들어서 펠리페 시대의 문서들이 대량으로 연구되어 왕의 인간적인 면모가 새롭게 발견된 것이지만, 펠리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통해 자신의 고충을 숨김없이 털어놓곤 했다. 몇 가지만 들어보자.



 

"이미 자정이 넘었는데, 이 업무가 나를 아주 죽이고 있다오. 무슨 뜻이냐면 밤마다 기진맥진한다는 뜻이오."


"내가 뭔가 빼먹은게 있다면, 수면부족 탓이라고 생각해두시오."


"일이 너무 과중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오."


"지금 새벽 한 시인데, 나 빼고 모두 자고 있소"




하루는 기껏 열심히 일해서 드디어 끝났다 싶었더니 막 새로운 서류들이 또 무더기로 배달되기도 하였다.


왕은 비서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온종일 쉬지 않고 일했는데, 방금 또 수많은 서류가 도착했다. 이건 오늘밤 안에 도저히 못 끝내겠다. 도대체 이걸 써보내는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건지 모르겠다.  내가 돌이나 쇠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내 피곤한 몰골을 보면 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람이라는걸 다들 깨닫게 되겠지."


한번은 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오늘도 온종일 읽고 쓰면서 보냈단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이미 밤 10시가 넘었는데, 무척 피곤하고 배가 고프구나."



어찌되었건 이렇게 작업을 하다가 대체로 9시나 10시경에 비로소 저녁을 먹었다. 스트레스 탓인지 펠리페 2세는 상당히 많이 먹는 편이었다. 그러나 식단은 단조롭게 고기 위주였다. 점심과 저녁 모두, 대체로 구운 닭이나 튀긴 닭, 자고새, 혹은 사냥 고기 중 하나를 메인으로 고르고, 사슴고기나 쇠고기를 사이드로 먹었다(...-_-) 여기에 수프와 빵을 곁들였다. 샐러드와 과일도 냈으나 주방 기록에 따르면 거의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고기가 업무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가장 큰 힘이 아니었나 싶기도 한데, 바티칸에 열심히 졸라댄 결과 펠리페는 드디어 1585년에 사순시기에 고기를 먹어도 좋다는 허가를 교황으로부터 받아내기에 이른다. 그 뒤로 펠리페는 행복하게도 성 금요일만 빼고 매일 고기를 먹었다.



이렇게 저녁 식사가 끝나면, 다시 야근업무에 복귀했다. 공식적으로는 밤 11시가 본인이 정해놓은 하루 업무 종결 및 퇴근시간이었으나, 앞서 보았듯 심각한 일이 있으면 자정을 넘어서 새벽까지 서류를 붙들고 있어야 하는 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촛불에 의지하여 심야까지 매일 업무를 봤으니 시력이 나빠지는것도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가 남긴 수많은 문서의 필적은 세월이 갈수록 나빠진 시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도 사람이니 때때로 집무실의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서 기분전환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루는 날씨 좋은 날 왕실 가족들과 함께 소풍을 나간 일이 있었다. 경치좋은 강가에서 모처럼 즐거운 하루가 펼쳐졌는데, 정작 펠리페는 다들 잘 노는 동안 구석에 책상 펴놓고 서류결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_-)









나오며


펠리페의 이러한 업무 스타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릴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은 양면적이다. 나중에 기회가 있을때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지만, 펠리페의 이러한 통치는 어떤 면에서는 한계가 있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그의 긴 재위기간동안 상당히 초인적인 노력을 발휘하면서 살았다는것만은 분명하다.


펠리페 2세는 1598년, 상당히 오랜 재위 끝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개인적으로 유럽사를 공부하면서 최대 미스테리 중 하나는, 긴 재위기간에 걸친 과로와 일중독, 불규칙한 수면시간, 철저한 육식위주의 식생활이 특징이었던 이 양반이 70대까지 살았다는 점이다.







참고


Geoffrey Parker, Imprudent King: A New Life of Philip II (New Haven, 2014).

william S. Maltby, The Rise and Fall of the Spanish Empire (Basingstoke, 2009).


영국 내전의 기원 (15)-에필로그 및 참고문헌 History-근동, 서양사


후일담

찰스 1세가 떠난 뒤, 런던은 의회 강경파가 장악했다. 이들은 붕괴된 기존의 의회정치를 대신해서 나라의 절반 가량을 이끌어야 했다. 그리고 떠난 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담당하게 된 이들은 비로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 재정상태 맛 간거 진짜였구나(......)"그동안 왕이 뻥치는줄 알았지


결국 의회파는 내전에서 이기기 위해, 그들이 그동안 줄기차게 반대했던 찰스 1세의 행정과 재정정책을 거의 그대로 다 시행해야만 했다(...-_-;)

1642년에 런던을 떠난 찰스 1세는 1649년까지 다시 수도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런던을 통제하지 못했고, 덕분에 돈줄에서 많이 딸렸음에도 국왕의 세력은 상당해서 전쟁 초기는 국왕군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의회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든 스코틀랜드의 도움을 받으려 들었다. 스코틀랜드는 변함없이 '잉글랜드 교회를 스코틀랜드처럼'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왕당파가 떠난 상태에서도 이러한 스코틀랜드의 요구는 의회파 내에 상당한 분열을 초래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스코틀랜드의 가세가 전세 역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찰스 1세가 1649년에 런던에 돌아왔을때, 그는 재판을 받는 죄수의 몸이었다. 그러나 그의 처형은 아무것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으며, 잉글랜드의 정부와 정치, 종교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하기 위한 싸움은 그뒤로도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결론-연재를 마치며 

이렇게 해서 영국 내전의 기원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마침내 내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서 대략적인 결론을 내려볼 수 있다.

지난 몇십년간 학자들은 영국 내전이 헌정적일 갈등 탓인지, 사회경제적 갈등 탓인지, 종교적 갈등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여왔다. 그러나 현재의 중론은 이 모든 요소들이 다 존재한다는 것이며 어떤 요소가 가장 크게 작용했는지는 내전에 참여한 각 당사자마다 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종교'였음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당시의 종교는 동시에 헌정 체제 및 사회적 질서와 직결되는 것이었음을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다.

헌정적인 면에서 봤을 때 영국 내전은 결코 절대주의와 헌정주의(혹은 의회민주주의)의 충돌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찰스 1세가 특별히 루이 14세식의 절대왕정을 꿈꾸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내전기의 그 주변에 포진했던 왕당파들도 대부분 근본적으로 헌정주의자들이었다. 마찬가지로 배타적인 반가톨릭주의 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던 강경 의회파도 흔히 생각하는 민주투사와는 백만 광년쯤 떨어져있었다.

즉, 영국 내전은 낡은 엘리자베스 체제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게 된 시점에서, 영국의 새로운 체제와 프로테스탄트 국교회의 형태를 둘러싸고 상반된 비전들이 충돌한 싸움이었다. 양측은 모두 자신들이 영국의 법 전통에 내재되어 전해내려온 '고래의 헌정(ancient constitutuion)'과 고전적 공화주의가 말하는 균형정치의 이상을 대표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를 '가톨릭에 휘둘리는 이들과 비밀 가톨릭', 혹은 '뭐든 다 때려부수려는 퓨리턴 포퓰리즘'의 대표자들로 바라보며 두려워했고, 이 두려움이 전쟁의 근간에 깔려있었다.

내전의 책임에 있어서, 전통적인 역사서술은 찰스 1세에게 상당히 많은 책임을 지워왔다. 가장 대표적인 비판은 찰스 1세가 타협의 기술이 부족했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왕권의 원칙과 어긋나는 것이면 그 어떤 것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러한 측면도 있었다. 이후 찰스 1세가 지지자를 규합하는 과정을 보면, 그가 진작 더 전폭적인 타협을 통해서 더 일찍 중도파를 포섭했다면 초장에 내전을 방지할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후대인의 속 편한 소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찰스 1세는 그렇다치더라도, 의회 내 강경파의 비타협성 역시 찰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히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이 시기의 갈등상황을 결국 내전으로까지 키운 것은 왕 혼자서 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아무리 극단적인 종파주의 시대였음을 감안하더라도 심하다는 말을 나로 정도로, 같은 개신교도들까지도 '잠재적 가톨릭'으로 배척하던 일이 빈번했던 퓨리턴의 편협한 배타주의는 그동안 많이 간과되었으나 대단히 중요한 변수였다. 물론 당시 영국 사회에 널리 퍼져있었던 편집증적인 반가톨릭주의 히스테리 역시 당시의 갈등이 결국 전면전으로 발달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동시에 영국 내전이 결과적으로 영국 헌정주의의 발전에 미친 영향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찰스 1세와 맞섰던 의회파는 결코 민주주의자도, 반왕정주의자들도 아니었지만, 이들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왕정이라는 개념 자체의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물론 어디까지나 '결과적'으로다. 또한 영국 내전이 이후 서구의 시민혁명에 있어서 중요한 선례와 반면교사의 역할을 동시에 제공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동시에, 이 시기에 영국인들이 경험한 전례없는 참화와 혼란은 영국인들의 집단기억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이후 영국 정치사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이후로도 영국은 정치적 혼란기가 여러 차례 다가왔지만, 그때마다 절대다수가 공유하는 단 하나의 가치는 "또다시 그런 내전을 겪는 것만은 안된다"였다. 따라서 영국 내전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영국 정치와 영국인들의 정치적 마인드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후 민주주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이 거대한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의의는 의의대로 인정하되 그 시대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가치관과 그들이 내려야 했던 쉽지 않은 선택 역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과적인 의의와는 별개로, 이 시기는 단순히 민주 대 반민주, 진보 대 보수 등의 이분법으로 판별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한 시대였다. 내전의 의의를 긍정하기 위해서 굳이 의회파에 반대했던 이들을 폭군, 혹은 반동 세력으로 낙인 찍을 필요도 없고, 그것은 오히려 비역사적인 관점이다.

다만 이 혼란스러운 시대의 전환기에 있어서, 영국의 미래를 놓고 다양한 헌정적 비전이 존재했으며, 그 실현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뿌렸다는 점은 꼭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대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가 성숙하기까지는 긴 역사에 걸쳐 숱한 정치적 실험들과 시행착오가 있었으며, 영국 내전기도 그러한 실험의 시대였다.









참고문헌

Barry Coward and Peter Gaunt, The Stuart Age England 1603-1714 (London,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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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Stoyle, Loyalty and locality : popular allegiance in Devon during the English Civil War (Exeter,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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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내전의 기원 (14)-내전 시작되다 History-근동, 서양사


대간주(Grand Remonstrance) 사건 

정부의 기능이 마비된 상황에서, 아일랜드 프로파간다 덕분에 힘을 회복한 존 핌을 주축으로 한 강경파 의원들은 이후 '대간주(Grand Remonstrance)라고 명명된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는 이 강경파 의원들이 생각하기에 찰스 1세의 즉위부터 현 시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실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이에 대한 시정을 '겸손하게' 촉구하는 문서였다...고는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내용이 픽션에 가까운 반가톨릭주의 음모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 기본 내용인즉, "왕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휘둘리고 있고, 우리는 이런 왕이 이끄는 정부를 믿을 수 없다. 더욱이 아일랜드 반란같은 중차대한 현실 앞에서, 가톨릭에 휘둘리는 왕이 이를 제대로 해결하리라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왕 주변의 가톨릭부터 제거해야 한다."인데, 기본 전제부터가 틀렸으니 찰스 1세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문서였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그는 평생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으며 가톨릭 신자들을 잡아다 죽이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특별히 가톨릭에 특혜를 준 적도 없었다.(물론 퓨리턴들은 그 '잡아죽이지 않은 것'이 문제며, 이 때문에 왕을 믿을 수 없다고 비난하였지만)

Braddick 선생이 지적했듯, 이 문서는 사실상 찰스 1세 본인을 바티칸과 예수회가 주도하는 거대한 음모의 꼭두각시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 문서의 목적은 어떤 면에서 봐도 국왕의 위신과 정당성을 치명적으로 손상시키기 위함이었다. 

물론 아일랜드 덕분에 퓨리턴이 세력을 회복했다지만, 일전에 그들의 깽판짓 덕분에 국왕 편으로 돌아선 세력들도 만만치 않았다. '대간주'는 결코 의회의 일치된 뜻이 아니었다. 이 문서는 찬성 159표 반대 148표로 간신히 하원을 통과했다. 이 역시 영국 정계의 양극화를 잘 보여준다. 의회 내에서 생각만큼 동조세력을 확보하지 못하자, 강경파는 이 문서를 아예 출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런던 시민들 중 자신들의 동조자를 규합해서 압박을 넣으려는 생각이었다. 문서 공개 여부도 124대 101로 쉽지 않게 통과되었다.

어찌되었건 찰스 1세는 대간주를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지금까지 그는 의회가 내민 문서에 버티거나 시간 끈적은 있었어도, 대체로 잘 서명해왔다. 하지만 이것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여기에 있어서는 찰스 1세를 비난하기 어렵다. 문서 자체도 허수아비치기에 가까운데다가 찰스에게 가장 비판적인 Coward와 Gaunt 선생도 인정하듯, 이런 류의 문서에 서명할 17세기 국왕은 없다.






정면충돌

동시에 런던의 분위기는 한층 더 혼돈의 카오스로 빠져들고 있었다. 런던은 다양한 정치적, 종교적 의견을 가진 수많은 집단들이 거주하던 국제적 대도시였으며, 이들은 대단히 정치적으로 능동적이었다. 그리고 의회 강경파는 이들을 자신들의 자산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대간주를 공개하였다. 이는 말 그대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셈이 되었다.

의회의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런던의 여론도(그리고 전국적인 여론도 함께) 양분되어버렸고, 점점 더 극단적으로 변해갔다. 아직 폭력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뿐 이미 상황은 내전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Braddick 선생의 말대로, 냉정히 따져보면 상황은 왕에게 더 유리했다. '대간주'의 내용이 억지라고 생각하며, '퓨리턴 포퓰리즘'이 '교황주의자의 음모'보다 더 위험하다고 믿는 이들이 여론의 절반은 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난해에 의회가 일치단결해서 왕과 맞서던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러나 이 냉정하게 따져보는 것 자체가 후대 역사가들만이 누릴수 있는 사치다. 당대 사람들 입장에서는(특히 찰스 1세 본인은 더더욱) 런던의 분위기가 나날이 혼란스러워지는 마당에 냉정히 따져볼만한 여유 따위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국왕을 분노하게 했던 것은 강경파의 타겟이 왕비에게 집중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왕비 측근의 가톨릭 신자들을 제거하고 이들을 프로테스탄트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이어서, 이제는 아예 대놓고 왕비의 종교의 자유 자체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분노를 넘어서, 찰스 1세 입장에서는 불안할수밖에 없었다. 스트래퍼드 백작을 처형으로 몰고 갔던 탄핵사건이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해도해도 너무한 강경파의 공격과 왕비의 안전에 대한 불안이 찰스 1세가 의회를 향해 무모한 공격을 시작한 배경이 되었다. 1642년 1월 4일, 찰스 1세는 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의회에 진입하여 존 핌을 비롯한 강경파 지도자 다섯 명을 체포하려 하였다. 그러나 다섯 의원들은 이미 의회를 빠져나가 런던 시티로 탈출한 뒤였다. 찰스 1세의 이 시도는 정치적으로 큰 타격만 남긴채 실패로 끝났다. 


다섯 의원을 체포하려 시도하는 찰스 1세

다음날 찰스 1세는 시티로 가서 다섯 의원의 신병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미 런던이 통제불가의 상황에 빠졌으며, 여론이 극단적으로 양분되었다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을뿐이었다. 시티의 시의원들이 찰스 1세의 요구를 거부하는 가운데, 길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두 패로 갈라져서 각각 "의회의 특권! 의회의 특권!""불한당 존 핌! 하느님, 국왕을 보호하소서!"를 외쳐댔다.








내전의 막이 열리다

시티에서의 소동을 겪은 찰스는 런던에서는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왕은 일가를 피신시키고 자신도 런던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영국의 의회정치 체제가 붕괴했다는 것이 만방에 알려졌다. 이후 여름이 오기까지 왕과 의회 강경파는 몇 차례 의미없는 타협시도를 했으나 말 그대로 의미없는 시도였다. Coward와 Gaunt 선생의 지적대로, 이때 의회가 보낸 타협 조건들 자체가 이미 강경파가 주도하는 의회는 타협할 생각 자체가 없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 시기동안 양자는 전쟁준비를 하는 동시에, 치열한 여론전에 돌입했다. 의회 강경파들은 계속해서 가톨릭 음모론을 논하면서 동조자들을 규합했다. 퓨리턴에 반대하던 의원들은 이미 국왕 측으로 달려갔기 때문에, 의회에 남은 이들은 사실상 퓨리턴이거나 친퓨리턴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이 음모론은 매우 잘 먹혔다. 동시에 런던을 떠난 국왕측 역시 '퓨리턴 포퓰리즘'을 강조하면서 맞섰다.

양측은 서로 자신들이 '진정한 종교(True Religion)'와 질서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면서 맞섰고, 지역과 계층을 불문하고 '교황주의자들의 음모'를 더 겁내는 이들은 의회파 측으로 달려가고, '퓨리턴 포퓰리즘'을 더 겁내는 이들은 국왕 측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여름이 오자 마침내 대전쟁의 막이 올랐다.


내전의 시작-노팅엄 성에 국왕의 깃발을 세우는 찰스 1세






다음번에는 연재의 총정리 겸 에필로그가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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