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의 기원 (8)-찰스 1세의 개인통치 History-근동, 서양사


개인통치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1630년대 내내 이어진 찰스 1세의 정부는 '개인 통치(The Personal Rule)'라고 불린다. 의회 없이 11년간 이어진 이 통치에 대한 해석도 크게 엇갈려왔다. 전통적인 휘그 사관은 이 시기를 '11년의 폭정(The Eleven Years' Tyrrany)라고 해석해왔다. 비교적 근래까지도 학자들은 이 시기의 정치가 전제적이었으며, 국왕과 행정부가 신민 다수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켰다고 해석하는게 일반적이었다. 반면에 최근의 몇몇 학자들은 이 시기가 오히려 매우 효과적이면서도 온정적인 정부였다고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사실 Hutton 선생이 지적했듯이, 이 개인 통치 시대에 대한 평가는 스튜어트사 전공자들 중에서도 가장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시기이다. 영국 내전기와 관련된 모든 해석이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현재 학자들은 이 시기에 있어서도 한 줄로 요약된 평가는 불가능하다는 점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찰스 1세에게 가장 비판적인 Coward와 Gaunt 선생조차도 이 시기 찰스 1세의 통치의 한계는 명확히 지적하되, '11년의 폭정' 해석은 이후 승자가 된 의회파의 왜곡이 짙게 들어가있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평한다. 진실은 언제나 한줄 정리보다 훨씬 더 복잡하며, 해석이 갈릴 여지가 대단히 많다.


한 가지 기억할 점은, 이 시기를 단순히 전제왕권과 그 반대의 대립으로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1620년대에 붕괴된 엘리자베스 체제를 대체할 모델을 찾기 위한 첫 번째 정치적 실험이었다는데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찰스 1세가 이루고자 한 목표는 무엇이었으며, 그의 11년의 성취와 한계는 무엇이었을까?





찰스 1세의 행정부


개인 통치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11년은 무엇보다도 통치의 제일 중심에 찰스 1세가 서있었던 시기다. 그러나 당연히 왕 혼자서 모든걸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의 의지를 실천에 옮길 조력자들이 필요했다. 바로 그의 행정부를 운영할 대신들이었다.


찰스 1세는 그의 행정부를 다양한 사람들로 채웠다. 이들은 정치적 신념도, 관점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특히 가장 최근에 왕의 측근으로 합류한 토머스 웬트워스(훗날의 스트래퍼드 백작)는 정작 이전 시기에 의회에서 격렬하게 왕과 대립하던 의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찰스 1세가 권리청원을 받아들인 후에 찰스 1세 편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었다면, Hutton 선생이 잘 서술하였듯이, 모두 유능하고 근면한 행정가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찰스 1세는 자신의 정부를 제대로 된 이들로 채웠다. 그러나 퓨리턴이 보기에는 이 인적구성에 매우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이들이 퓨리턴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을 이끌고 찰스 1세는 어떤 정책을 실현하려 했을까? 다시 한번 Hutton 선생을 인용하면, 찰스 1세는 1620년대의 재앙으로부터 확실히 배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정부의 구조와 재정 시스템을 완전히 개혁하기 전에는 대외전쟁도, 의회소집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것은 제임스 1세도 시도했다 실패한 대단히 어려운 과제임이 분명했다. 어찌되었건, 찰스 1세가 절대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개인 통치를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Coward와 Gaunt 선생도 인정하는 바, 찰스가 의회를 영구히 폐지하려 했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정부와 재정을 다 뜯어고치는 개혁을 위해서는 당분간 의회가 조용해야만 한다는 판단을 내렸을 뿐이었다.





재정정책


그렇다면 여러모로 문제의 근원이었던 재정의 개혁은 어떻게 추진되었을까? 찰스 1세와 그의 각료들은 이제는 완전히 시대에 뒤쳐진 유물이 되버린 재정 시스템에 마침내 손을 댔다. 우선 수입을 늘리고 지출을 줄이는게 급선무였고, 과세 체제를 업데이트해야만 했다. 이는 상당한 수준의 행정 개혁을 필요로 하였다.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했듯이, 이 개혁 시도는 제임스 1세때와 마찬가지로 막강한 장애에 부딪쳤다. 이 연재를 처음 시작하면서, 이 당시 잉글랜드에 재정 시스템을 일신하는게 매우 긴급한 과제였다는걸 깨달은 이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바 있다. 의회를 해산시켰으니 왕이 마음만 먹으면 개혁을 할수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도 소위 개혁군주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왕이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것 같으나, 현실적으로 왕은 초인이 아니다. 개혁은 기본적으로 옛 체제에 막강한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수많은 사회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다. 의회가 소집되지 않는다고 해서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집단들이 사라진것도 아니고, 이해관계로 얽힌 집단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도 없는 일이다.


재정과 그에 관련된 행정을 모두 손보는 것은, 돈과 관련된 모든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왕의 후원을 받는 대상자, 관직의 수, 궁정의 규모 등등 수많은 것들이 연결되어있다. 당연히 여기에는 복잡하면서도 강력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한 집단도 아니고 여러 집단들의 서로 다른 반발들을 억누르면서 개혁을 추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통치기 첫해에 찰스 1세와 각료들은 상당히 지출을 줄이는데 성공했으나,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로 보아 개혁에 대한 반발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기 절약은 가능했으나 구조적으로 지출을 줄이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따라서 엘리자베스 체제를 완전히 대체하는 개혁된 행정체제의 수립이라는 목표는 제한된 성과밖에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재정개혁이 완전히 실패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지출 삭감은 뜻대로 안되었으나, 대신 수입은 상당한 증대를 이루었다. 더욱 대단한 것은 이 부분에서는 큰 반발 없이 수입을 늘렸다는 점이다. 예전에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특별세들에 대한 저항도 잠잠해졌고, 관세 수입도 크게 늘어났으며, 해안지방에 대한 선박세도 성공적으로 징수되었다. 특히 후자는 이 때 잉글랜드 남부 해안이 해적의 위협을 받으면서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후 이 세금을 내륙에까지 확대시키자 그때는 반발이 일어났다.


이 부분은,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대성공이었다. 수입도 크게 늘었을뿐 아니라 해군의 질도 크게 향상되었다. 이에 따라 지난 패전으로 실추되었던 국제적 위상도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다. 네덜란드 어선들은 이제 북해에서 조업하기 위해 찰스에게 돈 내고 허가를 받기로 동의하였고, 프랑스도 대서양의 영국 근해에서 함대를 철수시켰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왕실의 빚은, 여전히 많긴 했지만, 상당히 줄어들었고, 재정적자는 고작 18,000 파운드 남짓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옛 체제를 완전히 일신한 것이 아니라는 한계는 분명히 있었으나, 충분히 큰 성과였다.





지방통치


찰스 1세 입장에서는 재앙이던 1620년대는 잉글랜드 전체 입장에서도 좋지 않던 시기였다. Braddick 선생이 잘 설명했듯이, 지난 130년간 인구는 급격히 성장했으나, 잉글랜드 경제는 그 인구에 모두 일자리를 줄만큼 따라서 성장하지 못했다. 노동 공급 과잉으로 실질임금은 하락했다. 게다가 일련의 흉년으로 곡물가는 올라갔다. 개인통치 시대를 시작한 찰스 1세는 의회의 도움 없이 이러한 문제와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Braddick 선생의 연구는 이 시기 국왕의 행정부와 각 지방은 놀랄만큼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전에도 서술한 적이 있지만, 이 시기는 효과적인 통신수단과 지리적 정보의 부재로 인해 현대와 같은 의미에서의 중앙집권은 불가능한 시기였다. 국왕의 개인통치라고 해서 찰스가 지방행정까지 일일히 감독할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시기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지방 행정이 무리없이 굴러가고, 또 행정의 효율화를 어느정도 이뤄낸 것은 그만큼 지방에 적정한 선에서 자치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 시기 널리 퍼져있던 잉글랜드의 공화주의 관념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영국 내전 이후 성립된 공화국이 커먼웰스(Commonwealth)라는 이름을 취했기 때문에, 이 개념이 청교도의 전유물로 아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커먼웰스 개념은 잉글랜드 정치관념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개념이며, 왕정과 반드시 대립하는 개념도 아니다.


예전에 중세 잉글랜드의 정치사상에 대해 서술한 바 있지만, 잉글랜드의 정치사상은 중세나 근대 초나 근본적으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사상을 물려받았다. 여기서 말하는 공화주의는 말 그대로 공공의 것, 즉 res pubulica 혹은 커먼웰스에 대한, 덕성을 갖춘 능동시민의 적극적 참여와 헌신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체제적인 면으로 가면 폴뤼비오스가 주장한 것과 같은 '혼합 정체' 혹은 균형 헌정(balanced constitution)을 강조하는 것이 이 시기 공화주의 이론이다. Braddick 선생이 강조하듯, 그 어떤 것도 직접적으로 군주정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Cust 선생이 지적하듯이, 찰스 1세 본인이 혼합 정체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의회가 이 시기에 소집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공화주의의 이상과 충돌하는 것도 아니다. 이 시기 의회는 영국 헌정주의 이론에 따라도 반드시 주기적으로 소집되어야만 하는 상설기관이 아니었다. 대신 공화주의적 참여정치의 이상은 지방 엘리트들이 적극적으로 지역 행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실현되었다. 고전 교육을 통해 이러한 이상에 익숙한 이 엘리트들은 자발적으로 지방 정부를 참여하였고, 지역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를 단순히 봉사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를 통해 이들은 지역에서 명망을 얻어 지배층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런면에서 Braddick 선생은 찰스 1세 개인통치기의 잉글랜드는 관직보유자들의 공화국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역설한 바 있다.


물론 온전히 지방 정부에 맡겨둔 것은 아니었다. 정말 급한 위기시에는 중앙정부가 개입했다. 그 결과가 이른바 Book of Orders라고 불리는 것으로, 1629-30년에 발생한 경제위기때 만들어졌다. 이는 지방정부가 나아가야 할 개혁방안을 제시한 일종의 청사진이었다. 이 개혁의 징기적 성과가 어느정도였는가는 학자들 간의 논의가 분분하지만,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1629-30년에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는데에는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심각한 위기를 제외하면 대체로 지방 행정은 지방에 일임하는 것이 찰스 1세의 정책 기조였다.


어쨌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조는 대체로 잘 이루어졌고, 찰스 1세로서는 큰 비용 들이지 않고 경제위기와 인플레이션의 시대에 지방행정을 원활하게 유지시킬 수 있었다. 앞서 말한 1629-30년의 위기를 비롯하여, 이 시기에 몇 차례의 흉작과 전염병이 발생했지만 큰 타격 없이 잘 극복할 수 있었다. Braddick 선생이 서술했듯이, 이는 이 시기 잉글랜드 정부가 상당히 건강한 상태였음을 잘 보여준다.




군제개혁 시도


앞서 찰스 1세가 선박세 등을 통해 해군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바 있다. 그러나 이 당시 육군의 상태도 엉망이었다. 근대 초 잉글랜드의 육군은 기본적으로 각 카운티 별로 할당된 민병대 체제였다. 이 체제는 메리 1세가 중세적인 가신단 군대 체제를 끝내면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기존 체제에 아무런 업데이트를 안한게 엘리자베스 1세의 특징이니만큼, 이 시기에 이르기까지 메리 1세 당시의 체제 그대로 머물러있었다. 찰스 1세는 여기에도 메스를 들이댔다.

당시 민병대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하여, 이미 제임스 1세 시절에 부분적으로 개혁을 시도한 바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개혁과 마찬가지로 저항이 상당하여 결국 실패하였다. 찰스 1세는 다시 개혁을 시도하면서 'exact militia', 혹은 'perfect militia' 창설을 목표로 하였다.


일단 찰스 1세에게 비판적인 학자들도 인정하듯. 개혁안 자체는 상당히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제임스 1세때처럼 각 지역에서 맹렬한 반발에 부딪쳤다. 특히 찰스 1세가 지역 민병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내려보낸 직업군인들이 문제였다. 이들은 국왕의 대권에 의해 해당 지역에서 봉급을 지불하도록 되었는데, 이것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반발의 이론적 근거였다.


물론 자기 지역 민병대를 타지에서 온 직업군인이 훈련시킨다는 것에 대한 심리적 반발도 컸다. 사실 따지고보면 군대와 전쟁이 점점 더 전문화되어가는 이 시기에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기억 속의 황금시대인 엘리자베스 시대만을 기억하면서 "엘리자베스 때는 안그랬는데!"라고 외쳤다.


그래도 추밀원이 작정하고 밀어붙였다면 보다 목표에 근접한 결과가 나왔겠지만, 1630년대 내내 평화가 이어지자 이들도 반발을 무릅쓰며 군제개혁을 밀어붙일 이유에 대해 점점 회의적으로 변해갔다. 결국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찰스 1세의 군제개혁안은 본래 의도에 한참 못 미치는 성과밖에 거두지 못했다.





종교문제


마지막으로 언제나 재정과 함께 모든 문제의 양대 근원이었던 잉글랜드 교회 문제가 있다. Hutton 선생이 잘 지적했듯이, 찰스 1세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유럽에서 가장 정체성이 애매모호하고, 가장 행정이 느슨하게 이루어졌으며, 가장 깊게 분열된 교회의 수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찰스 1세의 목표는 좀더 잘 관리되고, 원활하게 돌아가는 잉글랜드 국교회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여기에 있어서 찰스는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와 의견이 일치했다. 그리고 이 둘의 성향은 분명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이었다. 찰스 1세와 로드의 개혁은 잉글랜드 국교회의 전례를 좀더 장엄한 방향으로 일원화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퓨리턴과 강경파 개신교의 격렬한 반대를 낳았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듯이, 이 정책 때문에 찰스 1세의 정부가 신민들과 완전히 괴리된 것은 아니었다. Braddick 선생이 지적하듯, 사실 이 정책에 찬성하는 사람도 많았다. 당시 잉글랜드 개신교 내에는 퓨리턴 못지 않게 반퓨리턴파도 많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찰스와 로드의 앵글리카니즘은 찰스 1세가 사실은 가톨릭이라는 음모론 및 가톨릭 왕비의 존재와 결합하여 제법 많은 개신교도들을 불편하게 한 것은 사실이다. 이들 중에는 결코 퓨리턴에게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로드의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퓨리턴과 제휴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 덕분에 소수파였던 퓨리턴은 조금씩 세를 불려갔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은 아직까지는 잠복해있었다. 전쟁도 없고, 의회가 안 열린 탓에 과열된 논쟁도 없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분위기가 차분했다. 이 시기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있던 반가톨릭 음모론과 군제개혁에 대한 반발은 분란의 씨앗이 될 수는 있었지만 반드시 분란이 터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또한 찰스와 로드는 생각보다 종교정책을 온건하게 추진하였다. Hutton 선생이 지적했듯이, 반발하는 이들은 화형도 교수형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1637년 세 명의 가장 격렬한 반대자들이 모욕적인 글을 출판하자, 마침내 본보기를 보이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들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단두대에 올랐다. 다만 단두대에서 머리 대신에 귀를 베었다. 어찌되었건, 정치적 이유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겠다는게 찰스 1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물론 신체형은 잔인한 형벌임에 틀림이 없고, 퓨리턴은 이를 폭정의 표본으로 몰아갔지만,튜더 군주들이었다면 귀가 아니라 머리를 자르거나 사지절단형을 내렸을 수도 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Hutton 선생의 표현대로, 이때까지 찰스 1세의 통치 16년은 그때까지 영국사에서 정치적 이유로 사형당한 사람이 없는 유일한 시대였다.


사실 1620년대의 혼란상에 비하면 아직까지 잉글랜드에서 종교정책에 대한 반발은 생각보다는 적은 편이었다. 오히려 제임스 1세 때보다 순응하는 성직자들이 더 많았다. 이 정책에 찬성하는 이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 맞춰 더욱 격렬해진 불만세력은 어찌되었건 불안요소였다.






소결론-찰스 1세의 개인통치기


찰스 1세의 개인통치 11년은 성과도 많았고 한계도 많았다. 분명 그는 목표한 바를 모두 이루지는 못했다.(그런데 사실 워낙 이루기 어려운 목표임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11년이 마냥 태평시대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어려운 상황에서 상당히 볼만한 성과를 올렸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는 명백한 결점에도 불구하고(그리고 그의 시대의 많은 문제점들이 거기서 온 것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무능한 군주는 아니었다. 사실 Cust 선생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찰스 1세가 정말 대책없이 무능한 군주였다면 진작에 폐위당했거나 허수아비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행정력도, 자기 세력을 구축하고 그들의 충성을 확보하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


그의 개인 통치 11년은 Braddick 선생이 지적하듯, 17세기 잉글랜드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내외적으로 평온했던 11년이었다. 여러 악조건을 생각해볼때, 평온하게 11년을 끌어온 것은 상당부분 찰스 1세와 그가 선택한 대신들의 업적이었다. 그러나 여러 볼만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파탄난 엘리자베스 체제의 근본적인 면까지 일신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 1620년대의 여러 문제점들은 여전히 수면 아래 잠복해 있었고, 언제라도 상황이 맞으면 폭발할 여지가 있었다.



영국 내전의 기원 (7)-엘리자베스 체제의 붕괴 History-근동, 서양사

갈등의 시작: 카디스 원정


막 왕위에 오른 찰스 1세는 젊은 국왕의 패기를 담아 1624년에 어영부영 끝난 스페인과의 전쟁을 다시 추진했다. 그동안 강경파 퓨리턴을 비롯한 수많은 개신교 신민들이 주구장창 대륙의 종교전쟁에 참여하라고 제임스 1세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을 지켜봤으니만큼, 찰스 1세는 자신의 대스페인 개전이 의회와 신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Worden 선생의 지적대로, 그동안 전쟁을 강경하게 요구했으며 기꺼이 개전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이 정작 필요한 전비지출은 거부했던 것이다.


의회: 전쟁하자고 했지 돈 대주겠다고는 안했는데요?



찰스 1세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의회 입장에서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물론 의회는 공동의 목표를 가진 단일한 세력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이 돈 대주는 것을 거부한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우선 지난번 제임스 1세의 요청에 전비를 대주었으나, 제임스 1세의 방침 때문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은 1624년의 기억이 있었다. "그때 모아준 돈 다 어디다 썼냐?"가 이들의 의구심이었다. 그 다음으로 찰스 1세와 프랑스 왕실의 결혼으로 인해 개신교를 위해 싸운다는 찰스 1세의 의도를 못 믿겠다고 나온 강경파 개신교 의원들이 있었다. 그리고 전쟁에 들어가면 국왕의 행정권이 강화될테고 이것이 의회의 독립성을 약화시킬 것이라 두려워한 이들, 제임스 1세 때의 국왕과 의회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 왕 길들이기를 좀 할 필요가 있다고 본 이들 등등 매우 다양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앞의 둘이었다. 게다가 지난번에 서술했듯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재정 시스템이 심하게 맛이 가서, 의회가 화끈하게 돈을 거둬주지 않는 이상 전쟁 치를 엄두도 못낼 수준이라는걸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번째 이유가 약간 이해가 어려울수도 있는데, 찰스 1세는 평생 무늬만 개신교고 사실은 가톨릭이라는 의심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는 매우 경건하고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으며, 모든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바, 단 한번도 가톨릭에 끌렸던 적이 없었다. 사실 그는 이 시기 신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반가톨릭 법안을 나름 열심히 시행했다. 그러나 강경파 개신교도들은 의심을 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찰스 1세의 반가톨릭 정책은 벌금을 거두고 사제를 추방하는 정도였지, 잡아다 죽이는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나친 탄압은 대스페인 전쟁에 필수인 프랑스의 지원을 무효로 돌릴 수 있었다. 또한 지난번에 서술했듯이 찰스 1세는 정치적(이 시기 정치와 종교는 매우 많이 겹친다) 이유로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결심한 바 있었다. 퓨리턴을 위시한 강경파 개신교는 이 점이 불만이었다.



퓨리턴: 아니 화끈하게 잡아서 사지도 좀 찢고, 목도 자르고 좀 그래야지, 이게 뭡니까?



이 점에 있어서도 때때로 탄압을 가했던 제임스 1세보다 정치감각이 떨어졌다고 할 수는 있을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사람 더 많이 죽이자고 한 이들은 후대에 자유와 민주의 투사로 칭송받고, 죽이는 것만은 안하겠다고 한 왕은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미 제임스 1세 때부터 청교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 국교회 내의 아르미니우스파 앵글리칸을 밀어주기 시작했던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찰스 1세는 더욱 확고하게 아르미니우스 파의 편을 들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청교도가 영국 사회의 질서와 안정에 가장 큰 위협이라는 관념이 제임스 1세 말년부터 확고해진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앵글리칸이 강조하는 장엄한 전례가 찰스 1세의 예술적 취향에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신학적으로 찰스 1세는 확고한 칼뱅파 개신교였고, 앵글리칸을 밀어주면서도 이 점은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물론 청교도에게는 전부 가톨릭 2중대로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점들이 결합하여 이 시기 잉글랜드가 가톨릭에 잠식되고 있다는 편집증에 가까운 불안감이 강경파 개신교를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나중 일이지만 찰스와 프랑스인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와의 관계도 의심에 불을 질렀다. 단, Kishlansky 선생의 지적대로, 찰스 1세가 아내에게 휘둘렸다는 전통적인 설은 사실과 다르다. 찰스는 아내의 신앙은 존중했으나, 개인 차원에서 머물도록 엄격히 제한하였고, 그녀의 프랑스인 수행원들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녀의 종교로 인해 찰스 1세는 끊임없는 의심에 시달렸다. 기본적으로 둘의 사이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찰스 1세가 그녀를 정략결혼 상대로 대우하고 애인을 따로 두었다면 의심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애인도 두지 않고, 왕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 점이 찰스 1세가 사실 가톨릭이라는 의심을 부채질했다. 다른 시대 다른 왕이 그랬다면 칭찬을 받을 일이지만, 맥카시즘 시대를 방불케 하는 이 시기 잉글랜드에서는 이게 오히려 욕먹을 일이 되었으니 역시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찌되었건, 이렇게 불충분한 재정지원을 받은 상태로 원정군은 카디스를 향해 떠나갔다. 엘리자베스 시기 월터 롤리 경이 습격하여 명성을 얻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뒤로 많은 시간이 지났고, 이 시기는 유럽 각국의 경쟁이 극에 달하고 군대가 날이 갈수록 진화하던 시기였다. 그런 마당에 꽤 오랜시간 제대로 된 전쟁 경험도 없고(물론 유럽 전쟁에 개별적으로 참전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당시 잉글랜드에 매우 많았지만),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재정 시스템에 의해 지원받는 군대가, 유럽의 강국이며 전쟁으로 날을 지샌 스페인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니 결과는 안봐도 뻔한 것이었다.


카디스 방어전을 지휘하는 스페인군 지휘부


카디스는 진화하는 전쟁 양상에 맞추어 강력하게 요새화되어있었고, 잉글랜드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치욕스러운 참패를 당했다. 탄약은 규격에 맞지 않고, 머스킷은 불량품인 경우가 수두룩했다. 규율과 기강도 엉망이었다. 






균열의 심화


원정의 실패를 놓고 왕과 의회는 각기 다른 곳에 책임을 돌렸다. 의회는 찰스 1세의 베스트 프렌드이자 선왕 제임스 1세의 총신(?)이었던 버킹엄 공작의 무능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였고, 찰스는 "니들이 돈을 안줘서 그런거잖아"로 맞섰다.


새로 개회된 의회에서도 의원들은 전비지출을 거부했다. 이들은 대신 버킹엄 탄핵을 들고 나왔다. "탄핵 없이는 돈도 없다"가 의회의 입장이었다.


물론 1분만에 탄핵되지는 않았다



물론 찰스 1세 입장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일수 없는 내용이었다. 우선 친구를 버릴 수가 없었고, 둘째로 탄핵을 전제로 의회가 약속한 비용은 전쟁 치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흔히 서술되듯이 찰스가 무조건 비타협적으로 나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찰스는 버킹엄을 몇몇 관직에서 해임하고 권력을 제한하겠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의회가 타협은 없다고 강경하게 나왔다.


결국 왕은 돈을 대기 위해 강제공채(forced loan)에 의존할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일종의 전시 특별세로, 사실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Cust 선생이 지적하듯, 세금은 영국 헌정사에서 언제나 예민한 문제였다. 강제공채는 다시 갚을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세금은 아니었으나, 의무로 내야 하기 떄문에 많은 이들에게는 특별세로 느껴졌다. 의회는 '의회의 동의 없이는 과세도 없다는건 영국 커먼 로의 전통이다'라고 주장하며 반기를 들었다. 찰스 1세는 부왕 제임스 1세가 이미 편 주장인 '공익을 위해 국왕의 대권(royal prerogative)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법 전통의 일부다'라고 응수하고 나섰다. 사실 국왕 대권의 행사범위와 과세에 대해서는 이전 시대부터 해석이 분분하긴 했다. 어찌되었건 상당히 많은 이들이 납부를 거부하였고, 이들 중 가장 주도적인 이들이 투옥되었다. 이른바 '다섯 명의 기사 사건'이다.


정치적으로는 악영향이 많았지만, 일단 재정적인 면에서 공채는 성공이었다. 이는 진작 재정 시스템 개혁을 통해 과세 체제를 손봤다면 잉글랜드가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여전히 이 시대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적합한 군대를 제대로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시간을 끄는 사이 스페인과의 전쟁은 다시 평화 협상 모드로 들어섰고, 찰스 1세가 돕겠다고 맹세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은 패배해버렸다.


그러나 국제 프로테스탄티즘의 대의에 잉글랜드가 공헌할 기회는 아직 하나가 남아있었다. 찰스와 버킹엄은 라 로셸에 포위된 위그노를 구원하는 일에 나서고자 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로는 자신을 끈질기게 의심하는 강경파 개신교 신자들과 의원들의 의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함이었다. 둘째로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예상했던 도움을 주지 않은데 대한 응징이었다. 사돈을 맺었음에도, 프랑스는 딸랑 공주만 보내왔을뿐 기대했던 군사적 원조는 주지 않았다. (프랑스는 잉글랜드 가톨릭을 온전히 해방시킨다면 화끈하게 지원해주겠다는 암시를 날렸으나, 그건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찰스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공채로 모든 돈은 군대를 일으킬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충분히 '근대화'할 정도는 아니었다. 라 로셸 구원군은 여전히 자금도 부족하고, 장비도 부족하며 조직력도 별로였다. 스페인 원정과 마찬가지로, 이 원정도 막대한 피해만 내고 실패로 끝났다.






엘리자베스 체제 마침내 붕괴되다


근대 초에 패전은 군주의 위신에 치명타를 날린다. 이 두 실패의 영향은 컸다. 돈 모으느라 욕은 욕대로 먹고, 빚은 빚대로 쌓였고, 서유럽의 양대 강국인 스페인과 프랑스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돈이 떨어진 군대는 별수없이 민가에 하숙시킬수밖에 없었는데 이것 역시 대단히 큰 저항에 부딪쳤다


그러나 찰스 1세 역시 본인이 책임져야 할 실책은 분명 많았으나, 역시 나름대로 할 말은 있었다. 국왕에 대한 의회의 불만 못지 않게 국왕도 의회에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그의 심정을 정리하면 아마 다음과 같았으리라.



찰스: 니들이 그렇게 전쟁하자고 떠들더니, 막상 하려니까 돈은 못주겠다고 하고.. 재정상황 개판이라 돈 모을 방법은 몇개 없는데 반대만 해대고.. 니들이 그렇게 국제 프로테스탄티즘의 대의를 떠들어대서, 유럽의 개신교를 구하려고 나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썼는데, 가톨릭 2중대라고 음모론이나 퍼뜨리고...(ㅠㅠ)



물론 의회는 의회대로 찰스 1세의 행동이 잉글랜드의 전통적 자유를 침해하는 절대주의를 꿈꾸는 것이라고 의심하는 이들, 혹은 진짜 가톨릭 2중대라고 의심하는 이들이 가득했고, 국왕의 행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 결과가 역사적인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이다


찰스는 마지못해서긴 했지만 어쨌든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후 영국 헌장주의와 민주주의 발달사에 남긴 큰 의의에도 불구하고, 당장 큰 영향력은 없었다. 일단은 조항이 애매해서 빠져나갈 구석이 많은데다가, 균열의 근원에 있는 종교문제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사태가 일단락될 가능성은 있었다. 의회의 모든 이들이 다 강경하게 왕에게 저항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명한 의회 지도자들 중에서도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좀 심한것 아님?"이라는 의견을 표명하는 중도파들도 제법 있었다. 이들은 국왕과 의회 강경파 사이에서 나름 열심히 노력을 했다. 더욱이 의회 내 강경파에 회의를 느끼고 찰스 1세의 편으로 돌아서는 이들도 제법 있었기 때문에, 찰스 1세는 결코 고립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화해는 실패했다. 이것은 어느 한쪽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실패의 원인은 의회 강경파 의원들과 찰스 1세 양자 모두의 비타협적 자세에 있었다.


어쨌든 1628년의 세번째 의회에서 국왕은 280,000 파운드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이 역시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비용이었다. 권리청원까지 받아들였음에도 결과가 이러니, 의회에 대한 국왕의 회의는 더욱 커졌다. 그리고 라 로셸을 구원하기 위한 두번째 원정을 준비하더 버킹엄은 휘하 장교에게 암살을 당했다. 지휘관을 잃은 원정군은 완전히 혼란상태로 빠져들고, 라 로셸은 항복하고 말았다.


이제 찰스 1세와 의회의 사이는 완전히 벌어졌다. 그에 대한 저항을 주도하던 의원들이 정부의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종교정책과 재정정책을 비난하며, 국왕의 각료들 중 반역자가 있다고 주장하자 찰스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의회는 해산되었고, 이어서 영국역사에서 전례가 없었던 국왕의 개인 통치 시기가 막을 올렸다.



영국 내전의 기원 (6)-국왕 찰스 1세 History-근동, 서양사




인간 찰스 스튜어트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찰스 1세는 오래도록 영국사에서 폭압적 전제정치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 인간으로서 찰스 스튜어트는 폭군의 스테레오타입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인간적인 호감을 갖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온화하고 선량한 성품을 가졌으며, 근면 성실했다. 교양이 풍부하고 특히 예술에 대한 감각은 전문가 수준으로 뛰어났다. 반면에 먹고 마시는데 있어서는 대단히 검소하고 절제하였다. 사생활 면에서는 동시대 군주들 중 보기 드물게 깨끗하였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남편의 전형으로, 애인이나 정부를 두지 않은 거의 유일한 17세기 유럽 군주였다.


그러나 왕으로서 그의 평가는 휘그파 역사가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수정주의 학자들에게도 영 좋지가 않았다. 전통적인 해석은 물론 찰스 1세를 자유와 헌정의 투사인 의회와 대비되는 폭군으로 몰아갔지만, 수정주의 학자들에게서도 찰스 1세는 아무 문제 없었던 잉글랜드의 정치구도를 혼자 말아먹은 무능한 군주 대우를 받았다. 특히 제임스 1세가 재평가되어 이미지가 좋아질수록, 찰스 1세는 아버지가 잘 해오던 일을 다 망쳐버렸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찰스 1세를 옹호하는 연구자들도 없지는 않았다. 최근 학자들 중에서 Barry Coward 선생과 Peter Gaunt 선생이 찰스 1세에 대해 비교적 비판적인 학자들이라면, C. Sharpe 선생과 M. Kishlansky 선생은 비교적 옹호적인 학자들이다. 다만 지난 몇년간 Coward 선생과 Kishlansky 선생이 모두 작고함으로서 더 이상의 논쟁을 보지 못하게 된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찌되었건 이러한 최근 논의들이 이루어지면서, 수정주의 담론도 상당부분 옛말이 되버린 지금에 와서는 찰스 1세의 치세에 대해서도 보다 객관적인 시각(여전히 논쟁의 여지는 매우 많지만)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제임스 1세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한 인간은 100퍼센트 폭군이나 100퍼센트 명군 등과 같은 단순한 이분법이 통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하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인물, 특히 국왕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 요구, 정치적 스탠스 등등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또한 장점과 결점에 대한 분석도 마찬가지다. 이중 장점에만 집중하면 누구나 명군 만들수 있고, 결점에만 집작하면 누구나 폭군 만들 수 있다. 찰스 1세는 결국 패배하고 목을 잃었으니 실패한 군주다. 그런데 이 '실패한 군주'라는 시각을 깔고 그의 치세를 분석하면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고 해도 은연중에 그의 결점에만 더욱 집중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못지 않은 결함을 가지고도 성공적인 치세를 마친 군주는 많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benefit of hindsight'도, 이분법적인 시각도 잠시 내려놓고, 그가 취한 각각의 행동들의 맥락과 이유, 영향을 분석하고 그의 결점이 유독 이 시대에 문제를 일으켰다면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나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





정치가 찰스 스튜어트


그렇다면, 이러한 전제를 깔고서 정치가로서 찰스 1세의 자질과 결점을 분석해보도록 하자. 우선 맨 앞에 언급한 찰스 1세의 인간적인 장점들은 사실 정치가로서의 찰스 1세와 완전히 별개의 것만은 아니다. 개인군주정 시대에 이는 얼마든지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었다. 한 예로 찰스 1세의 예술애호가로서의 능력은 국왕의 권위를 확고히 하는 프로파간다 구축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우선, 왕위에 오른 그는 의욕도 있었고 왕국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도 있었다. 업무 능력도 충분히 있었고, Kishlansky 선생이 잘 지적했듯이, 잉글랜드를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도 있었다.


치세를 시작하면서 세운 원칙도 훌륭했다. 특유의 온화한 성품이 발현된 것인지,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642년의 파국 이전까지 찰스 1세의 치세에서 정치적 처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는 온갖 음모와 피의 숙청으로 점철된 튜더-스튜어트 시대에 대단히 특이한 경우였다. 이런 사람이 후대에 폭군의 대명사로 이름을 남겼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장점들 못지 않게 상당히 심각한 약점들도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는 부왕 제임스 1세로부터 수줍음 타는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더 심각한 것은, 그래도 제임스는 지성이 겸비된 화려한 말빨로 다양한 세력들을 제압하고 설득할 수 있었던 반면, 찰스 1세는 이런 능력이 매우 부족했다는 점이다. 현대 학자들은 그에게 언어 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타고난 것이라 본인 잘못은 아니지만, 개인적 카리스마가 중요한 근대 초의 군주에게는 대단히 심각한 결점이었다. 게다가 그는 체구도 작았다. 그러나 찰스 1세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 군주의 위엄을 갖추는데 성공하였다. 부왕처럼 적극적인 토론을 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침착하고 장중한 모습을 통해서 군주의 위엄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왕의 외피 뒤에는 힘겹게 위엄을 지켜나가는 불안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한 인간이 있었다. 어찌되었건, 그의 이런 노력은 제법 성공적이었고 능력도 있었으니 만일 동시대 잉글랜드가 아니라 좀더 안정된 국가의 왕이었다면 성공적인 치세를 마쳤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잉글랜드의 상황은 그가 갖지 못한 자질을 더 많이 요구했다는 점이 그의 가장 큰 불운이었다. 나라는 서로 대립하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들로 인해 점점 더 양극화되고 있었고, 그걸 넘어서 그가 다스려야 하는 세 개의 왕국 간의 차이는 더 심했다. 따라서 이 서로 다른 세력들을 조율하면서 충돌을 최소화해야 하는게 급선무였는데, 이는 제임스 1세의 말빨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찰스의 성격과 언어장애는 여기에 치명적이었다.


찰스 1세에게 비판적인 학자들은 그가 비타협적이었으며, 소통을 몰랐다고 비판하였다. 물론 그의 성격에는 그런 측면도 있다. 찰스 1세는 군주로서 자신의 의무는 신민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지, 신민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가는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물론 여기에는 일견 합당한 부분도 있다. 당시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다양한 주장을 내놓고 있었으니 이를 다 따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찰스가 과연 타협을 몰랐는가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Kishlansky 선생이 지적했듯이, 찰스는 '자신이 세운 원칙을 거스르지 않는 한'에서는 얼마든지 타협하러 나왔다. 다만 제임스 1세처럼 자신의 원칙을 굽혀가면서까지(종교 탄압의 예처럼) 타협하러 들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후대 역사가들로부터 고집불통이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만약 찰스 1세가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면 이 자세는 원칙을 지키는 훌륭한 자세라는 평을 듣고 있을 수도 있다. 또한, 그렇다면 찰스 1세와 대립한 의회 의원들, 특히 청교도 성향의 의원들은 그러면 얼마나 타협할 준비가 되어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당연히, 양극화의 시대에 타협의 여지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고, 타협의 실패는 찰스 1세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소통능력의 부족은 정치가로서 찰스 1세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이 시기 잉글랜드의 정치적 특성상 왕은 자신의 견해를 여러 세력에게 잘 설득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찰스는 우직하게 "내가 좋은 의도로 추진하는 정책이니 다들 알아주겠지" 하는 식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밀고 나갈뿐, 설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언어 장애로 인해 그럴 능력이 심각하게 부족했다. 그는 이 장애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언제나 다른 사람과의 거리를 유지했고, 이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그를 오만하다고 오해하였다.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도 제대로 설명을 못하다보니 사람들은 그의 의도를 제각각 다르게 해석했다. 그의 정책 대부분은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대부분 그 반대로 오해되었다. 더욱이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토론이 점점 더 중요해지던 시기에, 그는 자신의 정책이 공론의 장에서 논의되는 것을 심하게 두려워했다. 이는 모두 근본적으로 그의 언어장애와 언변 부족에 대한 자각에서 나온 행위였다. 물론 이는 엄연히 '장애'이니 본인의 잘못만은 아니나, 그는 시기적인 면에서 브리튼의 역대 군주들 중 가장 때를 잘못 타고난 불운한 군주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사실 당시 잉글랜드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찰스 1세가 좀더 언변이 뛰어나고 소통을 적극적으로 하는 군주였다 하더라도 과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즉위 당시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제임스 1세의 유산과 찰스 1세 초기 잉글랜드의 정치상황


찰스 1세에게 결점이 있었던 것은 감안하더라도, 그는 후대 역사가의 비판 중에서 억울해할 부분이 상당히 많다. 그 많은 부분이 본인의 작품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제임스 1세를 높이 평가하는 학자들의 대표적인 비판은 제임스 1세의 성공적인 외교정책과 종교정책을 포기했다는 부분이었다. 이 둘이 왕과 의회의 사이를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찰스에게 상당히 비판적인 Coward와 Gaunt 선생도 인정하는 바, 왕과 의회 사이는 이미 제임스 1세의 말년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미해결 상태인 재정 개혁 문제가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심각한 문제였음은 물론이다.


이어서 외교적인 면에서 봤을 때, 제임스 1세의 평화주의 정책은 대단히 인기가 없었다. 의회를 비롯한 대다수의 프로테스탄트 신민들, 특히 청교도들은 잉글랜드가 국제 프로테스탄티즘의 일부로서 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찰스와 스페인 공주의 결혼협상 결렬 이후 이런 분위기는 더욱 높아졌다. 찰스도 적극적인 주전파로 돌아섰다.


결국 1624년 의회에서 스페인과의 전쟁이 결의되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여전히 우물쭈물했다. 그는 군대를 보내기는 보내되, 팔츠로 진입하거나 스페인군과 교전하는 것은 금하는 애매한 방식을 취했다. 결국 이 군대는 네덜란드에서 군자금만 까먹다가 질병으로 상당수를 잃었다. 이 사건으로 의회는 왕에 대해 결정적인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이 의구심은 이후 찰스 1세의 발목을 두고두고 잡게 된다.


두번째로 종교 정책 부분을 봐야 하는데, 이미 제임스 1세의 말년부터 국왕이 공정한 조정자로서 잉글랜드 교회의 각 세력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이상은 힘들어지고 있었다. 특히 제임스는 청교도들이 자신이 애써 세운 질서와 안정에 가장 큰 위협이라는 생각을 분명히 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말년의 제임스는 작정하고 고교회파 앵글리칸을 밀어주기 시작한다. 찰스 1세의 종교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윌리엄 로드 같은 이들이 그들이었다. 당연히 청교도들은 이에 대해 음모론에 가까운 의심을 품게 되었다. 제임스 1세의 말년의 잉글랜드 정치는 이미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것이 찰스 1세가 물려받은 정치환경이었다.



영국 내전의 기원 (5) 제임스 1세의 성과와 한계 History-근동, 서양사

국왕 제임스 1세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제임스 1세는 상당히 오랫동안 평가가 꽤 좋지 않았던 왕이다. 이러한 혹평은, 스코틀랜드 왕으로서 그가 전통적으로 받아온 높은 평가와 대조되어 한동안 학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필자가 이 카페에서도 여러번 말해온 바이지만, 역사상의 인물(그리고 현재 우리 주변의 인물들도) 중에는 100퍼센트 암군도, 100퍼센트 명군도 찾아보기 힘들다. 100퍼센트 나쁜놈이나 국가도, 100퍼센트 착한 분이나 국가와 마찬가지로 찾아보기 참 힘들다. 인간이나 사회나 국가나 모두 마찬가지로 그런 이분법이 통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한 존재들이다. 이런 격변의 시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현재 학자들은 제임스 1세와 그의 치세를 어떻게 보는가?


제임스 1세


사실 근대 초 유럽의 군주들 중 제임스 1세는 제법 독특한 축에 들어간다. 유럽의 군주는 전통적으로 전사였고, 전사로서의 자질을 가져야지만 귀족들과 백성들의 존경심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제임스 1세는 그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제임스 1세는, Hutton 선생이 표현하듯, 브리튼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 '학자 군주'라는 명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왕이었다.


단순히 책 많이 읽고 박식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걸로 치면 헨리 8세 같은 왕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제임스 1세는 단순한 지식습득을 넘어서 진짜 '지성(intelligence)'이 있었다. 그는 역사, 신학, 고전문학 전반에 조예가 깊었을뿐 아니라 자신만의 통치 철학과 신학 이론을 세울만한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자답게 자신의 해석과 다른 해석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을 모순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책상물림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임스 1세는 타고난 정치꾼이었다. 교활할 정도로 기민하고 상황 판단이 빨랐으며, 정치적 스킬로 위기를 벗어나는 능력이 탁월했다. 인사관리 능력도 뛰어났고, 토론 실력도 좋았다.


그러나 장점만 있는 사람은 없는 법이라, 이러한 그의 장점들 못지 않은 약점들도 있었다. 우선 국왕이라면 위엄과 카리스마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에 그는 신체적으로 크게 볼품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튜더 왕가의 왕들은 자신의 초상화를 수없이 양산해서 프로파간다로 활용했지만, 제임스 1세의 경우 초상화를 그리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러한 신체적 약점으로 인해서 제임스는 군중들 앞에서 상당히 수줍음을 타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수줍음은 곧잘 짜증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그는 화가 났을 때는 상당히 더러운 성질머리를 자랑하는 왕이 되었다.


이 약점은 그가 당시 잉글랜드인들이 싫어하는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해볼때 상당히 큰 부분이었다. 더욱이 그는 신민들의 인기를 얻으려는 노력에는 별로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제임스는 정치 게임에는 탁월한 재능을 자랑했으나 일상적인 행정과 같이 지루한 업무는 아주 싫어했다. 그러나 유능한 재상과 관료들만 잘 선발해놓는다면 이는 반드시 약점이라고 볼수는 없다. 헨리 8세도 똑같이 행정업무를 싫어하면서 거의 손도 대지 않았으나 대신 울시 추기경-토머스 모어-토머스 크롬웰로 이어지는 재능있는 관리들을 연달아 기용해서 내정을 철저하게 일임했다. 한국은 왕이 모든 업무를 다 틀어쥐면 왕권이 강해지고 나라가 잘 돌아가고, 재상에게 전담하면 왕권이 약해지고 나라가 망조든다는 관념이 이상하게 강한데, 이런 고정관념은 많이 수정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상당히 많은 장점과 약점을 모두 가지고 즉위한 제임스 1세는 엘리자베스가 남겨놓은 쉽지 않은 유산과 마주하게 되었다. 과연 그는 어떻게 대처했으며 결과는 어땠을까?







제임스 1세의 대외정책


앞서 말했듯, 근대 초 유럽의 군주로서 제임스 1세가 가장 특이했던 점은 군사적 영광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신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가장 큰 요인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겁쟁이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이 시대 군주들 중 보기 드문 평화주의자로, 전쟁은 국가간의 관계에 있어 최후의 수단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스페인 선박을 상대로 한 사략선의 약탈행위를 금지함과 동시에,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계속되어온 스페인과의 긴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었다. 본인의 평화주의뿐만이 아니라 잉글랜드는 더이상 전쟁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 국가재정 시스템이 형편없이 시대에 뒤떨어진 상황에서 유럽의 초강대국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힘겹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때쯤 되면 스페인도 그다지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얻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양국의 이해관계는 비교적 쉽게 맞아떨어졌다.


영국-스페인 종전을 위한 런던 회담, 1604


1604년, 런던 조약으로 잉글랜드는 스페인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로 인해서 제임스 1세는 그동안 잉글랜드의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안겨주던 전쟁을 마침내 끝냈다. 더욱이 이 협정은 잉글랜드가 실익도 챙기고, 체면도 크게 잃지 않는 상태로 끝냈다.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이것은 제임스에게 상당히 비판적인 학자들까지도 그의 '외교적 승리'라고 평가하는 작지 않은 업적이다.


그러나 군사적 영광과 직결되는 국제적 위신이 중요한 시기에, 제임스 1세의 평화정책이 과연 존중을 받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 있어서 제임스는 잉글랜드의 위신을 세우는 방식으로 상당히 독특한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전사군주 대신, 유럽 각국의 관계를 중재하는 일종의 '피스메이커'가 됨으로서 국제적 위상을 확보하려 했다.


이를 위한 그의 안배는 상당히 흥미로운데, 그는 딸은 프로테스탄트 국가에 시집보내고, 아들은 가톨릭 국가에 장가들게 하는 방식으로 균형을 잡으려 했다. 단순한 균형을 넘어서, 이는 두 세력 모두에 인맥을 만들어서 갈등상황에서 중재 역할을 하고자 함이었다. 그의 딸 엘리자베스는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아내가 되고, 그의 아들 찰스는 처음에는 스페인 공주와 결혼시키려 하다가 협상이 결렬되자 프랑스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실제로 평화의 중재자로서 제임스 1세의 명성은 이 시기에 꽤 높아졌다. 그러나 잉글랜드 신민들이 매료될만한 대외정책은 아니었다. 그리고 애써 조정해오던 평화는 나중에 사위 덕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1618년, 제임스의 사위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반기를 든 보헤미아의 왕위를 수락하였다. 이 사건은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유럽은 이제 국제 프로테스탄티즘과 국제 가톨릭주의가 정면충돌하는 무대가 되었다. 여기에 황제가 친족인 스페인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평화의 중재자를 자처해오던 제임스 1세로서는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종파주의 시대는 국민국가 시대와 다른 점이 많다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아직 근대 민족주의 이후의 국민적 아이덴티티보다 종파적 아이덴티티가 더욱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기였다. 잉글랜드의 개신교도들, 특히 강경 칼뱅파는 자연스럽게 자신들을 국제 프로테스탄티즘의 일부로 생각하였고, 당연히 제임스 1세가 군사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사위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제임스 1세는 늘 그랬듯이 무력을 쓰지 않고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우선 스페인에 '프리드리히의 영토를 공격하지 않으면 당신들과 우호관계를 맺겠다'라는 의사를 타전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협상 결렬을 대비하여 전쟁 준비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이 전략은 대단히 기발한 것이었으나 당시에 수행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것이었고, 결국 역효과를 냈다. 스페인과의 회담이 길어지는동안, 의회는 전쟁을 할 것 같지도 않으면서 전쟁 대비하게 자금을 달라는 요청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 결과 제임스와 하원의 관계가 악화되어 의회 해산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뜻대로 안풀리는 외교와 의회와의 관계는 제임스 1세의 말년을 상당히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후 살펴보겠지만 재정개혁의 되풀이된 실패도 겹쳐서 말년의 제임스는 거의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더 주목해야 할것은 당시 잉글랜드 개신교도들의 호전적인 요구였다. 제임스 1세의 평화주의 정책의 방향은 분명 옳았으나(당시 잉글랜드는 스페인과 전쟁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는 그의 인기 감소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는 이후 찰스 1세의 치세에도 상당히 복잡한 문제를 제공하게 된다.







재정개혁 시도와 그 실패


제임스 1세는 그 성향이 앞서 언급했듯 평화주의자이기도 했지만, 당시 잉글랜드의 재정상황 자체가 전쟁이고 뭐고 할 상태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모르쇠 정책 덕분에, 당시 잉글랜드의 재정 시스템은 스코틀랜드를 제외하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축에 들었다.


예전 글에 언급했듯이, 엘리자베스는 돈 부족으로 인해 주요 귀족과 관료들에게 극단적으로 인색하게 굴었다. 이는 관료들의 부패와 탈세를 촉진하여 많은 문제를 낳았다. 제임스는 그러한 인색함을 따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안그래도 인기없는 외국인 군주로서 그건 정치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근대 초의 군주는 관대하게 후원과 유흥과 잔치를 베풀 의무가 있었고, 제임스는 정확히 그렇게 했다. 이때문에 그는 꽤 오랫동안 사치하고 방탕한 군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고, 이런 관대함 덕분에 초기 스튜어트 체제는 비교적 쉽게 안착할 수 있었다. 그가 관대하게 뿌린 돈과 토지와 관직은 많은 잉글랜드 신민들의 충성을 사는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제임스의 정책을 마냥 옳다고만 할 수도 없다. 제임스 1세의 단점 중 하나는, 분명 옳은 정책을 시행하는데 적절하게 멈추지를 못하고 너무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관대함은 분명 필요한 것이었지만, 때때로 과도한 사치와 방탕이라는 선을 넘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히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이는 그의 궁정문화가 퇴폐스러운 이미지로 알려지는데 일조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을 막 뿌려대기에는 당시 재정상황이 너무 안좋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건 이제는 낡아서 총체적인 개혁이 필요한 체제가 근본 원인이라 제임스의 탓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스페인과의 전쟁을 멈춤으로서 상당한 경비를 절약했음에도 재정상황이 나아지지 않은데에는 지출을 너무 늘린 제임스의 책임도 일정부분 있었다.


어찌되었건 재정문제가 절약으로 해결될 차원이 아니라는것도 명백했다. 제임스 1세와 관료들은 이 체제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고, 이를 손보기 위한 작업에 돌입하였다. 1608년, 잉글랜드의 관세가 대대적으로 재조정되었는데, 이게 1550년대의 개혁 이후 처음 있었던 일이니 그간 재정 시스템 업데이트가 얼마나 안되어있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제임스 1세의 개혁시도는 수많은 반발에 부딪쳤다. 지난번 연재글에서 설명했듯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재정이 시스템적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수에게 1608년의 개혁시도는 별 문제없는 잉글랜드 헌정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재무상 로버트 세실 경은 1610년에 양원을 모두 소집하여 재정문제를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 결과 시도된 것이 이른바 '대계약(the Great Contract)' 이라는 왕과 하원 간의 타협안이다. 이 제안은 국왕이 후견권, 비상징발권을 비롯한 몇몇 봉건적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의회가 왕에게 매년 일정량의 돈을 제공하는 내용으로 되어있었다.


로버트 세실 경


이 계약은 사실 왕과 의회 모두를 만족시킬수 있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협상은 비교적 용이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의회가 재소집되었을때, 갑자기 의회 의원들이 발을 빼기 시작했다. 의원들 사이에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국가 재정 시스템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로 맛이 가있었는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왕의 수입을 늘려주면, 그때부터는 의회가 필요없다고 마음대로 통치하는거 아냐?"



협상이 지지부진해지자, 제임스 1세의 눈에도 갑자기 협상안의 문제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협상이 이루어지면 왕은 몇몇 봉건적 권리를 내주고, 매년 20만 파운드를 대신 받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20만 파운드는 고정된 비용이다. 지금과 같은 인플레이션의 시대에 그 가치는 매년 떨어질게 분명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제임스 1세도 이 협상안이 예전처럼 매력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재정개혁은 물건너가고 말았다.






종교정책의 성과와 그 한계


많은 연구자들은 제임스 1세의 치세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낸 정책으로 외교와 종교정책을 흔히 꼽는다. 국제관계에서도 독특했지만, 종교 면에서도 제임스 1세는 상당히 독특한 왕이었다. 그는 신학 면에서도 상당히 박식한 학자였기 때문에, 자신만의 이론이 확고했다. 그는 17세기 종파주의 시대의 왕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종교적으로 열린 마인드를 가졌던 사람이었다.


우선 정치가로서 그는 앞서 살펴봤듯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두 세력의 평화가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었고, 그 때문에 중재자를 자처했다. 이는 종파주의 시대에 매우 찾아보기 힘든 태도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자신의 종교관에서 기인한 바가 컸다. 그는 분명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그러나 당시 개신교 신자로서는 드물게도 로마 가톨릭에 별 적대감이 없었다. 절대다수의 개신교, 특히 강성 칼뱅파가 가톨릭을 마귀사탄, 적그리스도로 보던 시기에, 제임스는 가톨릭도 오류는 있을지언정 엄연히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일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엘리자베스처럼 가톨릭을 혹심하게 탄압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점도 그의 개신교 신민들의 큰 불만을 샀다. 가톨릭을 잡아죽여야 한다는 주장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영혼이 오류에 빠졌다고 해서 그 육신을 벌할 생각은 없소."




그러나 제임스는 학자이기 이전에 현실 정치인이었다. 그는 종교탄압은 하고 싶지 않았으나, 현실 또한 무시할 수 없었고, 때로는 신민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가톨릭을 탄압을 해야만 했다. 즉, 정치적 필요성으로 인해 제임스는 종종 자신의 이상주의적 신념을 포기해야만 했다. 더욱이 그는 스페인과 평화 때문에 많은 개신교 신민들로부터 의심의 눈길을 받던 처지였다. 따라서 Coward와 Gaunt 선생이 잘 설명하듯이, 치세 초반 제임스 1세의 대가톨릭 정책은 관용과 엄격한 탄압 사이를 자주 왔다갔다 했다. 가이 포크스 사건은 초기 관용에 기대를 걸었다가 뜻밖의 탄압을 당한 잉글랜드 가톨릭 신자들의 절망감을 배경에 깔고 있다.


그래도 제임스 1세를 높이 평가해줄 수 있는 것은, 맥카시즘 당시 미국과 흡사한 17세기 종파주의 잉글랜드의 한계 속에서 나름대로 종교적 관용이라는 자세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그는 공식적으로 가톨릭 신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지는 않았지만(혹은 못했지만) 탄압은 최소한도로 그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 균형을 항상 유지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사실 가톨릭보다 더욱 잠재적으로 폭발력이 큰 것은, 지난번 글에 언급한 잉글랜드 교회의 앵글리칸-퓨리턴의 분열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제임스는 자신은 교회 내의 분파를 초월한 입장임을 견지했다. 그는 생활방식에서 여러모로 청교도와 안 어울리는 사람이었지만, 예정설을 믿는 칼뱅파임을 자처하였다. 그는 절대 한 분파의 편을 과도하게 들지 않으면서 분파간 갈등의 조정자로 행동하였다.


제임스의 치세에 청교도들이 목소리 높여 주장한 godly한 개혁 대부분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소소한 개혁들은 최대한 반영하려 하였고, 특히 킹 제임스 성경의 번역은 청교도들의 실망감을 상쇄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반면 퓨리턴 중 가장 강경한 이들에게는 좀더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교회 전례 면에서 그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전통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를 위해서 국왕은 '앵글리칸' 혹은 잉글랜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중 일부를 고위 사제로 임명하여 청교도쪽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균형정책 덕분에 제임스 치세 내내 잉글랜드 국교회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앞서 본 그의 여러 정책들처럼 마냥 긍정적인 평만 하기도 어렵다. 재정정책과 마찬가지로, 제임스는 국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손보고 좀더 잘 굴러가게 하기는 하였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하지 못하였다.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제임스가 사망하면서 물려준 국교회는 '안정적이고 번창하였지만, 속은 갈등과 긴장으로 가득한 교회'였다. 더욱이 왕이 키워준 덕분에 성장한 앵글리칸 파는 청교도 강경파와의 대립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 갈등은 찰스 1세가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소결론-제임스의 치세


우선 제임스 1세는 상당한 자질이 있었으며,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서 즉위하였음에도 볼만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는 결코 휘그 사관이나, 몇몇 교양서에서 말하는 왕권신수설만 신봉하며 사치방탕한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다. 오히려 외교와 종교 정책 면에서 그는 동시대인들보다 훨씬 더 진보적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결코 본인 잘못만은 아니지만, 그도 엘리자베스 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에는 결국 손대지 못했다. 그의 치세 중에는 본인의 능란한 정치감각 덕분에 수면에 잠자는 상태였지만, 문제는 어떤 면에서는 더욱 악화된 상태로 찰스 1세의 손에 넘어갔다.


기존 체제, 특히 재정 시스템은, 비틀비틀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유지되고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 왕실의 빚은 더욱 늘어났고, 여기에 그의 치세때 시도되다가 실패한 개혁의 부작용과 제한된 효과가 맞물려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왕과 의회와의 관계, 종교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제임스 1세는 문제가 많은 체제를 1603년에 물려받아 이를 최대한 손질하면서 유지해왔다. 그 와중에 근본적인 수술도 열심히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 이 체제는 마침내 붕괴되기 시작한다.



영국 내전의 기원(4)-종교의 문제 History-근동, 서양사



영국 내전은 종교전쟁인가?


영국내전은 이전 세기 프랑스의 내전처럼 종교전쟁으로 흔히 분류되지는 않는다. 물론 예전 '청교도 혁명'이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던 때에는 이 시기 사회적 격변의 근간에 청교도 신앙이 있었다는 암묵의 동의가 있었으나, 그 초점은 어디까지나 시민혁명의 동력으로서의 청교도 신앙이었다. 또한 마르크스 사관을 거치면서 영국 내전에서 종교의 역할은 사실상 사회경제적 주장을 표출하는 일종의 외피 정도로 격하되기도 하였다.


수정주의의 주요 성과 중 하나는 이 시기 사람들의 망탈리테에서 종교의 중요성을 회복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 연구자들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는 부분도 영국 내전에 있어서 종교의 중요성이다. 예전에는 "설마 그래도 종교 때문에 이런 전쟁이 일어나겠어. 전쟁은 다 돈과 권력 때문이고 종교는 핑계지"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인, 세속화된 현대인의 관점을 과거에 투사하는 오류이다. 이 시기의 종교는 개인과 사회, 국가의 아이덴티티 그 자체였다. 이에 대해서는 예전에 '종파국가' 개념을 설명하며 이야기한바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적 관용은 이 시기에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관용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종파의 뿌리를 뽑을수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일시적으로 타협하는 것이었다. 보편교회의 큰 틀 안에만 머문다면 왠만한 이설은 포용하던 중세에 비해 근대 초의 관용은 분명 크게 후퇴했다. 사실 17세기에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을 가장 정확히 이해하는 방식은 바로 현대의 정치 이데올로기, 특히 냉전시대의 그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 내전을 완전히 종교전쟁이라고 규정하기에도 무리가 따른다. 종교는 분명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그 자체만으로 전쟁을 촉발시킨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종교의 문제는 지난번에 설명한 엘리자베스 체제의 재정적 문제와 결합하여 더 큰 문제를 낳았다. 그리고 이 전쟁에 참여한 이들은 자기만의 각각 다른 이유로 무기를 들었고, 그게 모두 일괄적으로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영국 내전은 종교전쟁의 성격이 대단히 강한, 복합적인 전쟁이었다.


그렇다면, 이 내전에 종교적인 성격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종교전쟁으로서의 성격일까가? '청교도 혁명'이라는 지금은 한물 갔지만 예전에 널리 통용되던 명칭과, 청교도 특유의 반가톨릭주의 레톨릭으로 인해 가끔 영국 내전도 가톨릭-개신교 대립의 일환이라고 보는 이도 있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왕당파는 친가톨릭, 의회파는 반가톨릭이라고 파악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앞으로의 연재를 통해 확실히 보겠지만, 분명한 오해다.(단 왕당파쪽이 의회파보다 가톨릭 배척이 덜 극단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일단, '잉글랜드'의 내전에서 가톨릭은 일부 개인 자격으로 참전한 이들을 제외하면 관여한 바가 거의 없다. 영국 내전은 Blair Worden 선생이 지적하듯이, 영국 국교회가 어떤 형태의 개신교가 되어야 하는가를 놓고 벌어진 개신교 간의 내전이었다.






영국 교회의 문제


17세기 초 영국 국교회 또한 엘리자베스 체제의 일부였다. 이 교회는 상당히 독특한 형태의 혼합물이었으며,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이 독특한 체제는 영국 국교회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숙명을 부여하였다. 많은 최근 연구자들이 동의하듯이 영국의 종교개혁과 개종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점진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제임스 1세 치세에 이르면 국교회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 교회의 중도 정책에 자부심을 갖는 이들도 많아졌다. 이들은 영국 교회의 중용이야말로 잉글랜드를 유럽을 휩쓰는 종교전쟁의 참화와 광신으로부터 구해낸 비결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체성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되지 않았고, 여기에 심각한 갈등 요소가 잠재해 있었다. 엘리자베스 국교회는 신학적으로는 칼뱅파의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가톨릭 교회의 교계 체제와 일부 전례적 요소를 남겨놓은 교회였다. 이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놓고, 점차 영국 교회를 놓고 두 개의 대립적인 시각이 등장하게 된다. 이 둘을 뭐라고 이름붙여야 하는가는 역시 논쟁이 분분하지만, 편의상 Worden 선생의 분류를 따라 '앵글리칸'과 '퓨리턴(청교도)'으로 부르도록 하겠다.


사실 편의상 이렇게 부르긴 하지만, '퓨리턴'은 일종의 멸칭이면서 비꼬는 이름으로 붙인 것이라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이들은 스스로를 godly, 즉 '경건한 이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후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키네 된다. 자신들이 godly라면 자신들의 믿음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이들은 ungodly가 되기 때문이다. Coward와 Gaunt 선생이 잘 설명했듯이 이들은 특별히 전투적인 강경파 칼뱅주의 개신교도였으며, 교회뿐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생활 모든 부분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경건한 방식으로 바꾸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천년왕국설을 따르는 종말론자들이었다. 이들은 어지러운 현실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확신을 가졌다. 따라서 현실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은 이 틀에 맞추어 해석되었다. 이 종말의 시기에 잉글랜드가 구원을 받으려면, 교회와 사회의 타락한 요소들을 모두 쓸어버려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동시에 이들은 예정설의 강경한 신봉자들이었다. 이에 따르면 인류 대다수는 멸망하기로 정해진 운명이었다.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은 본인의 노력이 아닌, 오직 하느님의 전적인 은혜와 자비로 구원받게 된다. 이 예정설은 사실 엘리자베스 치세 후반부터 청교도뿐 아니라, 영국 국교회 전반에 널리 수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톨릭 신학을 반박하기 위한 이론적인 차원에서 수용된 것이었다. 반면에 청교도는 이 이론을 삶의 핵심으로 삼고, 자신들이 선택받았음을 확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렇게 해서 예정설에 대한 절대적인 신봉은 청교도 아이덴티티의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제임스 1세 치세에 들어와 나타나기 시작한 '앵글리칸'과 청교도가 정면 충돌한 부분이었다. 이에 대한 Worden 선생의 설명은 경청할만 하다.




"이데올로기는 예전 믿음과의 타협할 수 없는 충돌을 통해 스스로를 정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타협을 통해 완화된다. 강경파 이론가들은 이런 현상에 좌절하면서 더욱더 본래의 이론에 매달리게 된다. 칼뱅파의 경우가 그러했다."  Blair Worden, The English Civil Wars 1640-1660 (London, 2009), p.11.




쉽게 말하면, 여기서 '앵글리칸'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본래의 강경한 칼뱅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다소 온건한 방향을 찾게 된 이들이고 '퓨리턴'은 이런 경향을 개혁의 쇠퇴라고 보며, 더욱 강경한 근본주의적 칼뱅파 신학에 매달린 이들이었다.


제임스 1세의 치세에 이르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칼뱅의 신학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부정하는 예정설은 하느님을 폭군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할수 없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을 향해 돌아설 수 있도록 하는 잠재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이 앵글리칸이었다.


예배의 형태를 두고도 앵글리칸은 청교도와 의견이 갈렸다. 청교도는 교회 내에서 옛 가톨릭의 흔적을 완전히 쓸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개혁은 여전히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가 청교도의 주장이었다. 반면에 앵글리칸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아니, 지금도 너무 나갔다"라고 주장하였다. 앵글리칸은 교회의 좋은 전통까지 파괴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앵글리칸은 교회가 가진 호소력은, 칼뱅파가 좋아하는 설교에 대한 과도한 강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영속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전례와 성사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강경 칼뱅파는 이러한 신학적 경향을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일어나던 움직임과 결부시켜 '아르미니우스주의'라고 칭하며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당시 영국 그리스도교가 퓨리턴과 앵글리칸으로 칼로 자르듯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는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퓨리턴들도 예정설과 강경한 반가톨릭주의 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집단이었고, 얼마나 강경한 성향을 띄었는가는 개개인마다 달랐다. 또한 Michael Braddick 선생이 지적하듯, 전통에 대한 강조는 잉글랜드 프로테스탄티즘의 중요한 요소였다. 강경한 퓨리턴은 소수였고, 대다수의 잉글랜드 칼뱅파는 주교제나 전통 전례를 큰 불편함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종교적 긴장과 갈등이 곧 내전의 발발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분열의 씨가 상당히 깊게 뿌려져있었으며, 양극단의 강경파가 아직까지는 소수파였으나 점점 더 강경해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퓨리턴은 앵글리칸, 혹은 '잉글랜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등장에 불안을 느끼며 더더욱 강경하게 "예정설천국 불신지옥"을 부르짖었다.







반가톨릭(?)주의


이 시기 잉글랜드의 종교갈등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것 하나가 툭하면 등장하는 반가톨릭주의 레토릭이다. 특히 청교도와 같은 강경파 칼뱅주의자들은 말끝마다 popery(당시 가톨릭에 대한 멸칭)를 달고 살았고, 이러한 레토릭은 내전기 내내 의회파 내에서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 잉글랜드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개신교 내의 갈등이라면 가만히 있는 가톨릭에 대한 공격이 주 의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Braddick 선생의 설명대로, popery가 반드시 진짜 가톨릭 신자들만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자도 다른 개신교 신자의 눈에 얼마든지 '교황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가령, 당시 가장 강경파 퓨리턴이 보는 종교지도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로마 가톨릭: 악의 축, 마귀사탄

루터파: 절반쯤 개혁하려다 만 교회

앵글리칸: 가톨릭 2중대

아르미니우스주의: 가톨릭 2중대




쉽게 말하면, 퓨리턴의 핵심적인 가치인 이중예정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가톨릭이거나, 개신교로 위장한 가톨릭이거나, 가톨릭에 물들 잠재력이 있는 개신교인 셈이었다.


바로 이 부분이 큰 문제였다. Worden 선생이 지적하듯, 퓨리턴의 종교적 비전에 공감하는 이들은 소수였으나 이들이 외치고 다니는 '가톨릭 반대'는 프로테스탄트 사이에서 넒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는 '가톨릭'의 정의가 제각각이었다. 앵글리칸에게 가톨릭이 로마 교황을 따르는 교회였다면, 강성 퓨리턴에게 가톨릭은 사실상 자기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이들 전부였다. 특히 앵글리칸과 아르미니우스파는 퓨리턴이 보기에는 가톨릭 복귀를 위해 음모를 꾸미는 세력에 불과했다.




청교도: "누가 가톨릭인지는 내가 정한다"



이런 까닭에 당시 잉글랜드의 퓨리턴들은 자신들이 적대적인 가톨릭에게 사방에서 포위당한 상태이며, 따라서 잉글랜드의 개신교는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고, 더 나아가 잉글랜드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을 잃을 위기에 놓여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물론 다시 말하지만, 이 시기 진짜 가톨릭은 비교적 얌전히 있었고, 퓨리턴과 대립하는 이들은 퓨리턴의 시각에 동감하지 못하는 '개신교'였다. 퓨리턴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심리상태는 이후의 전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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