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그 사관과 그 비판: 영국 근대사 해석의 변화 History-근동, 서양사

들어가며

예전에도 관련한 글을 쓴 적이 있지만, 18-19세기는 물론 20세기 중반까지 영국사 해석에 있어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것은 이른바 '휘그 사관(Whig history)'이라고 불리는 역사관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20세기 중반 이전에 쓰여진 영국사 서적(과 그 영향이 아직도 남아있는 몇몇 책들들)으로 영국사에 입문하려는 분들은 강하게 뜯어말리고 싶은데, 그 이유는 1950년대부터 시작해서 제기된 일련의 비판으로 인해 정통 휘그 사관은 사실상 학계에서 축출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현재 학계에서 '휘그 사관'은 심지어 결정론적 역사관을 조롱하는 의미로 쓰이기까지 한다. 그런 마당에 휘그 사관의 지배력이 대단히 강하던 시절에 쓰여진 책으로 영국사에 입문한다면, 상당히 현재 학계의 해석과 동떨어진 인식을 갖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단순히 그때 나온 책들뿐만이 아니다. 여전히 대중적인 역사서에는 이 옛 사관의 잔재가 상당히 강하게 남아있다. 이는 특히 소설이나 드라마 등을 통해 대중들의 의식 속에 끊임없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관은 어떻게 해서 학계에서 밀려났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으로 대중적인 인식에 끈질기게 남아있을까?





휘그 수정주의

휘그 사관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진보사관'이다. 영국의 역사는 입헌군주제, 의회민주주의, 개인의 자유를 위한 걸음이었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상당히 목적론적(teleological)이며 결정론적이다. 그리고 이 사관에 따르면, 이러한 진보의 걸음을 이끌었던 중요한 원동력은 '영국의 프로테스탄트화'였다. 영국의 역사 전체를 위의 '필연적으로 도달할수밖에 없는 목표들'을 위한 진보의 과정으로 해석하다보니, 얼핏 보기에 그것에 반대되는 요소들은 철저히 역사의 반동으로 낙인찍히고 폄하되어왔다.(가령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 군주들 및 스튜어트 왕가의 왕들) 이는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해석으로, 현대 역사학에서 반드시 피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휘그 사관에 대한 첫번째 도전은 20세기 중반에 등장한다. 이 시기의 역사학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있는 사람을 뽑으라면 단연 제프리 엘튼 경(Sir Geoffrey Elton, 1921-1994)을 빼놓을 수 없다. 엘튼 경은 사료의 객관적인 분석에 기반을 둔 역사를 강조하고, 정치사를 연구하는 매우 전통적인 스타일의 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역사학 중 휘그 사관의 목적론적 주장에는 온전히 동의하지 않았다.

제프리 엘튼 경 (1921-1994)

특히 엘튼이 반대했던 것은 역사에 있어서 '반드시 일어나도록 정해진 길'이라는 개념과, 의회의 역할에 대한 과다한 의미부여였다. 첫번째는 17세기 영국 내전은 전혀 불가피한 귀결이 아니었다는 주장으로 표현되었고, 두번째는 튜더 시기 행정부에 대한 강조로 나타났다. 첫번째는 실제로 이후 수정주의 역사관의 대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두번째 경우를 보면,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튜더 시기에 있어서 엘튼은 전통적인 역사관을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튜더 시기, 특히 종교개혁 시기를 해석함에 있어서 엘튼은 '강력하고 근대적인 중앙 행정부'의 탄생을 강조하였다. 헨리 8세의 정부는 영국사 최초의 근대적인 행정부였으며, 이 정부의 탄생은 중세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혁명적인 변화'였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엘튼 경은 그의 대표작의 제목을 <튜더 정부 혁명(Revolution in Tudor Government)>라고 이름붙였다.

엘튼이 보기에 이 정부 혁명을 주도한 영웅은 토머스 크롬웰이었다. 기존의 전통적인 휘그 사관에서 크롬웰은 음흉한 악당이었다. 전통 휘그 사관은 왕과 행정부의 권력을 제한하고 의회정치를 찬양했으며, 국왕의 절대권에 맞서는 개인의 양심을 강조하다보니 헨리 8세의 심복으로 행정부의 힘을 강화한 크롬웰은(그가 아무리 영국의 프로테스탄트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더라도) 곱게 보이지가 않았다.

토머스 크롬웰

엘튼 경은 기존의 시각과 달리 크롬웰이야말로 근대적인 관료제적 행정부의 창시자라고 보았다. 엘튼은 기본적으로 '강력한 정부야말로 혼란과 무질서를 방지한다'는 시각을 가진 보수적인 학자였다. 그런면에서 그는 크롬웰이 만들어낸 효율적이고 강력한 행정부가 튜더 시대의 사회혼란을 방지하고, 종교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았다.

여기서 종교개혁의 성공적인 안착이 그가 크롬웰과 튜더 행정부를 높이 평가한 한 근거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엘튼은 이로 인해 '교회와 국가라는 이중구조가 파괴'되었으며, 이는 근대국가로서 영국이 나아감에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는 교과서 등을 통해 익숙한 서술이다. 그러나 미리 말해두자면, 현재 학자들은 종교개혁이 과연 이러한 가치를 갖는지에 대해 예전보다 상당히 회의적이다.

어찌되었건 그런 면에서 봤을때, 엘튼 경은 전통적인 휘그 사관에 많은 부분 비판적이었지만, 적어도 16세기 해석에 있어서는 전반적으로 휘그 사관의 영향력을 온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런면에서 그의 역사학은 Admir Skodo 선생의 표현인, '휘그 수정주의(Revisionist Whiggism)'이라는 표현이 가장 정확하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관

비슷한 시기 엘튼의 주적은 사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이었다. 이건 주로 17세기 영국내전과 관련한 쟁점이지만, 크리스토퍼 힐과 브라이언 매닝 등 일련의 학자들은 16-17세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계급 형성을 이 시기 영국사의 격변의 주 원인으로 보았다. 이 해석에서도 프로테스탄티즘은 중요한 가치였다. 특히 이들은 이 시기에 등장한 각종 급진파 세력에 주목하면서, 저교회파 개신교가 급진적인 세력의 핵심이었으며, 이들이 참여한 의회파가 국왕파에 대비되어 진보의 세력으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따지고보면 이 마르크스적 해석도 목적론적이라는 면에서(그리고 프로테스탄티즘을 진보의 원동력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휘그적 해석과 큰 틀에서 다르지 않았다. Black 선생이 표현하듯, 어떤 면에서 봤을때 이것은 사회경제적인 용어로 재구성된 휘그 사관에 지나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엘튼의 해석도, 마르크스적 해석도 현재의 학계에서는 사실상 밀려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엘튼 경의 직계제자들도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가장 늦게 바뀌는게 교재, 개설서라지만 이미 영국 내에서 출간되는 개설서에서도 이러한 해석들은 반박되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수정주의 그리고 현재

앞서 계속해서 설명했듯이,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해석(어쩌면 교과서 등을 통해 이와 비슷한 요지의 해석을 접한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된다)은 한 가지를 당연한 전제로 깔고 있다. 즉, 종교개혁은 영국사의 진행에 있어서 '긍정적인'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강력해진 국가 내지는 정부도 그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근대화'에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오랜세월에 걸쳐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전제에 학자들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것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해오던 것을 의문을 품고 바라보니 실제로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는 엘튼에 대한 중요한 반박에서 잘 드러난다.

앞서 설명했듯, 엘튼이 토머스 크롬웰을 영웅시한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엘튼 경: 크롬웰은 매우 효과적이고 강력한 행정부를 만들어 사회혼란을 방지했다. 프로파간다를 통해 헨리8세의 정책에 동의하는 이들을 끌어모았고, 이들로부터 얻는 정보 및 고발을 통해 가톨릭과 불순세력을 색출하여 영국의 종교개혁을 이루어냈다. 이는 근대화의 기반이 되었다.


이에 대해 '이거 뭔가 이상한데?'라고 생각한건 로렌스 스톤 선생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이의를 제기한다.


스톤:....이거 뭔가 나치 독일 같은데?


그야말로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었다.(아이러니한 것은 엘튼 경 본인이 독일계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영국에 귀화했으며, 2차대전 중에는 영국 제8군 소속으로 복무했던 이라는 사실이다)

기존의 휘그 사관은 영국의 개신교화를 중요한 가치로 삼고 그것이 헌정주의와 개인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의 '긍정적인 가치'를 일웠다고 보았다. 그런 면에서 헨리 8세 시대의 정부도 '긍정적'으로 해석되어온 것이다. 그런데 그 개신교화를 위한 '억압과 통제'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게 옳은 해석인가?  뭔가 앞뒤가 안맞는다는 생각이 점차 퍼져나갔다.

이는 16-17세기 해석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가령 예전에는 영국의 개신교화를 근대화의 필수조건으로 보았는데, 이에 대해 영국내전을 연구한 마크 키쉴란스키 선생은 17세기 퓨리턴(퓨리턴의 만행에 대해서는 바로 이전 글로 하나 소개한 바 있다)을 비롯한 강경파 개신교도들의 히스테리컬한 반가톨릭주의가 대체 어딜 봐서 '근대적'이냐고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이러한 비판들이 축적되어, 앞서 말했듯, 지금 전통적인 휘그 사관은 물론, 엘튼 식의 수정된 휘그 사관도 더이상 학계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지금은 사실상 수정주의 해석도 넘어선 단계다. 지금 학자들은 이 시기의 역사적 경험은 각 개개인의 상황과 가치에 따라 대단히 다양했으며, 어느 하나의 가치를 들어 해석하기가 어렵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남아있는 휘그사관

그러나, 학계의 중론이 대중적 레벨까지 반영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지난 수백년간을 지배해온 사관이라면 바뀌기가 더욱 어렵다. 특히 학계에서는 당시 상황의 복잡성과 다양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는 딱딱 맞아떨어지는 깔끔한 내러티브를 좋아하는 일반 대중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히 소설과 드라마, 영화 등은 플롯의 특성상 깔끔한 내러티브를 선호하게 되고, 이는 대중들에게 한참 전에 밀려난 사관을 다시 주입하는 효과를 낳는다.

가장 확실한 예가 소설가 힐러리 맨틀의 히트작이자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끈 <울프 홀>이다. 이 작품은 토머스 크롬웰을 주인공으로 삼고, 토머스 모어를 메인 악역으로 삼는 등 제프리 엘튼 경 식 사관의 영향력이 역력하다. 이미 학계에서 사라진지 오래인 낡은 사관을 마치 새로운 해석인양 소개한 셈이다.

이 소설과 드라마의 성공은 많은 전공학자들로 하여금 기껏 낡은 사관을 비판해놨더니, 이 작품 때문에 일반인들의 이 시기에 대한 이미지가 또 이쪽으로 굳어지겠다고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특히 영국 종교개혁에 대한 수정주의 사관으로 유명한 대가인 E. 더피 선생은 이 작가와 소설을 본인의 최신 저서에서 직접 언급하면서 비판했는데(학술서에서 다른 학자의 학술서도 아니고 대중소설을 언급하면서 비판하는 건 그리 흔한게 아니다), 그 글을 읽다보면 선생의 깊은 빡침이 그대로 느껴진다.

사실 국내의 모 위키에서도 튜더 시대 관련 몇몇 항목들에 그 소설 내지는 드라마의 영향력이 여과없이 반영된 부분이 없지 않는데, 이 역시 역사인식에 있어서 대중문화가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하겠다. 필자가 갑자기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도 모 위키의 그 대목들을 어쩌다 보고나서, 영국 학계에서 이 시기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약간이나마 전달하고자 함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Eamon Duffy, Reformation Devided: Catholics, Protestants and the Conversion of England (London, 2017).
Admir Skodo, The Afterlife of Idealism: The Impact of New Idealism on British Historical and Political Thought, 1945-1980 (Berkeley, 2016).
Ronald Hutton, Debates in Stuart History (Basingstoke, 2004).
Keith Jenkins, On What is History?: from Carr and Elton to Rorty and White (London, 1995).
Christopher Haigh, The English Reformation Revised (Cmabridge, 1987).

생일이네요 일상잡담

처음 영국으로 올때만 해도 아직 20대였는데 지금은 크읅...ㅠㅠㅠㅠㅠ
그래도 탄핵 덕분에 이번 생일은 최고의 선물을 받은셈입니다ㅋㅋㅋ

파면! 일상잡담

사필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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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업자득

경사났네



았싸!!!!!

영국내전기 청교도 최악의 만행 History-근동, 서양사

1645년, 네이즈비 전투에서 토머스 페어팩스 경과 올리버 크롬웰 등이 지휘하는 의회파 군대는 찰스 1세의 국왕군을 대파했다. 이 패배로 찰스 1세는 정예 야전군을 상실했고, 1차 내전은 그로부터 1년 안에 막을 내린다. 그런데 이 전투는 승패가 결정된 직후에 한가지 악명높은 에피소드를 남긴다. 바로 의회군 내의 청교도 병사들에 의한 왕당파 비전투원(camp followers) 공격이다.





사건

마침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의회파 병사들은 패주하는 국왕군을 추격하던 와중에 국왕군의 치중대를 발견하고 약탈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 병사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상당수의 여성들이었다. 사실, 잘 알려져있다시피, 근대 이전의 군대에서 군인들의 아내를 비롯한 여성들이 종군하면서 세탁, 취사 등의 일을 담당하는 것은 흔한 현상이었다.

그런데 네이즈비에서는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사건이 일어났다. 의회파 병사들이 이 여성들에게 달려들어 가차없이 칼을 휘두른 것이었다. 최소한 백 명이 그자리에서 살육을 당했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부상을 입었다. 더욱이 끔찍한 사실은 이 부상이 매우 의도적으로 가해진 신체훼손이었다는 점이었다. 이 잔혹행위에 대해 의회파 기록자는 매우 당당하게


"우리 병사들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그들 중 약 100명을 죽였다. 그리고 저 사악한 군대에 동행한 나머지 창녀들의 코와 얼굴에 칼질을 해서 표시를 남겼다."


...고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이 시기 전쟁에서 군대의 마구잡이 약탈에 비전투원이 공격당하거나 희생당하는 것은 비교적 흔한 일이었고, 특히 도시나 요새가 무력으로 탈취되었을때는 눈이 뒤집힌 공격군에 의해(더욱이 이 경우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에 더더욱) 무차별 살상이 일어나는 것은 관례적인 일이기도 했다.
네이즈비에서 잔혹행위를 저지르는 의회군(Graham Turner)

그러나 네이즈비의 경우는 이러한 불운한 희생자들과는 달랐다. 약탈 와중에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도 아니고, 혼란스럽고 피아식별이 어려운 요새 공격의 와중에 일어난 사건도 아니었다. 벌건 대낮에 여성들을 의도적으로 학살한 것은 당시 전쟁의 암묵적인 룰에 크게 어긋나는 행위였다.





원인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예전 퓨리턴을 비롯한 급진파 프로테스탄트가 영국의 역사전개에 미친 영향에 있어서 대체로 긍정적으로 해석되던 20세기 중반에는 "원래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고 약탈이나 하려고 했는데, 여자들이 식칼을 들고 저항하는 바람에 그리 되었을 것"이라고 변호해주기도 하였다.(대표적으로 Wedgwood) 그러나 이 여자들을 살해한 것을 자랑스럽게 보도하는 당대 의회파 기록들을 보면 그럴 가능성은 그리 높아보이지 않는다.

현대 학자들은 이 사건 뒤의 동기를 몇 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 우선 '젠더'와 관련된 것으로, 종군여성에 대한 퓨리턴의 뿌리깊은 혐오를 들 수 있다. 당시 퓨리턴들은 왕당파 종군여성들을 모두 '창녀'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이는 위의 기록에도 잘 드러난다. 근대 초의 형벌에서 얼굴에 칼질을 해서 상처를 내는 것은 "두번 다시 창녀짓 못하게 해주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퓨리턴들의 믿음과는 달리, 네이즈비에서 희생당한 종군 여성들의 대다수는 국왕군 병사들의 정식 아내들이었다는게 현대 연구자들의 중론이다.

두 번째로, 얼굴에 칼질 당한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살해당한 백여 명들의 여성들은 누구였을까의 문제가 있다. 이 역시 의회파가 남긴 기록에서 단서를 찾을수 있다. 의회군 병사들은 이들이 '아일랜드 여자들이었고, 따라서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Carlton 선생이 지적하듯, '아일랜드인=가톨릭=죽여도 된다(혹은, 죽여야만 된다)'라는 논리가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논리도 참 해괴한 논리이긴 하지만 어찌되었건 내전 발발 이전부터 가톨릭에 대한 더욱 철저한 탄압을 주장하던 퓨리턴들이라 그리 이해 못할 논리는 아니다. 그러나 어이없는 것은 이 시기 찰스 1세의 군대에 아일랜드 여성이 종군했다는 것은 사료적 뒷받침이 빈약하다는 사실이다. 현대 학자들은 이들이 아일랜드 여성이 아니라 웨일스 부대 병사들의 웨일스인 아내들이었을것이라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의 웰시어를 알아듣지 못한 퓨리턴 병사들이 이들을 아일랜드인으로 착각하고 학살해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Mark Stoyle 선생과 Ann Hughes 선생 등이 지적하는 '복수의 논리'도 있다. 바로 이전 해인 1644년에 콘월에 진주했던 의회파 군대가 패배하고 후퇴하던 와중에 현지의 남녀 주민들에게 습격을 당했던 적이 있다. 여기에 분노한(특히 여자들이 군대를 습격하는데 동참했다는 사실에 더더욱) 의회파 병사들이 '콘월의 복수다!'라고 외치며 칼을 휘둘렀던 것이다.

콘월에서 당한걸 엉뚱한 사람들에게 복수한다는 논리도 황당하지만(물론 이들은 네이즈비의 여자들도 우리가 패했으면 우리 목을 따러 왔을거라고 주장하며 정당화를 하긴 했다), 따지고보면 애초에 이들이 퇴각중에 습격을 당한것도 의회파 군대가 처음 콘월에 진주했을때 현지 주민들에게 거칠게 대해서 적개심을 키운게 주 원인이었으니 더욱 황당하다고 할 수 있다.




결론

모든 면에서 봤을때, 의회파 퓨리턴 병사들이 네이즈비에서 저지른 짓은 당대의 전쟁 기준으로 봤을때도 일반적인 룰을 심각하게 위반한 잔혹 행위였다는 결론을 피하기가 어렵다. Stoyle 선생은 이를 잉글랜드 내의 내전에 있어서, '최악의 만행(the single worst atrocity)'이었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참고문헌

Ann Hughes, Gender and the English Revolution (London, 2012).
Mark Stoyle, Soldiers and Strangers: An Ethnic History of the English Civil War (New Haven, 2005).
Charles Carlton, Going to the Wars: The Experience of the English Civil War, 1638-1651 (London, 1992).

북왕국 이스라엘의 위상: 아합의 전차부대 History-근동, 서양사

들어가며

I. 핀컬슈타인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켜 '잊혀진 왕국'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대다수 사람들의 관념에서 북왕국의 존재는 희미하다. 구약성서 내에서도 북왕국은 남왕국 유다의 그림자 속에 전반적으로 묻혀버렸다. 성서를 구성하는 신명기계 역사서의 기본 사조는 기본적으로 다윗 왕가 중심, 예루살렘 성전 중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 내에서 북왕국의 이미지는 대략 좋지 않다. 성서만을 통해서 고대 이스라엘을 접한 이들에게 북왕국은 일련의 나쁜 왕들이 연속해서 즉위하다가 일찍 망해버린 나라일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유다보다 인구도 많았고, 영토도 넓었고,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더 강성했다는 사실은 종종 잊혀진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와 함께, 주변국들이 기록을 검토하면 북왕국에 대한 상당히 다른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 따지고보면 이스라엘이나 유다나 근동의 정세를 좌우하는 초강대국이 되본적은 없는 나라들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스라엘 왕국은 지난번 글에도 서술하였듯이 그 전성기때 지역강국의 지위는 누린 나라였다. 이 글은 그러한 면모를 잘 보여주는 한 짤막한 기록에 대한 논쟁을 소개하려고 한다.





북왕국의 군대

1861년 영국의 고고학자 존 조지 테일러는 흔히 '쿠르크 비문'이라고 불리는 두개의 석비를 발견한다. 이것은 아슈르바니팔 2세와 그 아들 샬만에세르 3세의 치세를 기록한 비문이었다. 이 비문의 끝부분에는 샬만에세르 3세의 카르카르 전투와 관련된 기록이 서술되어 있었다. 기원전 9세기, 시리아 정복에 나선 샬만에세르 3세의 아시리아군은 11명의 왕들이 연합한 적군과 격돌하게 된다.


비문은 이 연합군의 구성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람-다마스쿠스의 하닷-에제르의 전차 1200대, 기병 1200명, 보병 20000명.
하맛의 이르훌레니의 전차 700대, 기병 700명, 보병 10000명.
이스라엘(Sir-'-la-a-a)의 아합(A-ha-abu)의 전차 2000대, 보병 10000명.
.......
이 열두 임금을 그의 동맹으로 데려왔다.
그들은 나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싸우러 왔다.
나의 주님이신 아슈르께서 내게 주신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내 앞장을 서신 네가르께서 내려주신 강한 무기들로 나는 그들과 싸웠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해석되는 비문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성서 내에서 다소 '찌질하고 나쁜 왕' 정도로 묘사되는 아합과 북왕국의 국제적 위상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일단 비문에 기록된 동맹 왕들 중에서 아합은 가장 많은 전차부대를 거느리고 있다. 전차 2천대와 보병 1만을 동원할 수 있었다면, 북왕국은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무시 못할 강국이었다는 뜻이 된다.






문제-정말 아합인가? 정말 2천대인가?

이런 이야기가 성서 내에서만 나왔다면 '그거 뻥'이라고 결론내리고 치워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이 비문은 엄연히 동시대 아시리아의 기록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우선 첫 번째 논점으로, 이 비문에 서술된 A-ha-abu가 정말 성서의 그 아합인가?라는 의문이다. 이 문제는 이미 비문이 처음 발견된 19세기때부터 제기되었고, 근래까지 계속된 의문이다. 일단 아시리아 기록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언급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오므리의 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쿠르크 비문의 '이스라엘'이, 정말 이스라엘로 읽는게 맞다면, 상당히 독특한 케이스에 속한다.

비판적인 학자들은 비문의 해당 구절이 가리키는 왕은 북서부 시리아의 한 왕국의 통치자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였다.(Gugler 1996, Woude 1986)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서는 Bob Becking 선생이 1999년 저서에서 효과적으로 반박한바 있다. 반박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이 시기 북서부 시리아에 우연히도 이스라엘과 발음이 유사한 나라가 있었고, 마침 그 나라의 통치자 이름도 아합과 발음이 비슷한 이름이었다고 가정해야 하는데, 그다지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아니다." 따라서 현재 대다수 학자들은 이 비문이 가리키는 것이 그 이스라엘의 아합 임금이 맞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보다 심각한 문제 제기는 비문이 묘사하는 병력에 대해서다. 비문에서,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동맹군에게 가장 많은 전차부대를 제공하고 있다. 일단 전차는 상당히 비싼 무기고, 전차부대는 양성하기 쉬운 부대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이 시기 아무리 강성했다 한들 결코 근동의 초강대국 레벨은 아니었는데 전차를 2천대씩이나 보유할 국력이 되었을까?

실제로 아시리아 제국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때 동원한 전차부대가 2002대에 기병이 5542명이었다. 이스라엘의 왕이 전성기 아시리아 제국이 동원한 전차와 동일한 수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었단 말인가? 게다가 Na'aman 선생이 지적하듯, 히타이트 왕국이 카데쉬 전투에서 동원한 전차가 2천5백 대였다는 점 또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합의 이스라엘 왕국은 히타이트 왕국의 전성기 때와 같은 국력을 자랑했단 뜻일까?

전차부대를 양성하려면 엄청난 수의 말이 필요하다. 아슈르바니팔 시대에 아시리아 전차는 네 마리 말이 끌었다. 이스라엘군 전차는 몇 마리의 말이 끌었는지 모르겠지만, 2천대의 전차부대를 유지하려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말이 필요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Na'aman 선생은 당시 이스라엘이 전국에서 말을 끌어올만한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대제국은 아니었으니, 말을 구하려면 제값을 주고 말 산지에서 사와야 했을텐데, 과연 그만한 경제력이 있었겠는가에 의문을 표한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아시리아 전차

그렇다면 아합의 2천대 전차 설에 회의적인 학자들의 결론은 무엇인가? 답은 매우 간단하다. 오타 낸 것이다. Tradmor 등은 실제로 쿠르크 비문에서 상당한 수의 필사 오류가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Na'aman을 비롯한 회의적인 학자들은 비문의 전차 2천대는 실제로는 2백대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는 1982년에 출간된 케임브리지 고대사의 결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Lester L. Grabbe 선생은 Na'aman 선생의 견해를 반박한다. 그 내용인즉, 고대의 전차부대를 유지하는 것은 현대의 기갑 연대를 유지하는 것과 다르다는 점이다. 특히 말들은 상시적으로 마굿간에 두고 관리할 필요가 없다.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땅들도 말을 방목하기에는 충분할 수 있다. 둘째로 Grabbe 선생이 지적하는 것은 시리아 일대의 주요 세력들 중에 쿠르크 비문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특히 시돈과 티레는 비문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동맹세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 시기 유다 왕국은 이스라엘 왕국의 봉신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역시 병력을 제공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 지역 동맹 세력들의 맹주로서 연합군 내의 또다른 연합군을 끌고 온 것이라면 전차 2천대는 문제될게 없다는 주장이다.

최근에 핀컬슈타인은 한가지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제시한다. 고고학적 조사 결과 이 시기 북왕국이 누린 경제적 번영은 상당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시기 올리브유와 와인 생산사업이 번창했음이 조사 결과 나타났는데, 이스라엘은 남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아시리아로 이들 상품을 팔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 시기 Khirbet en-Nahas는 레반트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구리 광산이 위치한 곳이었다. 이곳의 생산량은 10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정점을 찍었는데, 바로 오므리 왕조 시기와 겹친다. 여기서 생산된 구리는 이른바 '임금의 큰 길'이라 불리던 고대 근동의 주요 교역로를 따라 이동했는데, 이 시기 이 통로의 상당부분은 오므리 왕조의 요새들의 감제 하에 있었다.

추가적으로, 이 시기 전차부대를 구성하던 말들의 원산지는 이집트였다. 핀컬슈타인에 따르면, 아시리아가 남쪽으로 팽창하기 이전까지, 이집트의 말을 북쪽 지역으로 옮겨주는 중개무역 역시 이스라엘의 번창하던 사업 중 하나였다. 이는 므깃또에서 발굴된 대규모 말 사육 및 훈련 시설로 증명된다.

여기에 더해서 Robin Archer 선생은 당시 이스라엘 전차부대가 실제로 근동 세계에서 꽤 이름을 날리던 정예부대였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마침내 아시리아 제국이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사마리아를 정복했을때, 이스라엘의 전차부대는 그대로 아시리아군에 흡수되어 제국의 수도인 칼후(님루드)에 배치되었다. 정복된 국가의 잔존병력이 정복군에 흡수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외국인 부대를 편제를 유지한채로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에 배치한 기록이 남아있는건 이 경우가 유일하다. Dalley는 이를 이스라엘 전차부대가 가진 특별한 기술과 명성 덕분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나오며

이 모든 논의를 종합해보면, 물론 실제 2천대는 과장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전반적으로 기원전 9세기에 이스라엘 북왕국은 고대 근동에서 상당한 명성을 누리던 강력한 대규모 전차부대를 보유하고 있었음이 명확해 보인다. 이 시기 이스라엘은 유다 왕국에게는 사실상 종주국 노릇을 하고 있었으며, 다른 주변국들에게도 맹주 노릇을 하던 국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강력한 연합 군대를 유지할만큼, 당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번영하던 왕국이었다.

즉, 이 시기 이스라엘 북왕국은 우리가 성서에서 접하던 단편적인 정보를 통해 흔히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영향력 있고, 부유한 국가였다.





참고문헌

Lester L. Grabbe, 1&2 Kings: History and Story in Ancient Israel (London, 2017).
Israel Finkerstein, The Forgotten Kingdom: the Archaeology and History of Northern Israel (Atlanta, 2013).
Garrett Fagan and Matthew Trundle (eds.), New Perspectives on Ancient Warfare (Leiden, 2010).
Nadav Na'aman, Ancient Israel and Its Neighbors: Interaction and Counteraction (Eisenbrauns, 2005).
Bob Becking and Marjo Christina Annette Korpel (eds.), The crisis of Israelite religion: transformation of religious tradition in exilic and post-exilic times (Leiden,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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