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서 History-근동, 서양사

들어가며

고대 이스라엘 역사 복원을 위한 사료로서 구약성서의 가치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은, 그 본문 상당부분이 상당히 후대에 완성되었거나 편집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크다. 게다가 성서에 있는 역사서들, 즉 예전에 설명한 '신명기계 역사서'들은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한다는 목적이 아니라 명백한 신학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책들이다.


이 성서 내의 책들, 즉 열왕기, 역대기 등의 이런 책들을 고대 이스라엘의 공식 역사서술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은 맨 종교적인 잣대로 왕을 평가하거나 모든 일이 종교와 관련되어 일어나는 특이한 나라라고 생각하기가 매우 쉽다. 그러나 지난번에 한번 서술했듯이, 고대 이스라엘은 다른 주변국과 별로 다를것 없는 평범한 근동 왕조였다. 열왕기 등의 구약 텍스트는 이스라엘 왕조의 공식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를 소재로 하여 후대에 편집한 종교적 텍스트라는 점을 간과할때 이런 오해가 발생한다. 그런면에서 동시대 이스라엘인들이 남겨놓은 진짜 역사서가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건 없다.

그러나 성서 본문에는, 살아남았다면 고대 이스라엘 역사 연구의 1차사료가 되었을 텍스트에 대한 실마리가 희미하게 들어있다. 사실, 신명기계 역사서의 저자들과 편집자들(그게 몇 명이든지)이 역사를 후대의 신학적 시각으로 재해석했다면, 무언가 이들이 보고 재구성한 사료가 존재했을 것이다. 그 사료의 존재는 무엇일까?




'이스라엘 왕조 실록'을 찾아서

마르틴 노트가 처음 신명기계 역사서 이론을 세웠을때, 그는 이 책들의 편집자가 기존에 존재하던 이스라엘 왕국의 공식 역사서들을 뼈대로 삼고, 내러티브의 빈 공간을 예언자 전설을 비롯한 각종 전승들을 수집하여 채워넣었다고 보았다. 사실 이건 완전히 새로운 이론은 아니었다. 성서의 열왕기 등의 책의 원사료가 이스라엘 왕국 궁정에서 편찬된 사서였을 것이라는 생각은 이미 19세기부터 자리잡은 견해였다. 그 뒤로 성서비평학은 계속 발전했지만 이 기본 이론, '고대 이스라엘 왕국이 남긴 동시대 사서가 구약성서 안에 있는 신명기계 역사서의 원사료'라는 생각은 이어지고 있다.

사실 구약성서의 이 부분은, 드물게도 원사료를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아사의 나머지 모든 행적과 무용, 그리고 그가 한 모든 일들과 그가 세운 성읍들에 관한 것은 유다 임금들의 실록에 쓰여 있지 않은가?
(열왕기상 15:23)

나답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모든 일들은 이스라엘 임금들의 실록에 쓰여 있지 않은가? (열왕기상 15:31)



이 두 구절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는 두 가지다. 첫째,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의 연대기, 즉 '실록'이 원래 존재했다. 둘째. 성서 열왕기의 저자들, 혹은 편집자들은 이 책들을 참조했다. 이 책들이 남아있다면 말 그대로 1급 사료가 되었겠으나, 앞서 말했듯, 이 책들은 이러한 흔적만 남겨놓고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물론 여기서 이 구절을 정말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회의를 품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말하면, '성서 저자들이 자신들의 저작을 사실처럼 보이게 하려고 없는 사료를 만들어낸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사실, 완전히 허무맹랑한 의문은 아니다. 골즈워디 선생이 지적하듯, 고대 역사가들의 경우 종종 없는 사료를 지어내는 경우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Lester L. Grabbe 선생은 동시대 실록이 존재했을 가능성에 대해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고대 근동의 왕정에서 공식 연대기를 편찬하는 것은 널리 퍼진 관습이었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 왕국이 그런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둘째. 열왕기에서는 상당히 비슷한 패턴, 문장의 글이 반복되는 부분들이 많다. 이건 어디 다른 자료에서 통채로 가져다 복붙했을 확률이 높다.

마지막으로, 실재성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 초기 왕정과 달리 남북 왕국 시대의 이스라엘과 유다 왕조의 역사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성서에 등장하는 왕들 중 제법 많은 이들이 그대로 아시리아 등의 기록에도 등장한다. 따라서 후대의 편집자가 성서를 쓸때 이 인명이나 행적을 상상으로 지어낸게 아니라는건 명백하다. 그렇다면 어디선가 보고 썼다는 말인데, 보고 썼을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료는 궁정 연대기, 즉 실록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를 종합해볼때, 이스라엘 왕조 실록은 존재했으며, 그것이 성서 열왕기의 원사료가 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 역사속으로 사라진 실록의 내용이 궁금해질수밖에 없다. 이 점에 있어서 현재 학자들은 본문 분석을 통해 옛 실록이 어떤 내용이었을까를 추측하고 있는데, 대략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역시 Grabbe 선생의 방법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우선 열왕기 내용을 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 임금 제십팔년에 아비얌이 유다의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세 해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마아카인데 아비살롬의 딸이었다.
그런데 임금은 제 아버지가 지은 죄를 모두 따라 걸었다. 그의 마음은 자기 조상 다윗의 마음과는 달리 주 하느님께 한결같지 못하였다.
그러나 주 다윗의 하느님께서는 다윗을 생각하시어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고, 그의 뒤를 이을 아들을 일으키시어 예루살렘을 굳게 해 주셨다.
다윗은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 사건 말고는,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만 하였으며, 살아있는 동안 내내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하나도 어기지 않았다.
르하브암과 예로보암 사이에는 늘 전쟁이 있었다.
아비얌 임금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모든 일들은 유다 임금들의 실록에 쓰여 있지 않은가? 아비얌과 예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었다.
아비얌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 성에 묻히고, 그의 아들 아사가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열왕기상 15:1-8)



이 본문의 구성 요소는 다음과 같다. '왕의 등극, 재위기간의 일, 그의 통치에 대한 신학적 평가, 왕의 죽음'이다. 우선 이 중에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파란 색으로 표시한 부분, 즉 신학적 평가이다. 이게 본래 유다 왕조 실록에서 나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선, 왕들에게 종교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고대 근동 왕조실록의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다. 또한, 그 평가의 잣대는 매우 전형적인 후대 신명기 사관이다. 필자가 예전에 썼듯이,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역사의 상당기간동안 이스라엘은 철저한 일신교 사회가 아니었으므로 동시대 기록에서 위와 같은 평가가 나오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부분은 비교적 자신있게 후대 신명기계 역사가의 평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명백하게 신명기 사관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파란 구절들을 빼버리고 나머지를 한번 보자. 맨 처음 검은색으로 표기한 구절은 왕의 등극과 재위기간, 가족 사항이다. 이 포맷은 거의 모든 왕이 즉위할때 반복된다.(물론 암살당했거나 찬탈한 왕의 경우 표현이 조금 다르다) 아무런 가치 판단도 들어있지 않은 건조한 사실 기록이며, 고대 근동의 다른 왕국 연대기와 비슷한 포맷이다.(단, 왕의 어머니 이름까지 기술하는 것은 다른 근동 왕국의 연대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데, Lester 선생은 유다 왕국의 독특한 문화적 관습이 아닌가 추측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유다 왕조 실록의 원문에서 직접 가져왔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되는 부분이다.

조금 애매한게 빨간 색 부분의 전쟁 기사다. 역시 매우 간략하게 전쟁이 있었다는 정보만 제공하고 있다. 대체로 메소포타미아의 궁정 연대기(업적을 자랑하거나 왕의 위업을 찬미하기 위해 쓴 노래, 시가같은것 말고)중에는 대체로 이와 비슷하게 간략한 서술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실록에서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어보이는데, 문제는 문맥이 영 이상하다는 점이다. Grabbe 선생은 실록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실록에 왕의 치세 중 전쟁에 대한 기록이 있었을테고 그것을 보고 끼워넣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 다음은 초록색 부분인데, 당연히 실록 원문에 실록을 보라고 써놨을 가능성은 없으므로 이건 신명기계 편찬자가 레퍼런스로 제시한 구절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문제는 마지막 보라색 구절이다. 조상들과 잠들다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죽음을 묘사하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이건 실록에서 가져왔을수도 있고, 신명기계 사가가 추가했을 수도 있다. 둘 다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렇다면 아비얌 임금의 재위에 대한 1차사료인 실록에서 왔을 것이 확실시되는 부분은 맨 앞줄 검은색, 그리고 약간 붉은색에 해당되는 기사가 원문 어딘가에서 변형되어 왔을 가능성이 있고, 마지막은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실록에도 왕의 죽음을 서술하긴 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실록 원문은 정말 짧을 것 같은데, 이건 재위기간이 짧은 왕이라 그렇고 다른 왕의 경우는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분석하면 조금 더 긴 원문을 복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간략한 책이었던 것 같다.




결론

이상의 분석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현재까지 성서 내 역사서에서 1차 사료인 이스라엘과 유다 왕조 실록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구절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간략하고, 정보만 제공하며, 대체로 재미없는 부분들은 실록에서 그대로 인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을 크게 왜곡할 여지가 없는데다가, 다른 고대 근동 왕국들의 연대기와 유사한 포맷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Lester 선생이 말하듯, 이 구절들의 역사적 신빙성은 대체로 높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 구절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개별 왕들에 대한 신학적 평가가 들어오는데, 이는 신명기계 역사서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본래 실록에 실려있던 내용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머지, 잘 알려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기적과 예언자들이 나오는 소설 같은 이야기들인데, 이쪽은 다양한 민간전승들을 끌어다 채웠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런 부분들, 특히 스토리성이 강한 부분일수록, 역사적 사실성을 장담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렇게 되면, 지금은 소실된 이스라엘과 유다 왕조 실록의 모습이 어떠했을지 대강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그것은 다른 근동 왕조의 공식 역사서와 비슷한 서술법으로 쓰여졌을 것이며, 한 명의 왕 당 한 문단 이상을 넘기지 않는(물론 재위기간이 길거나 임팩트 큰 일이 일어났던 왕의 경우 더 길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짤막한 기록들의 모음집이었을 것이다. 그 내용은 성서 텍스트에 나오는 종교적 평가가 아니라, 왕들의 재위기간과, 인적사항 및 주요 치적들과 관련된 사실정보들을 딱딱하고 간결하게 나열한 형태였을 것이다.





참고문헌

Lester L. Grabbe, 1&2 Kings: History and Story in Ancient Israel (London, 2017).
Susan Niditch, The Wiley Blackwell Companion to Ancient Israel (Chichester, 2016).

다윗과 솔로몬의 나라: 고대 이스라엘의 연합 왕정 논쟁 History-근동, 서양사

들어가며

구약성서는 가나안에 자리잡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족연합을 거쳐서 왕국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리고 성서 내러티브에 따르면 이 왕국은 사울과 다윗, 솔로몬이라는 세 임금을 거치면서 모든 이스라엘 부족들을 통합한, 따라서 흔히 '연합 왕정(united monarchy)'이라고 불리는 체제를 이루었으며, 솔로몬 시대에 전성기를 이룬 이 왕국은 예루살렘에 수도를 두고 정교한 관료제를 통해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고 되어있다.



솔로몬 임금이 주님의 집과 자기 궁전과 밀로 궁을 짓고, 예루살렘 성벽과 하초르와 므기또와 게제르를 세우려고 부역을 시킨 이야기는 이러하다. ....... 그 밖에도 솔로몬은 예루살렘과 레바논을 비롯하여 자기가 다스리는 온 영토 안에 세우고 싶어하던 것을 다 세웠다. ....... 한 해동안 솔로몬에게 들어온 금의 무게는 육백육십육 탈렌트였다. 무역상들과 상인의 거래에서 받은 것, 그리고 아라비아의 모든 임금과 지방관들에게서 받은것을 빼고도 그러하였다. (열왕기 상 9~10장에서 발췌)



그리고 이 화려한 연합왕국은 르호보암 대에 이르러 둘러 나뉘어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이 되었다는 것이 구약성서의 설명이다. 그런데 과연 이 이야기는 과연 얼마만큼의 역사적 사실성을 포함하고 있을까?

사실 부족한 사료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문헌적, 고고학적 증거로 인해 기원전 9세기에 시리아-팔레스타인 중앙 산악지대에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두 고대왕국이 존재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그 말은 그 이전 시기 언제쯤에 이 두 왕국의 기원이 되는 무언가가 존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연합 왕정의 역사적 사실성을 둘러싼 논쟁은 바로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한 과정이다. 이 글에서는 연합 왕정에 대한 학계의 최근 논의를 정리하고, 핵심 쟁점들을 간략하게 다뤄보도록 할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초기 왕정시대 서술의 변화

1980년대 이전까지 고대 이스라엘 초기 역사의 재구성은 거의 전적으로 구약성서 텍스트에 의존한 것이었다. 가령 이 시기 고대 이스라엘사의 패러다임을 대표하는 존 브라이트의 저서는 구약성서의 열왕기를 가장 주된 사료로 밝히며 나머지 데이터는 이를 이해하는 것을 도울 뿐이라고 명시한 바 있다.

이러한 경향에는 사실 이유가 없지 않았다. 당시 활발하게 이루어진 고고학적 성과, 특히 성서에 연합왕정의 주 도시로 언급된 게제르, 므기또 등의 발굴결과는 분명 구약성서의 역사성을 증명하는듯 보였던 것이다. (물론 이 시기 고고학자들이 종종 성서를 가이드 삼아 어디를 발굴할지를 결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위 성서 본문에도 나오는 게제르, 하초르, 므기또 등의 발굴 결과 대형 건축물의 흔적이 발굴되자 이는 솔로몬의 거대한 왕국과 이에 대한 성서 기록의 사실성을 입증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당시에도 성서 텍스트가 역사를 온전히 반영한 서술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다. 필자가 예전 글에서 한번 설명했듯이 마르틴 노트가 1940년대에 '신명기계 역사서' 이론을 정립한 이후, 구약성서의 역사서는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 아니라 신학적 목적을 위해 재구성되고 편집된 문서라는 것은 이미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중론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명기계 역사서들 내에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로부터 전해지는 독립된 전승들과 기록들이 섞여있다고 믿었다. 일반적으로 다윗의 왕권 장악 내러티브와 솔로몬의 왕위 계승 내러티브가 그러한 것들로 여겨졌다. 그 이유인즉, 이 기록들에서 명학하게 정통성이 부족하고 비정상적으로 집권한 왕의 정통성을 옹호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적 성격이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프로파간다가 필요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나왔을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1980년대 중반까지는, 이러한 프로파간다성 성격만 제외한다면, 성서 본문은 이스라엘 왕국의 초기 역사에 대해 그런대로 믿을만한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중론이었다. 그 결과 이 시기까지 고대 이스라엘사 서술에서 초기 왕정시대 부분은 성서 내용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는 1980년대에 깨어지게 된다.

1980년대 중반부터, 성서학계는 고대 이스라엘사의 해석에 있어서 새로운 도전에 맞닥뜨리게 된다. 우선 성서 내용의 신뢰성과 기록 연도에 대한 물음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가운데, 몇몇 고고학자들이 지금까지 솔로몬 왕국의 증거로 받아들여지던 게제르, 하초르, 므시또의 유적들이 사실은 각기 다른 시대의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더욱 결정적으로, 예루살렘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정작 기원전 10세기 예루살렘에서는 별다른 건축사업의 흔적을 찾아볼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정작 수도에는 별 건축을 안하면서 지방도시들에 활발하게 대규모 건축물을 세웠다는 이상한 이야기가 된다. 게다가 학자들은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의 예루살렘은 지방의 대규모 건설 사업을 주도하기에는 너무 작은 도시였고, 특히 성서에 나오는대로의 대제국의 수도라기에는 너무 빈약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원전 10세기 예루살렘 복원도

이보다 논쟁을 더 골치아프게 만들어버린 것은 연대측정 문제였다. 이른바 'low chronology'라고 불리는 새로운 연대를 제안한 I. 핀컬슈타인은 필리스티아 토기와 시리아-팔레스타인의 지층을 분석한 결과, 므기또 등지의 유적의 연대는 북왕국 오므리 왕가의 궁전 연대와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기존 생각대로 솔로몬 시대의 건축이 아니라 적어도 1세기 뒤인 기원전 9세기로 밀리는 셈이다. 이 외에도 많은 증거들이 재검토된 결과, 더 이상 성서에 나오는대로 거대했던 고대 이스라엘 연합 왕정이라는 개념은 더이상 유지되기가 어려워졌다.

그 결과 현재 학계에서는 저마다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지만 대략 몇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우선 한쪽 극단에 필립 데이비스와 같은 미니멀리스트 학자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은 기원전 10세기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성은 전혀 입증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편 극단에 성서 내용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는 I. Provan, P. Long, T. Longman 등(셋이나 언급한 이유는 책을 같이 썼기 때문이다)의 맥시멀리스트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요즘 많이 쓰는 고고학이나 사회학적 접근이 성서의 증언보다 더 객관적이라고 볼 이유가 대체 어디있느냐?'로 요약될 수 있겠다.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Lester L. Grabbe는 위 세 맥시멀리스트 학자들의 저서에 대해 '성서 본문 요약(그것도 아주 지루한 요약)에 불과하다'고 혹평한바 있다. 사실 이쪽은 소수 복음주의 성향의 학자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이다. 물론 극단적 미니멀리스트 주장을 받아들이는 이들도 많이 없긴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양극단의 가운데 어디쯤에 있다. 극단을 배제하고, 이들 학자들 중에서 연합 왕정의 역사성을 비교적 옹호하는 쪽의 대표자는 A. 마자르, 비교적 부정적인 이는 앞서 언급한 I. 핀컬슈타인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학자들이 현재 충돌하고 있는 쟁점들은 무엇일까?





현재의 논의

두 진영의 학자들이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는 것은 역시 최근에 발견된 새로운 증거들과 옛 증거들의 해석에 있다. 최근에 발견된 중요한 증거들 중 대표적인 것은 E. 마자르가 예루살렘에서 발굴한 유적들을 들 수 있다. 마자르는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발굴한 거대한 벽 유적(소위 Large Stone Structure)이 예전에 발굴된 소위 Stepped Stone Structure와 연결된 10세기의 구조물의 일부라고 주장한바 있다. 그녀는 이를 다윗의 궁전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핀컬슈타인은 마자르가 연대를 비정하는데 사용한 토기의 해석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또 발굴에 있어서 성서 텍스트에 의존하는 태도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마자르의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이 아니었다면, 이 구조물을 10세기 건축물로 볼 하등의 근거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A. 마자르는 핀컬슈타인이 제기한 비판들을 다시 반박하면서 이 구조물들을 사실 다윗이 정복한 시온 요새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마자르도 자신의 주장이 두개의 '불안정한 기둥', 즉 그 구조물의 철기1시대 건축연도에 대한 추정과 성서 텍스트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성서 텍스트와 고고학의 관계에 있어서는 아직도 논쟁이 치열하게 진행중이고, 이 분야에서 확고한 진실이랄 것이 아직 없으니만큼 다양한 시각을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외에도 성서의 에돔 지역인 Khirbet en-nahas에서 발굴된 요새와 건물 유적을 놓고 10세기설과 8-9세기 설이 맞부딪치고 있는데, 역시 앞서와 비슷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최근 발굴은 역시 Khirbet Qeuiyafa에서 출토된 히브리어 명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어떻게 읽을것인지,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아직 합의된 바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텍스트인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은 기원전 10세기에 이스라엘의 문해율이 생각보다 높았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귀중한 자료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해석은 치열하게 엇갈린다. 몇몇 학자들은 이 문해율의 증거를 들면서 이 시기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이 명문을 예루살렘의 중앙정부와 연결시킬 근거가 없다고 지적한다. 이 증거들은 오히려 인근 지역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농업이 발전하면서 각 지역들이 저마다 도시국가와 비슷한 공동체를 수립하기 시작했다는 근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명문 자체의 내용이 해석이 제대로 안되는 상황에서, 어느쪽으로 결론 내리기 참 어려운 문제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정황근거가 있다. 연합왕정이 존재했는지 안했는지는 둘째치더라도, 이후 북 이스라엘 왕국은 중앙집권화된 국가로 성장하면서 적어도 지역강국 정도는 되는 지위를 차지한다. 이 위상은 주변국들의 기록에서 비교적 쉽게 찾아볼수 있다. 그러나 남 유다 왕국은 북왕국의 전성기인 오므리 왕조가 끝나갈 시점이 되서야 비로소 주변국들의 기록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여러 근거들은 남왕국이 북왕국보다 제대로 된 국가로의 성장이 늦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그만큼 인구나 물력, 인프라 면에서도 크게 뒤졌을 것이다.(그리고 마자르 등도 10세기 예루살렘이 거대도시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히 인정한다) 그런 지역을 기반으로 해서 다윗과 솔로몬이 더 부유한 지역의 부족들을 지배하는 연합왕국을 건설했다는게 이치상으로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 때문에 상당수의 학자들은 연합왕국의 실체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에 대해 마자르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역사는 항상 일직선으로 전진하지 않는다. 역사는 항상 사회경제적, 혹은 환경적인 요인만으로 결정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개인의 역할도 중요하다. 특별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들이라면(가령 다윗처럼) 상당한 정치력,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를(비록 오래가진 못하겠지만) 건설하고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르나 문서에 등장하는 아피루(혹은 하비루) 지도자들 중에 이런 경우들이 있음을 지적한다.




나오며

지금까지 살펴본 핀컬슈타인과 마자르가 정면 충돌한 논문은 나란히 2010년에 출간된 선집에 실렸다. 그리고 논쟁은 지금도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또 외부인의 시각으로 보면, 두 주장이 그렇게 생각만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핀컬슈타인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다윗과 솔로몬은 실존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제국의 왕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그 인근을 중심으로 한 작은 나라의 통치자였을 것이다. 그들의 나라는 이후 북왕국이 자리잡게 되는 지역까지 뻗어올라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자르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성서의 기록은 분명 초기 이스라엘 왕정을 크게 미화하고 과장하였으며, 따라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보다 작은 규모의 연합왕정은 존재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발굴된 구조물들은 분명 그 시대의 것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대제국의 수도라기에는 빈약하지만, 지역 통치자의 세력기반 정도는 충분히 되었을 것이고, 관료기구도 있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Lester L. Grabbe, 1&2 Kings: History and Story in Ancient Israel (London, 2017).
Susan Niditch, The Wiley Blackwell Companion to Ancient Israel (Chichester, 2016).
John Barton (ed.) The Hebrew Bible: A Critical Companion (Princeton, 2016).
Megan B. Moore and Bred E. Kelle, Bibilical History and Israel's Past (Cambridge, 2011).
Amihai Mazar, "Archaeology and the Biblical Narrative: The case of the united monarchy.” In R. G. Kratz and H. Spieckermann (eds), One God – One Cult – One Nation: Archaeological and Biblical Perspectives (Berlin 2010).
Israel Finkerstein "A Great United Monarchy?: Archaeological and Historical Perspectives". One God – One Cult – One Nation.
H.G.M. Williamson (ed.) Understanding the History of Israel (Oxford, 2007).

17세기 '스페인의 쇠퇴'는 과연 옳은 개념인가? History-근동, 서양사

예전 역사학계에서는 16세기에 황금시대를 맞이한 스페인이 17세기에 들어와 쇠퇴했다는 시각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스페인사 연구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기초를 놓은 J. 엘리엇 선생의 1963년 저작 <스페인 제국사>의 시각이 대표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시각은 17세기 스페인 지식인들이 16세기의 영광을 그리워하면서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시대가 쇠퇴의 시기라고 인식한 것과, 스페인의 적대국들이 퍼뜨린 프로파간다, 이른바 '블랙 레전드'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의 쇠퇴' 테제는 현재 학계에서 예전처럼 통용되지 않습니다. 이미 1978년부터 H. Kaman 선생이 '스페인의 쇠퇴'론에 날카로운 공격을 가한 뒤로, 스페인이 정말로 대폭 쇠퇴했는가는 예전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새로 데이터를 검증해보니, 예전에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가정들이 사실이 아닐수도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스페인의 쇠퇴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페인은 경제에 근본적인 취약점이 있었다. 제대로 된 산업기반이 없이 식민지해서 약탈해온 은에만 의존했다. 거기다 무리한 전쟁으로 파산의 연속을 겪없다. 이러한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17세기 스페인의 쇠퇴는 필연이었다'입니다. 하지만 현대 역사학에서 무언가를 필연으로 돌리는 결정론적 해석은 더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전개에는 훨씬 더 복잡한 변수들이 작용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7세기 스페인 쇠퇴설 비판의 근거들을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16세기 스페인이 워낙 독보적으로 화려했기 때문에 17세기 스페인이 '상대적'으로 약해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건 17세기 스페인의 구조적 약점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애초에 근대 초 유럽 국제질서가 한 국가가 독주하기 힘든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16세기에 스페인의 최대 라이벌인 프랑스가 내전에 시달리면서, 정말 드물게 스페인이 독주 체제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반면에 17세기에는 프랑스가 안정 구도로 접어들고, 영국과 네덜란드 같은 신흥 국가들이 경쟁에 뛰어들면서 자연스럽게 독주 체제가 불가능해졌을 뿐입니다. Pendrill 선생이 지적하듯, '스페인이 약해졌다기보다는 다른 유럽 국가들이 엇비슷하게 강해진 것'입니다.


두번째. 스페인 쇠퇴설의 기본 주장은 스페인 경제가 식민지 은에 의존하는 구조적 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은이 줄어든 17세기가 되자 불가피하게 쇠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H. Kaman, J. Lynch, M. Morineau의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17세기 은 수입량은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즉 스페인 경제가 상대적으로 침체했던 시기에 은 유입량은 오히려 늘어난 셈입니다.

또한 새로운 연구 결과, 17세기는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경제가 16세기에 비하면 그 성장력이 다소 줄어든 시기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경제 침체는 전근대 시대의 자연스러운 성장-침체 사이클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최근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더욱이 17세기 스페인 최악의 위기는 역병, 기근, 홍수 등으로 인구가 줄어든 시기에 발생했습니다. 사실, 스페인은 생각처럼 국내 산업기반이 전무했던 나라가 아닙니다.(물론 스페인은 농업국가 맞습니다만, 동시대 다른 유럽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잉글랜드도 18세기까지 농업국가였습니다) C. Storres 선생이 지적하듯, 그라나다, 세고비아, 톨레도 등은 모두 번영하던 산업 중심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17세기에 자연재해로 인한 인구 감소로 이 지역들의 산업이 타격을 입습니다. 이건 전근대 국가 모두가 직면했던 문제이자, 한계였지 스페인만의 구조적인 약점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17세기 중후반부터 스페인 경제는 다시 회복세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에 잦은 전쟁으로 인한 파산 문제가 종종 거론되는데, 특히 이 부분에서는 16세기 펠리페 2세의 파산을 떠올리실겁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최근 논문은 오히려 펠리페 2세 시대 스페인의 경제는 상당히 건실했으며, 왕실 부채는 펠리페 2세가 죽을때까지도 충분히 관리 가능한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펠리페 2세가 선언한 파산은 경제정책의 총체적 실패나 근본적 약점이 아니라, 스페인군이 일시적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거나 했을때 나타나는 경우였으며, 이 역시도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미친게 아니라 "일시적" 경제후퇴의 증상이었을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페인 왕정의 무능이나 부패, 개혁의 실패 등등이 거론되는데, 이 역시도 스페인이 시스템의 문제로 쇠퇴하기로 정해져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16세기의, 실책은 있어도 대체로 열정적이고 유능한 국왕들,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와 달리 17세기의 왕들은 어리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뭐 그랬다는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학자들이 주목하는 바는, 오히려 그런 왕들이 즉위했음에도 상당한 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버틸만큼 스페인 정부 시스템이 탄탄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문에 펠리페 5세가 즉위하자 다시 부유하고 나름 강력한 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잘 안알려져있는 사실인데, 18세기 네덜란드가 쇠퇴하면서 유럽 해군력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의 3강 체제로 돌아갑니다)

결론으로 Storres 선생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7세기 스페인이 겪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더이상 예전처럼 스페인의 '쇠퇴'를 자신있게 논하지 못하고 있다."




참고

Colin Pendrill, Spain 1474-1700: The Triumphs and Tribulations of Empire (Oxford, 2002).
Mauricio Drelichman and Hans-Joachim Voth, "The Sustainable Debts of Philip II:  A Reconstruction of Castile’s Fiscal Position, 1566-1596", The Journal of Economic History 70 (2010).
Christopher Storrs, "The “Decline” of Spain in the Seventeenth Century " State Papers Online, 1509–1714 (2011).

레히펠트 전투 (5)-결전의 날 History-근동, 서양사

서전

오토의 구원군을 맞아, 마자르군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형에서 전투를 치르고자 했다. 앞서 서술했듯이 아우크스부르크 주변은 3면이 마자르족에게 유리한 개활지였다. 그러나 단 하나 걸리는 것은 도시 서쪽에 펼쳐진 삼림지대였다. 오토가 이쪽을 통해서 아우크스부르크로 접근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자르군은 이 경우도 계산에 두고 세심한 작전을 세웠다. 만일 오토의 군대가 삼림를 통과하려 한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선별한 기마 궁수들로 구성된 별동대를 파견하여 오토의 군대 후미를 공격한다. 나머지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마자르 본대는 오토가 숲에서 나오는 길목에서 기다린다. 그러면 오토의 후방으로 우회한 기병대가 망치 역할을 하고, 본대가 모루 역할을 하여 오토의 야전군을 확실하게  섬멸할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분명 이 작전은 성공 가능성도 높고, 잘 짜인 작전이었다. 마자르군의 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부대를 나눠도 될만큼 마자르군은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던게 분명하다. 일단 대대적인 동원이니 흔히 학자들이 추정하는대로 최대 1만5천여 기병을 동원했다고 치면 그것만으로도 오토 군의 두 배 가까이 된다. 여기에 이번에는 다수의 보병까지 동원했다는 점을 감안할때, 마자르군은 오토 군의 세 배 가까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8월 10일 이른 아침, 오토의 군대는 과연 숲을 통과해서 행군하기 시작했다. 이날은 성 라우렌시오 축일이었다. 8개의 부대 중 바이에른 군단 3부대가 선두에 섰다. 4번째는 콘라트의 프랑켄 부대였고, 다섯 번째가 오토가 친히 지휘하는 국왕 직속군이었다. 비두킨트에 따르면 가장 강력한 부대였다. 작센 군단을 데려올 수 없는 상황에서, 그중에서 특별히 가려뽑은 용사들만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6번째와 7번째는 슈바벤 부대가 뒤따랐고, 최후미는 천여 명의 보헤미아 군대가 구성하고 있었다. 사료에 따르면 이들은 잘 훈련받고 무장상태도 좋은 부대였다. 그러나 장거리를 행군해왔기 때문에 아직 피로에서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오토의 군대는 삼림지대를 관통하는 로마 도로를 따라 행군했다. 그리고 계획대로 마자르군이 이들의 후위를 노리고 있었다. 일단 지형은 일장일단이 있었다. 우선 울창한 수목 때문에 개활지만큼 화살을 빗발치듯 퍼부어서 적에게 출혈을 입히기가 쉽지가 않다. 이 점이 오토가 삼림지대로의 행군을 택한 주된 이유였다. 반면에 역시 지형 때문에 기습의 효과가 제대로 발휘된다면, 부대간 상호지원도 힘들고 방향전환도 힘들었다. 이 점을 이용하여 마자르군은 오토의 군대를 패닉 상태에 빠뜨릴 작정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양떼를 몰듯이 이들 숲 밖에서 기다리는 본대 쪽으로 몰아갈 수 있었다.

기습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자르군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었다. Bowlus의 지적대로, 가장 최상의 시나리오는 오토의 본대가 숲으로 들어가고, 후위만 남았을때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미 숲으로 들어간 본대는 지원하러 오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너무 시간을 끌다 후위까지 숲으로 들어가버리면 또 공격이 쉽지 않다. 후위는 식량과 물자를 싫은 수레를 끌고 있다. 이 수레는 매우 쉽게 임시 바리케이드로 이용할 수 있다. 연대기의 서술로 보아 마자르군은 이를 훌륭하게 성공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군대의 배후로 돌아온 헝가리군은, 후위 군단을 화살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들은 거대한 함성을 지르며(cum ingenti vociferatione) 돌격했다.' (작센 연대기, 권3. 44)


이 맹렬한 공격에 보헤미아 군단이 무너졌다. 이어서 마자르군은 슈바벤 군단에 맹공을 퍼부었다. 연대기에 따르면 이들 부대도 많은 피해를 입고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후위부대에 승리를 거두면서 마자르군이 물자를 약탈했다는 사실이다. 첫회에도 서술했듯이 마자르군은 적을 완전히 궤멸시키기 전까지는 약탈을 하지 않는 엄정한 군기로 유명했다. 따라서 이 대목도 많은 논란을 낳았다.

어쩌면 갑작스러운 개혁으로 군대의 성격을 바뀌면서, 옛 스텝 기병의 면모를 일부 상실했을 수도 있다. Thomas von Bogyay는 이 대목을 비잔티움 황제 레온의 묘사(1회에 소개)와 대조시키면서, 이 시점에서 마자르가 이미 군사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던 증거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마자르군이 승기를 놓치지 않고 오토의 군대를 압박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의견을 달리하는 학자들도 있다. Bowlus는 비록 연대기가 전투 묘사를 매우 간략하게 했지만, 보헤미아와 슈바벤 군단이 매우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비록 보헤미아 병사들이 행군으로 지쳐있긴 했지만, 연대기는 이들이 잘 훈련되고 잘 무장된 군대였음을 명시하고 있다. 슈바벤 군단도 엘리트 부대인 야전군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오토의 부대 중에서는 가장 오래 휴식을 취한 덕분에 원기왕성한 부대였다. 이들을 패주시키는데 성공했다면 마자르군도 분명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했을 것이다. 따라서 보헤미아 군단과 슈바벤 군단을 패주시킨 뒤 마자르군이 일시 멈춘 것은 약탈에 정신이 팔렸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간에, 오토는 후위가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콘라트를 급파하였다. 숲으로 한번 들어간 이상 본대가 지원을 오기 힘들것이라는 마자르군의 예상은 들어맞지 않았다. Scherff가 지적하듯, 콘라트의 반격은 매우 이상적인 타이밍에 이루어졌다. 반격하기에 최적의 타이밍은 적군이 막 승리해서 아군을 몰아낸 시점이기 때문이다. 콘라트는 오토에게 한번 반역한 적은 있었지만, 어쨌든 뛰어난 전사였다. 비두킨트는 그를 가리켜 '기병으로 싸우든, 보병 싸우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용사이며, 평시이든 전시이든 부하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지휘관'이었다고 극찬하고 있다.

콘라트는 휘하 중장기병을 이끌고 마자르군을 거세게 들이쳤다. 여기서 드러나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사실 마자르군의 작전도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망치와 모루'전술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해보였지만, 마자르의 경우 망치와 모루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오토 군의 후위를 공격한 마자르 기병은 숲 입구를 막기로 한 본대로부터 8km나 떨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는 광대한 삼림지대가 있어서 연락도 잘 되지 않았다. 즉, 마자르 본대는 우회부대가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 마자르의 원래 계획대로 오토의 전군이 패닉 상태에 빠져 숲을 빠져나가려 했다면 기다리던 마자르 본대에 의해 쉽게 섬멸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토는 침착하게 콘라트를 지원군으로 파견했다. 반면에 콘라트가 마자르 우회부대를 공격했을때, 마자르 본대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방법도, 지원군을 보낼 길이 없었다.

콘라트의 부대는 이미 지쳐있던 마자르군을 쉽게 격파했다. 마자르군은 보헤미아와 슈바벤 포로들과 약탈물을 버려두고 후퇴했다. 이렇게 해서 첫 접전은 중간에 상당히 위험한 순간이 있기는 했지만 오토 군의 승리로 끝났다.





메인 전투

콘라트가 돌아와 승리의 소식을 전하자, 오토는 이제 마자르족의 본대를 상대하기 위해 나아갔다. 문제는 이 중요한 대목에서 1차 사료들의 기록이 매우 소략하다는 것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사료인 비두킨트의 연대기는 오토의 영웅적인 면모를 묘사하는데 집중하고 있어서 마치 오토가 이끈 기병돌격 하나가 전부인 듯한 인상을 준다. 예전에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전투를 서술하기도 하였다. 특히 Leyser는 이 기록을 인용하면서 오토의 군대의 기본전술은 기병의 정면돌격이었다는 테제를 뒷받침하는데 사용하였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오토의 군대에서 기병은 아무리 정예라 하나 소수였고, 하인리히 시절의 개혁도 기병과 보병의 합동작전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때, 기병만으로의 전투를 치렀다고 결론짓기에는 무리가 상당히 많다.

결국, 많은 고대와 중세 전투가 그렇듯이 레히펠트 전투도 문헌사료만으로는 온전한 복원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료의 간략한 기록에서도 드문드문 전투의 실상을 짐작하게 도와주는 중요한 정보들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을 일종의 단서로 삼고, 가설과 추론을 동원하여 전투를 복원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예전 글에서 설명하였듯이, 기마궁수가 많은 마자르족이 선호하는 전투 대형은 초승달 대형이다. 마자르군이 다수의 보병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은 보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양익에 기병을 배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정면돌격을 해주는 것은 마자르군이 바라는대로 해주는 일이다. 오토가 중앙에 배치된 마자르군 보병을 상대로 기병돌격을 시도한다면, 마자르군은 양익의 스텝 기병을 동원하여 오토의 군대를 포위하고 사면에서 화살을 퍼붓는 방식으로 싸울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전술적으로 오토의 대처도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스텝 군대를 상대로 이미 위력을 검증한 전술을 사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합리적이었을테니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오토는 기병의 정면돌격이 아니라, 측면우회를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부대배치도 그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는 오토와 그의 귀족들에게 익숙한 로마식 전술(그들의 주된 학습자료는 베게티우스였다)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연대기도 기병돌격을 했다고 했지, 정면으로 돌격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중세 독일군-레히펠트 전투보다 약 1세기 뒤의 모습이다

오토는 우선 마자르 기병의 공격을 쉽게 격퇴할 수 있는 지형에 부대를 배치시켰다. 숲을 가로지르는 옛 로마 가도를 따라 그대로 행군했다면, 오토의 군대는 아마도 숲을 등지고 포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를 구원하려면 방어만 해서는 안 된다. 공세로 나가 마자르군을 격파해야만 했다.

기병의 측면 배치에 있어서, 베게티우스는 상황에 따라 양익에 배치하는 것과 한쪽으로 몰아서 배치하는 것 모두를 소개하고 있다. 둘다 장단점이 있는데, 실행은 한쪽 측면이 지형지물에 의해 방어될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만일 오토가 Bowlus의 추정대로 슈무터 강을 좌측에 두고 포진했다면, 좌익을 걱정할 필요 없이 우익에 기병을 모두 배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익배치도 나름의 전술적 장점이 있기 때문에 어떤 배치를 취했는가는 확신할 수 없다. 만일 양익배치를 했다면 한쪽은 콘라트에게 맡기고, 오토는 다른 측면을 담당했을 것이다.

하인리히 때와 마찬가지로, 기병의 우회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려면, 보병이 방어막이 되어주어야 한다. 따라서 오토 군의 보병대가 먼저 마자르 보병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마자르 보병 뒤에는 분명 보병 궁수가 포진했을 것이다. 마자르족이 공성전을 벌일 계획을 세워놓고 침공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보병 궁수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을 포함한 마자르 궁수들이 오토 군의 보병대를 향해 화살비를 퍼부었다.

이에 대항하여 오토의 보병대는 팔랑크스 형태의 밀집대형을 갖추고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 상태에서 천천히 전진했을 것이다. 견고하게 방어대형을 갖춘 보병대는 화살 공격에 쉽게 타격을 받지 않는다. 게다가 전투 직후에 이 지역을 폭풍우가 휩쓸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날에도 이미 먹구름이 잔뜩 끼고 습도가 높았을 것이다. 이는 마자르 궁병의 전투력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오토가 양익에 기병을 배치했고 교과서적으로 군대를 운용했다면(다시 말하면 베게티우스의 이론을 따라서), 동시에 좌익에 배치된 콘라트의 기병대가 좌측으로 질주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는 적 기병대를 사정거리 밖에서 유인함과 동시에 적군의 대열을 옆으로 늘려서 얊게 만드는 목적이었다. 마자르 우익의 기병대가 콘라트 기병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했다면 마자르의 초승달 대형이 얇아지면서 화살공격의 위력이 감소했을 것이다. 동시에 오토의 기병은 전진하는 보병의 뒤에서 우측을 향해 구보로 움직였을 것이다. 보병대열의 보호를 받으면서 우회공격이 가능한 위치로 이동하는 것은 선왕 하인리히가 사용한 전술이기도 하다. 여기서 적 전열의 상태를 주시하면서, 전속력으로 돌격할 타이밍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지휘관의 역할이다. 비두킨트는 이 전투에서 오토가 '가장 강력한 전사이자, 최고 지휘관으로서 두 역할을 모두 다 해냈다'고 서술하고 있다.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오토가 판단을 내렸는지는 지금 사료만으로는 알 수가 없지만, 적기가 찾아왔다고 판단하자, 오토는 비두킨트가 '수천 명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용맹한 젊은이들'이라고 서술한 그의 직속 군단의 선두에서 돌격할 채비를 했다.


'그(오토)는 방패와 성스러운 창을 손에 쥐고는 그의 제일 먼저 적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작센 연대기, 권3, 46)


이어서 오토와 그의 기사들이 전속력으로 마자르 좌익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마자르 기마궁수들도 화살을 날렸고, 분명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작전이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콘라트의 기병과 보병이 마자르군을 분산시켰고, 화살도 소모시켰을 것이기 때문에 큰 사상자를 내지 않고 돌파에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다.(단 기병을 이쪽에 몰아서 배치했다면 보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오토의 기병이 마자르 기병과 충돌했다. 근접전에 들어간 시점에서 마자르의 합성궁과 곡도는 오토의 기사들이 지닌 랜스와 장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오토의 돌격으로 마자르 좌측면이 혼란에 빠진 상태에서,  콘라트가 이끄는 좌익 기병대가 방향을 선회하여 마자르 우익을 공격했다. 마자르군 전체가 포위될 위험에 빠졌다. 마자르 기병 입장에서는 포위될 위험 속에서 싸우다가 살육당하거나 더 늦기 전에 탈출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만 남았다. 다른 중요 사료인 <울리히 성인전>의 저자 게르하르트가 아우크스부르크의 성벽 위에서 마자르 기병 다수가 비교적 전열을 잘 유지하면서 후퇴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서술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마자르 기병들은 오토의 기사들과 근접전으로 그리 오래 싸우지 않고 후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대신 마자르군의 보병대는 무방비한 상태로 사실상 버려졌다. 이들을 상대로 정면에서는 창을 겨눈 오토 군의 보병이 밀고 들어왔고, 후방에서는 오토와 콘라트의 중장기병이 밀어닥쳤다. 지금까지의 서술 상당부분이 추론에 의지하고 있어서 의문을 표시할 수도 있겠지만, 비두킨트의 사료도 사실 이러한 전개를 암시하고 있다.


'적군 중 가장 용감한 이들은 처음에는 저항하였으나, 곧 그들의 동료들이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것을 보고 충격과 두려움에 빠졌다. 그들은 아군 부대 사이에서 끼어버렸고, 우리 병사들이 그들을 베어 쓰러뜨렸다. (작센 연대기, 권 3. 46)'


짤막한 서술이지만 적군이 오토 부대 사이의 함정에 빠졌다는 서술은, 오토 군이 예전 설명대로 정면돌격한게 아니라 포위전법을 시도했으며 이 전술이 멋지게 들어맞아서 적군을 포위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전에는 이 전투의 두 주요 사료인 비두킨트와 게르하르트의 서술이 일견 달라보여서 해석에 혼란을 주기도 하였다. 비두킨트는 적군이 덫에 걸려 혼란에 빠졌다고 서술하고 있는 반면, 게르하르트는 마자르군이 질서를 유지하며 다수가 후퇴했다고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Bowlus 선생이 잘 지적하듯, 면밀히 사료를 분석해보면 이 두 서술은 상충되는게 아니다. 후퇴에 성공한 것은 기동력이 있는 마자르 기병이고, 함정에 빠진 꼴이 되어 혼란에 빠진건 마자르 보병이었다고 보면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게르하르트는 거리가 제법 떨어진 아우크스부르크 성벽 위에서 보고 있었기 때문에, 후퇴하는 적 기병의 모습은 볼 수 있어도 전장의 모습은 목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자르 기병이 질서를 유지하면서 후퇴한 것으로 보아, 오토가 추격해왔다면 조직적인 반격을 가해왔을 가능성이 높다. 스텝 기병의 특기인 위장 후퇴를 구사하려 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하인리히 때와 마찬가지로, 오토도 여기에 걸려들지 않았다. 오토의 군대는 짧은 거리만 추격하다 정지했다. 그러나 이 추격 와중에도 전투는 끊임없이 벌어졋다. 마자르군이 유인전술을 쓰려 했다는 증거 중 하나다. 그 와중에 이날 전투에서 맹활약을 했던 콘라트가 전사하고 말았다. 8월의 더위 속에서 맹렬히 싸우다 기진맥진한 그는 잠시 갑옷 끈을 느슨하게 풀었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오토의 군대는 레히 강을 건너 마자르군의 진영을 점령하고, 포로를 구출했다. 오토는 여기서 추격을 멈추게 하고 아우크스부르크로 입성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오토의 군대는 마자르군의 별동대와 본대를 상대로 두 차례의 격전을 치렀다. 그들은 완전히 체력이 고갈되었을 것이다. 오토가 성문을 들어서자 이 전역의 또다른 영웅인 울리히 주교가 국왕을 영접했다. 오토는 승리를 축하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의 군대의 사상자도 컸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날의 일등공신이자 사위인 콘라트를 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마자르족을 완전히 물리쳤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전투 직후

우리가 흔히 레히펠트 전투라고 부르는, 성 라우렌시오 축일에 벌어진 격전은 막을 내렸다. 쌍방간에 많은 피해를 낸 격전이었지만, 여기까지만 본다면 아직 그렇게 결정적인 승리는 못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를 구원하고 마자르군의 보병대를 섬멸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주력인 스텝 기마 궁수들은 이번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빠져나갔다. 어떻게 보면 부왕 하인리히의 리아데 전투와 흡사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와 다른 점이 있었다. 리아데 전투는 거의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따라서 마자르족은 무인지대로 쉽게 물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마자르족은 바이에른 깊숙이 들어와있었다. 그리고 오토도 이 전투를 결정적인 한방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하인리히의 작품인 종심방어 체제가 다시 작동할 차례였다. 마자르군이 후퇴해야 하는 길목 요소요소마다 수비군으로 가득한 견고한 요새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 말인즉, 안그래도 고달프게 후퇴하는 마자르군 입장에서는 물자도 얻기 어렵고, 어디 한군데 마음 편히 쉬었다 가기도 힘들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전투 직후에 이 일대에 격렬한 폭풍우가 몰아쳤다. 이 때문에 강물의 수위가 급격히 불어났다. 쳐들어올때는 말을 타고 손쉽게 건넌 물도 배가 필요해졌거나, 몇몇 지점 외에는 도강이 불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오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국왕은 특히 여울목과 나루터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전령들을 급파하여 도망치는 마자르족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실 종심방어만 아니었다면. 마자르족은 물이 빠질때까지 기다렸다가 철수작전을 펼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왠만한 곳이 다 적군의 요새로 들어찬 상황에서 그들은 서둘러 철수할수밖에 없었다. 이 며칠이 레히펠트를 역사에 남을 결정적 전투로 만들었다. 주요 도로는 적군이 철통같이 지키고, 뒤에서는 추격해오는 오토의 군대의 압박에 밀린 마자르군은 점차 잘게 분산되었고, 차례차례 섬멸되었다. 마자르의 지도자들도 차례로 붙잡혀 처형되었다.

전투가 막 끝났을때만 해도, 그렇게 거대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이제 오토의 승리가 얼마나 결정적인 것이 되었는지는 누가 보아도 명백해졌다. 부왕 하인리히 때부터 오랜 세월에 걸친 치밀한 준비와 대결 끝에 이뤄낸 대승리였다. 비두킨트에 따르면 감격한 오토의 병사들은 그에게 "조국의 아버지이자 임페라토르"라고 부르며 환호하였다.





나오며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 마자르족이 죽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전투 이후로 마자르족의 서유럽 침공은 멈추었다. 이 패배 이후 마자르족은 정주민이 되었다(단 비잔티움에 대한 공격은 970년까지 계속되었따). 그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빠르게 유럽 문명권에 편입되었다.

이후 그동안 서유럽을 괴롭혀왔던 헝가리는, 다른 스텝 부족의 공격으로부터 유럽을 지키는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레히펠트에서 마자르족을 격퇴한 뒤, 라틴 그리스도교권은 스텝 부족으로부터 안전해졌다. 근대 초기까지도 유라시아는 스텝 부족과 정주민 간의 싸움으로 계속해서 피를 뿌려댔지만, 서유럽은 비교적 안전하게 떨어져서 중세 전성기 문화를 쌓아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오직 이 한번의 싸움에서 결정났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겠으나, 이후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레히펠트 전투와 그 전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들이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지금까지 짧은 연재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참고문헌

1차사료

Widukind, Res Gestae Saxonicae, translated by Bernard S. Bachrach and David S. Bachrach, Deeds of the Saxons (Washington D.C., 2014).
Gerhard, Vita Sancta Uodalrici Eposcopi Augustani, Gerhard's Life of Bishop Ulrich of Augsburg, in Bowlus (2006)


2차사료

Bernard S. Bachrach and David S. Bachrach, Warfare in Medieval Europe, c. 400-1453 (London, 2017).
David S. Bachrach, Warfare in Tenth-Century Germany (Woodbridge,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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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rd S. Bachrach, 'Charlemagne and the Carolingian General Staff',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66 (2002), 313-357.
John France, 'Close Order and Close Quarter:The Culture of Combat in the West', The International History Review27 (2005), 498-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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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P. Lidner, 'Nomadism, Horses, and Huns', Past and Present 92, (1981), 3-19.

레히펠트 전투 (4)-955년의 침공 History-근동, 서양사

955년 전역의 배경

936년, 오토 1세가 부왕 하인리히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랐다. 하인리히는 흔들리던 동프랑크의 왕권을 안정시키고, 마자르족의 침공을 격퇴했을뿐 아니라 오토에게 자신이 즉위할 때보다 훨씬 더 넓어지고 강력해진 왕국을 물려주었다. 샤를마뉴의 제국이 분열된 이후, 그 뒤를 이은 왕국 중 아마도 가장 강대한 세력이었을 것이다. 이에 힘입어 오토는 즉위 초부터 자신이 샤를마뉴의 후계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가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른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정치적 행위였다.

오토 1세로 추정되는 기마상 (13세기 작품의 복제)

오토는 자신의 왕국이 차지하는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중, 장기 전략 수립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부왕의 정책 기조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젊고 아직 검증되지 않은 국왕이 즉위했을때 자주 그러듯이, 오토는 그의 권위에 반발하는 세력들을 잇달아 마주해야 했다. 한 예로, 오토가 깊이 신뢰하던 신하인 헤르만 빌룽을 엘베 강 하구 방어선의 군사령관(독일어로는 흔히 '변경백'으로 번역하는 마르그라프, 라틴어로는 princeps militiae)으로 임명하자, 헤르만의 친형이 여기에 반발하여 정치적 소요를 일으켰다. 오토의 이복형 탕크마르도 자기가 원한 변경백 직책을 받지 못하자 불만을 품었고, 이 둘과 프랑켄 공 에베르하르트(전왕 콘라트 1세의 동생)가 나중에 반란에 가담하게 된다.

바이에른에서도 소요가 일어났다. 오토가 아르눌프 공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바이에른의 왕령지와 교회를 직접 관리하여 한게 발단이 되었다. 아르눌프의 아들 에베르하르트는 왕의 제안을 거부하였고, 이에 오토는 직접 바이에른을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아직 젊은 왕이 미숙한 모습을 보이자 앞서 언급한 불만 세력이 일제히 대대적인 반란으로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오토는 만만하지 않았다. 초기 실패를 면밀히 분석한 뒤에 체계적으로 반격에 나섰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일단 왕국이 안정화되자 오토는 빠르게 동서 양면으로 잠시 흔들렸던 헤게모니를 되찾아나갔다. 937년에 대대적으로 침공해온 마자르족이 여전히 건재한 종심방어에 걸려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은 이미 지난번 글에서 살펴보았다. 951년에는 첫 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여 롬바르드의 왕관을 획득하고,죽은 롬바르드 왕 로타르의 부인 아델라이드와 결혼하여 로타르파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런데 원정 직후의 정치적 안배에서 오토가 새 왕비 아델라이드와 자신의 동생 하인리히의 지위를 강화하자, 이미 죽은 오토의 첫번째 왕비 이지드의 소생 류돌프가 반발했다.(그는 지난 이탈리아 원정에서 보인 실패로 부왕의 눈밖에 난 상태였다) 류돌프는 자기 매부인 로트링엔 공작 콘라트 적왕을 끌어들여 953년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내전은 2년간이나 이어졌는데, 그동안 절치부심하던 마자르족은 바로 이 기회를 틈타기로 한다.





개전

955년 4월, 막 레겐스부르크의 반란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오토 1세는 슬라브족의 침공 소식을 듣는다. 급히 작센으로 돌아온 오토는 상황을 점검하면서 추가적으로 일어날 더 큰 침공에 대한 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시점에서 그의 동생 하인리히가 급보를 알렸다. 마침내 마자르족이 그간의 침묵을 깨고 대대적인 침공으로 나온 것이다. 955년의 전쟁은 이렇게 막을 올렸다.

지난번 글에서 이미 서술했듯이, 마자르의 이번 공격은 그간의 습격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인리히가 세운 종심방어 시스템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놓고 고민하던 마자르는, 약탈자에서 정복자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그들의 이번 목표는 예전처럼 독일을 휩쓸고서 약탈물을 챙겨 돌아가는게 아니라 주요도시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는 기존의 스텝 기마궁사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간의 노력이 빛을 발해 이번 마자르 침공군은 대규모의 보병과 공성부대를 포함한 복합군이었다. 과연 일신된 마자르군은 정복자로의 전환에 성공한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이들의 원정 목표는 아우크스부르크였다. 이들이 아우크스부르크를 점령한다면,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연결하는 브레너 고개를 장악할 수 있다. 즉, 알프스를 넘는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상황은 여러모로 오토에게 불리했다. 마자르족은 더이상 옛날의 단순한 스텝 기병부대가 아닌데, 오토는 대군을 동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슬라브족이 그의 영토를 위협하고 있는데, 그곳 수비군을 다 비워놓고 대규모 야전군을 편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국왕 직속군인 작센군을 동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소심한 지휘관이었다면 망설였겠지만, 오토에게는 승부사의 자질이 있었다. 그는 지체없이 작센 병력 중 소수만 차출해서 거느리고 남하했다. 그러면서 슈바벤, 바이에른, 프랑켄에 최대한 빨리 병력을 보내라는 명령을 내리고 동시에 보헤미아군도 그에게 합류할 것을 지시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독일 내부의 혼란을 틈타려 한 마자르족의 시도는 실패했다는 부분이었다. 일반적으로 분열 상태에서 외침이 들어오면 더 심하게 분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마자르의 전략은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수학공식과 달라서 항상 같은 답이 나오라는 법은 없었다. 더 심하게 분열하는 경우는 외부에서 들어온 침략 세력과 결탁하여 이익을 볼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설 수 있을때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독일 지역의 여러 귀족들에게 '마자르는 우리의 공공의 적'이라는 인식은 너무나도 확고했다. 반란 세력에 대한 지지도는 뚝 떨어졌고, 대귀족들은 점차 오토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결국 위신과 세력을 잃은 반란군이 굽히고 나왔다. 콘라트와 류돌프는 둘 다 백기를 들었고, 덕분에 오토는 마자르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슬라브를 견제하느라 국왕의 직속부대가 없는 상황에서, 상당한 숫적열세 하에 사나운 적군과 싸워야 한다는 점은 명확했다.





아우크스부르크 공방전

역시 개혁의 성과를 보여주듯, 마자르족은 상당히 정교한 전략을 구사했다. 이들이 바이에른을 목표로 삼은 것 자체가 상당한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오토가 가장 믿을만하고 강력한 군대인 작센군을 이끌고 달려올 것인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마자르 지도자들은 지난 2년간의 전쟁으로 작센 병력이 상당히 지쳐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슬라브의 침공 위협도 있는 상황이었다. 마자르족은 오토가 작센군을 끌고 오지 않는다면 승산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파악했다. 그리고 이미 보았다시피, 이들의 계산은 지금까지는 잘 맞아떨어졌다.

이들의 전략은 주요 도시 점령도 있었지만, 동시에 오토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형으로 끌어내어 결정적인 패배를 선사하는데에 있었다. 이러한 승리를 거둔다면 자신들은 다시 한번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테고, 933년 이래 끊겨버린 공물도 다시 들어오게 될 터였다. 이를 위해 7월 내내 마자르족은 바이에른을 약탈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건 마구잡이 약탈이 아니라 분명히 치밀하게 세운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일부 분견대는 레히 강을 건너 슈바벤을 공격했는데, 이것은 이들이 이 지역을 노리고 있다고 믿게 하려는 일종의 미끼였다. 그렇게 된다면 라인란트의 병력을 그곳에 묶어둘 수 있고, 오토를 울름으로 유인할 수 있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마자르족은 특유의 기동력을 이용해 번개같이 아우크스부르크로 돌아가 그곳을 점령할 계산이었다.

그리고 8월 초, 계획대로 마자르군은 아우크스부르크로 돌아가 그곳을 포위하였다. 이를 위해서 마자르군은 상당수의 공성무기를 동원하였다. 이 강력한 군대를 상대로 도시와 시민을 지켜내야 할 의무는, 아우크스부르크 주교령의 수장 울리히 주교에게 떨어졌다.

훗날 성인의 반열에 올라가게 되는 울리히는 선왕 하인리히 1세에 의해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탁월한 학자로 이름을 떨쳤으며, 주교가 된 뒤로는 학교 개혁을 통해 사제의 실력과 도덕성을 대폭 강화하고, 빈민구제에 힘쓰는 등 사목자로서도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문제는 이 훌륭한 학자이자 종교인이, 아우크스부르크를 사나운 적군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책임까지 떠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의 시민들과 마자르 포위군은 곧 이 종교인이 장군의 자질까지 갖추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자르군이 아우크스부르크를 둘러싸자, 도시 안의 병사들은 울리히에게 나가 싸우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주교는 단호하게 거부하고, 공격에 취약할수밖에 없는 성문들을 단단히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특히 공격군이 접근하기 가장 쉬운 남문이야말로 방어군을 집중시켜야 할 지점이었다.

그러나 전술적으로 대폭 개량된 마자르군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첫날부터 기습적으로 동문을 공격했다. 이곳은 레히 강의 가파른 강둑을 마주보고 있어서 공격하기 매우 어려운 지형이었다. 그래서 동문 수비병들은 적이 이곳으로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자르족은 이러한 방심을 내다보고 기습을 가했다. 워낙 예상치 못한 지점을 찔렀기 때문에 기습은 거의 성공할뻔 했다. 마자르족이 성문과 성벽을 넘어 도시 진입에 성공할 판이었다.

그러나 다급한 상황에서 울리히는 매우 침착하게 대응했다. 주교는 다른 성문들에서 가능한 병력을 차출한 다음에 신속하게 돌파된 지점으로 투입했다. 그것도 그저 명령만 내린게 아니라, 말 위에 올라서 몸소 작전을 지휘했다. 이 전투의 주요 사료인 Vita Sancti Uodalrici는 이 때 주교가 단지 사제의 긴 옷만 입었을 뿐, 갑옷도 방패도 투구도 없이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 전투를 지휘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이건 성인전이고, 하느님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거뒀음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서술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아우크스부르크 공방전을 재현한 디오라마(성벽 위에 깨알같이 울리히 주교까지 재현했다)

어쨌든 격렬한 전투 끝에 마자르군은 격퇴되었다. 동문 공격을 이끌었던 마자르 지휘관이 치명상을 입고 쓰러질만큼 치열한 격전이었다. 적군이 물러나자 울리히는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곧장 손상된 성벽을 보강하고. 성 내에 적의 진입을 저지할 수 있는 추가 요새시설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당히 노련한 지휘관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첫날 아우크스부르크 점령에 실패한 마자르군은 이튿날부터 포위공성 태세로 전환했다. 이들이 다수의 보병과 공성무기를 끌고 왔다는것 자체가 이들이 진지하게 도시 점령을 시도했음을 보여준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상당히 잘 훈련된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 오토의 군대가 도착하기 이전에 이들을 지워버리는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성공하지 못했다. 바로 그 다음날에 오토의 군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마자르군은 미련없이 포위를 풀고 오토의 군대를 맞을 채비를 했다. 마자르 지휘관은 어차피 오토의 군대를 격파하면 아우크스부르크 뿐 아니라 오토의 왕국 전체가 무릎을 꿇을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 오토의 야전군을 격파하는 것은 마자르군의 중요한 전략목표 중 하나였다. 아우크스부르크 자체가 이를 위해 세심하게 선정된 전장이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인근 지형은 스텝 기병이 선호하는 개활지였다. 마자르군은 늘 그랬듯이 자신들이 원하는 지형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싸우고자 했고, 일단 지형 선점은 성공을 거두었다.





오토의 진군

마자르족과 맞서기 위해 남하하는 오토의 머릿속은 어떻게 강대한 적과 회전을 벌일만한 규모의 군대를 끌어모을 수 있을지로 가득했을 것이다. 한스 델브뤽은 초장부터 오토의 목표가 마자르군을 전멸시키는 것이었다고 주장했지만, 가장 믿을만한 직속 부대를 놔두고 가는 입장에서 벌써 그런 원대한 계획을 품을 여유가 있었을지 현대 학자들은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물론 오토의 장기 대전략은 헝가리의 위협을 완전히 끝장내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소원하던 로마 황제의 관을 받기 위해서라도 이는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이번 전역은 당장 마자르의 분탕질이 바이에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잡아둔 뒤, 군대를 모아 이들을 몰아내는 것부터가 시급했다.

일단 바이에른 내에는 아직 상당한 부대가 남아있었다. 종심방어 전략에 따라, 바이에른 곳곳의 견고한 요새에 잘 훈련된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아우크스부르크를 공격하는 마자르군 후방에도 이러한 요새들이 건재하였다. 그리고 앞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보았듯이, 이들은 요새를 방어할 능력이 충분했다. 그러나 이들의 1차목표는 수비였기 때문에, 전쟁 초기단계에서는 오토는 이들의 도움을 받기 어려웠다.

이 외에 당연히 야전군도 있었다. 종심방어 전략을 따르자면, 이들은 일단 쳐들어온 마자르군의 예봉을 곧바로 받지 않고 안전한 지역에 집결했다가 마자르군이 약탈을 위해 흩어지거나 돌아갈때를 노리도록 되어있었다. 다만, 이번 전쟁에서 마자르군은 예전같은 약탈부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전략이 필요한 상태였다. 소수의 작센 병력과 함께 남하하면서 왕은 지속적으로 전령을 보내 군대 집결을 독려하는 한편, 적의 행보에 수시로 대해 보고를 받았다.

10세기 독일 기사

일단 바이에른 부대 3개 군단(legiones, 1개 군단은 약 천 여 명)이 오토에게 달려와 합류했다. 왕의 명령을 받은 슈바벤 군단도 달려왔다. 앞서 보았듯, 마자르군은 양동작전을 통해 라인란트를 공격할 듯 하여 쾰른 대주교 브룬(오토의 동생)이 관할하는 부대를 그곳에 묶어두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포위로 마자르군이 라인란트로 진격할 의도가 없다는게 명백해졌지만, 브룬이 군대를 끌고 오토에게 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여전히 병력이 부족했다. 오토는 일단 프랑켄에 사령부를 두고 그 지역 병사들도 모아들였다.

얼마 뒤, 일전에 류돌프와 손잡고 오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사위 콘라트가 휘하 부대를 이끌고 달려왔다. 그가 로트링엔 공작 직위를 내놓으며 항복했을때, 오토는 관대한 처우를 해줬는데 이제 장인을 돕기 위해 달려온 것이었다. 그가 이끈 부대도 적어도 천 명은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비두킨트는 콘라트의 군대가 기병부대였다고 명시하고 있다. 동시에 loricati라는 명칭으로 보아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병이 다수였을 것으로 보인다. 천 명이라는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보여도 중장기사가 그 정도라면(물론 전원이 중장 기사는 아니라고 치더라도) 상당한 전력이었다.

오토의 진영은 콘라트의 군사들을 뜨겁게 환영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까지 소집된 오토의 군대에는 중무장 기병이 많이 부족했던 것이다. 콘라트의 가세로 비로소 오토의 군대는 전술적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헤미아 군단이 오토에게 합류했다. 보헤미아 공 지휘 하에 두번째 보헤미아 군단이 집결중이었지만, 역시 시간 내에 달려올 수는 없었다. 이렇게 계산하면 오토의 군대는 약 8천 여 명이 된다. 많은 수는 아니었고, 국왕의 직속 군단이 빠진 야전군이었지만 역시 오랜 군제 개혁 끝에 태어난 군대였으니 질적으로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오토는 이제 좀더 공격적으로 나가도 되겠다고 판단하고, 아우크스부르크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결전의 순간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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