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펠트 전투 (5)-결전의 날 History-근동, 서양사

서전

오토의 구원군을 맞아, 마자르군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형에서 전투를 치르고자 했다. 앞서 서술했듯이 아우크스부르크 주변은 3면이 마자르족에게 유리한 개활지였다. 그러나 단 하나 걸리는 것은 도시 서쪽에 펼쳐진 삼림지대였다. 오토가 이쪽을 통해서 아우크스부르크로 접근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자르군은 이 경우도 계산에 두고 세심한 작전을 세웠다. 만일 오토의 군대가 삼림를 통과하려 한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선별한 기마 궁수들로 구성된 별동대를 파견하여 오토의 군대 후미를 공격한다. 나머지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마자르 본대는 오토가 숲에서 나오는 길목에서 기다린다. 그러면 오토의 후방으로 우회한 기병대가 망치 역할을 하고, 본대가 모루 역할을 하여 오토의 야전군을 확실하게  섬멸할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분명 이 작전은 성공 가능성도 높고, 잘 짜인 작전이었다. 마자르군의 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부대를 나눠도 될만큼 마자르군은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던게 분명하다. 일단 대대적인 동원이니 흔히 학자들이 추정하는대로 최대 1만5천여 기병을 동원했다고 치면 그것만으로도 오토 군의 두 배 가까이 된다. 여기에 이번에는 다수의 보병까지 동원했다는 점을 감안할때, 마자르군은 오토 군의 세 배 가까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8월 10일 이른 아침, 오토의 군대는 과연 숲을 통과해서 행군하기 시작했다. 이날은 성 라우렌시오 축일이었다. 8개의 부대 중 바이에른 군단 3부대가 선두에 섰다. 4번째는 콘라트의 프랑켄 부대였고, 다섯 번째가 오토가 친히 지휘하는 국왕 직속군이었다. 비두킨트에 따르면 가장 강력한 부대였다. 작센 군단을 데려올 수 없는 상황에서, 그중에서 특별히 가려뽑은 용사들만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6번째와 7번째는 슈바벤 부대가 뒤따랐고, 최후미는 천여 명의 보헤미아 군대가 구성하고 있었다. 사료에 따르면 이들은 잘 훈련받고 무장상태도 좋은 부대였다. 그러나 장거리를 행군해왔기 때문에 아직 피로에서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오토의 군대는 삼림지대를 관통하는 로마 도로를 따라 행군했다. 그리고 계획대로 마자르군이 이들의 후위를 노리고 있었다. 일단 지형은 일장일단이 있었다. 우선 울창한 수목 때문에 개활지만큼 화살을 빗발치듯 퍼부어서 적에게 출혈을 입히기가 쉽지가 않다. 이 점이 오토가 삼림지대로의 행군을 택한 주된 이유였다. 반면에 역시 지형 때문에 기습의 효과가 제대로 발휘된다면, 부대간 상호지원도 힘들고 방향전환도 힘들었다. 이 점을 이용하여 마자르군은 오토의 군대를 패닉 상태에 빠뜨릴 작정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양떼를 몰듯이 이들 숲 밖에서 기다리는 본대 쪽으로 몰아갈 수 있었다.

기습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자르군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었다. Bowlus의 지적대로, 가장 최상의 시나리오는 오토의 본대가 숲으로 들어가고, 후위만 남았을때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미 숲으로 들어간 본대는 지원하러 오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너무 시간을 끌다 후위까지 숲으로 들어가버리면 또 공격이 쉽지 않다. 후위는 식량과 물자를 싫은 수레를 끌고 있다. 이 수레는 매우 쉽게 임시 바리케이드로 이용할 수 있다. 연대기의 서술로 보아 마자르군은 이를 훌륭하게 성공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군대의 배후로 돌아온 헝가리군은, 후위 군단을 화살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들은 거대한 함성을 지르며(cum ingenti vociferatione) 돌격했다.' (작센 연대기, 권3. 44)


이 맹렬한 공격에 보헤미아 군단이 무너졌다. 이어서 마자르군은 슈바벤 군단에 맹공을 퍼부었다. 연대기에 따르면 이들 부대도 많은 피해를 입고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후위부대에 승리를 거두면서 마자르군이 물자를 약탈했다는 사실이다. 첫회에도 서술했듯이 마자르군은 적을 완전히 궤멸시키기 전까지는 약탈을 하지 않는 엄정한 군기로 유명했다. 따라서 이 대목도 많은 논란을 낳았다.

어쩌면 갑작스러운 개혁으로 군대의 성격을 바뀌면서, 옛 스텝 기병의 면모를 일부 상실했을 수도 있다. Thomas von Bogyay는 이 대목을 비잔티움 황제 레온의 묘사(1회에 소개)와 대조시키면서, 이 시점에서 마자르가 이미 군사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던 증거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마자르군이 승기를 놓치지 않고 오토의 군대를 압박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의견을 달리하는 학자들도 있다. Bowlus는 비록 연대기가 전투 묘사를 매우 간략하게 했지만, 보헤미아와 슈바벤 군단이 매우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비록 보헤미아 병사들이 행군으로 지쳐있긴 했지만, 연대기는 이들이 잘 훈련되고 잘 무장된 군대였음을 명시하고 있다. 슈바벤 군단도 엘리트 부대인 야전군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오토의 부대 중에서는 가장 오래 휴식을 취한 덕분에 원기왕성한 부대였다. 이들을 패주시키는데 성공했다면 마자르군도 분명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했을 것이다. 따라서 보헤미아 군단과 슈바벤 군단을 패주시킨 뒤 마자르군이 일시 멈춘 것은 약탈에 정신이 팔렸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간에, 오토는 후위가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콘라트를 급파하였다. 숲으로 한번 들어간 이상 본대가 지원을 오기 힘들것이라는 마자르군의 예상은 들어맞지 않았다. Scherff가 지적하듯, 콘라트의 반격은 매우 이상적인 타이밍에 이루어졌다. 반격하기에 최적의 타이밍은 적군이 막 승리해서 아군을 몰아낸 시점이기 때문이다. 콘라트는 오토에게 한번 반역한 적은 있었지만, 어쨌든 뛰어난 전사였다. 비두킨트는 그를 가리켜 '기병으로 싸우든, 보병 싸우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용사이며, 평시이든 전시이든 부하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지휘관'이었다고 극찬하고 있다.

콘라트는 휘하 중장기병을 이끌고 마자르군을 거세게 들이쳤다. 여기서 드러나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사실 마자르군의 작전도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망치와 모루'전술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해보였지만, 마자르의 경우 망치와 모루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오토 군의 후위를 공격한 마자르 기병은 숲 입구를 막기로 한 본대로부터 8km나 떨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는 광대한 삼림지대가 있어서 연락도 잘 되지 않았다. 즉, 마자르 본대는 우회부대가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 마자르의 원래 계획대로 오토의 전군이 패닉 상태에 빠져 숲을 빠져나가려 했다면 기다리던 마자르 본대에 의해 쉽게 섬멸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토는 침착하게 콘라트를 지원군으로 파견했다. 반면에 콘라트가 마자르 우회부대를 공격했을때, 마자르 본대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방법도, 지원군을 보낼 길이 없었다.

콘라트의 부대는 이미 지쳐있던 마자르군을 쉽게 격파했다. 마자르군은 보헤미아와 슈바벤 포로들과 약탈물을 버려두고 후퇴했다. 이렇게 해서 첫 접전은 중간에 상당히 위험한 순간이 있기는 했지만 오토 군의 승리로 끝났다.





메인 전투

콘라트가 돌아와 승리의 소식을 전하자, 오토는 이제 마자르족의 본대를 상대하기 위해 나아갔다. 문제는 이 중요한 대목에서 1차 사료들의 기록이 매우 소략하다는 것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사료인 비두킨트의 연대기는 오토의 영웅적인 면모를 묘사하는데 집중하고 있어서 마치 오토가 이끈 기병돌격 하나가 전부인 듯한 인상을 준다. 예전에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전투를 서술하기도 하였다. 특히 Leyser는 이 기록을 인용하면서 오토의 군대의 기본전술은 기병의 정면돌격이었다는 테제를 뒷받침하는데 사용하였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오토의 군대에서 기병은 아무리 정예라 하나 소수였고, 하인리히 시절의 개혁도 기병과 보병의 합동작전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때, 기병만으로의 전투를 치렀다고 결론짓기에는 무리가 상당히 많다.

결국, 많은 고대와 중세 전투가 그렇듯이 레히펠트 전투도 문헌사료만으로는 온전한 복원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료의 간략한 기록에서도 드문드문 전투의 실상을 짐작하게 도와주는 중요한 정보들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을 일종의 단서로 삼고, 가설과 추론을 동원하여 전투를 복원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예전 글에서 설명하였듯이, 기마궁수가 많은 마자르족이 선호하는 전투 대형은 초승달 대형이다. 마자르군이 다수의 보병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은 보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양익에 기병을 배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정면돌격을 해주는 것은 마자르군이 바라는대로 해주는 일이다. 오토가 중앙에 배치된 마자르군 보병을 상대로 기병돌격을 시도한다면, 마자르군은 양익의 스텝 기병을 동원하여 오토의 군대를 포위하고 사면에서 화살을 퍼붓는 방식으로 싸울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전술적으로 오토의 대처도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스텝 군대를 상대로 이미 위력을 검증한 전술을 사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합리적이었을테니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오토는 기병의 정면돌격이 아니라, 측면우회를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부대배치도 그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는 오토와 그의 귀족들에게 익숙한 로마식 전술(그들의 주된 학습자료는 베게티우스였다)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연대기도 기병돌격을 했다고 했지, 정면으로 돌격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중세 독일군-레히펠트 전투보다 약 1세기 뒤의 모습이다

오토는 우선 마자르 기병의 공격을 쉽게 격퇴할 수 있는 지형에 부대를 배치시켰다. 숲을 가로지르는 옛 로마 가도를 따라 그대로 행군했다면, 오토의 군대는 아마도 숲을 등지고 포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를 구원하려면 방어만 해서는 안 된다. 공세로 나가 마자르군을 격파해야만 했다.

기병의 측면 배치에 있어서, 베게티우스는 상황에 따라 양익에 배치하는 것과 한쪽으로 몰아서 배치하는 것 모두를 소개하고 있다. 둘다 장단점이 있는데, 실행은 한쪽 측면이 지형지물에 의해 방어될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만일 오토가 Bowlus의 추정대로 슈무터 강을 좌측에 두고 포진했다면, 좌익을 걱정할 필요 없이 우익에 기병을 모두 배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익배치도 나름의 전술적 장점이 있기 때문에 어떤 배치를 취했는가는 확신할 수 없다. 만일 양익배치를 했다면 한쪽은 콘라트에게 맡기고, 오토는 다른 측면을 담당했을 것이다.

하인리히 때와 마찬가지로, 기병의 우회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려면, 보병이 방어막이 되어주어야 한다. 따라서 오토 군의 보병대가 먼저 마자르 보병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마자르 보병 뒤에는 분명 보병 궁수가 포진했을 것이다. 마자르족이 공성전을 벌일 계획을 세워놓고 침공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보병 궁수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을 포함한 마자르 궁수들이 오토 군의 보병대를 향해 화살비를 퍼부었다.

이에 대항하여 오토의 보병대는 팔랑크스 형태의 밀집대형을 갖추고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 상태에서 천천히 전진했을 것이다. 견고하게 방어대형을 갖춘 보병대는 화살 공격에 쉽게 타격을 받지 않는다. 게다가 전투 직후에 이 지역을 폭풍우가 휩쓸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날에도 이미 먹구름이 잔뜩 끼고 습도가 높았을 것이다. 이는 마자르 궁병의 전투력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오토가 양익에 기병을 배치했고 교과서적으로 군대를 운용했다면(다시 말하면 베게티우스의 이론을 따라서), 동시에 좌익에 배치된 콘라트의 기병대가 좌측으로 질주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는 적 기병대를 사정거리 밖에서 유인함과 동시에 적군의 대열을 옆으로 늘려서 얊게 만드는 목적이었다. 마자르 우익의 기병대가 콘라트 기병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했다면 마자르의 초승달 대형이 얇아지면서 화살공격의 위력이 감소했을 것이다. 동시에 오토의 기병은 전진하는 보병의 뒤에서 우측을 향해 구보로 움직였을 것이다. 보병대열의 보호를 받으면서 우회공격이 가능한 위치로 이동하는 것은 선왕 하인리히가 사용한 전술이기도 하다. 여기서 적 전열의 상태를 주시하면서, 전속력으로 돌격할 타이밍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지휘관의 역할이다. 비두킨트는 이 전투에서 오토가 '가장 강력한 전사이자, 최고 지휘관으로서 두 역할을 모두 다 해냈다'고 서술하고 있다.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오토가 판단을 내렸는지는 지금 사료만으로는 알 수가 없지만, 적기가 찾아왔다고 판단하자, 오토는 비두킨트가 '수천 명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용맹한 젊은이들'이라고 서술한 그의 직속 군단의 선두에서 돌격할 채비를 했다.


'그(오토)는 방패와 성스러운 창을 손에 쥐고는 그의 제일 먼저 적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작센 연대기, 권3, 46)


이어서 오토와 그의 기사들이 전속력으로 마자르 좌익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마자르 기마궁수들도 화살을 날렸고, 분명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작전이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콘라트의 기병과 보병이 마자르군을 분산시켰고, 화살도 소모시켰을 것이기 때문에 큰 사상자를 내지 않고 돌파에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다.(단 기병을 이쪽에 몰아서 배치했다면 보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오토의 기병이 마자르 기병과 충돌했다. 근접전에 들어간 시점에서 마자르의 합성궁과 곡도는 오토의 기사들이 지닌 랜스와 장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오토의 돌격으로 마자르 좌측면이 혼란에 빠진 상태에서,  콘라트가 이끄는 좌익 기병대가 방향을 선회하여 마자르 우익을 공격했다. 마자르군 전체가 포위될 위험에 빠졌다. 마자르 기병 입장에서는 포위될 위험 속에서 싸우다가 살육당하거나 더 늦기 전에 탈출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만 남았다. 다른 중요 사료인 <울리히 성인전>의 저자 게르하르트가 아우크스부르크의 성벽 위에서 마자르 기병 다수가 비교적 전열을 잘 유지하면서 후퇴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서술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마자르 기병들은 오토의 기사들과 근접전으로 그리 오래 싸우지 않고 후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대신 마자르군의 보병대는 무방비한 상태로 사실상 버려졌다. 이들을 상대로 정면에서는 창을 겨눈 오토 군의 보병이 밀고 들어왔고, 후방에서는 오토와 콘라트의 중장기병이 밀어닥쳤다. 지금까지의 서술 상당부분이 추론에 의지하고 있어서 의문을 표시할 수도 있겠지만, 비두킨트의 사료도 사실 이러한 전개를 암시하고 있다.


'적군 중 가장 용감한 이들은 처음에는 저항하였으나, 곧 그들의 동료들이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것을 보고 충격과 두려움에 빠졌다. 그들은 아군 부대 사이에서 끼어버렸고, 우리 병사들이 그들을 베어 쓰러뜨렸다. (작센 연대기, 권 3. 46)'


짤막한 서술이지만 적군이 오토 부대 사이의 함정에 빠졌다는 서술은, 오토 군이 예전 설명대로 정면돌격한게 아니라 포위전법을 시도했으며 이 전술이 멋지게 들어맞아서 적군을 포위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전에는 이 전투의 두 주요 사료인 비두킨트와 게르하르트의 서술이 일견 달라보여서 해석에 혼란을 주기도 하였다. 비두킨트는 적군이 덫에 걸려 혼란에 빠졌다고 서술하고 있는 반면, 게르하르트는 마자르군이 질서를 유지하며 다수가 후퇴했다고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Bowlus 선생이 잘 지적하듯, 면밀히 사료를 분석해보면 이 두 서술은 상충되는게 아니다. 후퇴에 성공한 것은 기동력이 있는 마자르 기병이고, 함정에 빠진 꼴이 되어 혼란에 빠진건 마자르 보병이었다고 보면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게르하르트는 거리가 제법 떨어진 아우크스부르크 성벽 위에서 보고 있었기 때문에, 후퇴하는 적 기병의 모습은 볼 수 있어도 전장의 모습은 목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자르 기병이 질서를 유지하면서 후퇴한 것으로 보아, 오토가 추격해왔다면 조직적인 반격을 가해왔을 가능성이 높다. 스텝 기병의 특기인 위장 후퇴를 구사하려 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하인리히 때와 마찬가지로, 오토도 여기에 걸려들지 않았다. 오토의 군대는 짧은 거리만 추격하다 정지했다. 그러나 이 추격 와중에도 전투는 끊임없이 벌어졋다. 마자르군이 유인전술을 쓰려 했다는 증거 중 하나다. 그 와중에 이날 전투에서 맹활약을 했던 콘라트가 전사하고 말았다. 8월의 더위 속에서 맹렬히 싸우다 기진맥진한 그는 잠시 갑옷 끈을 느슨하게 풀었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오토의 군대는 레히 강을 건너 마자르군의 진영을 점령하고, 포로를 구출했다. 오토는 여기서 추격을 멈추게 하고 아우크스부르크로 입성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오토의 군대는 마자르군의 별동대와 본대를 상대로 두 차례의 격전을 치렀다. 그들은 완전히 체력이 고갈되었을 것이다. 오토가 성문을 들어서자 이 전역의 또다른 영웅인 울리히 주교가 국왕을 영접했다. 오토는 승리를 축하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의 군대의 사상자도 컸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날의 일등공신이자 사위인 콘라트를 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마자르족을 완전히 물리쳤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전투 직후

우리가 흔히 레히펠트 전투라고 부르는, 성 라우렌시오 축일에 벌어진 격전은 막을 내렸다. 쌍방간에 많은 피해를 낸 격전이었지만, 여기까지만 본다면 아직 그렇게 결정적인 승리는 못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를 구원하고 마자르군의 보병대를 섬멸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주력인 스텝 기마 궁수들은 이번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빠져나갔다. 어떻게 보면 부왕 하인리히의 리아데 전투와 흡사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와 다른 점이 있었다. 리아데 전투는 거의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따라서 마자르족은 무인지대로 쉽게 물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마자르족은 바이에른 깊숙이 들어와있었다. 그리고 오토도 이 전투를 결정적인 한방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하인리히의 작품인 종심방어 체제가 다시 작동할 차례였다. 마자르군이 후퇴해야 하는 길목 요소요소마다 수비군으로 가득한 견고한 요새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 말인즉, 안그래도 고달프게 후퇴하는 마자르군 입장에서는 물자도 얻기 어렵고, 어디 한군데 마음 편히 쉬었다 가기도 힘들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전투 직후에 이 일대에 격렬한 폭풍우가 몰아쳤다. 이 때문에 강물의 수위가 급격히 불어났다. 쳐들어올때는 말을 타고 손쉽게 건넌 물도 배가 필요해졌거나, 몇몇 지점 외에는 도강이 불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오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국왕은 특히 여울목과 나루터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전령들을 급파하여 도망치는 마자르족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실 종심방어만 아니었다면. 마자르족은 물이 빠질때까지 기다렸다가 철수작전을 펼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왠만한 곳이 다 적군의 요새로 들어찬 상황에서 그들은 서둘러 철수할수밖에 없었다. 이 며칠이 레히펠트를 역사에 남을 결정적 전투로 만들었다. 주요 도로는 적군이 철통같이 지키고, 뒤에서는 추격해오는 오토의 군대의 압박에 밀린 마자르군은 점차 잘게 분산되었고, 차례차례 섬멸되었다. 마자르의 지도자들도 차례로 붙잡혀 처형되었다.

전투가 막 끝났을때만 해도, 그렇게 거대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이제 오토의 승리가 얼마나 결정적인 것이 되었는지는 누가 보아도 명백해졌다. 부왕 하인리히 때부터 오랜 세월에 걸친 치밀한 준비와 대결 끝에 이뤄낸 대승리였다. 비두킨트에 따르면 감격한 오토의 병사들은 그에게 "조국의 아버지이자 임페라토르"라고 부르며 환호하였다.





나오며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 마자르족이 죽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전투 이후로 마자르족의 서유럽 침공은 멈추었다. 이 패배 이후 마자르족은 정주민이 되었다(단 비잔티움에 대한 공격은 970년까지 계속되었따). 그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빠르게 유럽 문명권에 편입되었다.

이후 그동안 서유럽을 괴롭혀왔던 헝가리는, 다른 스텝 부족의 공격으로부터 유럽을 지키는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레히펠트에서 마자르족을 격퇴한 뒤, 라틴 그리스도교권은 스텝 부족으로부터 안전해졌다. 근대 초기까지도 유라시아는 스텝 부족과 정주민 간의 싸움으로 계속해서 피를 뿌려댔지만, 서유럽은 비교적 안전하게 떨어져서 중세 전성기 문화를 쌓아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오직 이 한번의 싸움에서 결정났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겠으나, 이후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레히펠트 전투와 그 전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들이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지금까지 짧은 연재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참고문헌

1차사료

Widukind, Res Gestae Saxonicae, translated by Bernard S. Bachrach and David S. Bachrach, Deeds of the Saxons (Washington D.C., 2014).
Gerhard, Vita Sancta Uodalrici Eposcopi Augustani, Gerhard's Life of Bishop Ulrich of Augsburg, in Bowlus (2006)


2차사료

Bernard S. Bachrach and David S. Bachrach, Warfare in Medieval Europe, c. 400-1453 (London, 2017).
David S. Bachrach, Warfare in Tenth-Century Germany (Woodbridge, 2012).
Charles R. Bowlus, The Battle of Lechfeld and its Aftermath, August 955 (Aldershot, 2006).
Bernard S. Bachrach, 'Charlemagne and the Carolingian General Staff',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66 (2002), 313-357.
John France, 'Close Order and Close Quarter:The Culture of Combat in the West', The International History Review27 (2005), 498-517. 
John France, 'Recent Writings on Medieval Warfare: From the Fell of Rome to c. 1300',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65 (2001), 441-473
R. P. Lidner, 'Nomadism, Horses, and Huns', Past and Present 92, (1981), 3-19.

레히펠트 전투 (4)-955년의 침공 History-근동, 서양사

955년 전역의 배경

936년, 오토 1세가 부왕 하인리히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랐다. 하인리히는 흔들리던 동프랑크의 왕권을 안정시키고, 마자르족의 침공을 격퇴했을뿐 아니라 오토에게 자신이 즉위할 때보다 훨씬 더 넓어지고 강력해진 왕국을 물려주었다. 샤를마뉴의 제국이 분열된 이후, 그 뒤를 이은 왕국 중 아마도 가장 강대한 세력이었을 것이다. 이에 힘입어 오토는 즉위 초부터 자신이 샤를마뉴의 후계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가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른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정치적 행위였다.

오토 1세로 추정되는 기마상 (13세기 작품의 복제)

오토는 자신의 왕국이 차지하는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중, 장기 전략 수립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부왕의 정책 기조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젊고 아직 검증되지 않은 국왕이 즉위했을때 자주 그러듯이, 오토는 그의 권위에 반발하는 세력들을 잇달아 마주해야 했다. 한 예로, 오토가 깊이 신뢰하던 신하인 헤르만 빌룽을 엘베 강 하구 방어선의 군사령관(독일어로는 흔히 '변경백'으로 번역하는 마르그라프, 라틴어로는 princeps militiae)으로 임명하자, 헤르만의 친형이 여기에 반발하여 정치적 소요를 일으켰다. 오토의 이복형 탕크마르도 자기가 원한 변경백 직책을 받지 못하자 불만을 품었고, 이 둘과 프랑켄 공 에베르하르트(전왕 콘라트 1세의 동생)가 나중에 반란에 가담하게 된다.

바이에른에서도 소요가 일어났다. 오토가 아르눌프 공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바이에른의 왕령지와 교회를 직접 관리하여 한게 발단이 되었다. 아르눌프의 아들 에베르하르트는 왕의 제안을 거부하였고, 이에 오토는 직접 바이에른을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아직 젊은 왕이 미숙한 모습을 보이자 앞서 언급한 불만 세력이 일제히 대대적인 반란으로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오토는 만만하지 않았다. 초기 실패를 면밀히 분석한 뒤에 체계적으로 반격에 나섰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일단 왕국이 안정화되자 오토는 빠르게 동서 양면으로 잠시 흔들렸던 헤게모니를 되찾아나갔다. 937년에 대대적으로 침공해온 마자르족이 여전히 건재한 종심방어에 걸려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은 이미 지난번 글에서 살펴보았다. 951년에는 첫 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여 롬바르드의 왕관을 획득하고,죽은 롬바르드 왕 로타르의 부인 아델라이드와 결혼하여 로타르파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런데 원정 직후의 정치적 안배에서 오토가 새 왕비 아델라이드와 자신의 동생 하인리히의 지위를 강화하자, 이미 죽은 오토의 첫번째 왕비 이지드의 소생 류돌프가 반발했다.(그는 지난 이탈리아 원정에서 보인 실패로 부왕의 눈밖에 난 상태였다) 류돌프는 자기 매부인 로트링엔 공작 콘라트 적왕을 끌어들여 953년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내전은 2년간이나 이어졌는데, 그동안 절치부심하던 마자르족은 바로 이 기회를 틈타기로 한다.





개전

955년 4월, 막 레겐스부르크의 반란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오토 1세는 슬라브족의 침공 소식을 듣는다. 급히 작센으로 돌아온 오토는 상황을 점검하면서 추가적으로 일어날 더 큰 침공에 대한 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시점에서 그의 동생 하인리히가 급보를 알렸다. 마침내 마자르족이 그간의 침묵을 깨고 대대적인 침공으로 나온 것이다. 955년의 전쟁은 이렇게 막을 올렸다.

지난번 글에서 이미 서술했듯이, 마자르의 이번 공격은 그간의 습격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인리히가 세운 종심방어 시스템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놓고 고민하던 마자르는, 약탈자에서 정복자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그들의 이번 목표는 예전처럼 독일을 휩쓸고서 약탈물을 챙겨 돌아가는게 아니라 주요도시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는 기존의 스텝 기마궁사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간의 노력이 빛을 발해 이번 마자르 침공군은 대규모의 보병과 공성부대를 포함한 복합군이었다. 과연 일신된 마자르군은 정복자로의 전환에 성공한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이들의 원정 목표는 아우크스부르크였다. 이들이 아우크스부르크를 점령한다면,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연결하는 브레너 고개를 장악할 수 있다. 즉, 알프스를 넘는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상황은 여러모로 오토에게 불리했다. 마자르족은 더이상 옛날의 단순한 스텝 기병부대가 아닌데, 오토는 대군을 동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슬라브족이 그의 영토를 위협하고 있는데, 그곳 수비군을 다 비워놓고 대규모 야전군을 편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국왕 직속군인 작센군을 동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소심한 지휘관이었다면 망설였겠지만, 오토에게는 승부사의 자질이 있었다. 그는 지체없이 작센 병력 중 소수만 차출해서 거느리고 남하했다. 그러면서 슈바벤, 바이에른, 프랑켄에 최대한 빨리 병력을 보내라는 명령을 내리고 동시에 보헤미아군도 그에게 합류할 것을 지시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독일 내부의 혼란을 틈타려 한 마자르족의 시도는 실패했다는 부분이었다. 일반적으로 분열 상태에서 외침이 들어오면 더 심하게 분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마자르의 전략은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수학공식과 달라서 항상 같은 답이 나오라는 법은 없었다. 더 심하게 분열하는 경우는 외부에서 들어온 침략 세력과 결탁하여 이익을 볼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설 수 있을때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독일 지역의 여러 귀족들에게 '마자르는 우리의 공공의 적'이라는 인식은 너무나도 확고했다. 반란 세력에 대한 지지도는 뚝 떨어졌고, 대귀족들은 점차 오토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결국 위신과 세력을 잃은 반란군이 굽히고 나왔다. 콘라트와 류돌프는 둘 다 백기를 들었고, 덕분에 오토는 마자르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슬라브를 견제하느라 국왕의 직속부대가 없는 상황에서, 상당한 숫적열세 하에 사나운 적군과 싸워야 한다는 점은 명확했다.





아우크스부르크 공방전

역시 개혁의 성과를 보여주듯, 마자르족은 상당히 정교한 전략을 구사했다. 이들이 바이에른을 목표로 삼은 것 자체가 상당한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오토가 가장 믿을만하고 강력한 군대인 작센군을 이끌고 달려올 것인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마자르 지도자들은 지난 2년간의 전쟁으로 작센 병력이 상당히 지쳐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슬라브의 침공 위협도 있는 상황이었다. 마자르족은 오토가 작센군을 끌고 오지 않는다면 승산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파악했다. 그리고 이미 보았다시피, 이들의 계산은 지금까지는 잘 맞아떨어졌다.

이들의 전략은 주요 도시 점령도 있었지만, 동시에 오토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형으로 끌어내어 결정적인 패배를 선사하는데에 있었다. 이러한 승리를 거둔다면 자신들은 다시 한번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테고, 933년 이래 끊겨버린 공물도 다시 들어오게 될 터였다. 이를 위해 7월 내내 마자르족은 바이에른을 약탈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건 마구잡이 약탈이 아니라 분명히 치밀하게 세운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일부 분견대는 레히 강을 건너 슈바벤을 공격했는데, 이것은 이들이 이 지역을 노리고 있다고 믿게 하려는 일종의 미끼였다. 그렇게 된다면 라인란트의 병력을 그곳에 묶어둘 수 있고, 오토를 울름으로 유인할 수 있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마자르족은 특유의 기동력을 이용해 번개같이 아우크스부르크로 돌아가 그곳을 점령할 계산이었다.

그리고 8월 초, 계획대로 마자르군은 아우크스부르크로 돌아가 그곳을 포위하였다. 이를 위해서 마자르군은 상당수의 공성무기를 동원하였다. 이 강력한 군대를 상대로 도시와 시민을 지켜내야 할 의무는, 아우크스부르크 주교령의 수장 울리히 주교에게 떨어졌다.

훗날 성인의 반열에 올라가게 되는 울리히는 선왕 하인리히 1세에 의해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탁월한 학자로 이름을 떨쳤으며, 주교가 된 뒤로는 학교 개혁을 통해 사제의 실력과 도덕성을 대폭 강화하고, 빈민구제에 힘쓰는 등 사목자로서도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문제는 이 훌륭한 학자이자 종교인이, 아우크스부르크를 사나운 적군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책임까지 떠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의 시민들과 마자르 포위군은 곧 이 종교인이 장군의 자질까지 갖추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자르군이 아우크스부르크를 둘러싸자, 도시 안의 병사들은 울리히에게 나가 싸우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주교는 단호하게 거부하고, 공격에 취약할수밖에 없는 성문들을 단단히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특히 공격군이 접근하기 가장 쉬운 남문이야말로 방어군을 집중시켜야 할 지점이었다.

그러나 전술적으로 대폭 개량된 마자르군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첫날부터 기습적으로 동문을 공격했다. 이곳은 레히 강의 가파른 강둑을 마주보고 있어서 공격하기 매우 어려운 지형이었다. 그래서 동문 수비병들은 적이 이곳으로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자르족은 이러한 방심을 내다보고 기습을 가했다. 워낙 예상치 못한 지점을 찔렀기 때문에 기습은 거의 성공할뻔 했다. 마자르족이 성문과 성벽을 넘어 도시 진입에 성공할 판이었다.

그러나 다급한 상황에서 울리히는 매우 침착하게 대응했다. 주교는 다른 성문들에서 가능한 병력을 차출한 다음에 신속하게 돌파된 지점으로 투입했다. 그것도 그저 명령만 내린게 아니라, 말 위에 올라서 몸소 작전을 지휘했다. 이 전투의 주요 사료인 Vita Sancti Uodalrici는 이 때 주교가 단지 사제의 긴 옷만 입었을 뿐, 갑옷도 방패도 투구도 없이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 전투를 지휘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이건 성인전이고, 하느님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거뒀음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서술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아우크스부르크 공방전을 재현한 디오라마(성벽 위에 깨알같이 울리히 주교까지 재현했다)

어쨌든 격렬한 전투 끝에 마자르군은 격퇴되었다. 동문 공격을 이끌었던 마자르 지휘관이 치명상을 입고 쓰러질만큼 치열한 격전이었다. 적군이 물러나자 울리히는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곧장 손상된 성벽을 보강하고. 성 내에 적의 진입을 저지할 수 있는 추가 요새시설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당히 노련한 지휘관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첫날 아우크스부르크 점령에 실패한 마자르군은 이튿날부터 포위공성 태세로 전환했다. 이들이 다수의 보병과 공성무기를 끌고 왔다는것 자체가 이들이 진지하게 도시 점령을 시도했음을 보여준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상당히 잘 훈련된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 오토의 군대가 도착하기 이전에 이들을 지워버리는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성공하지 못했다. 바로 그 다음날에 오토의 군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마자르군은 미련없이 포위를 풀고 오토의 군대를 맞을 채비를 했다. 마자르 지휘관은 어차피 오토의 군대를 격파하면 아우크스부르크 뿐 아니라 오토의 왕국 전체가 무릎을 꿇을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 오토의 야전군을 격파하는 것은 마자르군의 중요한 전략목표 중 하나였다. 아우크스부르크 자체가 이를 위해 세심하게 선정된 전장이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인근 지형은 스텝 기병이 선호하는 개활지였다. 마자르군은 늘 그랬듯이 자신들이 원하는 지형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싸우고자 했고, 일단 지형 선점은 성공을 거두었다.





오토의 진군

마자르족과 맞서기 위해 남하하는 오토의 머릿속은 어떻게 강대한 적과 회전을 벌일만한 규모의 군대를 끌어모을 수 있을지로 가득했을 것이다. 한스 델브뤽은 초장부터 오토의 목표가 마자르군을 전멸시키는 것이었다고 주장했지만, 가장 믿을만한 직속 부대를 놔두고 가는 입장에서 벌써 그런 원대한 계획을 품을 여유가 있었을지 현대 학자들은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물론 오토의 장기 대전략은 헝가리의 위협을 완전히 끝장내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소원하던 로마 황제의 관을 받기 위해서라도 이는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이번 전역은 당장 마자르의 분탕질이 바이에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잡아둔 뒤, 군대를 모아 이들을 몰아내는 것부터가 시급했다.

일단 바이에른 내에는 아직 상당한 부대가 남아있었다. 종심방어 전략에 따라, 바이에른 곳곳의 견고한 요새에 잘 훈련된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아우크스부르크를 공격하는 마자르군 후방에도 이러한 요새들이 건재하였다. 그리고 앞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보았듯이, 이들은 요새를 방어할 능력이 충분했다. 그러나 이들의 1차목표는 수비였기 때문에, 전쟁 초기단계에서는 오토는 이들의 도움을 받기 어려웠다.

이 외에 당연히 야전군도 있었다. 종심방어 전략을 따르자면, 이들은 일단 쳐들어온 마자르군의 예봉을 곧바로 받지 않고 안전한 지역에 집결했다가 마자르군이 약탈을 위해 흩어지거나 돌아갈때를 노리도록 되어있었다. 다만, 이번 전쟁에서 마자르군은 예전같은 약탈부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전략이 필요한 상태였다. 소수의 작센 병력과 함께 남하하면서 왕은 지속적으로 전령을 보내 군대 집결을 독려하는 한편, 적의 행보에 수시로 대해 보고를 받았다.

10세기 독일 기사

일단 바이에른 부대 3개 군단(legiones, 1개 군단은 약 천 여 명)이 오토에게 달려와 합류했다. 왕의 명령을 받은 슈바벤 군단도 달려왔다. 앞서 보았듯, 마자르군은 양동작전을 통해 라인란트를 공격할 듯 하여 쾰른 대주교 브룬(오토의 동생)이 관할하는 부대를 그곳에 묶어두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포위로 마자르군이 라인란트로 진격할 의도가 없다는게 명백해졌지만, 브룬이 군대를 끌고 오토에게 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여전히 병력이 부족했다. 오토는 일단 프랑켄에 사령부를 두고 그 지역 병사들도 모아들였다.

얼마 뒤, 일전에 류돌프와 손잡고 오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사위 콘라트가 휘하 부대를 이끌고 달려왔다. 그가 로트링엔 공작 직위를 내놓으며 항복했을때, 오토는 관대한 처우를 해줬는데 이제 장인을 돕기 위해 달려온 것이었다. 그가 이끈 부대도 적어도 천 명은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비두킨트는 콘라트의 군대가 기병부대였다고 명시하고 있다. 동시에 loricati라는 명칭으로 보아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병이 다수였을 것으로 보인다. 천 명이라는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보여도 중장기사가 그 정도라면(물론 전원이 중장 기사는 아니라고 치더라도) 상당한 전력이었다.

오토의 진영은 콘라트의 군사들을 뜨겁게 환영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까지 소집된 오토의 군대에는 중무장 기병이 많이 부족했던 것이다. 콘라트의 가세로 비로소 오토의 군대는 전술적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헤미아 군단이 오토에게 합류했다. 보헤미아 공 지휘 하에 두번째 보헤미아 군단이 집결중이었지만, 역시 시간 내에 달려올 수는 없었다. 이렇게 계산하면 오토의 군대는 약 8천 여 명이 된다. 많은 수는 아니었고, 국왕의 직속 군단이 빠진 야전군이었지만 역시 오랜 군제 개혁 끝에 태어난 군대였으니 질적으로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오토는 이제 좀더 공격적으로 나가도 되겠다고 판단하고, 아우크스부르크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결전의 순간만이 남아있었다.

레히펠트 전투 (3)-933년의 전역과 마자르의 딜레마 History-근동, 서양사

933년의 침공

932년, 하인리히 1세는 독일 주교단에게 마자르와의 평화조약을 깨고, 지난 8년간 바쳐왔던 공물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그 이유로 그동안 뱌쳐온 막대한 공물로 인해 교회가 지는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을 들었지만, 이 묘사는 하인리히 1세를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군주로 그리고자 했던 작센 연대기 저자(저자인 비두킨트는 베네딕토회 수사였다)의 의도가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 Bachrach가 지적하듯이, 군사적 자신감을 얻은 하인리히 1세는 개전을 앞두고 지지여론을 모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얼마 뒤,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도 비슷한 의식을 치르고 하인리히의 전쟁에 동참할 것을 분명히 했다.

933년, 공물이 끊어지자 헝가리의 마자르족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 상당한 규모의 마자르군이 튀링겐과 작센을 목표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동프랑크는 예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았다. 불길한 징조는 초장부터 나타났다. 이제까지 마자르의 침공때 큰 도움이 되었던 지역 슬라브인들이 가세를 거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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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레 강을 건넌 마자르족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향했다. 서쪽의 튀링겐으로 향한 부대는 곧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주민들이 가져갈수 있는 식량과 재산과 가축들을 모조리 챙겨서 요새로 피신해버렸던 것이다. 그 지역 방어군에게도 이미 동원령이 떨어져 있었다.

마자르군을 향해 지역 방어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난번 글에 설명했듯이, 주기적으로 훈련받은 milites로 보강된 군대였다. 이들은 한데 집결하여 마자르군을 공격했고, 이미 추위와 식량부족으로 취약해져있던 마자르족은 큰 패배를 당했다. 패배 이후 마자르군은 식량과 마초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이 상태가 가장 취약한 상태였다. 각 요충지마다 지어진 요새 안에서 잘 쉬고 있던 동프랑크군이 흩어진 마자르 소부대들을 덮쳐왔다. 이들의 공격에 마자르군은 매우 쉽게 각개격파당했다. 하인리히의 종심방어 전략은 이렇게 그 가치를 완벽하게 증명했다. 서쪽으로 진군해간 마자르 군대는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리아데 전투

동쪽으로 향한 부대는 메르제부르크를 공격하려 시도하였다. 그 인근의 리아데(Riade)가 바로 하인리히 1세가 그의 군대를 집결시킨 장소였다. 서쪽에서 하인리히의 종심방어 전략이 효과를 입증했다면, 이제 군제개혁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야전군이 실력을 발휘할 차례였다.

하인리히의 군대가 접근해오는 것을 알아차리자, 마자르족은 연기를 피워올려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튀링겐 지역에 흩어져있던 마자르족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하인리히는 예상 외의 전술을 구사했다. 그의 군대 중에서 가장 빈약하게 무장한 기병들을 약간의 중무장병을 딸려서 내보냈던 것이다.

이 부대를 보자 자신감을 얻은 마자르족이 공격해왔고, 빈약하게 무장한 동프랑크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마자르군을 하인리히가 공들여 쳐놓은 함정 한복판으로 끌어들였다. 마자르족을 비롯한 스텝 군대의 주특기인 위장 후퇴 전술을, 하인리히가 다름아닌 그들을 상대로 구사했던 것이다. 이는 개혁의 결과로 재탄생한 그의 군대의 전술적 수준을 잘 말해준다.

적이 미끼를 물고 가까이 오자, 하인리히는 매복시켰던 중무장 기병을 풀어놓았다. 이 대목은 이후 역사가들이 하인리히 개혁의 핵심을 기병 양성으로 오해하게 만든 장면 중 하나이다. 그러나 Bowlus 선생이 잘 지적하듯이, 중무장 기병에만 집중하다보면 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경무장한 궁기병이 다수 포함된 스텝 기병대를 상대로, 중무장 기병이 돌격을 통해 백병전으로 국면을 끌고 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지난번 글에도 썼듯이, 중무장 기병이 예상치 못한 근거리에서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는한 정말 쉽지가 않다. 리아데 전투의 중요성은 각 부대의 유기적인 협동을 통한 위장 후퇴와 매복 전술로 그 어려운 작업을 이루어냈다는 점에 있다. 지난번 글에 언급했듯이 단순히 기병 양성이 아니라, 이러한 작전을 구사할 수 있는 군대를 만들어낸것이 하인리히가 이룬 개혁의 진정한 성과였다.

어쨌든, 근거리에서 매복해있던 동프랑크 기병이 돌격해오자 마자르군은 크게 당황했다. 어찌나 가까운 거리에서 튀어나왔던지 마자르 기병은 화살을 딱 한 번밖에 쏠 수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곧장 뒤로 돌아 도망쳐버렸다.

다만 하인리히 입장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위험을 감지한 마자르군이 재빨리 후퇴하는 바람에 함정을 통해 적을 섬멸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하인리히의 기병은 적을 추격했지만, 딱 8마일만 뒤쫓다가 정지했다. 이는 사실 현명한 결정이었다. 더 추격하다가 말이 지친다면, 재결집한 마자르군의 역습에 당할수도 있었다. 승리한 군대가 대열이 흐트러졌다가 역습에 당하는 사례는 매우 많다. 질서를 유지하면서 추격하자 적절한 시점에서 멈출수 있었다는 점도 동프랑크군의 훈련도와 규율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마자르족은 큰 사상자를 내지 않고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곳은 작센 국경지역이었기 때문에, 잘레 강만 넘어가면 무인지대였다. 따라서 서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종심방어에 걸려 섬멸된 부대와 달리, 이쪽의 마자르군은 거의 온전히 철수하였다. 그러나 스텝 군대는 물러나더라도 곧장 재집결하여 반격을 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에 마자르군이 그래도 도망쳤다는 것은 단단이 혼이 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종심방어 전략의 위력을 증명하고, 군제개혁의 결과로 탄생한 야전군의 전술적 능력을 보였으며, 궁극적으로 마자르군을 물러나게 했다는 것은, 불과 20여년 전에 루트비히의 동프랑크군이 마자르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했고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기적으로 공물을 바쳐야 했다는 점과 비교해볼때 큰 성과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마자르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어 앞으로의 침공을 단념하게 만드는 과업은 하인리히의 아들 오토에게로 넘겨졌다.





마자르의 딜레마

일단 마자르족은 그런대로 전력을 보존해서 철수했다(전멸한 서쪽 방면군은 제외하고). 덕분에 몇년 지나지도 않은 937년에 마자르족은 다시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일으켜 작센과 튀링겐을 재침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침공은 유럽을 마음대로 휩쓸던 좋은 시절은 이제 갔다는 사실만을 증명해주었다.

하인리히의 종심방어 체제는 다시 한번 굳건히 위력을 발휘했고, 철수하던 마자르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침공군이 돌아갈때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중요한 길목마다 잘 무장된 방어군으로 가득한 요새들이 들어차 있으니 피해를 입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933년과 937년의 전역은 마자르족에게 그때가지 유지해왔던 전략 기조를 수정해야 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정주민을 상대로 벌여온 약탈전쟁 방식으로는 동프랑크의 종심방어를 상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마자르족의 전략적 딜레마가 있었다.

이전의 많은 유라시아 스탭 출신 유목민들도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같은 딜레마에 부딪친 바 있다. 이들은 정주사회 인근에 자리잡고 주기적인 약탈을 통해 그들의 부를 빼앗아오는 삶의 방식을 따랐다. 이제까지의 숱한 침공에서, 마자르족은 근본적으로 정복자가 아닌 약탈자로서 나타났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방식을 계속 유지하려면 정주사회로의 통합을 피해야만 했다. 안 그러면 바로 이들을 정주민 입장에서 공포스러운 존재로 만들어준 기술들을 잃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삶의 방식을 유지하자니 더이상 침공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더욱이 이들이 스텝 지역의 전쟁 방식을 고수하려면 정복하는 지역마다 새로이 목초지를 확보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기마 전사의 수를 유지할 수가 있다. 그런데 하인리히의 축성 덕분에 이 지역을 정복하고 목초지로 만드는 것은 상당히 어려워졌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서유럽은 스텝 지역처럼 목초지를 확보하기가 힘든 지역이지만. Lindner는 바로 이 목초지의 부족때문에 아틸라의 훈족도 유럽으로 진군할수록 기마 궁수의 비율은 점점 더 줄어들고 결국에는 그의 군대에서 아주 소수가 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약탈자에서 정복자로 변신하려면 그들의 군대와 전쟁방식 자체가 변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정복전쟁을 수행하려면 예전처럼 스텝 기병 중심의 군대가 아니라, 다수의 보병과 공성부대를 포함한 복합군으로의 진화가 필요했다. 특히 이 공성기술을 확보한다는게 중요한 관건이었다. 이건 유목민에게는 삶의 방식 자체가 걸린 문제로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익숙한 생활 방식에 수정을 가한다는건 대단히 힘들고 불편한 일이다. 모든 개혁의 근본적인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맨 첫회에서 언급했듯이, 스텝 유목민의 많은 장점들 중 하나는 탁월한 적응력이다. 일단 방향을 잡으면 이들은 주변의 발달된 문명으로부터 배우거나 빌려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마자르족도 변신을 위한 노력에 들어갔다. 그들은 부유하고 선진 문명을 자랑하는 비잔티움 제국으로 눈을 돌렸다.

마침 자신들의 세력권인 이탈리아로 동프랑크가 세력을 확장하려 드는 것에 분개하던 비잔티움 제국과 마자르족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이후 마자르 침공을 지휘하게 되는 지도자는 실제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꽤 오래 체류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비잔티움으로부터 전략적 조언과, 공성에 관련된 기술을 전수받은 마자르족은 대대적인 변모에 들어간다.

이렇게 개혁을 위한 치열한 과정을 겪은 두 군대가 또다시 마주쳤을때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가 다음 글에서 살펴볼 주제이다.


레히펠트 전투 (2)-하인리히 1세의 대비 History-근동, 서양사

두 제국의 유산

그렇다면 이 스텝 기병의 침공을 동프랑크는 어떻게 대비하고 있었는가? 레히펠트 전역에서 오토 대제가 이끌었던 군대는 근본적으로 그의 아버지 작센 공이자 동프랑크의 왕 하인리히 1세가 심혈을 기울인 개혁의 산물이었다. 이 개혁의 내용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리지만, 그 개혁 이전 상황으로 먼저 돌아갈 필요가 있다.

동프랑크 왕국의 군사적 유산은 무엇보다도 카롤링 왕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프랑크 제국이 분열되면서 동원할 수 있는 인력과 물자가 샤를마뉴 때보다 적어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기본적인 군사조직과 인프라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물론 더 추적해서 올라가면 샤를마뉴가 이어받은 로마 제국의 군사적 유산이 있었다.

8세기 후반의 팽창으로, 샤를마뉴의 제국은 잘레 강과 엘베 강을 따라 슬라브족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이때까지 샤를마뉴의 기본 정책은 방어보다는 주기적인 공세였다. 그러나 팽창이 멈추자, 이제 국경선을 안정시키고 효율적인 방어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방어전략 수립에 있어서 샤를마뉴가 참고할 명확한 선례는 옛 로마 제국이었다. 샤를마뉴는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건립된 행정 중심지들을 따라 일련의 방어요새를 건축한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강 건너편의 '야만족' 지역에까지 요새화된 교두보들을 설치했는데, 이 역시 로마 제국의 방어전략을 따른 것이었다.

샤를마뉴의 후계자들은 이 기조를 전반적으로 유지해왔다. 그러나 동프랑크(혹은 독일) 왕국의 남동쪽 국경을 따라 마자르인들이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하면서 여기에 대처할 필요가 생겨나게 된다. 907년, 마자르족이 바이에른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더니, 910년에는 동프랑크의 통치자, '유아왕' 루트비히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겼다. 이 승리의 결과 마자르인들은 슬라브인들과 외교적 관계를 맺고, 프랑크에 대해 연합전선을 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힘을 바탕으로 동프랑크 왕국 내로 심각한 수준의 침공을 가하게 된다.

반대로 동프랑크 왕국은 심각한 정치적 내분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카롤링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루트비히 유아왕이 911년에 사망하였고,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가 그 뒤를 이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내분은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간신히 끝을 맺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등장한 하인리히 1세

왕좌에 앉은 하인리히는 헝가리의 마자르인들이 내포한 전략적 위협에 대처할 방안을 고민해야 했다. 그는 기존의 방어정책만으로는 자신의 공국과 왕국을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잘레 강 동안의 슬라브 공동체에 대한 간접지배에서 직접지배로의 전환과 마자르 족의 침공에 대비한 방어 시스템의 확장 및 신설이었다.





종심 방어

여기서 잠시 하인리히의 방어시스템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929년 슬라브족에 대해 성공적인 군사작전을 이끈 뒤, 930년대에 하인리히는 그야말로 미친듯이 축성 작업에 들어간다. 그 결과 50여개에 달하는 요새가 빽빽하게 들어찼다. 이 요새들은 각각 7.5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이때문에 후대에 하인리히 1세는 그저 성 짓는 걸 좋아하는 임금(모 위키의 표현으로는 '성덕후') 정도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건 하인리히가 세운 전략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오해다.

하인리히는 그저 마구잡이로 성을 쌓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건설한 요새들은 정확히 주요 도로 시스템이 지나가는 곳과 하천들의 주 도하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평균 7.5km의 거리는 한 성이 공격을 받을 경우 상호지원을 하기에 적절한 거리를 염두에 두고 배치한 것이었다. 최근 학자들은 하인리히의 방어전략을 '종심 방어(defense-in-depth)'라는 이름으로 설명한다. 이것 역시 그가 로마 제국에서 카롤링 왕조를 거쳐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이 방어전략은 기본적으로 후기 로마 제국이 국경방어를 위해 채택한 방안이었다.(물론 고대 로마인들은 종심 방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다. 현대 학자들이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일본의 어떤 작가님이 매우 싫어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 방어전략은 세 개의 요소로 이루어진다. 첫째. 요새를 방어하기에 충분한 훈련과 장비를 갖춘 그 지역 출신의 수비군. 둘째, 수 개월 이상 원정을 치를 요건을 갖춘 이들로 구성된 야전군. 셋째, 기병 비중이 높고 엘리트 프로 전사들로 구성된 기동 타격대.

따라서 후기 로마 제국에서 탄생한 종심 방어 개념은 결코 성채에 틀어박혀 버티는 수동적 작전이 아니었다. 이 요새들은 백성들과 이동 가능한 물자를 최대한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거점들이다. 그리고 적은 수로도 쉽게 방어할 수 있되 공격해서 빼앗기는 어려운 요충지에 지어진다. 요새의 방어군도 가만히 지키기만 하는게 아니라, 인근의 다른 요새들을 지원하면서 활발하게 움직인다.

물론 요새로 가져갈수 없는 물자들은 희생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물자들은 미끼이기도 하다. 기동성을 장기로 삼는 유목 군대도 약탈물을 잔뜩 짊어지면 둔해지기 마련이다. 바로 이 시점이 그동안 잘 갈무리해둔 정예 야전군이 출동할 시점이다. 그리고 약탈을 위해 넓게 흩어지고 쪼개지면, 여러 요새에 분산된 수비군들에게도 공격 기회가 올 수도 있다. 기동력이 뛰어난 적을 상대로 국경 전체를 지켜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만큼, 종심 방어는 정주민 국가 입장에서는 최선의 전략이었다. 빼앗긴 물자는 적이 되돌아갈때 격파하고 되찾아오면 된다.

동프랑크 왕국이 이 작전을 로마 제국의 선례에서 배웠음은 명확하다. 하인리히 1세가 대대적인 축성 사업을 벌이는 9세기부터 로마식 종심 방어 전략 개념을 담고 있는 책자들(특히 베게티우스)의 필사가 급격히 늘어난다는 점이 이를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군제개혁

앞서 말했듯이 종심방어는 단순히 지키기만 하는 수동적인 전술이 아니기 때문에, 적시에 한방을 날려줄 수 있는 강력한 야전군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인리히 1세의 군제개혁에는 이 강력한 군대의 양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재위 초반에 하인리히는 마자르족을 맞아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연대기 저자는 하인리히가 '빈약하게 훈련된 군대를 야전에서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마자르 지휘관 하나가 사로잡히면서, 협상을 통해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고, 하인리히는 9년의 평화협정과 매년 공물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군대를 개혁할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이 개혁의 실체는 그동안 놀랄만큼 학자들 간에 합의된 바가 없이 해석이 계속 바뀌어왔다. 일단 이를 묘사하는 가장 중요한 사료인 비두킨트의 <작센 연대기Res Gestae Saxonica>의 라틴어 단어들이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점이 이 모호함을 더욱 키웠다. 또한 20세기 중반까지 독일 학계는 대체로 중세 초기 국가에서 '독일적'인 특성을 찾는데 집중해왔는데, 이 점도 기존 해석에 영향을 미쳐왔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인리히 개혁의 중요한 요소인 agrarii milites의 존재에 대한 논쟁이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이 시기에 하인리히가 축조한 요새들에 배치되었다고 생각되는데, 19세기의 학자들은 이들을 문자 그대로 '농민 병사'로 해석하였다. 이 해석은 당시 유행했던 로맨티시즘이 강조한 '자유로운 독일 농민 전사' 개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이 강인한 농민병들이 방어전을 통해 야전에서 무적이었던 마자르족을 꺾을 수 있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후 1980년대쯤 해석의 추가 바뀌면서, 마자르족에 대한 동프랑크의 승리는 농민병들의 방어전략이 아니라 강력한 중장 기사단의 돌격 전술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주를 이루었다. 대표적으로 K. Leyser는  방어력이 뛰어난 체인메일을 입은 중장기병은 기마궁수의 화살공격을 받아내면서 성공적으로 돌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이 시기 중세사 해석의 정설은 이 시기 중세 유럽의 기술발전으로 중장기병이 전장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것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었다. 린 화이트 주니어의 저서 1장이 이 주장을 대표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 해석에 따르면, agrarii는 요새를 지키는 마이너한 임무만을 담당하는 보잘것 없는 민병대였고, 진짜 주력인 야전군은 중장기병대였다는 뜻이 된다. 즉, 하인리히 개혁의 핵심은 마자르족을 상대할 수 있는 기사대 양성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 정설은 다시 뒤집히고 있다. 대표적으로 Bowlus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기존 정설 말대로 하인리히 개혁의 핵심이 중장기병 양성이고, 중장기병의 돌격작전이 핵심 교리였다면, "대체 왜 정작 10세기 사료에서 제대로 진형을 갖춘 헝가리군에 대한 유럽 기사단의 정면돌격 사례를 찾아보기가 힘든가?"

실제로, Leyser가 돌격전술이 중세 유럽군의 기본전술이 되었다는 예로 든 사례들을 보면, 적의 접근을 예상치 못한 마자르군을 상대로 유럽 기사들이 갑작스럽게 기습공격을 가했다거나 이미 전열이 흐트러진 적을 상대로 돌격한 것과 같이 '기본 전술 교리'라고 보기 힘든 특수한 상황들이거나, 후술하겠지만 단순한 돌격 이상으로 복잡한 작전이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Bachrach 등은 중세의 전장을 기병이 지배했다는 것 자체가 오해에 가까웠으며, 중세 내내 보병은 마이너한 역할이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전술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사료적 근거와 여러 정황근거를 토대로 파악한 하인리히 군제 개혁의 실체는 무엇일까? 최근 학자들은 단순히 용어 해석뿐 아니라, 이들이 이후 전쟁에서 실제로 담당했던 역할들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새로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우선 agrarii milites가 요새에 배치된 병력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단순히 수비만 하는 2선급 부대라기에는 이들의 편제와 훈련은 상당히 정교하다. 우선 편제를 보면, 하인리히는 9명이서 한 부대를 구성하도록 하고, 9명 중 한 명은 요새 내에 거주하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각 부대에서 한명씩 요새 안에 살게 될 이를 정한다. 나머지는 요새 인근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데, 수확의 3분의 1은 비상용으로 요새에 비치한다. 요새 안에 사는 병사들은 이 비축식량을 관리하고, 요새 유지에 책임을 진다. 요새 밖에서 농사짓는 병사들은 요새 안에 거주하는 동료들의 보유지까지 대신 경작해준다.

평소에 농사를 짓는다고 해서 이들의 전투력을 낮춰봐서는 안된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같은 집회(concilia)에 참여하고, 공적 행사(conventi)를 같이 치르며, 축일 음식을 같이 먹었다(convivae). 그리고 정기적으로 같이 훈련을 받았다. 하인리히가 이들을 이렇게 같이 일하고, 같이 훈련받는 집단으로 묶은 것은 이들을 연대감을 갖는 공동운명체(confamiliares)로 양성하고자 함이었다. 이들은 결코 농민들을 징집해서 창만 쥐어준 2선급 부대가 아니었다.

여러번 반복하는 바이지만 이들은 단순한 방어군이 아니었다. 이후 하인리히의 원정 기록을 보면, 이들 agrarii milites가 대거 참여했음이 분명하다. 연대기 저자도 '이들이 규율과 기강이 잡히고 나서야 비로서 하인리히가 슬라브족을 상대로 원정을 떠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부대는 어땠을까? 사료는 하인리히의 군대를 묘사할 때, militiaexeercitus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예전에는 하인리히 개혁의 핵심이 기병 양성이라는 것이 정설이었기 때문에, agrarii milites는 지역 방어군, militia는 중장기병 위주의 야전군이라고 보았지만, 현재 해석은 다르다. 일단, militia가 엘리트 상비군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딱히 이들이 기병 중심이었다고 판단할 사료적 근거는 많지 않다. 오히려, 상당한 수의 보병 전사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Bowlus는 기병으로 싸우는 훈련을 받은 이들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보병으로도 싸울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대대적인 원정일 경우, agrarii도 엄연히 원정을 떠난 야전군(exercitus)의 일부를 구성했다. militia와의 차이점은, militia가 상비군인데 비해 agrarii는 파트타임 병사였다는 점이었다. 앞서 말했듯, 이들은 요새를 중심으로 살고 훈련받으며 적의 침공시에는 종심방어 전략 내에서 전술적 방어 역할(그러나 그것이 상황에 따라 공격을 배재하지는 않는다)을 하였고, 원정시에는 야전군으로 참가했던 것 같다.

이와 구분되어, 중무장한 기병들을 가리키는게 분명한 용어는 milites armati이다. 사료의 묘사로 보아 이들이 충격전술을 담당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충격전술의 존재만 가지고 하인리히의 군대가 기병 중심이었다고 볼 근거는 없다. 이들은 중요하지만 여러 전술적 요소 중 하나를 담당했을 뿐이다.





개혁의 결과

이렇게 대략 군제의 틀이 잡히고 훈련이 마무리되자, 하인리히는 슬라브 원정을 떠났다. 이 원정이 그의 새로 태어난 군대에게는 실전 테스트가 되었다. 그리고 이 원정에서 그의 군대는 개혁의 성과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특히 렌첸 전투(929)는 이 군대의 전술능력을 잘 보여주었다. 이 전투에서 동프랑크의 보병이 밀집대형을 이루어 슬라브 보병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동안, 중장기병대는 적의 측면으로 돌격하여 적 대열을 무너뜨렸다. 비두킨트의 연대기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제 국왕은 기병 전투에서 실력을 증명한 군대를 갖게 된 만큼, 그의 숙적인 헝가리인과도 싸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구절도 예전에는 하인리히의 군제개혁 핵심이 기병 양성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앞뒤문맥을 따져보면 이건 그런 뜻이 아니다. Bowlus 선생이 지적하듯이, 보병을 상대로 측면공격에 성공했다고 해서 스텝 기마궁수를 상대로도 똑같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하인리히는 어떻게 해서 마자르와도 맞설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까?

기병이든 보병이든, 활을 주무기로 삼는 군대에게 가장 위력적인 대형은 초승달 대형이다. 적이 중앙으로 돌진해오면 3면에서 화망을 구성하고 공격을 퍼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무너뜨리려면 중앙 돌격을 자제하고, 측면으로 우회 공격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무엇보다도 적군은 기동력에서 중장기병을 능가하는 스텝 기마 궁수다. 중장기병이 우회를 시도할 것 같으면 바로 방향을 바꿔버리거나 흩어져버리면 그만이다.

따라서 난점은 기동 자체가 아니라, 중장기병이 우회기동을 시도한다는 것을 적이 모르게 해야 된다는데 있다. 여기서 잘 훈련된 보병의 역할이 중요하다. 보병은 견고한 대형을 갖추고 적의 관심을 끌면서, 동시에 아군 기병의 기동을 적의 눈에서 가려야 한다. 즉, 잘 훈련되고 기강이 잡힌 기병과 보병 모두, 그리고 정교한 전술적 공조가 필요하다.

렌첸 전투 이전까지 하인리히의 보병은 능력을 충분히 입증했다. 그러나 주 전장이 습지라 기병은 아직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비로소 렌첸 전투에서 기병이 기동과 돌격 능력을 증명함과 동시에, 보병과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또한 보여주었다. 하인리히가 해볼만 하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도 여기에 있었다. 즉, 하인리히 개혁의 진정한 성과는 단순히 기병 양성이 아니라, 이런 복잡한 전술기동을 해낼 수 있는 실력의 군대를 양성해낸 데 있었다.

슬라브 원정 직후, 하인리히는 더 이상 마자르족엑 공물을 바치지 않을 것을 선언한다. 이제 개혁의 결과로 탄생했고, 실전경험까지 쌓은 그의 군대가 진짜 강적인 스텝 기병을 상대로 실력을 입증할 차례였다.


레히펠트 전투 (1)-공포(?)의 마자르족 History-근동, 서양사

들어가며

화약 무기가 널리 정착되기 이전 스텝 기병은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막강한 전사 집단 중 하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는 스탭 부족들과 정주민들의 투쟁으로 얼룩졌으며, 많은 경우 스텝 기병은 정주민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사실 근대 이전의 여러 문명권들의 군대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활동하는 환경에 맞게 적응하고 진화한 군대들이었다. 역사상의 여러 군대를 놓고 하는 if놀이가 무의미한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다른 문명권의 군대와 마주치는 경우 처음에는 곤혹스럽고 당황스러운 상황이 펼쳐지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 양편 모두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약점을 최대한 보강하고 강점을 최대화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결국, 여기서 보다 성공적인 군대가 살아남는다.

이 '적응'이라는 것은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 역사를 볼때, 냉정한 평가를 내리기에 앞서서 결과를 다 알고 있는 우리의 시각에서 벗어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예측을 내려야 하는 당시인들의 입장에 서봐야 할 필요가 있다. 스텝 군대의 또다른 강점은 여기에 있었다. John France 선생이 지적하듯, 스텝 군대는 상당히 유연하고 적응력이 높은 전사 집단이었다.

그런 면에서 955년 레히펠트 전투는 상당히 흥미로운 예를 제공해준다. 유럽은 마자르족의 지속적인 침공에 노출되어 있었다. 사실 이때까지 서유럽은 스텝 부족을 그렇게 많이 접하지는 못했다. 아바르와 훈족의 공격은 강력했으나, 그들의 위협은 상대적으로 짧게 끝났다. 마자르의 공격은 서유럽이 스텝 군대의 지속적인 공격에 직면했던 마지막 경우였다. 이 공격을 받아내야 할 동프랑크 왕국은 카롤링 왕조와 옛 로마 제국의 군사적 전통에 서 있었다. 이 전통이 본격적인 시험대 위에 오른 셈이었다.





마자르 군대-전술적 특징과 강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스텝 군대의 전술적 특징이자 강점은 기마로 대표되는 기동성과 강력한 합성궁으로 대표되는 원거리 타격 능력에 있었다. 기동성 덕분에 이들은 정찰에서 정주민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매복작전에도 유리했으며, 적군의 측면과 후방을 비교적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강력한 화살 공격 덕분에 적에게 입는 직접적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에게 출혈을 강요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스텝 전사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이 아니면 전투에 잘 응하려 들지 않았다. 아니면, 온갖 노력을 동원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다. 정주민족의 군대와 싸울 경우, 이들이 전투대형을 갖추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런 까닭에 최상의 타겟은 이동중인 군대였다. 스텝 전사들의 화살공격으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이동중에도 두터운 대형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러면 이동속도가 느려지고, 역설적으로 화살 공격에 아주 손쉬운 타겟이 된다. 반면에 빨리 이동하는 것을 택할 경우 대열 곳곳에 틈이 생기고, 그러면 스탭 전사들인 기동력을 발휘해서 이들을 쉽게 각개격파할 수 있다.

근접전에 익숙한 서유럽 군대에게 스텝 군대는 까다로운 적일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쫓아버리기 위해 대열을 풀고 공격을 가하면 스탭 전사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공격해왔다. 이때가 모든 스텝 군대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위장 후퇴(그리고 이른바 "파르티안 샷")가 가장 잘 발휘되는 시점이다. 910년 '유아왕' 루트비히의 동프랑크군이 바로 이 전술에 걸려 참패를 당했다.

만일 정주민족의 군대가 탄탄한 방어대형을 갖춘다면, 스텝 전사들은 여전히 거리를 유지한채 화살공격을 가하면서 빈틈을 노리거나, 적군이 대열을 풀고 공격해오는 것을 유도한다. 설령 적군의 방어대형에 틈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방적으로 화살공격을 당하다보면 공격을 하거나 다른 지형으로 이동하는 것을 선택하게 되기 마련인데, 바로 이 이동이 종종 스탭 전사들이 노리는 결정적 전기를 제공해주었다.

이런 전술은 결코 구사하기 쉬운게 아니다. 역동적인 기동을 필수로 삼는 이런 전술은 정교한 팀웍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으며 따라서 전투경험 풍부한 베테랑 전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상당기간 함께 손발을 맞춰본 군대와 강력한 규율을 필요로 한다.

마자르인들은 그런 면에서도 강력한 군대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레온 6세(소포스)는 자신의 저작 <탁티카>에서 마자르 기병은 적군이 완전히 격파되기 이전에는 결코 약탈을 하지 않으며, 반드시 악착같이 추격해서 적을 최후의 1인까지 격멸하기 이전까지는 만족하지 않는다고 서술하였다.





마자르군의 약점

이상의 모습들 때문에 간혹 스텝 군대는 적어도 전투에서는 당할 자가 없는 무적의 군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들 때문에 종종 공포에 떨었던 정주민족들은 스텝 전사들의 무서움에 대한 생생한 기록들을 남겼고, 바로 그 공포심으로 인해 과장된 부분까지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져온 점이 크다. 그러나 스탭 전사들도 무적의 존재는 아니었다. 이들도 분명한 약점이 있었다. 스탭 군대의 입장에서는 이 약점을 최대한 보강하는 것, 그리고 정주민족의 군대는 이 약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승패의 관건이 되었다.

첫 번째 약점은 이들이 항상 넓은 목초지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었다. 유럽을 공격했던 훈족, 아바르족, 마자르족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카르파티아 분지가 얼마나 많은 전사들을 유지시킬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분분하다. 중세 사료들은 헝가리 전사들이 10만이 넘는다고까지 기록하기도 하지만, 이는 상당한 과장으로 보아야 한다.

Denis Sinor와 Rudi Paul Lindner는 카르파티아 분지에서 양성될 수 있는 기마전사의 최대치를 6만명 정도로 잡았다. 그러나 이는 그 지역 전체가 오로지 말을 키우는데만 사용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 수치다. 당연히 그것을 불가능하다. 먹고 살려면 다른 동물들도 키워야 한다. 따라서 Sinor는 마자르 전사들의 규모를 2만명 정도로 추산하였다. Lindner는 이보다 더 적게 잡았다. 이들 유목민들이 다른 초식동물들을 전멸시키지 않는 이상, 이들이 기르는 동물들 외에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들도 계산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헝가리 대평원 지역은 1만5천여 명 이상의 기병을 길러내기 힘들 것이라고 보았다.

비교적 최근에 관련 연구서를 낸 Charles Bowlus는 약간 다르게 접근한다. 헝가리 평원이 유지할 수 있는 모든 말이 아니라, 특별히 기르고 훈련시킨 군마(특히 거세마)의 수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 군마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종마와 암말 여럿이 또 필요하다. 게다가 스텝 전사 한 명은 군마 하나만 끌고 다니지 않는다. 기존의 주장대로 스텝 기병 한 명이 군마 10필을 끌고 다닌다고 본다면, 2만 명의 기병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말은 무려 720,000 필이다. 헝가리 평원지대가 양성할 수 있는 말에 대한 Lindner의 이론에 대입한다면, 마자르족이 동원할 수 있는 기병은 불과 4천2백명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Bowlus는 다시 이 모델에도 약점이 있으며, 그 정도로 마자르군이 소수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우선 그는 전사 한 명이 말을 10필씩이나 실제로 끌고 다니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한 명이 끌고 다니는 말이 많을수록 오히려 군대의 유연성은 떨어지게 된다. 그는 적절한 수는 1인당 5필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여기에 카르파티아 분지에 흩어진 다른 목초지들도 어느정도 기병을 제공했을 것이라고 본다면, 원정에 나선 마자르군의 기병은 Lnidner의 추정대로 얼추 1만5천여 명을 채울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동원 가능한 기병 수에 대한 논쟁이다. 레히펠트 전투에서 마자르군은 보병도 동원했다. 어쨌거나 스텝 기병 한 명 한 명은 생각보다 비싸고 귀한 전력이었다.

두 번째 약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전술적 강점이었던 활이다. 이들의 주무기인 합성궁은 강력한 원거리 무기이지만, 날씨에 민감한 무기이기도 하다. 이성계의 그 유명한 사불가론에도 나오지만, 습한 날씨에는 활의 아교가 떨어져나가기 매우 쉬웠다. 그리고 알프스 이북 유럽은 비도 부슬부슬 자주 오고 꽤 습한 편이다. 그런 면에서 스탭 기병에게는 최악의 기후였다. 유럽인들이 합성궁의 위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면서 쓰지 않은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합성궁은 상당히 정교한 무기로, 숙련된 장인이 필요했으며 비쌌다. 재료 수급도 꽤 까다로웠다. 특히 유럽 소의 뿔은 잘 부서지는 편이라 재료로 합당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 재료를 가공하는데도 적절한 온도와 습도가 필요했다. 이는 스탭 군대가 서유럽에 가까이 근접할수록 이들의 주무기가 점점 더 제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어진다는 뜻이다.

이러한 약점들은 유목민들과 싸워본 적들도 다 알고 있었다. 일례로 비잔티움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스트라테기콘>에서 이 두 가지 약점을 명확하게 언급하면서, 비잔티움의 장군들에게 스탭 군대에게 충분한 목초지를 허용하지 말것과 습한 날씨에 싸울 것을 주문하였다.

마지막으로, 비교적 경무장을 했기 때문에 백병전에 불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스텝 전사들은 이 부분을 기동성과 화력으로 커버해왔다. 그러나 전투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공간이고, 뜻같지 않게 근접전에 말려들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근접전용으로 마자르족은 경기병이 사용하기 좋은 세이버를 지녔다. 세이버는 훌륭한 무기였지만, 실제 근접전에서는 프랑크군의 검보다 내구력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근접전에 돌입하기 이전에 적의 기운을 충분히 빼지 않는 이상, 백병전에서는 스텝 전사들은 유럽의 중기병보다 불리한게 일반적이었다.





정리

이상이 마자르족을 포함하여 유럽을 위협한 스텝 군대의 강점과 약점이다. 이들은 막강한 전사들이었으나 그만큼 약점도 많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유목민의 큰 장점은 유연함과 적응력이다. 결국 이들이 어떻게 이 자질을 발휘하여 자신들의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최대화하는가가 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세 유럽의 군대도 그들만의 강점과 약점이 있었다. 스텝 전사들의 공격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이들도 똑같은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다음 글은 최종적으로 레히펠트의 결전에 이르기까지, 동프랑크 왕국이 어떻게 군사적으로 대비를 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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