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의 기원(3)-엘리자베스 체제의 위기 History-근동, 서양사

이 글은 제가 예전에 썼던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최근 평가 http://charger07.egloos.com/4132873 >를 먼저 읽고 읽으시면 더욱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많은 문제의 근원이신 이 분






몇몇 대전제들

본격적으로 영국 내전의 기원을 찾아가기에 앞서서, 이 연재 전체를 읽으면서 꼭 기억해두면 좋은 몇가지 대전제들이 있다. 온갖 갈등과 다양한 주장들이 복잡하게 얽힌 시대이지만, 그 복잡함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전제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엘리자베스 1세가 물려준 체제, 특히 재정 시스템은 이제 한계에 달했고, 개혁이 필요했다.
둘째. 의회를 비롯한 절대다수의 국민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셋째. 적법한 정부는 신수왕권에 기반을 둔다는 점은 동시대인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스튜어트 시대에 터져나온 모든 문제점들은 근본적으로 저 세 요소에서 기인한다. 좀 속되게 표현한다면, 엘리자베스가 1세가 그 긴 재위기간동안 싸놓고 안치우고 떠난 X이 큰 문제였다.

맨 위에 링크한 예전 글에 상세히 설명했듯이, 엘리자베스가 만든 체제는 근본적으로 중세 정치의 연장이었다. 격변하는 16세기 말 내내 엘리자베스는 그 체제의 구조를 바꾸는 개혁 대신, 그때그때 미봉책으로 대처하면서 오랜 세월을 버텨왔다. 그러나 그 사이 왕실의 빚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쌓여갔고, 소수의 총신들이 지배하는 정치의 문제점 및 왕의 후원을 받지 못하는 귀족들의 불만도 점점 더 누적되었다. 더욱이 이 인플레이션의 시대에, 근본적인 수술을 하지 않고는 이러한 재정 체제는 더이상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긴 전쟁은 이를 더욱 악화시켰다. 스페인과의 전쟁도 힘겨웠지만, 엘리자베스가 추진한 아일랜드 정복전쟁은 잉글랜드를 쉽게 빠져나오기 어려운 긴 수렁에 빠뜨림과 동시에,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무지막지한 학살을 통해 아일랜드에 깊은 분노와 원한을 심어주게 된다.

여기에 더해서 기본적으로 타협의 결과물인 엘리자베스 시대의 국교회 문제가 더해졌다. 잉글랜드 내에서는 비교적 큰 문제가 없었지만,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여기 스튜어트 왕가의 계승으로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세 왕국이 결합되니, 이는 튜더 시대의 문제점들에 더 골치아픈 문제를 하나 더 하는 격이었다. 게다가 오랜 전쟁의 역사로 인해 세 왕국의 구성원들의 상호간 감정이 전혀 좋지 않았다는 것은 덤이다.







개혁은 왜 어려웠는가

이러니 막 즉위한 제임스 1세와 이후 찰스 1세가 맞닥뜨린 어려움의 강도는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러한 구조적 문제점들을 끝내 개혁하지 못하고 결국 내전으로까지 치닫게 된 것일까? 여기서 위 전제의 둘째 이유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직접 통치를 하고 행정을 담당하는 입장에서야 체제에 이미 깊게 생겨서 더이상 수선으로는 버티기 어렵게 된 균열들이 똑똑히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그게 안 보인다는게 문제다. 몇몇 선각자들이 문제를 깨닫고 목소리를 높여도 대부분에게는 쓸데없는 선동으로 들리는 경우가 많다.

즉,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그동안 아무 문제 없었고, 지금도 잘 살고 있는데 왜 자꾸 고치자는거야? 딴 꿍꿍이 있는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이건 당시 뿐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나타났으며,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는 현상이다.

더욱이 엘리자베스의 긴 치세동안 체제는 잉글랜드 사회 전반에 대단히 뿌리를 깊게 내렸다. 한번 익숙해진 방식을 고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다. 특히 한 체제가 장기간 지속되면 거기에 이해관계, 더 나아가 삶의 방식 전체가 좌우되는 집단들이 늘어난다. 개혁을 하자면 이 모든 이들을 설득하거나, 정치적인 방식으로 제압해야 하는데 결코 쉬운게 아니다.

이때 상황을 보면 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어렵지 않게 이해가 간다. "나는 유혈 혁명보다 점진적 개혁에 동의한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점진적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대한 이해는 간과되는 측면이 있다.

지금까지는 모든 개혁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당시 잉글랜드 특유의 정치적 관념인 '고래의 헌정(the ancient constitution)' 개념이 미친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이는 잉글랜드가 불문법 체계이지만, 그 근간에는 예로부터 전해내려온 기본법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군주의 자의적 통치를 제한하는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운용이 잘못되서 그렇지 기본적인 체제는 좋은 것'이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어서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혁신을 저해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근대 초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보수적(급진적 종교개혁을 주도한 이들도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는 대단히 보수적이었다)이었고, 무언가를 근본부터 뜯어고치자고 요구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위험한 인사들로 받아들여졌다.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이러한 어려움에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공적 영역'과 '여론'이라는 요소가 더해졌다. '공적 영역'은 1960년대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가 주창한 개념이다. 하버마스는 18세기 영국의 도시 부르주아 사이에 형성된 정치적 여론의 등장을 가리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은 이러한 정치적 여론은 이미 16세기 말부터 다양한 요소들(대중출판, 소식지, 커피하우스, 입소문 등등)을 통해 등장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여론의 등장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정치적 의견의 다양화를 낳았다. 대중이라는 강력한 요소가 정치무대에 등장함에 따라,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 각양각색의 의견을 가진 대중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어려움까지 맞닥뜨리게 되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와 달리, 17세기에 이는 대단히 새로운 현상이었고, 많은 정치 엘리트들은 이런 상황에 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새로운 현상에 단기간에 적응하는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 이들만을 탓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왕권신수설의 문제

마지막 전제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권신수설은 거의 대다수가 동의하는 정치철학이었다. 왕권신수설은 종종 오해를 받는 개념이다. 간혹 이 시기 서양 정치는 왕권신수설밖에 없어서 '미개'하다는 말씀 하시는 분들도 보는데, 왕권신수설은 왕이 멋대로 통치해도 좋다는 개념이 절대로 아니다.

근대 초의 정치사상은 기본적으로 중세와의 강력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중세 이래로 유럽 정치의 기본은 나름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 다양한 집단들이 합의와 협력을 통해 하나의 정치체(body politic)를 형성하는 것이며, 이는 국왕이라는 신성한 몸을 통해 형상화된다. 이러한 정치사상은 필자가 예전에 한번 올린 바 있던 솔즈베리의 존의 정치사상에 대한 글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따라서 Black 선생이 지적하듯, 통치자가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부여받았다는 점은, 그 통치자가 법에 따라 공정하게 통치할 의무를 면제시켜주지 않는다. 솔즈베리의 존이 역설한 바와 같이. 신성한 것은 신이 부여한 법에 따라 통치하는 왕이다. 멋대로 폭정을 휘두르면 그건 왕이 아니라 폭군이고, 폭군은 전혀 신성하지 않다.

이 부분을 이해하는 것은 이후 스튜어트 왕가와 의회의 갈등을 단순히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왕들' vs '자유와 헌정을 주장하는 의회'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을 벗어나기 위해 필수적이다. 찰스 1세와 대립하던 그 순간에도 의회 대다수는 왕권신수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아니, 심지어 명예혁명 이후에도 왕권신수설의 기본 부분은 대체로 유지되었다.

문제는 어떤 부분이 적법한 통치며, 어떤 부분이 '고래의 헌정'을 침해하는 폭정이냐는 것인데, 이는 해석의 문제였다. 가령, 국가위기시에 왕이 특별세를 거두는 것은 법으로 보장된 적법한 권한이다. 그러나 과연 어떤 것이 '위기상황'이냐에 대해서는 모두가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물론 찰스 1세의 정치가 폭정인가는 앞으로 연재를 통해 살펴볼 일이지만, 중세 내내 왕과 귀족의 갈등도 이와 비슷한 해석 문제가 컸으며, 이 시기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그 자체로는 유독 이 시기에 와서 체제가 붕괴되어야만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다른 문제들과 결합하기 이전까지는.






소결론

지금까지 이야기한 부분이 17세기 스튜어트 왕가의 왕들이 직면한 문제점들이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몇몇 수정주의 학자들의 주장대로 전혀 문제가 없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전이 필연적이었다는 휘그 학파의 주장 또한 옳지 않다. 그 못지 않게 문제가 산적했으면서도 내전이나 체제 붕괴가 오지 않은 나라는 많다.

따라서 영국 내전의 기원을 탐구하면서 중요한 것은 이 시기 이러한 문제점들이 당시의 특수한 사정과 맞물려서 어떻게 터져나오게 되었는가와 관련된 상호작용들을 면밀히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17세기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종교를 고려해야 한다. 이 부분이 다음 글의 주된 내용이 될 것이다.


영국 내전의 기원(2)-영국 내전 해석의 역사 History-근동, 서양사


들어가며

영국사의 수많은 논쟁거리들 중, 영국내전의 기원과 성격은 그 논쟁의 광범위함과 치열함에서 단연 최고급에 속한다. 이는 지난 한 세기동안 절정에 달했다.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만큼, 영국내전에 대한 해석은 세계사 교과서만 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만큼 크게 바뀌었다. 20세기 초반의 영국내전 해석과 현재의 해석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이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도 사학과 학부 진학 이전까지 영국내전에 대해 아는것은 <먼나라 이웃나라>가 전부였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훌륭한 명군 엘리자베스(이에 대한 비판은 필자의 이전 글 참조)의 뒤를 이어 무능한 스튜어트 왕가의 왕들이 즉위했는데, 제임스 1세는 사치방탕하여 재정을 망쳐놨고, 왕의 권위에만 관심있고 무능한 찰스 1세가 절대주의를 꿈꾸며 의회와 대립하여 결국 내전까지 가게 되었다는 요지의 내용으로, 의회는 거의 절대선의 세력으로 묘사된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학과에 진학해서 영국사 개설 수업을 들으면서 비로소 이게 얼마나 단순한 이해였는지를 깨달았는데, 그때 느낀 혼란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사실 사학과 1학년때까지만 해도 역사는 교과서에 쓰인 내러티브가 전부인줄 알았으나, 이 수업을 들으면서 한 가지 정해진 내러티브는 존재하지 않으며, 한 주제에 대해 학자들이 얼마나 상반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는가를 깨닫고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그런게 존재하긴 하는가에 대해 어마어마한 충격과 혼란을 느꼈던 것이다.

그 뒤로 어느새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유학을 떠나 영국사를 직접 전공하는 입장이 되어있는 지금도 그 혼란은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그 시대 자체가 하나의 내러티브가 통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한 시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주제를 놓고 지난 1세기동안 학자들은 어떤 논쟁을 벌였으며, 영국 내전에 대한 사관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그리고 현재 학계는 영국 내전이라는 중요하면서도 거대한 사건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제1기: 휘그 학파

상당히 오랜 시간 영국사 해석을 주도했으며, 지금도 일반인들 사이에서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은 휘그 사관이며, 이에 대해서는 이전에 한번 자세하게 다룬 바 있다. 이 시기의 역사를 의회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진보로 해석한 이 사관은 빅토리아 시대와 에드워드 시대에 기반을 두고 있다. 대표적인 역사가로 S. R. 가디너 (1829-1902)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던 시대의 의회정치를 과거 역사를 해석할때 강하게 투영시켰다.

새뮤얼 로슨 가디너

예전에 쓴 글과 많이 겹치기 때문에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해석에 따르면, 영국 내전은 근본적으로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위한 투쟁이다. 영국의 역사는 중세 때부터 국왕의 절대권을 제한하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으며, 그러한 자유 정신을 이어받아 17세기 의회 지도자들이 찰스 1세의 절대주의와 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자유주의적 헌정과 종교의 자유였다. 여기서 종교의 자유는 '프로테스탄트 국교회'와 동일시되었다. 

따라서 이 해석에 따르면, 영국내전은 압제와 자유의 투쟁이었으며, 영국이 의회민주주의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연이 된다. 물론 이런 목적론적인 해석은 현대 역사학의 원칙과 크게 어긋나는 것으로, '순수한' 휘그 학파는 현재 학계에서는 사실상 축출된지 오래다. 이후 본 내용에 더욱 자세히 나오겠지만 당시 상황은 절대 폭정과 자유의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있을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의회파는 투철한 민주투사도 아니었고, 이들이 생각한 종교의 자유는 대단히 편협한 것이었다. 또한 영국 내전이 '필연'이었다는 설 또한 수많은 변수가 내재해있던 당시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었다.










제 2기: 마르크스주의 학파

20세기 중반에 대두한 새로운 영국 내전 해석은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었다. 크리스토퍼 힐(1912-2003)로 대표되는 이 학파는 영국 내전을 근본적으로 계급 투쟁으로 해석하였다. 이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16세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는 젠트리로 대변되는 중산층, 즉 부르주아의 성장을 가져왔다. 이 '젠트리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그때까지 사회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던 귀족층과의 충돌을 불러왔다. 이들은 자신들의 늘어난 부와 사회적 영향력에 걸맞는 정치적 지위를 얻고자 하였고, 이것이 충돌의 주된 원인이었다.

크리스토퍼 힐

이런 면에서 볼 때, 영국 내전은 '부르주아 혁명'으로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선구자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한 부분에서 이들은 휘그 학파와 의견을 같이했다. 바로 개신교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다. 이는 막스 베버의 청교도 해석과도 관련이 깊다. 이들은 청교도를 위시한 당대의 급진파 개신교가 급진적인 경제적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사회의 변화를 선도한 진보적인 세력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J. Black 선생이 잘 표현했듯, 영국 내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사회경제적 휘그사관이라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개신교 급진파에 대한 의견뿐만이 아니다. 이들의 역사해석 역시 대단히 목적론적이었으며, 영국 내전을 역사발전에 있어서 필연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도 휘그 학파와 동일하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부르주아 혁명론' 자체도 수정주의의 등장으로 크게 흔들린 마당에, 영국내전에 대한 이런 해석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이후 실증적 연구가 더욱 진행되면서 마르크스주의 학파의 영국 내전 해석은 실제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점이 입증되었고, 따라서 역시 휘그 학파와 마찬가지로 학계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제 3기: 수정주의

1970년대 이후로 학계를 거세게 강타한 것은 바로 수정주의 학자들이라는 이름을 얻은 일련의 학자들이 내놓은 새로운 해석들이었다. 여기서 제 3기에는 '학파'라는 이름이 없다는것을 알아챈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 이유는, 이 학자들의 주장들이 '휘그 학파와 마르크스주의 학파는 틀렸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들은 헌정적, 정치적 이유로 영국 내전이 필연적이었다는 휘그 학파의 주장을 비판했다. 당대 기록들을 면밀히 분석해보니, 튜더-스튜어트 시대에 휘그 학파에서 설명하듯 국왕의 절대주의와 의회의 헌정주의 같은 상반되는 거대 이데올로기의 충돌 같은 것은 없었다. 물론 이런저런 갈등은 많았지만, 그것이 소위 '혁명'으로 이어질만큼 거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수정주의 학자들 다수는 영국 내전은 영국 정치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찰스 1세 개인의 무능함 때문에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에 있어서도, 수정주의적 학자들은 실증적 연구를 통해 젠트리-귀족 대립은 허상에 가깝다는 점을 입증하였다.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에 따르면 젠트리들이 의회파를 구성해야되고, 왕당파는 귀족들이 주축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 당대인들의 사회적 배경과 그들이 직접 남긴 기록들을 조사해보니, 의회파에도 대귀족들은 얼마든지 있었고, 왕당파에도 비귀족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또한 왕의 편을 든 지역과 의회 편을 든 지역도 사회경제적 라인으로 딱 떨어지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개개인들이 어느쪽에 충성을 마치는지 여부는 대단히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딱히 사회경제적 계급갈등의 요소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렇게 해서 수정주의 학자들은 19세기부터, 혹은 18세기부터 20세기 중후반까지 계속되어온 영국 내전에 대한 정립된 해석의 기반을 완벽하게 허물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영국 내전이 필연이 아니었음을 입증한 것은 좋은데, 그렇다면 왜 이런 거대한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설명이 안되기 때문이다. 몇몇 수정주의 학자들이 내세운. '당시 잉글랜드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 찰스 1세 한 명이 잘못해서 이렇게 됬다'는 구조적 요인을 중시하는 현대 역사학이 납득하기 쉬운 주장은 아니다. 더욱이 수정주의 진영에는 마크 키쉴란스키 선생처럼 찰스 1세에게 대단히 호의적인 학자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정주의 자체가 앞서 말했듯이, 본질적으로 휘그 학파와 마르크스주의 학파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것이라, 이들의 허점을 공격하는 데에는 대단히 효과적이지만, 이들을 대체하는 해석을 정립하는데에는 무리가 많았다.









제 4기: 혼돈의 카오스

이렇게 해서 20세기 후반부터, 학자들은 다시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설명에 눈을 돌렸다. 어떻게 보면 다시 휘그 사관으로 회귀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정주의가 남겨놓은 영향력을 무시할 수 있는 학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감히 단언하건데, 고전적인 의미에서 휘그 사관과 마르크스 사관이 영국 내전 해석의 주류로 돌아올 일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현재 학자들은 옛 사관들의 목적론을 거부한다. 즉, 영국 내전이 필연이 아니었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전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그러나 튜더-스튜어트 시대 잉글랜드가 전혀 문제가 없었으며, 왕 한 명이 무능해서 내전이 일어났다는 주장 또한 거부한다. 영국 내전은 장기적이고 단기적인 원인이 대단히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었다는데에는 모두가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학계에서 영국내전의 기원을 설명하는 주류 학설은 무엇일까?


없다. Coward 선생과 Gaunt 선생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옛 휘그 학파와 마르크스 학파, 혹은 수정주의가 주류 담론으로 학계를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다. 앞서 말했듯, 영국 내전은 대단히 많은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작용하여 일어난 사건이었으며, 그 중 어떤 요인이 어떻게 작용했으며, 어떤 것들이 중요했는지는 학자마다 다 다르다. 따라서, 현재 학계의 분석은 17세기 당시 영국 정치계만큼이나 혼란스울정도로 다양하다. 한 가지 합의가 있다면 그 당시의 복잡한 상황,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동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글부터는 영국내전 직전의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물론 이 시대는 그게 그거지만) 상황을 분석해보고, 이어서 영국 내전이 결국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최근 학자들 다수가 그나마 합의를 이룬 설명을 통해 따라가면서 필자의 의견을 아주 살짝 추가해보고자 한다.


영국 내전의 기원(1)-간략한 머릿말 History-근동, 서양사

영국 내전의 전투 모습
(그러나 이 연재는 전투를 다룰 일이 없다는 것을 미리 밝힙니다. 죄송.)



연재를 시작하며


영국 내전은 영국사, 어쩌면 서양사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뽑아보라면 반드시 들어가는 거대한 사건입니다. 그만큼 그 역사적인 영향력 또한 어마어마했습니다. 동시대 대륙의 30년 전쟁같은 긴 전쟁도 아니고, 그만큼 참화가 크지는 않았지만, 내전이 끝난 뒤 왕이 목일 잃고, 영국 역사상 (아직까지는)유일하게 군주가 없는 공화정이 설립되었던 것을 비롯하여 그때까지 오랜 세월 유지되어왔던 정부와 사회의 구조가 짧은시간이나마 격변을 겪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이 사건은 두고두고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영국이 이후 보다 민주적인 사회로의 발전을 선도하는 데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혁명 등에도 중요한 선례를 제공했습니다.

30년 전쟁보다야 덜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국내전이 결코 피를 덜 흘린 전쟁도 아니었습니다. 정확한 사망자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전쟁기간동안 잉글랜드는 총인구 중 대략 3-4퍼센트, 스코틀랜드는 6퍼센트, 아일랜드는 무려 41퍼센트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대부분은 실제 전투가 아니라 전쟁과 연관된 질병, 기근 등(아일랜드의 경우는 학살도 추가)으로 사망했습니다.(순수 전투 사망자는 대략 8만5천여 명 가량으로 추측됩니다)

이러한 전시 사망자 비율은 20세기 양차대전에서 영국이 입은 손실을 훌쩍 뛰어넘는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 사망자는 전 인구의 1.6퍼센트이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0.7퍼센트였습니다. 물론 이 두 경우는 순수 군인 사망자라, 본토에서 벌어졌으며 민간인들까지 기근과 질병 등의 영향을 크게 받은 내전과는 경우가 다르지만, 어쨌든 무기의 발달로 대량살상이 가능해진 20세기의 전쟁이라는 점 또한 감안해볼때, 17세기 영국 내전의 참혹함을 증언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겉보기엔 낭만적인 옛 시대의 전쟁 같으나 실상은...



이와 같이 파급력이 큰 사건이니만큼 역사학적으로도 영국 내전은 대단히 큰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학적 해석은 또다른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사실 관점에 따라 이 사건은 명칭조차도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영국 내전(The English Civil War)'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대반란(The Great Rebellion), 다른 이에게는 청교도 혁명(The Puritan Revolution), 혹은 영국 혁명(The English Revolution), 아니면 삼왕국의 전쟁(The Wars of Three Kingdoms) 등등으로 불려왔고 또 불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명칭들은 마음대로 붙인 것이 아니며, 각기 다른 사관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도 이 거대한 사건이 도대체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라 하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지난 100년간 수많은 학자들이 수많은 의견을 내놓아왔고 그 해석은 시기에 따라 정말 급격하게 달라졌습니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이렇게 상반된 해석이 나온다는 점에서, 역사가 왜 '과거의 현재의 대화'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국내의 대중적 차원에서, 영국 내전의 복잡함에 대한 이해는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편입니다. 이미 학계에서 쫓겨난지 오래인 휘그 사관의 영향력이 너무나도 강력한데다가, '청교도 혁명'이라는, 더 이상 학계에서 큰 지지를 받지 못하는 용어도 여전히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찰스 1세가 목을 잃어 마땅한 폭군으로, 크롬웰을 구국의 영웅으로 보는 단순한 인물관, 이 투쟁을 폭정과 민주의 대립으로 보는 이분법적 시각도 팽배합니다.




이번 연재의 주된 목적은 무엇보다도 이 시대가 얼마나 복잡하고 혼란한 시대였는지를 조금이라도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이 시기는 선과 악, 진보와 반동 같은 단순한 이분법이 통하지 않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학이 여러 세대에 걸쳐서 어떻게 이 시대를 해석해왔는가 또한 중요한 주제입니다.

사실 저는 17세기 영국사가 전공이고, 영국 내전은 지금 논문으로 쓰고있는 주제와도 일부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연구하고 있는 주제와 겹치는 부분은 영국내전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며, 따라서 영국내전의 기원에 대해서 아주 확실한 해석을 내릴 능력은 없습니다. 다만 현재까지 여러 다른 연구자들의 서로 다른 주장들을 종합하여 국왕과 의회의 갈등이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과정을 가장 최근의 연구결과들을 따라 서술하도록 노력해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머릿말까지 써놓고보니 뭔가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 10회 미만의 매우 짧은 연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겠습니다.

중세는 더러웠나?-중세 전성기의 도시위생 History-근동, 서양사

들어가며

중세 유럽의 도시가 오물천지에 더러웠다는 것은 대단히 오랜 세월동안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고대 로마시의 청결한 '이미지'와 대비되어, 중세 문명을 미개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쳐왔다. 현대에 이르러, 학계 내에서 중세 문명의 여러 측면이 재조명을 받았고, 역사 애호가들에게도 그 성과가 많이 전달된 면이 있지만 그 애호가층을 조금만 벗어나도 대중들에게 뿌리박힌 '더럽고 미개한 중세' 이미지는 여전히 강고하다.

이 글은 실제 중세 도시의 위생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학계 최근 성과를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이전, 몇 가지 전제를 깔고 가야 한다. 첫째. "현대 기준으로" 보면 근대든 중세든 고대 로마든 사람 살기 힘다고 생각될 정도로 더럽고 악취나는 곳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둘째,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이든지 건강하게 잘 살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소위 '미개'해서 더러운걸 당연한 상태로 여기고 살았다고 봐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청결을 일정수준 이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제반조건을 갖출 능력이 되었느냐의 문제다. 그런 면에서 도시 위생 문제는 단순히 '겉보기에 깨끗하니 우월하고 더러우니 미개하다'라는 이분법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







중세의 위생이론

물론 중세인들의 병리학적 지식은 현대와 다르며 상당히 제한되있었다. 중세 모든 문화가 그렇듯이, 의학 지식 역시도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의학이론과 중세 신학의 결합의 형태를 띄었다. 여기에 더해서 고대 그리스 의학을 수용하여 발전시킨 이슬람 의학의 수용도 폭넓게 이루어졌다.

이 시기 인간 신체에 대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서 나온 4체액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신체의 건강은 근본적으로 열건습냉의 성격을 가지는 4개의 체액이 균형을 이루어야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의학이론 및 그것에 영향을 받은 이슬람 의학을 바탕으로. 중세인들의 몸 이론이 나왔다. 중세에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한 몸으로 여겨졌다. 이것의 정치적 함의에 대해서는 지난번 솔즈베리의 존의 정치사상을 다루며 언급한바 있지만, 의학적인 면에서도 그러했다.

도시든, 국가든, 교회든 공동체는 한 몸이었으며, 이 몸은 개개인의 작은 신체들로 이루어져있다. 어느 하나의 건강은 다른 하나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한 영혼의 건강과 육체의 건강도 둘이 아니다. 따라서 공동체 구성원의 정신적 건강 못지 않게 신체적 건강을 돌보는 것은 공동체 전원의 책임이었다.

중세의 의학자들은 당연히 근대적인 혈액순환과 세균 감염 등을 알지 못했다. 이들은 죄악과 방탕한 행위가 영혼의 건강과 육체의 건강을 동시에 해친다고 믿었다. 따라서 경건한 생활은 건강의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오물과 악취 섞인 공기는 자연스럽게 내면의 죄와 연계되었다. 중세인들은 경건함만으로 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영혼의 죄를 환기시켜주는 현실의 더러움 역시 영혼과 육신의 건강 모두를 위해 제거해야 될 것들이었다.






도시의 오물

흔히 중세의 거리는 거대한 똥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20세기 초반까지 학자들은 중세인들은 위생에 전혀 무관심했으며, 더럽고 악취나는 환경을 숙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살았다고 보았다. 이는 19세기 이래 역사학을 강력하게 지배해온 '역사의 진보' 사관의 영향이다. 그러나 중세인이라고 인간의 오감이 현대인과 달랐을리가 없고, 이들이라고 깨끗한 환경을 싫어했을리가 없다. 또한 앞서 보았듯이 중세의 의학과 신학 이론 전반에서 청결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실제로 당대의 행정문서들은 현대인의 편견과는 상당히 다른 중세인의 이미지를 전해준다. 중세의 통치자들은 도시 위생에 끊임없이 신경을 썼다. 요크의 도시위생 개선을 위해 내린 에드워드 1세의 칙령은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다.


그 누구도 도시 내에 배설물, 거름, 혹은 다른 오물을 쌓아두는 것을 금한다. 배수로에 천과 아마포를 넣는 행위도 해선 안된다. 나무 줄기나 목재가 들어갈 경우 신속히 제거할 것을 명한다. 대변은 신속하게 치울 것이며, 배수로는 수시로 청소하라. 또한 도시의 네 구역에 각각 공중변소를 둘 것을 명한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원정을 떠나는 자신의 병사들이 요크에 머무는 동안 병에 걸릴까 염려했다. 위의 칙령은 그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는 중세인들이 더러운 환경은 질병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당시 국가의 행정력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언제나 잘 이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소한 중세의 통치자들은 끊임없이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리면서 감시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인력과 물력의 한계로 현대도시의 깨끗함을 달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중세인들이 청결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는 옛 통념은 수정되어야 한다. 1302년의 한 에피소드는 중세인들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런던에서 있었던 일인데, 국왕의 마부들 중 한 명이 급했는지 길거리에서 실례를 하다가 시민 두명에게 걸린 일이 있었다. 이때 시민들은 화를 내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볼일은 시내 공중변소에서 보는게 상식 아니오?"


물론 길거리에서 볼일 보는 사람은 늘 있었겠지만, 최소한 그게 사회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들 수가 있다. 중세에 공중 화장실이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 있었다. 앞서 보았듯 에드워드 1세를 비롯한 통치자들과 도시의 시장들은 화장실 설치를 의무화했다. 중세 도시의 공중 화장실들은 대체로 가장 인파가 붐비는 지역과 강변, 다리 등에 설치되었다. 강변에 설치된 이유는 물론 아주 약간만 가공을 하면 원시적이지만 수세식 화장실을 만들수 있었기 때문이다.(이 방식은 로마제국 시대에도 이용되던 방식이다) 설치만 한것이 아니라 관리인을 지정하여 봉급을 주면서 유지와 청소를 담당하게 하였다.

보다 부유한 이들은 집에 개인화장실을 만들었다. 이런 경우 뒤처리가 문제인데, 대체로 집안에 파이프를 설치해서 뒷뜰에 파놓은 구덩이로 빠지게 하였고, 강이나 시냇물 근처에 사는 이들은 공중변소와 비슷하게 흐르는 물을 이용했다.

그러나 14세기 말쯤 되면 늘어난 도시인구 때문에 수질 오염이 위험 수위에 다다르게 된다. 이때부터 도시 행정관들은 보다 치밀하게 배설물 처리를 관리하기 시작하였다.(물론 이때부터 관리가 더욱 정밀해졌다는 것이지, 그 이전에는 관리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행정문서가 풍부하게 살아남기 시작하는 존 왕 시절부터 이미 기록은 찾아볼수 있고, 그 기록의 내용으로 미루어보건대 Rawcliff 선생이 지적하듯 존 왕 이전에도 관련법규는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이 오물처리와 관련한 규제는 흑사병을 겪고 난 뒤에는 더욱 체계화되었다. 이때부터 뒷처리용 구덩이는 아무렇게나 파지 못하게 하고, 엄격한 규격을 따르게 하였고 반드시 둘레를 목재와 돌로 두르도록 하였으며, 엄격히 지정된 자리에만 파게 하였다. 심지어 이웃에게 악취로 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이웃집까지의 거리까지 규정해놓았다. 그리고 이 오물들은 밤중에 정기적으로 도시를 도는 수거용 수레를 통해서 실어나가도록 하였다.






물과 목욕

도시 위생을 위해서는 청결한 물의 공급이 필수적이며, 몸이 청결을 유지하려면 씻어야 한다. 그런데 중세에는 로마와 달리 물공급이 우물에만 의존했고, 목욕은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도 대단히 깊게 뿌리박힌 편견이다.

우선, 그리스도교 교회는 목욕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가졌다. 로마 말부터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전에 하던 그대로 목욕을 즐겼다. 많은 신학자와 사제들도 목욕을 청결 유지와 기분전환을 위한 수단으로 권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어머니 모니카가 사망했을때 슬픔을 이기려 목욕을 했다고 전해진다. 목욕을 거부한 것은 몇몇 금욕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금욕의 한 수단으로 목욕이라는 즐거움을 포기했던 것이다.

교회 내에 목욕을 향한 이 두 가지 시선은 다음의 에피소드에 잘 드러난다. 4세기 말 한 주교는 너무 목욕을 좋아해서 하루에 두번씩 대중목욕탕을 갔다고 한다. 이에 한 금욕주의자가 이렇게 물었다.


금욕주의자: 주교님, 대체 왜 하루에 목욕을 두번이나 하십니까?
주교: 세번 할 시간이 없어서요.


서로마가 멸망한 뒤 이런 목욕문화가 사라졌다는 서술이 많지만, Elizabeth Archibald 선생이 지적하듯이 이는 심한 과장이다. 사라진 것은 로마 시내에 황제들이 지었던 초대형 목욕탕들이다. 서로마 붕괴 직후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이런 대형 목욕탈을 돌릴만한 노예들을 확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형 목욕탕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영업했다.

중세에도 교회의 입장은 비슷했다. 앞서 보았듯 당시의 일반적인 태도는 신체의 건강과 영혼의 건강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으며, 영혼이 죄를 피하듯 신체의 먼지와 오물도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회가 경계했던 것은 당시의 공중목욕탕이 종종 매춘굴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떻게보든간에, 목욕탕은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대중목욕탕이 급감한것은 근대 초로 접어드는 16세기의 일이었다. 여기에는 사회적, 종교적으로 여러 이유가 있었으나 흑사병 시기를 거치면서 성적 분방함을 자제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해야된다는 믿음과, 동시에 뜨거운 물과 온도가 전염병의 원인이 된다는 속설이 퍼진 것도 그중 하나였다. 1526년 에라스무스는 "25년전만 해도 브라반트에서 대중목욕탕만큼 인기있는 곳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도 없다. 지난 역병으로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라고 썼다.

어찌되었건 중세에 청결에 대한 관심은 흔히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높았다. 이는 도시 물 공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상하수도는 위생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상하수도를 건설하고 유지하는데는 막대한 비용과 조직력이 필요했다. 그때문에 비용과 조직을 갖춘 곳, 즉 수도원이 우선적으로 상하수도 시설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외에 부유한 이들도 집에 시설을 잘 갖출 수 있었다. 지금도 12세기 윈체스터 주교 저택의 유적에는 정교하게 지어진 상하수도 시설이 남아있다.

윈체스터 주교저택의 수로 유적


캔터베리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물공급시설:
저수조에 채워진 물은 파이프를 통해 수도원으로 공급되었다 

도시 엘리트들도 상하수도 시설에 관심이 많았고, 끊임없이 투자하였다. 물과 관련된 시설들, 홈통, 배수로, 우물 등은 도시 정책에 있어서 우선순위였다. 각 주요도시들에서 수도관을 건설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려는 노력은 대단히 치열하고 지속적이었다. Lynn과 Exeter같은 도시들은 아예 전문 배관공과 금속 기술자들을 보유하면서 수시로 수도관을 점검하고 유지, 보수할수 있도록 하였다. Exeter는 14-15세기 후반에 걸쳐, 수도관을 더욱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보수할수 있도록 길이 25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터널을 만들었다. 이 터널은 사방이 돌로 마감되어있었고, 배관공이 쉽게 들어갈 수 있을정도로 컸다. 이 터널은 아직도 남아서 관광명소로 기능하고 있다.

엑시터 시내로 물을 공급하던 지하수로




비용과 원동력

당연히 위와 같은 도시 인프라를 만들고 유지하는데에는 막대한 비용과 노력이 든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선 맨 처음에 언급했듯이 여러 왕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은 분명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아무리 국왕과 행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분권적인 유럽의 정치구조 하에서는 그것을 실현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결코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던 고대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의 그 많은 인프라들은 그 건축을 통해 명성과 정치적 영향력을 얻으려던 엘리트들의 경쟁 덕분에 가능했다.

중세도 마찬가지였다. 국왕들과 행정관들의 노력 못지 않게, 시민 스스로의 공헌은 대단히 중요했다. 우선 중세 전성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시민적 정체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에 자치권을 얻어낸 도시들은 저마다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발전시켜가고 있었으며, 도시 경관과 위생은 자기 도시에 대한 자부심의 중요한 요소였다. 중세 중기 이후부터 이(lice)와 여타 더러움의 증거는 점차 야만인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도시의 유력 시민들은 자기 도시에 이런 요소가 많을 경우 수치심을 느꼈다. 이러한 측면에서 도시의 부유한 엘리트들은 도시 위생 유지에 상당한 자금을 댔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앞서 언급한 중세 특유의 '몸 이론'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시는 여러 신체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신체였고, 공기와 수로는 그 혈관이었다. 몸 한 곳이 아프면 몸 전체가 힘들듯, 시민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관념은 도시 거주민들에게 강력한 연대의식을 불어넣었다. 부유한 시민 A가 호화로운 저택에서 위생적인 환경에서 산다고 해서, 비위생적인 데서 사는 다른 사람들을 남 일이라고 무시해버릴 수 없는 환경을 조성했던 것이다. 동시에 선행으로 하늘의 공덕을 쌓는 중세 가톨릭 교회 특유의 신학도 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관념은 상당한 수의 엘리트와 유력자들이 도시 인프라 조성과 유지의 의무를 떠맡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아래위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중세 유럽의 도시들은 공중 화장실을 만들고, 관리인을 고용하고, 밤새 분뇨수거차를 돌리고, 배수로를 청소하고, 수도관을 설치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나오며

사실 더러움의 강도나 양으로 본다면, 유럽의 도시들은 중세보다 오히려 17세기에 더욱 비위생적인 환경을 가졌을 것이다. 당연히 이는 17세기 사람들이 더 어리석거나 미개해져서가 아니라, 상업과 도시가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도시인구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중세에 지었던 도시 인프라로는 더이상 이들을 수용할수가 없었고, 15세기까지 잘 기능하던 공중변소들만으로는 17세기 도시인구가 배출하는 양을 감당할수가 없게 되었을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섣불리 과거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리려는 행위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준다. 단순히 한 시대를 재단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 시대의 여러 측면을 낳은 복합적인 이유들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중세인은 결코 운명론에 빠져서, 질병을 천벌로 받아들이거나 더러움을 묵묵히 참고 살지 않았다. 인력과 물력, 기술력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조금이라도 더 쾌적하게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며 살았다. 분명 현대에 비하면 한계가 많았고, 그게 당연한 것이지만, 이들을 '미개'하다고 비웃기보다는 이들이 어떻게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왔는지에 주목하는 것이 더욱더 생산적인 논의를 낳는, 진짜 공부일 것이다.







참고

Carole Rawcliffe, Urban Bodies: Communal Health in Late Medieval English Towns and Cities (Woodbridge, 2013).
Virginia Smith, Clean: A History of Personal Hygiene and Purity (Oxford, 2008).                          
Elizabeth Archibald 선생의 2014년 강의, Durham University

삼국지 시대의 전쟁 (발췌요약번역)-5 History-한국, 동양사

사상자, 포로, 인질, 그리고 사대부의 행동규범

개활지에서 패배한 군대는 대단히 취약해졌다. 대다수의 사상자는 등을 돌려 도망치는 순간에 발생했다. 추격은 잔인하고 치명적이었으며, 사상자의 비율은 불균등했다. 다만, 이 시기 포로를 확보하고 관리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대부분의 무기가 근접 백병전 용도로 제작되었거나 활과 쇠뇌처럼 단발 무기일 경우, 포로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와 비슷한 숫자의 인력이 필요했다. 더욱이 장소는 사방에 무기가 굴러다니는 전쟁터다. 방금 항복한 사람도 마음만 먹으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칼이나 창을 집어들수 있고, 그렇게만 하면 항병은 바로 다시 전투병이 될 수 있었다.

현대 군대에서는 기관총이나 수류탄을 든 단 한 명의 병사만 있어도 많은 포로를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으나 이때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리고 많은 경우 포로를 감시할 병력을 떼어낼 여유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가장 안전한 포로는 죽은 포로였다. (사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죽은 자가 5만에 달했으며, 아쟁쿠르 전투에서 헨리 5세는 포로 학살 명령을 내렸다. 또한 관도 전투 직후 원소의 군사 일부가 거짓으로 투항했다가 이후 탈출을 시도했다고 전해진다. 조조는 이들을 생매장시켰다. 이 이야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있으나, 정확한 숫자는 알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자 수가 종종 과장되었다고 볼 충분한 근거가 있다. 또한 사상자에 대한 언급에서 죽은 자와 부상당한 자의 비율을 판단하기는 어렵고, 누가 즉사했는지 아니면 부상으로 인해 죽었는지를 가려낼 방법도 없다. 얼마나 많은 수가 회복되어 다시 싸울 수 있게 되었는지 판단하기도 어렵다.

조조는 최소한 네번 부상을 당했다. 서영과의 전투중에 입은 부상도 있고, 그 뒤 반란을 일으킨 군사들과 싸우다 입은 부상도 있었다. 194년에는 여포와 복양에서 싸우다 화상을 입었고, 197년에는 장수의 기습공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이 모든 경우에 그는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또한 그 이후 상처가 감염이나 심각한 발열을 일으키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부상병에 대한 치료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게 거의 없다. 근대 의학이 발전 이전 시대에도 부상이 외상에 머무르는한 상당히 심각한 부상이더라도 사람들은 놀라울정도로 대단한 회복력을 보인다. 존 키건은 아쟁쿠르 전투를 다루면서, 열상은 상당히 깊게 베였더라도, 상대적으로 상처가 깨끗하며, 단순히 붕대를 감아두기만 해도 신속하게 회복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팔이 부러지더라도 부목을 대면 쉽게 맞출 수 있었다. 반면에 화살이나 창 등에 의한 관통상은 치명적인 경우가 많았다. 복부를 관통당할 경우 복막염을 일으킬 수 있었고, 상체의 경우 종종 더러운 옷이 상처에 말려들어가기 때문에 패혈증을 일으킬 수 있었다.

물론 가능하다면, 고참병을 치료하는 것은 경험없는 신병을 모집하고 훈련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남는 장사였다. 또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자체가 사기에 미치는 영향도 컸다. 로마군도 각 군단마다 군의관이 있었고, 보다 심각한 부상을 당한 병사를 위한 병원이 있었다. 후한 제국군에도 이와 유사한 시스템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내전 초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런 시스템이 있었을지는 의심스럽다. 전사들은 전우나 종군 민간인들에게 의존해야 했으며, 몇몇은 상처를 다룰 수 있는 실욕적인 경험을 얻었을 것이다.

조조와 다른 군벌들이 안정된 통치를 확립하면서 보다 전문적인 치료 체계가 자리를 잡았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정확히 알수 있는 바는 없다. 다만 더이상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이들은 조조의 둔전과 같은 곳에서 생계를 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상자 관련 통계가 처음으로 집계되기 시작한 전쟁 중 하나인 미국 남북전쟁에서는 15퍼센트의 부상자가 이후 사망했다. 그 상처로 죽거나, 관련된 쇼크나 열병 때문이었다. Rosenstein이 로마군 연구에서 언급했듯이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창과 칼이나 화살에 의한 부상은 총알과 포탄 등에 의한 부상보다 덜 치명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잘 조직된 군대에서 받을 수 있는 치료는 고대 군대가 19세기보다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Rosenstein은 질병으로 인한 사망은 전투 사망보다 두배는 더 높았다고 언급한다.

군대와 그 종군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몰려있으니만큼, 감염의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황건의 난 이전 제국 전역에서 전염병이 발병한 예가 있었고, 217년에도 역병이 돈적이 있었음에도, 그 시기 군대 내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적벽 전투 당시 조조군 다수가 몸이 좋지 않았던 예는 있다. 이는 분명 건조한 북부에서 장강 유역의 습한 환경으로 바뀐 것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215년 손권이 합비에서 당한 치욕스러운 패배도 어쩌면 질병이 한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전역을 위해 끌어모은 인력과 그들이 생활한 환경을 고려해본다면, 그러한 예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다. 물론 기록에 남지 않은 사례도 있었을 것이고, 몇몇 전염병들은 피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다만 수인성 감염의 위험은 중국인들이 차를 끓여마시거나 곡류를 쪄서 먹는 습관 덕분에 다소 완화되었을 수도 있다.


일반 병사들은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되거나 편을 바꿀 수 있었지만, 그 지휘관들의 사정은 달랐다. 많은 고위 장수들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일부는 포로가 되거나 항복을 강요받았고, 그뒤 그들의 운명은 그 자신들의 충성 관념과 승자의 이해관계에 달려있었다. 공손찬은 파괴된 자신의 요새에서 죽었으나, 유비는 여포에게 패한 뒤에도 성공적인 재협상을 할 수 있었다. 반면에 여포는 조조의 포로가 된 뒤 항복을 제안했으나 본인의 옛 행적들이 결국 처형을 불러왔다.

사 계층의 운명은 경우에 따라 달랐다. 조조는 배신자 위충을 용서하고 하내태수로 삼았다. 이와 비슷한 관용의 혜택을 받은 이들은 더 있었다. 조조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프로파간다를 작성한 진림을 자신의 비서로 삼았으며, 묵은 감정이 있던 양곡도 곁에 두었다. 물론 마지막 두 사람은 무장이 아니라 학자였고, 이러한 사람들을 잘 대우하는 것은 조조 본인의 명성 면에서 이득이었다. 반면에 그의 적이었던 유비의 친우인 관우에게 보여준 관대함은 상당히 독특하다. 어쩌면 널리 알려진 영웅에게 존경을 표할 필요가 있었던 부분도 있지 않았나 짐작해볼 수 있다.

원소가 관도에서 패전하면서 그의 고위 관리들 다수가 조조의 손에 떨어졌다. 이 중 살아남은 이들은 별로 없지만, 마찬가지로 사서는 그들의 죽음의 책임을 완전히 조조에게 돌리지는 않는다. 가령, 순우경의 경우 조조는 살려주려 했으나 배신자 허유가 처형을 주장했다고 조만전은 기록하고 있다.

매우 많은 경우, 생사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은 포로로 잡힌 이가 충성의 대상을 옮길 수 있느냐의 여부였으며, 붙잡은 이가 그것을 믿어주느냐에 달려있었다.


저수는 조조의 군사들에게 잡히자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포로가 된 것이지 항복한 것이 아니다." 조조는 그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투항을 권했다. "원소가 지모가 없어 그대의 계략을 쓰지 않은 것이오.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않았으니, 나를 도와 일해준다면 기쁘겠소." 저수가 답했다. "나의 숙부와 어머니와 동생들이 모두 원소의 손 안에 있습니다. 나를 속히 죽여주는 것이 내 복입니다." 조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그대를 일찍 얻었다면, 천하는 근심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조조는 저수를 풀어주고 후히 대하였다. 그러나 저수는 후에 원소에게 돌아가려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패턴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 하나는 몸값을 받고 풀어주는 관습이다. 여러모로 후한 말의 전쟁과 흡사했던 중세 유럽의 전쟁에서는 흔한 관습이었을뿐 아니라, 전투와 포로 획득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기록에는 이런 관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만일 포로로 잡힌 이를 써먹을 수 없다면, 남는건 신속한 처형 뿐이었다.

인질은 사용되었지만, 항상 효과를 본 것은 아니었다. Yang Lien-sheng은 제국 정부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북방 부족들로부터 인질을 받은 사례와 전한 초기에 장군들과 봉국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질을 받은 예를 서술한 바 있다. 서기 200년경 군벌 마등과 한수도 조조에 대한 선의를 입증하기 위해 아들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받은 바 있었다. 208년에는 마등 본인이 가솔과 함께 입조하였다. 그러나 211년 마초가 조조에 대항한 연합에 합세하자, 이듬해 마등과 그 가솔들은 처형되었다.

이때문에 마초는 불효를 저질렀다고 비판을 받았으며, 사실 아버지를 버리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족을 인질로 잡아 누군가의 행동을 강요하는 것도 어려웠다. 심배의 두 아들이 관도에서 조조에게 사로잡혔고, 몇몇 참모들이 원소에게 심배의 충성심이 의심스럽다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본래 사이가 나쁜 것으로 알려진 봉기가 그를 변호하였고, 원소는 봉기를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심배의 두 아들이 어찌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심배는 원가의 충신으로 남았다.

아내와 자녀들은 종종 일회품으로 취급받았다. 196년 북해의 공융이 원담에게 공격을 받자, 그는 처자식을 버리고 탈출했다. 203년에 원담이 어려움에 처하자, 그의 신하 관통은 처자를 버리고 원담을 도우러 갔다. 그의 처자는 모두 살해되었다. 213년에 마초는 조앙을 통제하기 위해 아들 조월을 인질로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앙은 마초에 대항한 봉기에 참가하였으며, 아내에게 의견을 묻자 아내는 "군부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는 머리를 잃는 것도 별 문제가 아닌데, 이 원칙이 아들 하나 보다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강력한 유학과 가족 전통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수는 개인의 충성과 명예 개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환경을 감안하더라도, 유비는 가족을 잃어버리기로는 대단히 두드러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처자를 최소한 세 번 이상 잃었다. 유비에게는 처자가 여럿 있었지만, 본처를 여러번 잃었는데, 이들을 다시 만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가 첩으로 맞아들인 감부인은 원정 중에 동행하였고, 이후 형주까지 함께 간게 된다. 감부인은 그곳에서 유비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유선을 낳았다. 관우가 조조의 포로가 되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기록과 비교해보면, 유비에게는 형제와 동지들이 부인보다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가족을 더 중요하게 앞세운 몇 안되는 사례는 유비의 참모였던 서서의 예다. 그는 어머니가 조조에게 사로잡히자, 유비에게 간청하여 조조에게 투항할 허락을 받았다. 이후 그는 위국에서 고위 관직에 오른다.

두 특별한 가족상봉의 사례도 언급할 만 하다. 제갈량과 그의 형 제갈근은 어린 시절에 전쟁으로 인해 떨어졌다. 이후 제갈량은 유비의 참모가 되었고, 제갈근은 손권의 신하가 되었다. 그들은 우연히 만났으나, 항상 신중하게 거리를 유지했으며 사적인 대화를 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방림과 그의 아내 습씨의 이야기로, 방림이 유비를 따라 형주를 탈출하게 되었다. 이들은 15년 후 방림이 위에 항복하면서 비로소 다시 만났다.


한 측면에서 전쟁은 전술과 전략, 무기와 병사의 사용과 통제의 문제이다. 이러한 내란의 시기에는 다양한 군벌들을 통제할 공식적이고 보편적인 권위가 없었다. 조조가 천자를 끼고 있는 것이 약간의 이점을 주기는 했은, 그 정통성은 원소가 그랬듯이 얼마든지 도전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동탁도 천자를 끼고 있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따라서, 성공은 개인의 자질 및 다른 이들이 그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었다. 따라서 조조와 같은 지도자들은 항상 그의 동급의 사람, 적군, 자발적 비자발적 투항자와 포로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197년, 조조가 남양의 장수에게 당한 뜻밖의 패배의 충격으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무겹, 그는 원소로부터 조롱하는 듯한 편지를 받는다. 이에 그의 모사 순욱과 곽가는 그가 원소보다 뛰어난 이유를 조목조목 늘어놓으며, 결국 조조가 이길 것이라 격려하였다. 가후와 양부도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 이 찬사 중 얼마가 진심이고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제기한 자질들이 일반적으로 이 시기의 리더들에게 필요하다고 당시 사람들이 기대하던 자질이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많은 이들이 조조가 그러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조조의 정책과 행정(즉, 전투에서 얻은 권위를 적용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 수단)에 대해서는 또 논의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시기 전반적으로 조조가 전략과 전술에 있어서 재능이 있으며, 따라서 '신무'한 힘으로 전쟁을 이끌었다는 대에는 큰 이견이 없었다. '조조를 말하면 조조가 온다'라는 속담은 아직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


유사역사아웃

원시림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