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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역사상의 인물들에 대해 한줄평가를 지양하고, 복합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현대 역사학의 당연한 추세이기도 하고, 필자도 여러번 글을 통해서 강조해온 바이다. 특히 왕들을 명군, 암군, 폭군 식으로 작위적으로 딱지를 붙이는 식의 평가는 전통시대 역사서술에서나 통하는 경우가 많다. 재위기간이 긴 왕일수록, 평가의 복잡성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저 유명한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도 한줄평가의 어려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군주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암군이냐, 유능한 군주냐를 놓고 모 위키 등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높이를 것을 볼 수 있는데, 40년이 넘게 재위한 왕을 그렇게 한마디로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다른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그렇듯이, 펠리페는 업적도 많고 실책도 많고,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복합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체로 유능하고 똑똑한 군주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Maltby, 2009) 다만 유능함도 어떤 분야냐에 따라 크게 다른 것이고, 어떤 상황과 환경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다. 역사적 인물을 한줄평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사실 펠리페 2세에 대해 총체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회가 되면 다음에 본격적으로 다루어보고 싶은 주제다. 다만, 펠리페 2세의 치세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간에, 딱 하나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의 지나칠 정도로 근면성실한 집무태도다.
이 글은 펠리페 2세의 하루를 따라가면서, 근대 초 유럽 군주로서 그가 과연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간접적으로 체험해보고자 한다.
왕의 하루
펠리페는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통치하던 아버지 카를로스와는 다른 종류의 왕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있다. Maltby 선생은 카를로스가 전사 군주였다면, 펠리페는 행정가형 관료 군주였다고 설명한다. 사실 아버지가 벌려놓은 일도 매우 많아서 그는 관리형 군주가 될수밖에 없었다. 이는 당연히 광대한 제국 전역에서 날아드는 보고와 관련 업무들을 처리하는 일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의 별명인 '서류 왕'은 여기서 탄생했다.
펠리페는 상당히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을 살았다. 일반적으로 그는 일찍 일어나는 유형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의 기상시간은 일반적으로 아침 8시였으며, 그 이전에는 왠만해서는 일어나지 않았다.(물론 학교 안 가는 날 필자 기준으로는 매우 일찍 일어나는 거지만 그건 넘어가도록 하자) 그는 이 기상 시간을 상당히 열심히 사수했는데, "아침 8시까지는 시끄러운 소리 내지 마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수염과 머리를 정돈하고 옷을 입은 다음 그날의 첫 업무를 시작한다. 전날 밤부터 도착해서 비서관들이 준비해놓은 서류들을 읽고 결재하는게 그의 첫 일과였다. 워낙 큰 제국이니 한시도 서류가 도착하지 않는 때는 없었다.
그 다음 일과는 가톨릭 국가의 국왕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인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었다. 당대 사람들의 표현에 따르면 이 시간은 펠리페가 "왕의 일을 하느님께 설명하는 시간"이었다. 그게 끝나면 오전 11시까지 대신들을 접견하거나 남은 서류를 결재했다.
다음은 점심시간이다. 왕은 하루 두끼를 먹었는데, 대부분 혼자 먹었다. 밥먹고 나면 스페인 사람답게 시에스타(낮잠)를 즐겼다. 물론 그가 부려먹는 대신들은 이 시간에 못자고 일했다. 하지만 펠리페 입장에서 이 낮잠은 필수였을 것이다. 이 시간이 지나면 그의 진짜 하루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전 업무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왕이 일어나면 이제 본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온갖 서류가 홍수처럼 왕의 책상으로 몰려드는데, 대신들이 작성한 소견서들을 비롯해서 국정과 관련된 모든 문서들이 쏟아져들어왔다. 왕은 이것들을 모두 꼼꼼히 읽고 결정을 내린 뒤 그것을 작성해서 돌려보내야 했다. 왕의 오후 시간은 이렇게 모두 국정에 바쳐졌으며, 해가 져도 큰 변화 없이 계속되었다.
이 시점부터는 기계적인 일상이 깨지는 일도 종종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왕은 밤 9시까지 서류작업을 하다가 저녁을 먹었는데, 물론 업무가 많으면 상황이 달라졌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서류에 '더이상 볼 시간도 기력도 없다'며 결국 두 손을 들고 나온 밤도 있었다. 그날 일에 대해 펠리페는 참으로 인간적인 호소를 내뱉었다.
"지금 시간이 밤 열시가 넘었는데, 짐은 아직 저녁도 못 먹었단 말이오."
사실 최근 들어서 펠리페 시대의 문서들이 대량으로 연구되어 왕의 인간적인 면모가 새롭게 발견된 것이지만, 펠리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통해 자신의 고충을 숨김없이 털어놓곤 했다. 몇 가지만 들어보자.
"이미 자정이 넘었는데, 이 업무가 나를 아주 죽이고 있다오. 무슨 뜻이냐면 밤마다 기진맥진한다는 뜻이오."
"내가 뭔가 빼먹은게 있다면, 수면부족 탓이라고 생각해두시오."
"일이 너무 과중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오."
"지금 새벽 한 시인데, 나 빼고 모두 자고 있소"
하루는 기껏 열심히 일해서 드디어 끝났다 싶었더니 막 새로운 서류들이 또 무더기로 배달되기도 하였다.

왕은 비서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온종일 쉬지 않고 일했는데, 방금 또 수많은 서류가 도착했다. 이건 오늘밤 안에 도저히 못 끝내겠다. 도대체 이걸 써보내는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건지 모르겠다. 내가 돌이나 쇠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내 피곤한 몰골을 보면 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람이라는걸 다들 깨닫게 되겠지."
한번은 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오늘도 온종일 읽고 쓰면서 보냈단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이미 밤 10시가 넘었는데, 무척 피곤하고 배가 고프구나."
어찌되었건 이렇게 작업을 하다가 대체로 9시나 10시경에 비로소 저녁을 먹었다. 스트레스 탓인지 펠리페 2세는 상당히 많이 먹는 편이었다. 그러나 식단은 단조롭게 고기 위주였다. 점심과 저녁 모두, 대체로 구운 닭이나 튀긴 닭, 자고새, 혹은 사냥 고기 중 하나를 메인으로 고르고, 사슴고기나 쇠고기를 사이드로 먹었다(...-_-) 여기에 수프와 빵을 곁들였다. 샐러드와 과일도 냈으나 주방 기록에 따르면 거의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고기가 업무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가장 큰 힘이 아니었나 싶기도 한데, 바티칸에 열심히 졸라댄 결과 펠리페는 드디어 1585년에 사순시기에 고기를 먹어도 좋다는 허가를 교황으로부터 받아내기에 이른다. 그 뒤로 펠리페는 행복하게도 성 금요일만 빼고 매일 고기를 먹었다.

이렇게 저녁 식사가 끝나면, 다시 야근업무에 복귀했다. 공식적으로는 밤 11시가 본인이 정해놓은 하루 업무 종결 및 퇴근시간이었으나, 앞서 보았듯 심각한 일이 있으면 자정을 넘어서 새벽까지 서류를 붙들고 있어야 하는 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촛불에 의지하여 심야까지 매일 업무를 봤으니 시력이 나빠지는것도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가 남긴 수많은 문서의 필적은 세월이 갈수록 나빠진 시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도 사람이니 때때로 집무실의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서 기분전환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루는 날씨 좋은 날 왕실 가족들과 함께 소풍을 나간 일이 있었다. 경치좋은 강가에서 모처럼 즐거운 하루가 펼쳐졌는데, 정작 펠리페는 다들 잘 노는 동안 구석에 책상 펴놓고 서류결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_-)
나오며
펠리페의 이러한 업무 스타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릴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은 양면적이다. 나중에 기회가 있을때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지만, 펠리페의 이러한 통치는 어떤 면에서는 한계가 있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그의 긴 재위기간동안 상당히 초인적인 노력을 발휘하면서 살았다는것만은 분명하다.
펠리페 2세는 1598년, 상당히 오랜 재위 끝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개인적으로 유럽사를 공부하면서 최대 미스테리 중 하나는, 긴 재위기간에 걸친 과로와 일중독, 불규칙한 수면시간, 철저한 육식위주의 식생활이 특징이었던 이 양반이 70대까지 살았다는 점이다.
참고
Geoffrey Parker, Imprudent King: A New Life of Philip II (New Haven, 2014).
william S. Maltby, The Rise and Fall of the Spanish Empire (Basingstoke, 2009).
- 2018/01/0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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