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트로이>와 일리아스 관련 잡담 영상물잡설


제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매우 감동적으로 읽었던 책이 애들용 축약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였습니다.
그리고 좀더 큰 다음에 중역본이기는 했지만 서사시 형태로 되어있는 것을 읽었지요.

(그나저나 이 이야기의 유명세에도 불과하고 원전에서 제대로 번역한 책이 불과 몇년 전이니 국내의 인문학적 토양이 아직도 얼마나 열악한지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때 든 생각이 '왜 이 이야기는 영화가 없나' 였는데, 2004년에 트로이가 개봉되었을 때 제가 얼마나 기대가 컸을지는 가히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대실망이었지요. 아직까지도 제 기준 시대극 최악의 작품 중 하나로 생각합니다. 같은 해 개봉했던 <알렉산더>와는 정말로 극과 극이었지요.

신들이 사라지고 원작과 많이 달라졌다는 비판은 그 무렵에도 많았지만, 그것은 상관 없었습니다. 어차피 영화라는 것은 감독의 작품이고, 모티브를 따온 원작을 백 퍼센트 스크린으로 옮길 의무는 없는 것입니다. 시대고증이 부실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극예술에서 그것이 반드시 필수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이 너무 단순하고 얕으며, 인간에 대한 성찰, 이해가 빠져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이 점에서 새로 나온 감독판은 그나마 좀 낫습니다.) 올리버 스톤의 <알렉산더>에 비해 가장 다른 점이 여기에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점이 왜 큰 문제냐 하면, 볼프강 페터젠 감독이 트로이를 만들면서 의도적으로 신들을 제거한 것은, 이른바 '신화의 역사화'를 시도한 것이면서 동시에 신들이 주인공인 이야기에서 인간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것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인간'의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신들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불사의 신들에 비해 가혹한 운명에 매여있는 인간은, 그러나 그 운명에 용감하게 도전하고 쓰러집니다. 그 과정을 호메로스는 잔인하면서도 비장하게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고결함, 잔인함, 연약함, 비열함이 번갈아가면서 입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실상 이 이야기에서 완벽한 영웅은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너무나도 평면적입니다. 그냥 진부한 일일연속극의 등장인물들 같습니다. 인간에 대한 묘사가 3천년전 그리스인의 통찰보다도 떨어진다고 하면 너무 심한 평일까요?  아킬레우스는 그냥 무식하게 힘만 세면서 반항심만 강한 불량 청년 격이며, 아가멤논은 처음부터 끝까지 찌질한 악역으로 등장합니다. 그 대척점에 모든 것이 완벽한 헥토르가 있지요. 그나마 숀 빈이 연기한 오뒷세우스 정도가 비교적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까요?

<일리아스>의 인간 이해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아킬레우스는 영화에서처럼 마구 폭력을 휘두르는 반항아가 아니라 명예심이 깊고 고결한 영웅입니다. 그러나 절제가 부족하고 자존심이 강하다는 약점이 있지요. 전장에서 적군에게는 한없이 냉혹하지만 동시에 드문드문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21권에서 프리아모스의 아들인 뤼카온을 죽이는 장면이 대표적이지요.

아가멤논은 또 어떻습니까. 영화의 변태찌질이영감이 아닌, 뮈케나이의 왕 아가멤논은 다소 성급하고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는 결점이 있지만 동시에 전장에서는 용감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완벽한 엄친아 캐릭터인 헥토르는, 원작에서도 역시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입니다만 결코 완벽한 영웅은 아닙니다. 영화에서는 그저 가족애와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그런 멋진 남자로 묘사되었지만, 원작의 헥토르는 자신의 전공과 개인적인 명예에도 충분한 관심이 있고, 공을 세우기 위해 부상당한 전우의 구원요청을 무시하고 전장으로 뛰어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허세도 잘 부리고 주변의 충고를 무시하는 모습도 보이지요. 등장인물들 중 가장 완벽에 가까운 영웅이지만, 그럼에도 역시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점을 묘사하면서 호메로스는 가장 멋진 캐릭터를 만들어내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트로이아의 운명을 한 몸에 짊어지고 있는 그가 느끼는 복잡한 심경은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강한 일체감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가 수없이 많은 그리스의 괴물급 영웅들과 맞서서 쓰러질듯 쓰러질듯 하면서도 버티는 모습이 강한 감동으로 전달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영웅이 대결을 목전에 두고 두려움을 느끼는 장면을 호메로스는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그리스의 영웅들에게 대결을 신청한 뒤에 거인 아이아스가 그의 대결을 받아들이고 걸어나오는 모습을 보며 겁을 먹는 그의 심정 묘사가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전투력 면에서는 아이아스가 헥토르보다 한 수 위입니다. 하지만 헥토르는 동생과 달리 여러 면에서 불리한 싸움을 피하지 않습니다.(그리고 영화가 가장 말아먹은 것도 이 장면 -.-)

헥토르와 아이아스의 대결을 소재로 한 미술품은 많지만, 이 작품이 최고의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힘겨운 대결을 무승부로 끝내고  선물까지 교환한 뒤에 돌아서는 두 영웅이 무언가 아쉬운 듯 뒤를 돌아봅니다. 이러한 세심한 모습이 참 멋지게 표현되어 있지요.

이러한 요소가 영화 <트로이>에는 결정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신을 밀어내고 인간에 집중하려면, 그 인간의 캐릭터들을 한 층 더 입체적으로 부각해야 되는데, 결과적으로 신도 인간도 아닌 어중간한 작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제 감상입니다.



ps. 이것과 비교해서 <헬렌 오브 트로이>라는 작품이 더 낫다는 분도 많이 계시던데, 글쎄요.. 저는 그것도 그닥 -_-

덧글

  • hyjoon 2010/04/11 22:04 #

    저도 어째 인문들을 평면적으로 그렸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더군요. 그렇다고 원전에 충실한 것도 아니고......그냥 서사시를 읽으며 해석을 하는게 어떨까 싶기도.....(한데 서점에서 보기 힘든 현실.....ㅜㅜ)
  • Mr 스노우 2010/04/11 22:09 #

    차라리 그 기술력으로 원작을 충실히 옮겼다면 독창적이지는 않아도 더 안전한 투자였겠습니다.
    일리아스라면 천병희 교수님이 옮기신 훌륭한 원전번역이 나와있지요. 그리고 최근에 괜찮은 해설서도 한권 출간되었습니다.
  • FELIX 2010/04/11 22:38 #

    사실 그런데 이런 얕음은 작가나 제작진의 철학이 얕아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독자, 이 경우에는 관객의 취향을 고려한 탓이겠지요. 저는 역덕이라 당연히 알렉산더에 더 열광했지만 결국 흥행한건 트로이니까요.
  • Mr 스노우 2010/04/11 22:45 #

    어쩔 수 없는 딜레마라고 해야 할까요...
    트로이는 그리스 고전문학 전공자들도 엄청 욕하면서 봤다고 하더군요.
    어떻게든 양쪽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은 나올 수 없는 것인지 참 모르겠습니다.
  • 들꽃향기 2010/04/12 12:51 #

    잘 읽고 갑니다. ^^사실 저 역시도 영화에서 말아먹은 장면(?)중 하나로 헥토르와 아이아스의 결투장면을 꼽는데.....감상이 비슷하셨군요. =_=

    사실 능력(?)이 좀 딸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어깨위에 놓여진 책임 때문에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헥토르와, 그런 헥토르와의 대결에서 눈앞에 서 있는 '적'이라는 것도, 그런 최선을 다하는 하나의 인간임을 깨닫는 아이아스라고 해야할까요 ㄷㄷ

    개인적으로는 니체가 얘기했었던 "'적'이라는 것은 자기와의 대등성을 전제로 한다."라는 말의 적절한 실례라고 좋아하는 파트이기도 합니다.

    사실 영화 트로이에서는, 스노우님께서 매우 예리하게 지적해주신대로 일리아드에서의 등장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복합적인 면모가 단선화되고 타입화되어 우리앞에 제시된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고, 그것이 원작은 물론 극예술의 구성에 있어서도 마이너스 포인트가 된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명청시대 소설-희곡사를 보면, 명말에 희곡이 발전하고 소설이 분리되어가면서, 보다 시각적이고 대중적인 희곡의 인물은 그 인물 자체에 다양성을 띄어가기보다는 일종의 타입화가 되어가는 경향이 있더군요 =_=;; 역시 대중화와 함께 '다양한 다수의 대중 앞에서 한번에 보여진다는' 측면을 가지게 되면 피할 수 없는 부분인가 싶어서 씁쓸하기도 합니다. ㄷㄷ
  • Mr 스노우 2010/04/12 15:32 #

    장문의 덧글에 감사드립니다^^ 저 같은 경우 헥토르와 아이아스의 대결은 헥토르의 입장에서는 많이 생각해봤지만 아이아스의 입장에서는 별로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호메로스가 명색이 트로이아 최고 용장인 헥토르를 전투력 면에서는 너무 약하게 묘사한 것 아니냐는 불만도 종종 제기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대중화라는 것이 반드시 극의 수준이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어야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blue 2010/05/02 20:53 #

    그래도 여자들은 참 좋아하더군요.(^^)
  • Mr 스노우 2010/05/02 21:20 #

    그건 근육 때문일겁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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