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에 폴란드 대통령이 카틴 숲 학살사건 추모 방문중에 항공기 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지요.
바로 그날이 카틴 숲 학살사건 70주년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1939년 9월 17일에 소비예뜨 러시아는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그리고 별다른 저항없이 상당한 수의 폴란드군을 포로로 잡게 됩니다. 이들 중 상당수의 사병들은 곧 석방되었습니다. NKVD가 인계받은 후에 우크라이나나 벨라루스 출신 병사들도 석방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장교들이었지요.
2007년작 폴란드 영화 <카틴>에 보면 '독일군은 폴란드 사병들을 잡고 있고, 러시아군은 폴란드 장교들을 잡고 있다'는 대사가 나옵니다. 소련군이 폴란드 장교들을 주로 노렸던 이유는 물론 스딸린의 명령에 의해 폴란드 국가의 근간을 파괴하기 위해서였지요. 장교 없는 군대는 있을 수 없으니까요.
약 2만2천 명 가량의 폴란드 포로들은 결국 4월 10일, 러시아의 카틴 숲에서 집단 처형됩니다. 처형은 극도의 효율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포로는 간단한 조사를 거쳐서, 손이 묶인 채로 작은 방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뒤통수에 총을 한 방 맞았습니다. 그리고 시체는 곧바로 치워졌고, 다음 포로가 들어왔습니다. 처형은 독일제 권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나중에 이 학살이 나치 독일의 소행이었다고 주장하는 데에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주의: 혐오사진

카틴 숲에서 살해당한 사람들은 한 명의 해군 제독, 두 명의 장군, 24명의 대령, 79명의 중령, 258명의 소령, 654명의 대위, 17명의 해군 대령, 3420 명의 부사관, 7명의 사제, 1명의 귀족, 3명의 지주, 43명의 정부관리, 85명의 사병, 131명의 피난민이었습니다.(이것은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에 나와있는 내용을 근거로 썼기 때문에 부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20명의 대학교수와 300명의 외과의사, 그 외에도 다수의 교사, 변호사, 작가, 언론인, 비행사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한 사회의 엘리트 층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망라하고 있는 셈이지요. 폴란드라는 나라를 철저하게 파괴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집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시 폴란드의 점령군인 나치 독일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냉전시대 이전까지는 연합국은 이 사건을 잘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몇년 뒤에 학살자인 소련군이 '해방군'으로 폴란드에 돌아오게 되니 폴란드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폴란드 우파들은 반러시아 감정이 대단히 큰데, 그러한 감정도 여기서 상당부분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내내 당하기만 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만...)
바로 그날이 카틴 숲 학살사건 70주년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1939년 9월 17일에 소비예뜨 러시아는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그리고 별다른 저항없이 상당한 수의 폴란드군을 포로로 잡게 됩니다. 이들 중 상당수의 사병들은 곧 석방되었습니다. NKVD가 인계받은 후에 우크라이나나 벨라루스 출신 병사들도 석방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장교들이었지요.

약 2만2천 명 가량의 폴란드 포로들은 결국 4월 10일, 러시아의 카틴 숲에서 집단 처형됩니다. 처형은 극도의 효율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포로는 간단한 조사를 거쳐서, 손이 묶인 채로 작은 방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뒤통수에 총을 한 방 맞았습니다. 그리고 시체는 곧바로 치워졌고, 다음 포로가 들어왔습니다. 처형은 독일제 권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나중에 이 학살이 나치 독일의 소행이었다고 주장하는 데에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주의: 혐오사진

카틴 숲에서 살해당한 사람들은 한 명의 해군 제독, 두 명의 장군, 24명의 대령, 79명의 중령, 258명의 소령, 654명의 대위, 17명의 해군 대령, 3420 명의 부사관, 7명의 사제, 1명의 귀족, 3명의 지주, 43명의 정부관리, 85명의 사병, 131명의 피난민이었습니다.(이것은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에 나와있는 내용을 근거로 썼기 때문에 부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20명의 대학교수와 300명의 외과의사, 그 외에도 다수의 교사, 변호사, 작가, 언론인, 비행사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한 사회의 엘리트 층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망라하고 있는 셈이지요. 폴란드라는 나라를 철저하게 파괴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집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시 폴란드의 점령군인 나치 독일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냉전시대 이전까지는 연합국은 이 사건을 잘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몇년 뒤에 학살자인 소련군이 '해방군'으로 폴란드에 돌아오게 되니 폴란드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폴란드 우파들은 반러시아 감정이 대단히 큰데, 그러한 감정도 여기서 상당부분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내내 당하기만 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만...)
덧글
소련이 벌인 학살 아닌가요?
2. 냉전 연간에 미/소의 사이가 나쁠때도 이러한 "침묵의 카르텔"문제가 벌어질걸 우려해서 미국에서는 언급을 극도로 회피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우리도 흔히 보는 "진영논리"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쉬쉬하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었죠. 이건 사실 소련 시베리아 유형의 참혹함을 다루는 서방의 논리도 마찬가지입니다만.
ps: 카틴도 카틴이지만 굴락의 실체가 서방 세계에 공식으로 알려지게 된 최초의 계기 역시 굴락에 수감되었다가 자유 폴란드 군으로 서방으로 이동한 사람들로부터였죠. 자유 폴란드 군의 행적을 봐도 눈에 폭풍이 밀려올 정도입니다.(개판 번역으로 악명높은 굴락을 보시면 됩니다.)
영화 카틴의 감독은 꽤 많은 문제작을 만들었죠. 무려 한국 KBS에서도 방영된 "당통"역시 프랑스내에서 대단한 파문을 일으켰죠. ㅋ
그나저나 카틴의 감독이 당통까지 감독했는지는 몰랐네요^^
러시아 공산당은 비롯한 러시아 내의 여러 부류는 아직까지도 나치의 소행으로 돌리려고 하는 듯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그러고보니 '제국령 폴란드' 즉 독일에 정식으로 합병된 지역에서도 폴란드 민간엘리트에 대한 숙청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런걸 보면 '근대'라는 것이 문명개화의 시대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가장 기억의 남는 스탈린의 명언(?).
'모조리 죽여라, 죽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인간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
덧. 나치의 강제수용소제도도 소련의 그것을 벤치마킹한 거라네요...
마치 억지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