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사학과 추계답사 (3)-성주사지 답사, 여행기

성주사는 백제 때에 건립된 사찰로 당시 이름은 오합사였습니다. 신라 문성왕 때에 낭혜화상 무염이 중창하여 성주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신라 말기 선종산문의 하나로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습니다.
절터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인상. 두 산 사이에 위치한 넓은 절터가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합니다. 다만 11월 오후의 바람이 너무 차서 이때는 다들 거의 뻣뻣하게 마비되어가고 있던 시점...-_-
금당 자리입니다. 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돌로 된 부분만 남아있습니다. 사진에 나온 것은 불상이 놓이던 석좌. 그리고 주변을 따라서 주춧돌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 시대는 제가 그렇게 잘 아는 시대는 아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성주사는 신라의 삼한통일의 주역 중 하나였던 김인문의 가문과 관련이 깊은 사찰입니다. 태종 무열왕의 아들로 통일전쟁 과정에서 여러모로 많은 활약을 보였던 인물이지요. 물론 김인문은 이후 당에 거주했지만, 이 지역은 그의 봉토로 내려졌고, 그에 따라 성주사 역시 그의 가문과 영욕을 같이하게 됩니다.

김인문의 가문이 큰 타격을 받는 사건이 바로 김헌창의 난(822)입니다. 이 사건은 동시에 신라 왕정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는 신호탄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왕위계승전에서 패한 세력들도 지방의 세력기반을 일시에 상실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주원의 아들들 중 헌창은 반란의 실패로 몰락했지만, 종기와 그의 종족은 왕위를 노리는 대신 원성왕계를 지원했습니다.

나중에 김종기의 후손들인 김흔과 김양은 각각 갈라져서 민애왕과 김우징(신무왕)을 지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패한 김흔은 낙향을 하게 되지요. 이때까지도 김인문의 봉토는 김흔이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절터를 희사하고 낭혜화상을 청한 사람도 김흔이었습니다. 낭혜화상 무염 역시 김헌창의 난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니 여러모로 대단한 인연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당시 이 절은 쇠락해가고 있었는데, 실권자인 김양의 전교에 힘입어 이 절은 다시 크게 번창하게 됩니다. 이 시기 문성왕의 사액을 받아 '성주사'가 됩니다.
문제의(?) 낭혜화상비. 당대의 천재 최치원의 글이니 그 문화적 가치야 이루 말할 수가 없겠습니다. 그런데 진골에서 6두품으로 떨어진 낭혜화상, 무려 "호족"이었던 김양과의 연계, 그리고 선종이 신라 하대 호족들의 사상적 기반이었다는 점을 들어 성주사도 지방호족들과 관계가 깊은 사찰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김양은 신무왕을 왕위에 앉힌 공신이었고, 문성왕을 옹립한 사람입니다. 중앙정계에서 활동한 사람이었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위의 비문을 짓게 한 사람은 다름아닌 진성여왕입니다. 즉 이 사찰은 호족보다는 신라왕실과 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뜻이지요.
읽을 실력은 안되나 이 앞에 서니 최치원의 아픔과 좌절이 생생히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조선시대를 폐쇄적인 사회로 보고 고려, 신라 등을 자유로운 사회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 사회야말로 정말 폐쇄적인 법입니다. 고대 그리스만 해도 민주정치는 그 사회의 한 부분일 뿐이지요. 그리스 민주정이든 로마의 공화정이든 기본적으로 노예노동에 기반한 사회입니다. 오히려 흔히 저평가받는 중세야말로 노예제에서 농노제로 이행하면서 많은 농민들의 처지가 그나마 더 나아진 면이 있습니다.

한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사회의 지배층은 매우 협소하고, 폐쇄적이었습니다. 고대 세계를 부정적으로 보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고대 사회에는 가장 적합한 체제이기도 합니다. 시대의 한계라고 해야겠지요. 이러한 체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회가 변화하면 그 체제는 무너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보다는 고려 사회가 더 개방적이고, 그보다 조선 사회가 더 개방적이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최치원의 예는 신라 하대의 통치력은 이제 한계점에 다다랐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체제가 사회적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시점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비석의 장식인데, 비록 훼손되기는 하지만 그 정교함과 기술력이 놀랍습니다. 어떻게 보면 진성여왕 시대면 이제 신라의 체제가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떄인데, 이런 멋진 건축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이기도 하고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청나라의 이화원도 그렇고, 터키의 돌마바체 궁전도 그렇고 막 체제가 와해되기 직전에 정말 화려한 예술적 걸작들이 국가주도로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나름대로 왕조의 틀을 유지하고, 불안을 해소해보려는 노력이었으니까요.

덧글

  • 크핫군 2011/02/18 12:37 #

    답사에서 하루에 두번꼴로 절 혹은 절터 갔다 와서 절만 봐도 현기증 나긔;;;;
  • Mr 스노우 2011/02/18 12:38 #

    ㅋㅋㅋㅋㅋ 여기가 이날의 세번째 절터였으니...-_-
  • 크핫군 2011/02/18 12:46 #

    거기에 노교수님이라서 여행문을 A4용지 20장이나 써내야 했습니다 OTL
  • 크핫군 2011/02/18 12:47 #

    그것도 수필 ㅜㅜㅜㅜ
  • Mr 스노우 2011/02/18 12:51 #

    어익후...ㅜㅜ
    전 수강생 외 참가자여서 아무 일도 안하...
    ...지는 않았고 매일밤 안주를 사왔습니다(야임마)
  • 크핫군 2011/02/18 12:54 #

    엌.... 안주셔틀 ㄷㄷㄷ(퍽!)

    그러고보니 저희는 1학기 답사때 노교수님 대신해서 온 교수님이 너무 주량이 많으신 관계로 다음날 해뜰때 까지 술자리가 이어졌죠. 문제는 우리가 자야하는 방에서 술자리 했다는거;;;;
    .... 결국 밤 샜습니다 OTL
  • 앨런비 2011/02/18 22:06 #

    ...쿄토에서 하루에 절 10번쯤 들가니 여행자체가 지겨웠던거와 비교하면, 1~2번으로 현기증이 난다는 것은 풋.
  • 2011/02/18 16:5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Mr 스노우 2011/02/18 23:12 #

    그 사람 요즘은 좀 잠잠한듯 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_-
  • 松下吹笙 2011/02/19 13:08 #

    권력은 짧고 예술은 기니깐요...고구려 멸망 무렵의 사신도 벽화.... 통일신라 멸망 무렵의 아름다운 부도들... 19세기 급격하게 쇠퇴하던 조선을 빛냈던, 추사, 조희룡, 전기, 김수철, 남계우, 장승업등의 기라성 같은 화원들...
  • Mr 스노우 2011/02/19 19:47 #

    그게 당시의 정치현실을 생각하면 다소 씁쓸한 생각이 들수도 있지만, 뭐 후손들에게 예술작품을 물려준 것은 좋은 일이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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