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시대의 역사적 의미 History-근동, 서양사

고대 그리스사에서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 문화를 크게 확장시킨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과소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바로 앞선 시대인 고전시대의 문화가 너무 인상적이었던 탓도 있고, 때문에 헬레니즘 시대의 문화가 고전시대의 아류로 여겨지기도 하는 탓도 있지요. 지성사적 측면에서도 헬레니즘 시대는 제논과 에피쿠로스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을 배출시킨 시대이지만, 문제는 역시 고전시대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당해야 한다는 숙명을 타고났다는 점입니다 -_-

그러나 서양사의 역사적 맥락에서 헬레니즘 시대는 고전시대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그리고 헬레니즘 시대의 문화도 그 나름의 독특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말이지요.


세계와 개인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도 하나로 통합된 세계입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인해 헬라스인들에게 알려져있던 세계 대부분이 하나의 제국이 되었습니다. 물론 대왕의 제국은 단명하지만, 이 짧은 기간의 통합이 헬라스인들에게 준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바로 이들의 인식의 지평이 크게 확대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전, 그러니까 고전시대까지 헬라스인들의 삶의 단위는 각각의 폴리스였고, 각 사람은 폴리스의 구성원으로서만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괜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폴리스적인 동물이다"라고 정의한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헬레니즘 시대에 헬라스인들은 폴리스에 국한된 사고방식을 극복하게 됩니다.

물론 이것이 헬레니즘 시대에 갑자기 툭 튀어나온 사상은 아닙니다. 그 훨씬 전부터 조금씩 쌓여온 세계시민 사상이 이 시대에 확실히 정립되었다고 말해야겠지요. 소크라테스 이전에 살았던 데모크리토스는 이미 그와 같은 사상을 주장한 바 있었습니다.

     현명한 사람에게는 온 세계가 조국이다(ανθωπω σοφω ο κοσμοσ πατρισ εστιν)

이는 고전시대를 거치는 동안 계승되어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면 확고하게 자리잡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모든 사람은 세계를 자신의 모국과 같이 생각하라"고 말하지요. 그리고 코이네 그리스어가 공용어가 되면서 고전기때 그리스인이 생각하던 헬라스인과 바르바로이의 구분도 점차 희미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기존의 폴리스 중심의 정체를 극복하는 '코스모폴리스'라는 개념과 같은 폴리스의 시민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인류애'의 개념이 싹트게 됩니다.

이에 영향을 받아 태어난 것이 개인주의입니다. 고전기에는 "세계"도 없었고, 진정한 의미의 개인도 없었습니다. 다만 폴리스의 구성원인 아테나이인 아무개, 스파르타인 아무개가 있었을 뿐이었지요.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인은 "세계'라는 관념을 전제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계시민주의가 자리잡는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면 "개인으로서의 개인"이라는 관념도 태어나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

이러한 특징은 이 시기의 예술에서 잘 드러납니다. 고전기 때의 조각들을 보면 그 주제는 신이나 영웅인 경우가 많으며, 인간을 그대로 표현한다기보다는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이상'을 표현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표정은 대체로 근엄하며, 나체로 묘사되더라도 그것은 가장 완벽한 육체를 표현하기 위함이지 관능적인 느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헬레니즘 시대에 오면 조각가들은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보다는 현실 그대로의 인간을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들에서는 인간의 감정과 기분, 그리고 삶의 고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술취한 노파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기에는 고전기때의 정제된 형식미와는 다른 종류의 느낌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신과 영웅들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대상들이 예술의 소재가 되었다는 점도 특기할 점입니다. 위의 조각상이 묘사하는 것은 일상의 무게나 느껴지는 평범한 시장의 노파입니다. 이와 같은 노동자들이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바로 개개인의 삶과 거기서 오는 희비가 예술의 대상이 될만큼, 평범한 개개인에 대한 관심, 애정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역시 헬레니즘 시대의 한 특징입니다.


과학과 기술

과학사에 있어서도 헬레니즘 시대는 여러 걸출한 학자들을 배출했습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관심은 곧 지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첫째로는 유명한 아르키메데스를 들 수 있겠고, 지구의 직경과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를 계산한 에라스토테네스, 태양중심설과 지구자전을 주장한 아리스타르코스도 이때의 인물입니다. 천문학 쪽에서는 히파르코스가 별의 위치를 정하고 그것을 6등급의 광도로 분류하였습니다.

반면에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다소 발전이 부족한 인상을 받는데, 다만 헬레니즘 국가들간의 치열한 싸움 와중에 공성기술을 비롯한 각종 전쟁기술은 크게 발전하게 됩니다.


철학, 종교적 변화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변화일 수도 있는데, 고전기 때의 위대한 철학자들의 탐구 대상은 바로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의 개인주의적 동향은 철학과 종교에도 영향을 미쳐서,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은 주로 실생활과 관련되는 실천윤리와 관련되어있습니다. 즉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인가'가 핵심주제가 된 것이지요. 물론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가 각각 이에 대한 대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면에서 봤을 때, 기존의 다신교 즉 고전시대의 올림포스 종교는 점차 쇠락하는 추세였습니다. 물론 앞의 세계주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그것도 이 시기에 급작스럽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미 기원전 5세기에 활동했던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들을 부정한 바 있습니다. 이런 부도덕한 신들이 진짜일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소피스트들의 활동은 기존 신앙에 대한 회의를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따라서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면 이미 기존의 다신교는 매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폴리스의 수호신들이 중심이 되는 올림포스 신앙은 새로운 세계국가에는 어울리지 않았지요. 따라서 이 시기 그리스 세계에 수많은 외국 종교들의 영향이 유입되기 시작합니다. 그중에서도 동방에서 유입되는 신비종교들이 그리스인들의 새로운 영적 욕구에 부응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의 종교적 사상도 변하는데,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인 제논은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의 지고한 원리라는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이 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나왔으며, 인간의 본성에는 이러한 신적인 불꽃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것을 '제우스'라고 불렀으나 고전기의 바람피우는 그 제우스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며 여기서 다시 한번 정리해보지요. 세계를 움직여나가는 단일한 원리, 초월적인 존재, 그리고 동방 종교의 신비주의적 요소. 이는 동방의 일신교와 매우 흡사합니다. 물론 유대인의 인격신 개념과 이 시기 헬라스인들이 생각한 초월적 신 개념은 매우 다르긴 하지만, 어찌되었건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도교의 수용을 위한 토대를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측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나가게 되지요. 일본의 모 작가는 그리스, 로마의 다신교와 유대인의 일신교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엄청 강조하지만, 이 시기에 이르면 그리스, 로마인들 스스로가 일신교를 받아들이기 상당히 용이한 환경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헬레니즘 시대의 특징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 시기는 고전시대에 비해서 얼핏 보기에 못 미쳐 보이는 경우도 있으나, 그래도 사회의 전 분야에 걸쳐서 큰 변화가 일어났던 시대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매우 급격한 변화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이후 시대의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막대한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자료

보드먼, 원형준 역, <그리스 미술>, (시공사, 2003).
월 뱅크, 김경현 역, <헬레니즘 세계>, (아카넷, 2002). 
조남진, <헬레니즘 지성사>, (신서원, 2006).

덧글

  • 크핫군 2011/02/22 20:35 #

    아쉽게도, 문명에선 고전에서 중세로 바로 넘어가버립니다 ㅜㅜ
  • Mr 스노우 2011/02/23 13:12 #

    나름 위대한 시대였는데,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_-
  • Jes 2011/02/22 22:39 #

    그런 의미에서 헬레니즘 사 연재 ㄱㄱ?
  • Mr 스노우 2011/02/23 13:12 #

    개강이 코앞이라 여력이...-_-
  • aatheung 2011/02/23 11:34 #

    영화 알렉산더에서 온세계가 하나가 되고 모두가 코스모폴리탄이 된다는 원대한 포부에 아 감명받았었죠. 그 옛적에 이런 놀라운 진보정신이 탄생하다니!
  • Mr 스노우 2011/02/23 13:13 #

    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보다 훨씬 더 거슬러올라가는 사상인게 더 대단한 것이지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 인해 그 사상이 결국 실현된 것이구요 ^^
  • hyjoon 2011/02/23 15:28 #

    이 시대는 세계사와 철학사에서는 중요하게 다루어지건만, 사람들의 인식은......(...)
  • Mr 스노우 2011/02/23 20:04 #

    이미 지성사는 트렌드가 아닌 것인지(........)
  • 들꽃향기 2011/02/24 12:26 #

    1. 조지 세이빈 등의 공저인 '서양사상사'에서도 헬레니즘시기의 사상사적 변화를 중요한 것으로 다룬 서술을 읽어서인지 말씀하신 바가 더욱 공감이 됩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개별 도시민으로서의 좁은 정체성이 파괴되고, 신화적인 개별 각신을 넘어서 거대한 자연적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며, 그것은 다시 개별 국가-문화권을 뛰어넘는 '보편적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으니깐요. ㄷㄷ

    사실 정치사상사적으로 보면 그런 변화는 '자연법'개념의 탄생에 더 중점이 주어지겠지만, 언급하신 스토아 학파를 거쳐 기독교-이슬람교 등의 유일신교 신앙으로 나아가는 기반도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


    2. 하지만 18세기 계몽주의의 확산과 함께 '고전기' 그리스가 숭앙되면서, 헬레니즘 시기는 좋게 봐주면 만성(晩盛)한 시대로, 나쁘게 보면 고전기에 비해 퇴락되고 관능적인 시기로 인식되면서, 이 시기 사상사-지성사적 변화가 크게 중시되지 않고 그것이 다시 대중들 사이에서 선입견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인 것 같습니다. ㄷㄷ
  • Mr 스노우 2011/02/24 23:48 #

    1. 공부를 하면서 사상사적으로 봤을 때 헬레니즘 시대의 의미가 정말 크가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부분이 의외로 과소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에 이 글을 쓰게 되었지요 ^^

    특히 그리스도교 이전 고대 종교도 시대에 따라 패러다임이 상당히 다른데, 몽땅 싸잡아 다신교라고 표현하는 것도 좀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2. 고전기 자체가 그야말로 위대한 시대였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지만, 그 시대를 숭앙하기 위해 헬레니즘 시대가 격하된 것은 분명 비역사적 태도였던 것 같습니다. 18세기 신고전주의 시대에 그 전 시대인 바로크를 무시했던 것과도 어느정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푸른미르 2011/02/26 21:42 #

    어쩌면 먼 미래에 올 세계정부도 이와 비슷하게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 Mr 스노우 2011/02/27 00:09 #

    물론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단명했고, 앞으로의 일도 더 두고 봐야겠지만, EU도 발전해나가고 있고 하니 흥미로운 관찰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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