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안모극제와 팔기제 (2) History-한국, 동양사

팔기제의 형성과 특징

금 왕조가 무너진 뒤에 요동의 여진인들은 한동안 통일된 세력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6세기 이후 대명(大明)제국의 힘이 약화되면서 요동에서 명의 요동도사 체제가 붕괴되고, 여진의 통합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건주좌위 출신의 누르하치는 건주오부를 통합하여 이러한 움직임의 첫발을 내딛었으며, 1593년 몽골군을 격파한 후 그 여세를 몰아 여진 諸부 대부분을 통합하였습니다.

이어서 1616년에 대금(大金)의 건국을 선포하였고, 1618년 명에 대한 ‘칠대한(七大恨)’을 내걸고 마침내 명과의 정면대결을 선언하기에 이르지요.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는 1636년에 기존의 여진이라는 이름 대신 만주(滿洲)라는 명칭을 쓸 것을 선포하고, 국명을 대청(大淸)으로 고쳤으며, 그의 뒤를 이은 세조(世祖) 순치제(順治帝)때에 마침내 북경에 입성하여 누르하치 이래의 숙원을 달성하고 12세기 금에 이어 두 번째 중원 지배 시대를 열게 됩니다.

이러한 만주 세력의 급격한 성장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바로 팔기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팔기제는 금의 맹안모극제와 마찬가지로 후금과 청조 군사력의 핵심이자 기본적인 사회조직으로서 기능하였습니다. 따라서 이후 대청제국을 이해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기존에는 이 시기 만주 사회와 12세기 여진 사회를 혈연에 근거한 씨족사회로 보고, 맹안모극제 역시 그러한 대가족공동체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그러한 씨족사회는 일찍 해체되었고, 12세기 여진사회는 소가족이 중심이 되어 일정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연합체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는 17세기에도 마찬가지로 씨족공동체적 성격은 약화되고 지역공동체적 성격이 강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각 부민들이 지역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통일성이 약합니다. 따라서 누르하치에게는 다양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여진인들을 통합하기 위한 새로운 조직을 필요로 하였고, 이것이 팔기제 조직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누르하치는 1614년에 “처음으로 팔기의 제도를 정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맹안모극제가 그랬듯이, 팔기제도 누르하치 개인의 창안만은 아니었고, 기존에 존재하던 여진사회의 수렵, 생산 단위를 군사 조직으로 전환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누르하치는 여진사회의 기본구조를 유지하면서도 통합된 군사조직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청 태조 누르하치


여진사회에서 전통적인 수렵 조직의 기본단위를 니루(Niru)라고 하였는데, 누르하치는 이를 모방하여 휘하의 부족을 4개의 니루로 조직하고, 상징적 의미를 가진 4색 깃발로 이들을 구분하였습니다. 이것이 팔기제의 전신이고, 전쟁포로와 귀순자들을 편입시키면서 점차 그 규모가 증가하게 됩니다.


상께서 여러 나라들을 평정할 때, 각 300인마다 1니루에젠(牛彔額眞)을 두었다. 5니루를 1자란에진(甲喇額眞)으로 두고, 5자란을 1구사에젠(固山額眞)으로 두었다. 구사에젠의 좌우에 두 마이런에젠(梅勒額眞)을 두어 처음에는 4기가 있었는데, 기는 한 가지 색깔만으로 구분하여 황색, 홍색, 남색, 백색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4기를 더하여 그 색에 테를 둘러 함께 사용하였고 모두 팔기가 되었다.    (<청실록>, 태조실록 권 4)


청태조실록에 실린 위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615년 누르하치는 휘하 부족을 8기로 편성하여 그 체계를 확립하였습니다. 그 중 4기는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4개 니루의 깃발을 유지하여 정홍기(正紅旗), 정황기(正黃旗), 정백기(正白旗), 정남기(正藍旗)라 하였고, 나머지는 양황기(鑲黃旗), 양백기(鑲白旗), 양남기(鑲藍旗), 양홍기(鑲紅旗)라 칭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니루는 여진 사회의 기본단위가 되었고, 팔기제는 후금의 새로운 군사조직이자 행정, 경제, 사회조직으로 정비되었습니다. 각 기의 책임자는 ‘버일러’라고 칭해졌는데, 누르하치의 아들과 조카들 중 8인이 버일러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들은 휘하 기의 군사(軍事)와 민사(民事)를 총괄하였기 때문에 팔기는 군민일체(軍民一體)의 조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는 누르하치의 건주여진만의 특징이 아니라 앞서 다루었던 금이나 요, 몽골, 혹은 고대의 흉노에 이르기까지 막북이나 요동의 유목 공동체나 수렵 공동체에서는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임을 유념할 필요도 있습니다. 금의 맹안모극제와 마찬가지로 팔기제의 이러한 군민일체, 혹은 병농일체(兵農一體)적 특성은 여진이 전시에 막강한 군사적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 제도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팔기제는 기존의 여진 부족뿐만 아니라 요동에 거주하는 한인, 복속된 몽골인들까지도 기존의 체제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고, 지도자들 역시 기존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기존의 사회를 조금씩 누르하치의 통제에 더욱 용이하게 변형시켰던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정복으로 인해 새로이 편입되는 이들도 무리 없이 이 체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한 매우 효과적이고 독창적인 제도였다고 하겠습니다.



팔기제의 발전과 입관 이후의 변화

누르하치의 정복사업이 지속되면서 여진인의 통치 하에 편입되는 한인과 몽골인의 수도 점차 늘어갔습니다. 누르하치는 이들 역시 니루로 편성하여 팔기조직에 편입시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팔기는 여진인의 사회조직일 뿐 아니라 다른 공동체들까지 아우르는 제도로 발전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은 홍타이지에 의해 더욱 분명하게 자리잡습니다. 누르하치가 영원성에서 패하고 곧이어 사망하자 그의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가 즉위하니 바로 청 태종이지요. 홍타이지의 치세에 요동의 지배가 확고해졌으며, 군주의 권한도 막강해졌고, 한인관료들을 받아들여 중국식 국가 체제에 더 근접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청 태종 홍타이지


이 시기 팔기제의 발전에 있어서 주목할 부분이 바로 몽고팔기(蒙古八旗), 한군팔기(漢軍八旗)의 조직입니다. 이미 누르하치의 치세에 몽골인과 한인 귀순자들이 증가하여, 팔기 조직 안에 편입되고 있었습니다. 홍타이지는 이러한 추세에 더해서 1635년 정식으로 몽고팔기를 조직하였고, 1637년부터 1642년까지는 한군팔기를 조직하여 기존의 만주팔기(滿洲八旗)와 함께 청조 군사조직의 기본틀을 완성하였습니다. 한군팔기는 특히 화기를 쓴다 하여 효용성이 높았지요.

이러한 변화는 양면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인 등에 대한 홍타이지의 정책은 누르하치의 그것보다 온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따라서 이 시기 후금군/청군에서 한인의 비중이 크게 늘었습니다. 한인과 몽골인이 독립된 팔기조직으로 편성되어 기인(旗人)이 된 것은 분명히 만주 공동체 내에서 능동적 지위를 인정받은 것이었지요. 그러나 이들은 만주 기인에 비해 분명한 차별을 받았고, 그만큼 특권도 적었습니다. 몽한팔기가 독립된 조직으로 편성되기 이전에 귀순하여 만주팔기에 소속되었던 한인과 몽고인들은 계속해서 만주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만주인과 함께 오래 생활하여 이미 만주인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이후 청제국의 역사적 발전 방향에 대한 분명한 암시를 제공합니다. 청조는 중국적인 국가를 건설하려 하였고, 상당한 한화가 결과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지배세력과 특권세력은 어디까지나 만주인이었습니다. 청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팔기제에서 이러한 특징은 일찍부터 드러나고 있습니다.

누르하치의 니루 편성이 여진인들의 기존 사회구조를 보전하면서도 지역적 특성을 약화시켜 단일한 백성으로의 정체성을 부여하였다면, 홍타이지의 이러한 정책은 정치적인 면에서 여진인의 우위를 분명히 하면서도 몽고, 한인 등 타 공동체와의 협동을 더욱 원활하게 하였으며, 동시에 팔기를 통해 기존의 여진인에서 ‘만주인’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하였던 것입니다.

중국을 지배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대청이라는 국가의 성격과 그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팔기제에도 일정한 변화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만주인의 본거지인 요동이 빌 정도로 막대한 규모의 요동 주민이 중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성벽으로 둘러싸인 만성(滿城)이 중국 내의 주요 도시들에 건설되었습니다. 만주인의 배타적 거주지라 할 수 있는 만성은 각 지역의 군사 거점이자 행정 중심지였으며 청 왕조의 통치거점이었습니다. 중국 내지 19곳에 팔기주방(八旗駐防)이 만들어졌고, 이곳에 주둔할 팔기군은 만주인, 몽고인, 한인 모두에게서 차출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본래 소속과 무관하게 모두 주방팔기(駐防八旗)라 칭하게 되었다. 경사에 주둔한 팔기는 금려팔기(禁旅八旗)라 칭해졌습니다.

중앙에 주둔한 금려팔기는 수도방위와 궁성 호위를 담당하였고, 각 지방 요충지에 배치된 주방팔기는 평상시에는 치안을 담당하면서 지방관과 한인들을 감시하다가 반란이 일어났을 경우 진압을 담당하였습니다. 또한 전조(前朝)인 명의 병사들을 재조직하여 녹영군(綠營軍)을 만들었는데, 이는 팔기군과는 다른 명령체계를 갖춘 한인만의 군대였습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입관 이후 기인들에게 정기적으로 봉급을 지급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중원 장악으로 경제적 기반을 갖춘 청조가 명조의 방식을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순치 8년에는 기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가 실시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비록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내용상으로 명백히 기인들을 우대하기 위함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법적, 직업적으로 기인들은 한인에 비해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팔기제의 변질과 쇠퇴

청조의 근간인 팔기제도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며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재정적 문제였습니다. 청의 입관 이후 팔기의 규모는 계속해서 증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유지비용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지요. 청은 중국의 역대 왕조 중 가장 넓은 영역을 지배한 왕조였습니다. 따라서 국경선도 가장 넓었고 대규모 군사력을 유지해야 할 필요도 컸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동체를 지배하는 통합국가로서 청은 한인을 비롯한 내부의 불만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서도 한인 왕조보다 더 큰 군사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왕조 초기부터 국가재정에서 군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커서 때로는 70퍼센트에 이르기까지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중에서도 팔기제에 들어가는 비용은 더 컸는데, 이는 물론 기인들에게 여러 특권을 제공했기 때문이었지요.

만주 기인


팔기제도가 국가재정을 위협하는 가운데, 국가에서 제공하는 특권에도 불구하고 팔기 내부에서도 빈곤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팔기병의 수입은 고정되어 있었던 데 비해 자손의 증가로 팔기병이 부양해야 할 가족 수는 늘어난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이 수입은 물가의 변동과 상관없이 일정했기 때문에 기인들 간의 빈부격차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더해서, 입관 후 번진 사치풍조와 부채 역시 기인의 빈곤화에 일조하였고, 장교들의 부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당연히 군사력의 저하를 불러왔습니다.

청의 황제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아무리 많은 비용이 들어가고 효율적이지 못하다 하더라도 팔기제는 만주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국가의 근본이었기 때문에 결코 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옹정제와 건륭제는 부정부패를 처벌하면서 기인들의 빈곤화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조치들을 실행하였습니다. 또한 족보와 호구제 개혁을 통해 기인들의 만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한편 기인의 수를 제한하여 재정 부담을 경감하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한군팔기가 먼저 퇴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청 초기에 군사력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던 한군팔기는 만주팔기와 몽고팔기보다 낮은 지위를 감수해야 했을 뿐 아니라 삼번의 난 이래 불신의 대상이 되어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군사력 또한 형편없어 팔기에 있을 가치가 없다는 비판이 가중되었습니다. 이에 차츰 한군팔기의 방출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옹정제, 건륭제의 정책으로 팔기제는 청조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사력의 쇠퇴는 뚜렷했습니다. 19세기에 이르면 특권을 누리면서 나태하게 살지만 정작 무예는 보잘것없는 기인에 대한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팔기군의 장비도 이때쯤 가면 상당히 낙후된 것으로 보입니다. 백련교도의 봉기나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에서도 팔기군은 종종 무력한 모습을 노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팔기군이 전투부대로서의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위와 같은 모습을 보인 기인들도 있지만 동시에 여전히 아편전쟁 등에서 용감하게 싸운 기인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조의 안정적인 지배로 인해서 실전을 경험하기 어려운 지역의 기인들은 나태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였지만, 모든 지역의 기인들에 대해서 일괄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과거 금의 맹안모극제도 후기에 이르러 쇠퇴하였으나 몽골이 침입해 왔을때 최후까지 치열하게 항전하였던 이들도 분명 존재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청불전쟁 당시 청군의 모습

팔기군은 1901년의 군사개혁 때에도 감축되긴 했으나 살아남았고,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잔존 조직은 그 뒤로도 잠시동안 남아있었습니다.


 


덧글

  • 2011/03/19 19:42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Mr 스노우 2011/03/19 19:51 #

    1. 아무래도 시간이 흐를수록 초기의 조치가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나마 청나라가 이 정도로 오래 이 제도를 붙들고 있었다는게 더 놀라울 지경이지요.

    2. 그런 경우도 있었군요. 작년에 썼던 글이다보니 기억이 좀 가물가물합니다 ㅎㅎ 확실히 이후에도 항복했던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키고, 꽤 오래 갔던 한인의 저항들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 같습니다.

    3. 예전 글을 가지고 쓰다보니 이런 실수가...ㅠㅠ 수정했습니다.
  • hyjoon 2011/03/19 20:53 #

    아닌게 아니라 청나라 말기의 팔기군은 좀 안습이죠. 태평천국의 난 때 향용을 쓴 걸 보면........-_-
  • Mr 스노우 2011/03/19 21:31 #

    어느 나라나 말기는 다 비슷한 법이지만, 초기나 한창 기세올릴 18세기에 비하면 좀 그렇지요
  • 행인1 2011/03/19 21:12 #

    이사벨라 비숍 여사의 조선 여행기를 읽어보면 청일전쟁 대목에서 쇠락한 만주 팔기를 (상당히 부정적으로)묘사하는 부분이 있죠. 그런데 1901년 이후에도 팔기제도가 존속되었다니 놀랍군요.
  • Mr 스노우 2011/03/19 21:33 #

    이건 다른 이야기를 하는 책도 있어서 좀 조심스럽습니다. 신군 개혁때 팔기제를 폐지했다고 말하는 쪽도 있거든요. 그래도 종합해보니 전투부대로서는 거의 존재의미를 상실했지만 황제 주변에서 상징적인 의미로서는 존속했던 것 같습니다.
  • 111 2011/03/19 21:13 # 삭제

    두 제도의 성립하는 것과 망해가는 모양새가 비슷하네요..
  • Mr 스노우 2011/03/19 21:33 #

    그래서 더욱 흥미롭습니다.
  • oldman 2011/03/19 22:45 #

    잘 읽었습니다. 태평천국때 팔기군의 행동들을 보면서 '안습'이라는 단어 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더군요. 그래도 20세기 초까지 이 제도가 유지되었다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Mr 스노우 2011/03/19 22:59 #

    감사합니다 ^^ 확실히 공동체적 정체성이라는 측면이 있어서 국가적으로 지원한 것이 컸던 것 같습니다.
  • 크핫군 2011/03/20 09:17 #

    말도 부족했다고 들은거 같았는디;;;
  • Mr 스노우 2011/03/20 17:11 #

    사료값이 올랐나...(퍽)
  • 희야낭자 2013/11/04 17:37 #

    하도 옛날 게시글이긴 하지만 팔기군에 조사하던 차에 이런자료를 찾게 되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여담으로 좋은정보들이 많아 링크 걸고 갈꼐요^^
  • Mr 스노우 2013/11/04 19:46 #

    감사합니다. 자주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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