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안모극제와 팔기제 (3) History-한국, 동양사

비교

지난번 포스팅까지 금의 맹안모극제와 청의 팔기제의 간략한 특징과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둘을 비교해보면 두 제도가 비록 5백년 가까운 시간의 간극을 두고 있긴 하나 놀랄 만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맹안모극제와 팔기제 모두 기존에 존재하던 사회 조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데에서 강력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점은 이미 지적한 대로 흉노, 거란, 몽고 등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기 때문에 이 점만 놓고 본다면 특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두 제도가 비슷한 역사적 흐름을 거쳤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맹안모극제는 아골타가 여진 각 부를 통합하기 위해 사용하였으나, 이후 정복된 거란인, 한인 등이 그 편제 아래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요. 팔기제 역시 누르하치 휘하 부족에서 출발하여 몽고팔기, 한군팔기가 더해졌습니다.

쇠퇴의 과정은 날카로울 정도로 비슷합니다. 맹안모극호의 빈곤과 여진인들 간의 빈부격차의 증대, 그리고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한 군사력의 쇠퇴는 기인들의 빈곤과 빈부격차 문제, 군사력 쇠퇴 문제와 그대로 겹쳐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로서 맹안모극제와 팔기제는 각각 금, 청 두 왕조의 멸망과 그 마지막을 같이하였다는 것 역시 공통점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물음에 접하게 됩니다. 맹안모극제와 팔기제는 각기 금, 청 사회의 근간이라고 해도 좋은 제도지요. 두 제도의 역사는 그대로 두 국가의 역사와 맞물려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매우 비슷한 역사적 궤적을 보이고 있는 두 제도로 미루어 본다면, 대청제국은 결국 12세기 금 왕조의 연장이라고 해도 좋을까요? 더 심하게 표현한다면 금 왕조의 확대재생산에 그친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청조는 단명한 금보다 훨씬 긴 세월동안 중원을 안정적으로 지배하였을 뿐 아니라 화북 지배에 그친 금과 달리 전통시대 중국 왕조들 중 최대 판도를 자랑하였습니다. 이러한 면에는 청조의 사회에 금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특징이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청과 금 사이에는 앞서 말한 것처럼 5백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누르하치는 처음 국호를 ‘금’이라 칭하면서 12세기의 국가를 계승했음을 명백히 천명했지만,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여진’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만주’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12세기 아골타의 여진인들과 17세기 누르하치의 여진인, 홍타이지의 만주인 사이에는 분명한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원점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두 제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일견 커 보이는 공통점들 사이로 드문드문 다른 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100여년 남짓 지속한 금에 비해 청이 300년이 넘도록 살아남았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특징이 아닙다. 이는 요와 몽골같이 요동에서 발원해 중원을 지배한 다른 왕조들도 이루지 못한 위업이지요. 그리고 청조의 지배가 무너지는 것은 동아시아 전통사회가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서구열강이 가져온 충격을 경험하고 나서야 가능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청의 중국 지배는 한인 왕조까지 포함해서 그 어떤 전통 왕조들보다도 안정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장기지배를 가능하게 했던 만주인의 국가 장악력은 한인에 대한 확고한 지배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 중심에 팔기제가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홍타이지가 처음 창설한 한군팔기는 대단히 교묘하게 양면적인 제도였습니다. 즉 한인을 만주인의 지배질서 안으로 끌어들이면서도 분명한 차별을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양면적인 제도는 입관 이후에도 만주인의 기본적인 정책이 됩니다.

순치제의 섭정왕 도르곤은 북경에 입성한 후에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세금을 감면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청군은 양주와 가정에서 가혹하기 그지없는 학살극을 벌입니다. 또한 치발령과 만주복장을 강요하였고, 주방팔기, 문자옥(文字獄), 주접(住接) 등을 통해 한인을 감시하였습니다. 반면에 한인관리를 등용하였고, 비록 구호에 불과했으나 만한병용(滿漢倂用)의 이상을 내세우기도 하였지요.

물론 겉으로 보면 12세기 금의 정책도 크게 다를 것은 없습니다. 금도 화북을 점령할 때 무자비한 파괴와 약탈을 자행했으며, 이후 한인관료를 등용하고 빠르게 한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통치의 정교함이나 세련됨에 있어서는 청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은 중국식의 국가를 지향하면서도 만주인의 정체성을 끝까지 유지하였고, 여러 면에서 한화되면서도 한인들이 만주인의 복식을 따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청의 황제들은 뛰어난 정보망을 통해서 한족관리들끼리 서로 감시하면서 황제에 대한 충성경쟁을 유도해낼 수 있었습니다. 금의 황제들 역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여진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한화라는 거대한 흐름을 저지하는 데에는 결국 실패했지요.

건륭제

청의 성공의 배후에는 바로 황제 전제권의 확립이 있었습니다. 청의 황제권은 중국의 역대 왕조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편에 속하는 것이었거든요. 순치제에서 옹정제에 이르기까지 황제들은 팔기를 독자적으로 통솔하여 황권을 위협할 수 있는 친왕들의 세력을 꺾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옹정제는 팔기의 군정을 정돈하고 기인들을 중앙관료로 등용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팔기를 황제의 장악력 안에 넣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는 맹안모극제와의 큰 차이입니다. 앞서 살펴본대로 해릉왕은 중국화된 국가를 추구하면서 여진 귀족들의 권한을 제한하고 황제 독재권을 확립하려다가 결국에는 살해당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의 황제들이 팔기의 중앙집권화를 초기에 이루어냈던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금과 청 사이 세월의 간극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청은 금의 선례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청의 황제들은 금의 후계자임을 천명하면서도 금이 가졌던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홍타이지는 거듭해서 금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그들의 조상인 여진인들이 한인의 풍습에 젖어 여진의 법도를 버렸기 때문에 금이 몰락했다는 것이 그의 인식이었던 것이지요. 특이 만주어가 잊혀지는 것과 활쏘기 등 여진의 야성을 상징하는 풍습이 퇴락하는 것에 청 황제들은 금나라의 선례를 떠올리며 민감하게 반응하였습니다. 이들이 국가의 근본이라고 본 팔기제의 유지에 노력을 기울였던 것도 이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황제들의 인식과 만주 지배층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또한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금의 경우 말기에 이르면 여진인들은 중국인과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되었으나 만주 기인들의 경우 만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비교적 후대까지 갖고 있었으며, 한인과 대비되는 자신들의 우위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은 앞서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청의 황제들이 이들의 특권을 보장하고, 만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사실과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역시 청조의 통치가 금보다 한층 더 정교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결국 이들도 만주어가 사라져가는 것과, 팔기제가 쇠퇴하는 것을 끝내 저지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노력으로 적어도 그 쇠퇴가 찾아오는 것을 최대한 늦출 수 있었다고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중앙아시아 무슬림을 정벌하는 청군


또한 지배 영역의 차이도 두 국가의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나라는 모두 요동에서 출발한 통합국가입니다. 그러나 금은 요동과 화북을 지배한 데에 그친 반면 청은 요동과 중국 전체, 티베트와 중앙아시아까지 그 지배력을 확장하였습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면에도 잘 드러나서 금은 중원의 문화와 요동 문화의 융합이라면 청의 문화는 더 넓은 지배 영역에 따른 더 넓은 문화적 융합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금의 후계자를 자처했지만 청은 몽골제국을 계승한 면도 있습니다. 청은 단순한 통합국가를 넘어서 분열 이전의 몽골제국과 같은 세계제국의 하나로 파악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청의 팔기제는 몽고의 천호제, 그리고 이것이 확장된 울루스 체제와는 또 달랐습니다. 울루스 체제가 대제국을 통치하는 데에 편리하기는 하지만 중앙의 대칸에 대한 각 울루스들의 정치적 독자성이 강화되어 쉽게 분열하는 특징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청의 중앙집권적 팔기제는 이러한 약점도 극복하여 안정적 중앙 지배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제국이면서도 끝내 요동국가로서의 정체성은 지켜냈던 대청제국의 양면성은 바로 팔기제 그 자체의 성격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비교해본 바와 같이 팔기제와 맹안모극제는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도 많습니다. 역사적 세월의 차이, 그리고 그 세월을 통한 경험의 차이가 그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여진인과 거기서 한 단계 성장한 만주인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청조의 장기지배는 그들이 금을 세웠을때보다 얼마나 진일보했는지를 말해주는 지표인 셈이지요. 그러나 팔기제와 맹안모극제가 요동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한다는 점은 변함없는 공통점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사회구성은 중국의 한인 왕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요동, 막북의 유목, 수렵 공동체만의 특징입니다. 다른 요동 공동체에서도 농경이 중심이 된 국가들에서는 이런 특징은 초기에 사라졌습니다.

청의 황제들이 지적했던 대로 금은 빠르게 한화되어갔지만 끝내 요동국가로서의 마지막 상징인 맹안모극제는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청도 왕조의 마지막까지 팔기제를 유지했다는 사실은 공동체의 정체성으로서의 두 제도의 가치를 잘 보여줍니다. 맹안모극제가 흔들리면서 금의 여진사회체제가 급격히 붕괴해갔던 것, 팔기제의 쇠퇴를 청의 쇠퇴가 뒤따랐던 것 역시 이러한 측면의 반증이라 하겠습니다.



마치며

금의 맹안모극제와 청의 팔기제는 단순한 사회제도를 넘어서 그들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두 왕조의 황제들이 많은 비용을 들여서까지 두 제도를 유지하려고 했던 점은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금과 청은 각각 요동에서 일어나서 요동을 통합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서 중원까지 점령, 지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일어날 때에 기존의 체제를 이용하여 맹안모극제와 팔기제를 만들어 사회의 근간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제도는 요동 국가로서 이들의 정체성인 것이지요. 거기에 금이 청의 조상임을 감안한다면, 두 제도와 그 역사적 진행의 유사성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청은 여러 면에서 금보다 더 정교하고 발전된 통치술과 사회구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여진 공동체가 만주 공동체로 변모하면서 이룬 발전과 요, 금, 원 등 지난 요동 출신 왕조들의 역사에서 얻은 경험들이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은 금의 한계를 넘어서 광대한 영역을 안정적으로 지배하는 세계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원과 요동을 함께 지배한 통합국가인 금제국도, 세계제국을 지향한 대청제국도 근본적으로는 최후까지 요동국가로서의 성격을 유지하였습니다. 이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일종의 한계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청조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까지 팔기제를 유지하고, 끝까지 요동을 자신들의 발상지로 유지하려고 했던 노력을 생각해본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이들이 요동국가임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두 제도가 쇠퇴함에 따라 두 나라도 쇠퇴하였고, 결국 두 국가와 제도는 운명을 같이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참고문헌

1차사료

《金史》-兵志, 太祖本紀
《淸實錄》-太祖實錄



2차사료

국내저작 및 번역서:
Elliott, Mark C., Manchu Way: The Eight Banners and Ethnic Identity in Late Imperial China, 이훈, 김선민 공역, 『만주족의 청제국』, (푸른역사, 2009).
김한규, 『요동사』(문학과지성사, 2004).
김한규, 『천하국가』, (소나무, 2005).
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2010),
Hansen, Valerie, The Open Empire: A History of Chian to 1600, 신성곤 역, 『열린 제국: 중국, 고대-1600』, (까치, 2005).
李東馥, 『金代 女眞社會構成의 硏究』(東國大學校大學院. 1985).
이시바시 다카오., 홍성구 역, 『대청제국 1616-1799』, (휴머니스트, 2000).
이영옥, 「만주족 청나라의 한족 지배정책」, 『북방민족과 중원왕조의 민족인식』, (동북아역사재단, 2009).
임계순, 『淸史-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신서원, 2000).

해외저작:
Franke, Herbert,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907-136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Roth Li, Getrraude,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9, The Ching Dynasty to 18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special thanks to:
사료해석에 많은 도움 주신 첫걸음 님.


덧글

  • 앨런비 2011/03/21 19:52 #

    청의 한화에 관해서 보면 재밌는 것이 중국 학자들의 연구는 한화를 강조하고, 서양과 일본은 만주족 고유풍습의 유지를 강조하죠-_-; 개인적으론 아무리 중국사라지만 민족주의적 역사관때문에 이 부분에서 중국학자들의 주장은 좀 아닌듯 하더군요.
  • asianote 2011/03/21 20:15 #

    다만 청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건륭제의 천하관은 한족의 천하관에 더 가까워 보이더군요. 그런 측면에서라면 한화가 더 가까운 듯 합니다.
  • Mr 스노우 2011/03/21 21:47 #

    사실 이 글 참고문헌도 금사와 실록 제외하면 대부분 서양 학자들과 일본 학자들의 글...;;;

    실제로는 한화와 만주인 전통의 유지 어느쪽으로 잘라서 말하기는 어려울겁니다.(금의 한화에 대해서는 서양 학자들도 일치하는 것 같지만) 여러 다양한 측면으로 나타났겠지요. 어느쪽이 더 강했는가가 논란의 여지가 되겠지만...
  • 앨런비 2011/03/21 22:01 #

    여하튼 글좀 컨트를 씨 브이 해주시라능 ㅜ.ㅜ
    저도 솔직히 이렇게 징징대는거 민망하다능 ㅜ.ㅜ
  • Mr 스노우 2011/03/21 22:05 #

    요즘 너무 바빠가지고.... 죄송;;;

    아무튼 시간 되는대로 노력은 해보겠습니다요;;
  • 앨런비 2011/03/21 22:39 #

    사실 이렇게 징징대는 제가 더 죄송하다능.;
  • hyjoon 2011/03/21 20:10 #

    역사가 아무리 순환하는 것 같아 보여도, 그 속의 발전이 있다는 점이 또다른 흥미 아닐까 싶게 하는 여러가지 사례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 Mr 스노우 2011/03/21 21:48 #

    어떤 시대든지 완전히 정체된 시대는 없는 법이지요.
  • asianote 2011/03/21 20:19 #

    서구열강의 침략 없이 청이 무너졌다면 아마 다시 새로운 중국 내 한족 계열 왕조가 등장했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건 한족 민족주의에 신사층은 전혀 공감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태평천국운동 당시에 반만주를 외쳤음에도 한족 지식인이나 혹은 한족의 유력계층들이 적극적으로 운동에 가담하지 않은 것을 보면 민족주의는 외세라는 관념과 종족에 대한 대대적인 차별 없이는 성립하기 어려운 듯 합니다.
  • Mr 스노우 2011/03/21 21:50 #

    동아시아 전통의 화이관이라는게 아무래도 서구의 영향을 받은 근대 민족주의와는 차이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일부로 본문을 쓸때도 민족이나 만주'족'같은 표현은 되도록 피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예도 있지만, 이미 지배층에 편입된 이들은 공동체적 정체성보다도 계급적 유사성에 더 유대를 느끼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 2011/03/21 21:3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Mr 스노우 2011/03/21 21:55 #

    많은 분들이 청이 (조선보다도)인구가 적으면서도 거대한 중국을 굴복시킨 것을 놀랍게 생각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제한된 인적자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 부분으로는 미처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각 조직의 특색에 대해서는 확실히 그러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러한 조직의 장들이 봉건귀족 대신 관료로 편입되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실제 사례를 보면 청이 금보다 더 확실하게 이런 장치들을 마련했던 것 같습니다.
  • 첫걸음 2011/03/21 22:50 #

    이제야 보았습니다. 형이 해석을 잘하신 것을 저는 숟가락 얹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글 자체도 훌륭하게 쓰셨고요 ^^
  • Mr 스노우 2011/03/22 15:12 #

    감사합니다 ^^ 그래도 정말 큰 도움 받은건 사실이죠 ㅎㅎ
  • 행인1 2011/03/21 23:36 #

    팔기제는 그전의 다른 제도들과 유사하면서도 보다 발전되고 정교해진 모델이었군요. 청의 황제들도 금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줄 알았고 말입니다.
  • Mr 스노우 2011/03/22 15:12 #

    확실히 시대가 흐르면서 축적된 경험이라는건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유사역사아웃

원시림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