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 대한 경외심 homo religiosus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인간은 숲과 나무라는 존재에 대해 일종의 근원적인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곳곳에 있는 신목이나 나무정령같은 전설 등을 보면 이러한 관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의 나무'가 등장하듯이, 이것은 매우 보편적인 관념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개간이 되지 않은 울창한 숲은 문명 초기의 인간에게 미지의 장소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잘 모르는 것은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숲에서 인간이 맞이할 수 있는 위험은 단지 상상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었으니까요. 미지에 대한 공포는 인간의 마음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고대 지중해 문명은 돌의 문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들에게도 숲에 대한 경외심은 존재했습니다. 가령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 여신은 숲과 들짐승의 수호신입니다. 신화에서는 제우스의 딸이지만 실제로는 미노스 문명 시기부터 소아시아 전역에 퍼져있던 상당히 오래된 신앙이었습니다. 여신의 거주지가 올림포스가 아니라 숲이라는 것은 이 신이 원시의 신격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아르테미스 신앙은 이러한 원시의 상태에 대한 인간의 공포에서 유래합니다. 깊은 숲속에서 힘없이 죽음을 당하는 인간의 무력함이 이 여신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로마 역사의 초창기에 이탈리아 역시 숲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시기 숲에 대한 심성을 잘 보여주는 전설이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서 소개한 네미 숲의 사제-왕의 전설일 것입니다. 네미의 성소에서 나무를 지키는 '숲의 왕'은 디아나 여신의 사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디아나는 그리스의 아르테미스에 해당하는 신격입니다. 로마인과 그리스인이 여기서 비슷한 심성을 공유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베르길리우스는 로마인들은 '숲의 사람들'이었다고 노래했습니다. 로마의 전설적인 왕인 누마 폼필리우스 역시 아내인 숲의 님프에게 지혜를 받았다고 이야기됩니다.

그러나 전설과 역사가 혼재된 시기가 끝나고 본격적인 역사 시대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크게 변합니다. 로마 공화정이 팽창하면서 로마 주변의 숲은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숲이 울창했던 지역에는 도시가 들어섰고, 벌채된 삼림지대를 농토가 대신했습니다. 그 결과 제정이 시작될 무렵 이탈리아의 삼림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으며, 유럽과 북아프리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숲의 사람들'은 로마인들이 야만인으로 여겼던 켈트인과 게르만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숲에 살면서 숲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세가 시작되면서 유럽 문명은 다시 '나무 문명'으로 이행하게 됩니다.

중세 초기에 아직까지 서유럽은 원시림으로 뒤덮인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세인들에게 숲은 양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삼림지대는 여행을 방해하는 요소이면서 온갖 위험으로 가득찬 공포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숲은 없어서는 안될 에너지와 식량 공급원이었으며 신비한 생명력으로 가득한 생명의 원천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중세 초기의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이러한 자연상태도 곧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11세기 이후부터 중세인들은 대대적인 개간을 시작합니다. 발달된 농기구와 새로운 농법으로 무장한 중세인들은 고대 로마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숲을 농토로 바꾸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중세 초기의 랜드마크나 다름없었던 원시림들은 대부분 사라지는 운명에 처했습니다. 14세기에 이르면 한때 프랑스의 6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던 숲이 20퍼센트로 감소합니다.

이는 당연히 사람들이 유구한 세월에 걸쳐 형성해온 숲에 대한 경외심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행동이었지요. 사회의 구조적 성장과 경제 팽창의 물결에 따라 숲을 파괴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깊숙이 자리잡은 심성은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숲은 생명을 상징했습니다. 그 생명의 상징은 스스로의 손으로 파괴한다는 것이 유쾌한 경험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미 성장하기 시작한 사회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는 일. 사람들은 그 생명의 상징을 다른 방식으로 보존하기로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유럽 농민들의 축제에 등장하는 오월제 기둥(may pole)입니다.
오월제 기둥이야말로 뿌리깊은 나무와 나무정령 숭배 관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월제 기둥에 쓰이는 나무는 가장 싱싱한 나무입니다. 사람들은 이 나무를 죽은 나무가 아니라 숲에서 막 옮겨온 살아있는 나무, 즉 생명력이 넘치는 나무라는 상징성을 부여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데메테르 제전과 마찬가지로 중세 유럽의 오월제 기둥은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인 5월에 숲이 주는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는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유럽인들은 숲에 대한 경외심을, 자신들이 경외하는 또다른 장소에도 옮겨서 보존했습니다.
고딕 성당 내부의 높이 치솟은 기둥들과 곡선을 그리는 아치, 신비로운 분위기는 이전에 유럽인들이 숲에서 느끼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그로테스크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생명력'의 원초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 고딕양식인 것입니다.
이러한 화려한 장식들도 울창한 숲의 나뭇잎이나 덩굴을 연상시키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고딕양식은 후대에 야만적이라는 편견에 싸인 비판을 받았지만, 그것은 뒤집어보면 그만큼 인간 심성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면이 있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19세기 로맨티시즘의 시대에 도시와 대비되는 자연이 다시 주목을 받았을 때, 중세와 고딕이 재평가를 받은 것도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숲에 대한 경외심은 근대와 현대에도 완전히 죽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각종 매체나 문화에서 숲은 신비로운 곳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공포의 근원으로 등장하는 것도 변함이 없습니다.
가령 팀 버튼의 영화 <슬리피 할로우>에서, 목없는 기수가 현세로 나오는 통로는 바로 '죽음의 나무'입니다. 혁명의 시대에 '자유의 나무'와 같은 상징도 있고, 오월제 기둥의 전통도 근대까지 계속 이어졌지요.

그러나 물론 현대에 이런 행위는 문화적 컨텐츠나 전통으로 지속될뿐, 고대인이나 중세인이 품고 있던 종교적 외경심은 많이 약해진게 사실입니다. 신화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만큼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이라고 해야겠지요. 현대에도 지속되고 있는 삼림의 상실과 그에 따른 여러 환경재앙들을 생각해볼때, 과거의 관념을 어느 정도 되살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참고

유재원, <그리스 신화의 세계>, 현대문학, 1999.
사카이 다케시, 이경덕 역, <고딕, 불멸의 아름다움>, 다른세상, 2006.
자크 르 고프, 유희수 역, <서양중세문명>, 문학과지성사, 1992.
제임스 프레이저, 박규태 역, <황금가지>, 을유문화사, 2005.
존 펄린, 송명규 역, <숲의 서사시>, 따님, 2010.

덧글

  • 로자노프 2011/06/03 18:31 #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참고로 저 숲의 감소는 서유럽에서 동물들의 광범위한 멸종, 혹은 서식지 축소로 이어집니다. 오록스는 점차 서유럽에서 사라져 결국 마지막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실 소유 숲에 극 소수가 살아남다 멸종하고, 유럽의 야생 당나귀도 비슷한 길을 걷게 됩니다. 서식지가 가장 넓었던 유럽 들소는 이런 숲의 벌채로 점점 서식지가 줄어들어 오록스 최후의 서식지로 그 서식지 규모가 줄어들고요. 그 외에도 서식지가 축소된 동물들은 수도 없고요.
  • Mr 스노우 2011/06/04 00:47 #

    인류문명이 생태계에 가할 수밖에 없는 폭력인가 생각해보면 참 씁쓸합니다.
  • hyjoon 2011/06/03 19:03 #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서도 숲은 신성하면서 힘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는데, 숲의 나무들이 고대 언어로 말하는 것으로 묘사해 놓는 등 숲에 대한 인식을 잘 묘사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 Mr 스노우 2011/06/04 00:46 #

    말 그대로 신화적 심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묘사라고 해야겠지요. 숲이 사라지면서 신화시대도 막을 내렸으니...
  • 슈타인호프 2011/06/03 19:35 #

    잘 보았습니다. 숲의 파괴는 정말...인류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럽 뿐 아니라 아시아와 북미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아프리카와 남미 동남아에서는 현재진행형이니까요.
  • Mr 스노우 2011/06/04 00:46 #

    그런 면을 생각해보면 문명의 진보라는 것에 대해서 참 다시 생각해보게 되지요. 그래도 아직은 숲을 구할 길이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
  • 들꽃향기 2011/06/03 23:48 #

    1. 잘 보았습니다. ^^ 중세 성당의 양식에서 숲의 잔영이라는 이미지는 적절한 지적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급하신 메이폴의 잔재는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기억으로 계속 잔존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웃음)

    2. "숲은 없어서는 안될 에너지와 식량 공급원이었으며" -> 그러고보니 에드워드 톰슨 역시 공유지와 숲은 얼핏 보기에는 쓸모없어보이지만, 하층민에게는 여러 보충-보조식품의 공급원이었다는 지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 Mr 스노우 2011/06/04 00:45 #

    감사합니다 ^^ 사실은 메이폴은 아직도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종종 기념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중세 재현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순서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아직도 5월의 축제를 하면서 이 전통을 지키는 경우가 있는 것 같더군요.
  • shaind 2011/06/04 16:41 #

    숲에 관한 인간의 근원적 경외심이라고 하면 역시 이걸 빼놓을 수 없죠. http://shaind.egloos.com/5462602
  • Mr 스노우 2011/06/04 20:01 #

    잘 읽었습니다 ^^ 학부때 종교학 수업을 들으면서 길가메쉬 서사시를 가지고 발표했던게 생각나네요. 신화적 심성의 원형이 왠만한건 다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ㅎㅎ 말씀하신 훔바바와의 대결에서 보이는 금지된 숲의 신목 모티브는 더욱 그렇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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