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봐야 할 곳은 당연히 둘째날 갔다가 휴관이라 돌아온 산탄젤로 요새지요. 자칫 기차 놓칠까봐 손목시계를 자꾸 체크하면서 성까지 걸어갔습니다.
교황의 요새였던만큼 바티칸에서는 매우 가깝습니다. 본래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였지요.
안으로 들어와서 줄을 섰습니다. 이 요새를 밖에서만 보고 가는 경우도 많지만, 그래도 고대부터 중세,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온갖 역사적 격변의 증인인 이 요새를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들어가면 바로 원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지었던 영묘의 모형이 있습니다. 403년에 호노리우스 황제는 로마의 방어시설을 구축하면서 이 영묘도 그 방어 시스템의 일부로 편입하였고, 그때부터 요새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사로가 산탄젤로 요새에서 고대의 흔적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 길은 황제 일가의 무덤이 있었던 곳으로 이어집니다.
어이쿠 어디서 많이 모던 문장이군요 ㅎㅎㅎ 지난번에 포스팅 하나 썼던 크리스토그람이지요. 16세기 이후 이 문장을 주로 사용하였던 단체의 사제들은 동방을(+전 세계를) 향해 떠났고, 역사는 돌고돌아서 5세기 후에 이 문장을 상징으로 쓰는 학교의 한 학생은 동방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이 앞에 섰습니다 네...
천사의 마당. 이 일대는 교황의 아파트입니다. 산탄젤로 요새가 거대하다고는 해도 결국 무덤이었던지라, 공간은 협소한 편이었습니다. 그것을 방어기능과 교황이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기능까지 겸하도록 설계하는 것은 르네상스 건축가들의 몫이었지요.
의인화된 죽음의 모습. 전설에 따르면, 대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시대에 로마에 전염병이 닥쳤고, 교황은 전염병을 막아달라는 기도행렬을 지시합니다. 그때 교황은 하드리아누스 영묘 위에 나타난 대천사 미카엘이 칼을 칼집에 넣는 환상을 보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이름이 천사의 성을 뜻하는 산탄젤로 요새입니다.
요새에서 내려다본 테베레 강. 이 영묘가 요새로서 탁월했던 이유는 오스티아에서 로마까지 오는 테베레 강의 물길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명한 천사의 다리를 요새에서 내려다봤습니다. 둘째날에도 이 다리를 건너갔는데 말이지요. 그날은 요새에 못 들어갔지만.
교황의 산책로. 피신처라지만 장식이나 인테리어는 매우 격조있고 화려합니다. 이 요새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를 뒤흔들어놓았던 양대 사건을 목격했던 역사의 증인입니다. 그때마다 교황은 이리로 피신해야 했지요.
1494년 프랑스의 왕 샤를 8세는 이탈리아를 침공합니다. 도시국가들과 교황령으로 나뉘어있던 이탈리아 국가들에게 통일된 군주국의 힘을 보여준 사건이었지요. 이때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이리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물론 알렉산데르 6세와 체사레 보르자의 정치력으로 이후 상황은 바뀌었지만.
아무튼 샤를 8세의 침공은 이탈리아인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이후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정치는 상당히 혼란스러워졌을 뿐 아니라, 이후 이탈리아가 유럽 강대국들이 충돌하는 무대로 전락하는 신호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527년에 이탈리아는 그보다 몇배는 더 충격적인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때는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와 신성로마제국-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왕조전쟁을 한창 벌이고 있을 때였지요. 1527년 5월 6일, 카를 5세의 제국군이 로마를 무참하게 약탈했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사실상 끝장나는 순간이었고,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 요새로 몸을 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의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 달의 포위 끝에 요새는 함락되었고, 교황은 황제의 포로 신세가 됩니다.
유명한 청동 천사상. 18세기의 작품입니다. 미카엘 대천사가 칼을 칼집에 넣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습니다.
여기가 군사용 '요새'라는 분위기가 물씬 나게 해주는 투석기와 석제 포탄들.
요새의 방벽. 본래 영묘에는 당연히 없었습니다. 영묘가 요새로 기능하게 된 후에 영묘를 둘러싸듯이 건설된 것이지요. 그래서 영묘에서 방벽으로 나가려면 철제 다리를 통해서 가게 됩니다.
방벽과 저 끝에 망루가 보입니다. 생각보다 상당히 거대한 구조물들입니다. 시간이 좀더 많았다면 더 자세히 둘러봤을 텐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교황 아파트 내부는 사진촬영 금지로 그곳의 화려한 시설과 유물들을 전해드릴 수 없는 점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천사의 다리에서 바라본 산탄젤로 요새의 모습. 이렇게 해서 로마 일정은 모두 끝났습니다. 못본 것도 많고, 더 자세히 보지 못한 점도 아쉽기만 합니다. 그래도 한정된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이, 여유있게 둘러보려고 노력했으니 후회는 없습니다.(대신 체력이 바닥남 -_- 이때쯤 되면 걸어가는 것 자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었다는...;;)
트레비 분수에 동전 던졌으니 조만간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굳게 믿으면서 발걸음을 돌립니다.










1494년 프랑스의 왕 샤를 8세는 이탈리아를 침공합니다. 도시국가들과 교황령으로 나뉘어있던 이탈리아 국가들에게 통일된 군주국의 힘을 보여준 사건이었지요. 이때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이리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물론 알렉산데르 6세와 체사레 보르자의 정치력으로 이후 상황은 바뀌었지만.
아무튼 샤를 8세의 침공은 이탈리아인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이후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정치는 상당히 혼란스러워졌을 뿐 아니라, 이후 이탈리아가 유럽 강대국들이 충돌하는 무대로 전락하는 신호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527년에 이탈리아는 그보다 몇배는 더 충격적인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때는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와 신성로마제국-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왕조전쟁을 한창 벌이고 있을 때였지요. 1527년 5월 6일, 카를 5세의 제국군이 로마를 무참하게 약탈했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사실상 끝장나는 순간이었고,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 요새로 몸을 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의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 달의 포위 끝에 요새는 함락되었고, 교황은 황제의 포로 신세가 됩니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 던졌으니 조만간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굳게 믿으면서 발걸음을 돌립니다.
덧글
유사시에 어떻게 차단을 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통로 자체가 방어시설을 갖춘 성벽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