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잉글랜드 투쟁사 (24)-새로운 폭풍 History-근동, 서양사

전유럽적 위기

제임스 5세의 섭정기와 친정 전반기는 플로든 이후의 국가적 위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다행히 어린 국왕을 대신한 섭정 대신들이 어느정도 국가를 안정시켰고, 제임스 5세도 국왕의 권위 회복이라는 목표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그러나 통치 후반기는 또다른 위기의 시기였다. 이번 위기는 스코틀랜드뿐 아니라 유럽 전역을 폭풍으로 몰아넣었다.

1517년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비르텐베르크에서 95개조 반박문을 개시한 이래, 천년간 유럽을 지배해온 중세적 질서에는 이제 명백한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물결은 멀지 않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까지 밀어닥쳤다. 1528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첫번째 프로테스탄트 순교자가 나타났다. 그는 비르텐베르크와 파리에서 공부한 신학자이자 제임스 2세의 증손자인 패트릭 해밀턴으로 '루터와 사악한 이단의 가르침을 퍼뜨렸다'는 죄목으로 화형주에서 불태워졌다. 이어서 1530년대에는 10명의 프로테스탄트가 화형을 당했다.

잉글랜드에서는 마침내 1534년에 헨리 8세가 로마 교회와의 분리를 선언하였고, 스스로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헨리 8세가 처해있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스코틀랜드 왕국은 프랑스와 혼인으로 굳게 맺어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536년에는 '은총의 순례'로 알려진 대규모 반란이 터져 그를 괴롭혔다.

이런 상황 하에서 헨리 8세의 당면과제는 스코틀랜드를 어떻게 해서든 신성로마제국-프랑스 동맹에서 떼어놓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헨리 8세는 제임스 5세에게 자기처럼 로마 교회에서 떨어져나오라고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교황이랑 놀지 마. 너도 나처럼 국교회의 수장이 되면 좋잖냐."

하지만 제임스 5세는 스코틀랜드 국교회의 수장이라는 타이틀보다는 프랑스의 왕과 교황의 지원(+돈)을 받을 수 있는 현재의 상황이 더 만족스러웠다.

조카가 말을 듣지 않자, 헨리 8세는 자신이 비장의 카드라고 생각한 무기를 꺼냈다. 바로 입배틀토론이었다. 헨리는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은 적도 있었고, 신학에 대한 논문도 쓴 적이 있었다. 따라서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하면 이러한 신학적 지식에다가 자신의 탁월한 언변으로 제임스 5세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헨리는 제임스 5세에게 자신의 북부 잉글랜드 순회때 요크에서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전갈을 보냈다. 이 당황스러운 요청에 제임스 5세는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지만 물론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헨리 8세는 제임스가 올거라고 믿고 요크에서 죽치고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제임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즉 바람맞았다

"이 조카놈 시키가....."


"아놔.. 내가 언제 간다고 그랬남요?"

그러나 그답지 않게 헨리 8세는 흥분하지 않았다. 대신 이듬해 2월, 노련한 정치가답게 그는 제임스 5세에게 편지를 보내서  "너그러운 삼촌으로서 너님이 오지 않은거 기꺼이 용서해 주마" 라는 요지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유럽의 상황이 변하기를 기다렸다.

그 해가 가기도 전에 상황은 변했다. 아무래도 숙적인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가 오래 동맹을 유지하기는 무리였다. 1542년 여름에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프랑스가 전쟁으로 바빠지자, 헨리 8세는 드디어 괘씸한 조카를 손봐줄 기회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솔웨이 모스 전투

7월 말, 헨리 8세는 북부 잉글랜드를 전시동원 체제로 전환시켰다. 제임스 5세도 이에 맞서 국경지대의 방비를 강화하였다. 일련의 소규모 습격과 탐색전 후에 잉글랜드쪽에서 로버트 보워 경이 3천여 병력을 이끌고 침공해 들어갔다. 그러나 8월 말, 제임스 5세에 의해 국경지대 방어를 맡은 4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은 2천여 병력을 이끌고 해든 리그 전투에서 이들을 패퇴시켰다.

그러나 초전에서 패배를 당했어도 헨리 8세의 계획에는 변함이 없었다. 헨리 8세는 노퍽 공작을 지휘관으로 하는 본격적인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10월 22일, 2만여 명에 달하는 잉글랜드군은 버윅-어폰-트위드를 출발했다. 숫적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났기 때문에 헌틀리 백작도 이번에도 맞아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만 대군을 이끌고 있는지라 노퍽 공작도 물자가 부족하여 스코틀랜드 내로 깊숙이 들어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제임스 5세는 당면한 위험에 맞서기 위해 대대적인 동원령을 내렸다. 그럭저럭 노퍽 공작의 군대와 맞설만한 병력이 모이자 국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그러나 양군의 충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자 부족과 보급 문제가 심각해져서 잉글랜드군은 이미 버윅으로 퇴각한 뒤였다. 그렇다고 잉글랜드 영토로 쳐 내려가기에는 스코틀랜드군의 보급 사정도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제임스 5세도 에든버러로 돌아갔다.

이제 양군의 군대만 국경지대에서 노려보고 있는 가운데, 제임스 5세는 새로운 작전을 짜냈다. 그것은 상당히 기발한 계획이었다. 제임스 5세는 우선 남동쪽을 공격하려는 모습을 보여 잉글랜드군을 혼란시켰다. 그리고 동시에 서쪽으로 공격해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이 공격 후에는 또다른 분견대와 몇몇 주교들이 트위드 강을 건너 잉글랜드 영토로 진입한 후에 헨리 8세에 대한 교황의 파문장을 발표한다는 것이 계획의 핵심이었다.

기발하고 멋진 작전이었지만, 이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잉글랜드 국경지대를 맡고 있던 토머스 워튼 경은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스코틀랜드군의 계획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2천여 명의 병력을 신속하게 끌어모았다.

11월 24일, 맥스웰 경 지휘 하에 진군하던 2만여 스코틀랜드군은 솔웨이 모스의 진흙탕에서 3천 명 가량의 잉글랜드군과 맞닥뜨렸다. 스코틀랜드군이 좋지 않은 지형에서 대열을 재정비하려고 애쓰는 사이 잉글랜드 기병이 측면으로 돌격해왔다.
솔웨이 모스 전투

잉글랜드군은 비롯 숫적으로는 크게 열세였으나, 3백명 가량의 경기병을 보유하고 있었고, 기동이 어려운 지형에 있었던 스코틀랜드군에 대해 큰 위력을 발휘했다. 이어진 싸움은 금방 끝나버렸다. 상황이 가망없다는 것을 깨닫자 스코틀랜드군은 줄줄이 항복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주요 귀족들도 죄다 포로가 되었다. 양군 다 사상자도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입장에서는 치욕적인 패전이었다. 제임스 5세는 낙담하여 에든버러로 귀환하였다. 비록 플로든과 같이 참담한 패전은 아니었고, 피해도 크지 않았지만 그가 세운 작전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국왕은 에든버러에서 잉글랜드군이 침공해 올 경우를 대비해서 국경지대의 방비를 강화하는 몇몇 지시를 내리고 왕비와 함께 린리스고로 향했다.



제임스 5세의 퇴장

이때 이미 제임스 5세는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나이는 아직 30세에 불과했고, 건장한 체구의 그였지만 병세는 심각했다. 아마도 이질이나 콜레라에서 걸렸을 가능성이 있어보인다. 병석에 누워있던 12월 8일에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은 후사를 이을 아들을 원하던 국왕의 기운을 북돋우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1542년 12월 14일, 제임스 5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태어난지 며칠 되지도 않은 그의 딸 메리 스튜어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스코틀랜드의 역대 국왕들 중에서 제임스 5세는 특별히 인기있는 군주는 아니다. 그의 부왕처럼 패전으로 인생을 마무리했으며(부왕이 당했던 것만큼 엄청난 패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왕처럼 매력적인 군주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임스 5세가 받고 있는 평가는 다소 불공평한 면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악평은 대부분 그를 거의 적그리스도처럼 취급한 이후 개신교 사가들의 편견에서 기인한 면이 크다. 그러나 제임스 5세는 친정을 시작한 뒤에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던 새아버지를 제압하고, 플로든 이후 흔들리던 왕실의 힘을 안정시킨 인물이다. 결코 무능한 국왕은 아니었다. 마지막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결과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까지 스코틀랜드가 겪었던 패전들보다 특별히 더 큰 패전은 아니었다.

더욱이 숨을 거두던 때에도 그는 아직 젊은 나이였고, 헨리 8세는 노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일 제임스 5세가 오래 살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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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위장효과 2012/02/08 17:54 # 답글

    여담인데, 오스프리의 자료들을 모아보니 고 앵거스 맥브라이드 옹의 그림체 변화도 상당하더군요. 70년대 보면 인물들 자세나 표정등에서 어색한 점이 많은데 최근 것들은 정말 전투 상황을 제대로 표현한다고나 할까요^^.
  • Mr 스노우 2012/02/08 18:59 #

    돌아가신게 참 아쉽지요. 더 오래 사셨다면 더 좋은 작품들을 많이 내주셨을텐데..
  • 로자노프 2012/02/08 18:17 # 답글

    이제 파란만장한 메리의 이야기가 시작되는군요.
  • Mr 스노우 2012/02/08 18:59 #

    바람 잘날 없지요;;;
  • 2012/02/08 18:2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Mr 스노우 2012/02/08 20:57 #

    그래도 이 편도 나름 힘들여 썼는데 말이죠..ㅠㅠ
    하지만 쓰면서 제임스 5세와 헨리 8세가 툭탁거리는것도 재미있는 스토리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 크핫군 2012/02/08 21:13 # 답글

    너그러운 삼촌이 마당에서 부하들 이끌고 캠핑하네;;;
  • Mr 스노우 2012/02/08 21:33 #

    알흠다운 가족사.txt
  • 닉네임 2012/02/08 21:28 # 삭제 답글

    정말 재미있네요 우연히 보게 됬는데 그대로 쭉 보고말았어요
  • Mr 스노우 2012/02/08 21:33 #

    어이쿠 감사합니다 ㅎㅎㅎ
  • 행인1 2012/02/08 23:50 # 답글

    헨리8세가 때가 오기를 기다릴 줄도 알았다니 놀랍습니다.(그런데 가정사는 왜...?)
  • Mr 스노우 2012/02/08 23:59 #

    사적으로는 삼촌과 조카지만 둘이 한번 툭탁거리면 그대로 양국간의 전쟁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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