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잉글랜드 투쟁사 (30)-내전의 시대 ㄴ스코틀랜드-잉글랜드 투쟁사

찰스 1세와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새 왕 찰스 1세는 사실 나면서부터 왕이 될 운명은 아니었다. 그에게 왕위 계승권이 돌아갔던 것은 그의 형 헨리의 사망 때문이었다. 그는 죽은 형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헨리가 활달하고 운동과 무예에 관심이 많았다면, 찰스는 다소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었으며 세련되었고, 학문과 예술을 좋아하였다.

찰스 1세


그러나 찰스 1세에게 군주로서의 자의식은 분명했다. 그는 강력한 왕권에 대한 생각을 부왕으로부터 확고히 물려받았고, 이를 고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국내의 분쟁을 조절하거나 유럽의 평화를 지켜나가는 등에 있어서 부왕의 통치술은 물려받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자신의 고향 스코틀랜드를 너무 몰랐다는 점이었다.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로 왔던 것은 찰스가 3살때 일이었다. 그리고 1617년에 제임스가 고향을 찾았을 때, 찰스는 그 일원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의 복잡한 정치환경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찰스 1세는 반대로 스코틀랜드의 상황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

따라서 문제의 근원은 잉글랜드가 아니라 국왕의 고향 스코틀랜드였다. 그는 1630년대 소위 '개인 통치기(Personal Rule)' 11년간 의회없이도 무리없이 잉글랜드를 통치해 보였다. 그러나 1630년대에 스코틀랜드에서는 불만이 가중되고 있었다. 유럽대륙에서의 활동과 기타 일들을 위해 국왕은 스코틀랜드에 부과하는 세금을 점차 늘려왔다. 그래도 이것까지는 참을 만 했다. 결정타를 날린 것은 찰스 1세의 종교정책이었다. 그것은 명백히 스코틀랜드 장로교/성공회(제임스 1세가 일시적으로나마 결합시키는데 성공했던)를 영국 국교회에 통합하려는 시도로 보였기 때문이었다.(물론 잉글랜드 내에서도 국왕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으나, 그것은 이 글의 직접적인 주제가 아니므로 넘어가고자 한다)

1636년, 국왕은 교회법(Code of Canons)을 발표해였다. 이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윌리엄 로드 대주교가 이끄는 영국 국교회의 보다 가톨릭적 전례를 부과하려는 시도였다. 이 법은 교회 문제에 있어서 국왕의 우월성을 전제하고 있었다. 이어서 이듬해에 발표된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의 적용이 전국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윌리엄 로드 대주교


사실 이 기도서는 스코틀랜드 주교들의 심사숙고가 반영되어 내용만 봐서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국왕의 독단으로 그것이 강요되었다는 것이 스코틀랜드인들을 분노하게 했다. 이것이 스코틀랜드인들의 오래 묵은 반잉글랜드 감정에 불을 질렀다. 스코틀랜드는 순식간에 반란의 불길에 휩싸였으며, 되살아난 스코틀랜드 국민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스코틀랜드 출신 '잉글랜드 국왕'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1638년 2월, 스코틀랜드의 귀족과 영주들은 국민서약(National Covenant)에 서명하였다. 이른바 주교전쟁(Bishop's War)의 시작이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반란을 별로 염려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반란을 진압할 완벽한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해군을 동원해서 스코틀랜드를 봉쇄하고, 스코틀랜드 내의 가톨릭 파의 지지를 불러일으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이 진행되는 와중에 잉글랜드의 전군을 소집하여 곧장 에든버러를 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의 완벽한 계획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돈이었다.




주교전쟁

지금까지 찰스 1세는 의회 없이도 정국을 그런대로 운영해 왔으나, 의회는 잉글랜드에서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그리고 잉글랜드는 국왕의 전쟁에 전혀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외국 침략자에 대한 국민감정이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잉글랜드인들은 오히려 스코틀랜드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결국 국왕은 북부 잉글랜드의 민병대로 구성된 2만여 군대를 간신히 모으는데 성공했으나, 병력의 질은 형편없었고 무장 상태도 열악했다. 국왕은 상황을 타개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해밀턴 후작은 북동부로 파견되어 왕당파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하였고, 안트림 백작은 북아일랜드에서,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국왕 전제정치의 상징과도 같았던 스트래퍼드 백작 역시 더블린에서 병력을 모아 스코틀랜드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모두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차 주교전쟁은 5주만에 끝났다. 무력충돌은 딱 한 차례 있었으며 그나마도 결과가 좋지 못했다. 결국 국왕은 6월 18일, '버윅 평화협정'을 맺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정전 상태였다.

국왕은 1640년 별 도리없이 12년만에 의회를 재소집했다. 그러나 의회는 재정지원을 거부하였고, 국왕은 자의적인 통치를 비난하여 3주 만에 해산되었다. 이것이 단기의회(Short Parliament)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재정지원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재개된 2차 주교전쟁은 1차보다 더 짧았다.

1640년 8월 20일, 스코틀랜드군은 콜드스트림에서 트위드강을 건너 잉글랜드군을 몰아붙였다. 28일, 뉴번에서 제법 그럴듯한 싸움이 벌어졌으나 잉글랜드군은 참패했다. 이것으로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10월 26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으며, 국왕은 스코틀랜드에게 850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물론 돈이 없는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스코틀랜드에 대한 배상금 마련을 위해 다시 의회가 소집되었는데 이것이 1640년부터 1653년까지 지속된 장기의회(Long Parliament)다. 의회는 국왕에 대해 전면적인 도전에 나섰다. 국왕의 독단적인 통치를 공격한 '대항의서(Grand Remonstrance)'가 채택되었고, 로드 대주교가 투옥되고 스트래퍼드 백작이 처형되는 등 의회가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다. 또한 3년마다 의회를 소집하게 하고 선박세를 폐지하고 의회동의에 의한 과세, 국왕특설재판소의 폐지 등을 요구하였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군의 침공을 두려워하여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교전쟁이 남긴 진정한 유산은 이때까지 유지되어오던 브리튼 섬의 안정적인 정치구도가 완전히 깨어졌다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반란은 1641년 10월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가톨릭 교도의 반란의 전조였다.

아일랜드에서 가톨릭 교도의 반란이 터지자, 하원의원들은 국왕이 그들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과격파 의원 존 핌이 하원에서 국왕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국왕은 군대를 이끌고 의회에 침입하여 반대파 의원 5명을 체포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이것이 1차 잉글랜드 내전에 본격적인 불을 붙였다.



내전

찰스 1세는 왕당파 세력이 우세한 북부로 피신하여 군대를 모았다. 의회는 중앙정부를 장악하였고 마침내 1642년 양자 간에 무력충돌이 시작되었다. 거듭 말하지만, 잉글랜드 내전은 본 연재글의 포커스가 아닌데다가, 이미 월광토끼님의 상세한 연재글이 있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간단히 요약하는 선에서 넘어가고자 한다.

첫 접전인 에지힐 전투는 양편이 승패를 가리지 못한 상태에서 끝났으나, 국왕은 승리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도 전세는 계속해서 국왕군에게 유리했다. 의회군은 점차 밀리기 시작했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전쟁에 대한 지지가 점점 떨어졌다.


그러나 1643년 뉴베리에서 벌어진 혈투에서 의회군 창병대는 국왕군의 공격을 버텨내는데 성공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전세는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군의 가세로 의회군은 열세를 만회하고 부대를 재편할 수 있었다. 재편된 의회군은 1644년 7월 스코틀랜드군의 지원을 받아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국왕군에게 참패를 안겼다. 이듬해인 1645년 6월 14일, 네이스비에서 최대의 결전이 벌어졌고, 토머스 페어팩스 경과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신형군(New Model Army)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네이스비 전투는 1차 내전의 분수령이었다. 찰스 1세는 한동안 버텼으나, 점차 기반이 무너졌다. 결국 가족들이 피신한 뒤, 찰스 1세는 옥스퍼드를 빠져나가 스코틀랜드군에게 항복했다. 1차 내전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관심을 돌려서 스코틀랜드가 경험했던 내전은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기적의 해"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할당시, 스코틀랜드는 그 어떤 때보다도 강력하고 잘 조직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아일랜드 반란에 개입하기 위해 잉글랜드 의회의 지원을 받았던 군대가 주축이 된 스코틀랜드군은 훈련 상태도 좋았고, 전반적으로 우수했다. 그러나 문제는 스코틀랜드 내부의 분열이었다. 스코틀랜드 지도부의 주축은 찰스 1세의 종교정책에 반발하여 국민서약에 서명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존재했다. 아가일 후작 같은 경우는 점점 더 급진적이 되어 국왕 폐위에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온건파였던 몬트로즈 백작 제임스 그레이엄은 이에 반대하였다.

엄숙동맹(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의 군대

에지힐 전투 이후 잉글랜드 내전은 소강상태에 빠져있었다. 이때 국왕과 의회는 각각 스코틀랜드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것이 스코틀랜드 내의 의견을 더욱 분열시켰다. 스코틀랜드는 이것이 스코틀랜드가 주도권을 쥐고 잉글랜드 국교회를 스코틀랜드 교회에 맞게 맞출 기회임을 깨달았다. 결국 1643년 8월 17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군사동맹인 '엄숙동맹(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가 체결되었고, 앞서 살펴본대로 이듬해 대규모의 스코틀랜드군이 파견되어 의회군을 지원하여 마스턴 무어 전투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내의 온건파, 특히 몬트로즈 백작은 국왕에게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1644년 2월, 찰스 1세는 몬트로즈를 후작에 봉하고, 스코틀랜드 내 왕당파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스코틀랜드 내전이 시작되었다.

몬트로즈 후작은 소규모의 군대와 지지기반만 가지고 외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곧 아일랜드 출신의 용맹한 왕당파 앨러스데어 맥콜라 맥도널드가 잘 무장된 아일랜드 병사들을 이끌고 그의 하이랜더 군대에 합류하였다. 이어서 역사상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로 기록된 몬트로즈 후작의 군사적 위업이 시작되었다.

1644년 9월 1일, 왕당파 군대는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동맹파 군대를 공격하였다. 여기서 아일랜드 보병들은 독특한 전술을 선보였다. 적병과 수백 미터 거리까지 접근한 다음 단 한 번의 머스킷 일제사격을 가했다. 그런 다음에는 모두 머스킷을 내려놓고 날 넓은 칼을 빼든 다음 적병을 향해 맹렬하게 돌격하였다. 이 무시무시한 돌격에 동맹파의 신병들은 그대로 붕괴되었다. 이 전술은 이후 '하이랜드 돌격'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이 승리를 시작으로 몬트로즈는 영국사에 길이 남을 군사적 업적을 이루어나갔다. 그의 군대는 빠른 기동력을 발휘하여 적의 추격을 뿌리쳤으며, 치고 빠지기 전술로 적군을 괴롭혔다. 1645년 2월 2일, 몬트로즈는 다시 "하이랜드 돌격"으로 로우랜드 출신으로 구성된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을 깨뜨렸다.

이제 동맹파는 사태의 심각성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우세한 병력과 기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전을 지고 있었다. 그들은 반드시 몬트로즈를 스코틀랜드에서 쓸어버리기로 다짐하고 병력을 파견하였다.

1645년 5월 8일. 4천여 동맹파 군대를 지휘하던 존 허리 경은 몬트로즈가 1700명의 군대와 함께 숙영하던 오던(Auldearn)에 접근하였다. 기습이 장기이던 몬트로즈는 이번에는 거의 완벽한 기습을 당할뻔 했다. 그러나 뜻밖의 행운이 그를 구했다. 동맹파 군대가 공격 직전에 비에 젖은 화약을 머스킷에서 빼내는 작업을 하다가 몇 발이 발사되었던 것이다. 이 소리를 듣고 급히 일어난 몬트로즈와 앨러스데어는 황급히 병사들을 방어대형으로 배치시켰다.

곧이어 적군의 맹공이 몰아쳤다. 이 공격을 받아낸 이들은 아일랜드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탄약이 떨어져서 물러났으나, 대형을 유지한 채였다. 곧이어 대열을 재정비한 그들은 칼을 빼들고 특기인 돌격을 감행했다. 그들이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사이 몬트로즈는 나머지 부대를 정비하여 일제히 반격을 가했다. 왕당파는 필사적으로 싸웠고, 결국 두 배 이상 많은 적을 상대로 믿기 어려운 승리를 거두었다. 동맹파 군대는 2천여 명의 전사자를 남겨놓고 후퇴했다. 왕당파는 2백여 명을 잃었을 뿐이었다.

몇 주 뒤에 동맹파와 왕당파는 알퍼드에서 다시 충돌했다. 이번에는 양군의 수가 엇비슷했다. 몬트로즈는 이 싸움에서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또 한번 유감없이 발휘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종말

이 일련의 승리를 통해 몬트로즈는 심각하게 위협이 될만한 적들을 사실상 모두 소탕했다. '기적의 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위업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온전히 그의 수중에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스코틀랜드에서 그의 위치는 여전히 취약했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위업은 순전히 그의 군사적 재능과 병사들의 용맹에 의지한 것일뿐, 그는 그것을 유지할만한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가톨릭 아일랜드인들을 이용해 동족을 살육하는 그를 스코틀랜드 주민들은 적대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네이스비 전투 패전의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동맹파 스코틀랜드 군대는 잉글랜드를 떠나 몬트로즈를 상대하러 돌아올 수 있었다. 몬트로즈는 필사적으로 잉글랜드의 왕당파와 합류하려 남하했지만, 불행히도 귀환하던 스코틀랜드 군대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9월 13일의 일이었다.

새벽에 몬트로즈의 군대와 마주친 스코틀랜드군 지휘관 레즐리 경은 즉시 공격을 가했다. 몬트로즈는 병력을 배치할 시간조차 없었다. 역사에 남을 전설적인 위업을 남겼던 몬트로즈의 군대는 이날 철저한 살육을 당했다. 몬트로즈는 간신히 전장을 빠져나갔다. 남은 이들에게 스코틀랜드군은 그간의 패배에 대한 복수를 가했다. 비전투원도 살육을 피해가지 못했다. 특히 아일랜드 병사들은 포로가 된 이들까지도 남김없이 총살을 당했다.

스코틀랜드 내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고,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군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몬트로즈는 여전히 찰스 1세에게 유용한 카드였다. 국왕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서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몬트로즈는 이 명령도 충실히 이행하였다.


덧글

  • 위장효과 2012/07/30 17:44 #

    음...1746년 컬로든 전투에서 잘 훈련된 영국군에 의해 결국 저 하이랜드 차지가 깨지고 말았으니 딱 100년의 유효성을 가진 셈이군요.(어디가!)

    요즘 새로 사서 재미있게 읽는 책이 "근대 전쟁의 시작"인데 여기서도 에지힐 전투에 대해 기병전술파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대략 저자들의 의견은 "루퍼트 공의 기병부대가 제 임무를 반만 했다." 정도...국왕군 기병대가 양익을 두들겨패는 일까지는 제대로 했는데 그 다음에 의회군 후방 진지 약탈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그 사이 간신히 전열을 재정비한 의회군 보병이 국왕군 보병 전열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고 그게 대충 정리될 무렵에야 국왕군 기병대가 전장으로 복귀했다고. 만약 그때 후방포위를 완수했다든가 아님 최소한 측면 공격을 맡았더라면 에지힐 전투는 국왕군의 주장이 아닌 진정한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Mr 스노우 2012/07/30 17:53 #

    저도 그 책 재미있게 봤습니다. 시리즈인 것 같은데 다른 책들도 번역이 된다면 좋겠는데 말이죠 ㅎㅎ 에지힐 전투 같은 경우는 확실히 찰스 1세쪽에서는 아쉬운 경우죠.
  • 앨런비 2012/07/30 18:32 #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쩐이외다 'ㅅ' 고로 쩐좀 줍쇼 ㅜ.ㅜ
  • Mr 스노우 2012/07/31 09:39 #

    알바를 하삼;;
  • 앨런비 2012/07/31 10:01 #

    곧 할거임.
  • 행인1 2012/07/30 23:39 #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도 내전을 벌였군요.
  • Mr 스노우 2012/07/31 09:39 #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랬습니다.
  • 술못받는현섭이 2012/07/31 08:00 #

    스노우님 안녕하세요. n(_-_)n...
    이스라엘 고대사부터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분쟁에 이르기까지 좋은 글 많이 올려서 감사히 읽고 있는 뉴비입니다. 눈팅만 하다가 최근에 아이디 만들었어요.

    영국 내전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도 또 그마만한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처음 알았네요. 오오...
    그런 의미에서 영국 내전을 그야말로 '영국 내전' 그러니까 'Britain civilwar'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나요?
  • Mr 스노우 2012/07/31 09:40 #

    Civil War in Great Britain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영국내전은 English Civil War의 번역이지요.
  • 앨런비 2012/07/31 10:01 #

    요즘은 삼왕국 전쟁이라는 표기가 느는 모양이더군요.
    http://en.wikipedia.org/wiki/Wars_of_the_Three_Kingdoms
  • daswahres 2012/08/02 22:18 #

    몬트로즈는 그동안 잘 수를 두다가 한번 잘못 두어서 아예 패망했군요.
    돈 부족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포스팅보면서 깨닫습니다.ㅇㅅㅇ
  • Mr 스노우 2012/08/03 18:34 #

    사실 애초부터 가능성이 적은 싸움이었습니다. 몰락에 이르기까지의 활약이 오히려 기적적이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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