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잉글랜드 투쟁사 (31)-내전의 끝, 새로운 싸움 ㄴ스코틀랜드-잉글랜드 투쟁사


찰스 1세의 최후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군에 투항한 것은 싸움을 그만둔 것이 아니었다. 왕에게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애초에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가 맺은 엄숙동맹은 오래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틈이 벌어지게 마련일테고, 국왕이 노리던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일단 국왕의 신병을 확보한 스코틀랜드측은 이 카드를 바탕으로 해서 자신들이 확고한 우위를 점했다고 판단하였다. 물론 찰스 1세는 여전히 국민협약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한편 스코틀랜드가 국왕과 멋대로 딜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잉글랜드 의회는 스코틀랜드군이 더 잉글랜드 정치를 어지럽히기 전에 당장 잉글랜드 땅에서 철군할 것을 요구했다.
 

포로가 되는 찰스 1세


이제 스코틀랜드측은 고민에 빠졌다. 국왕을 데리고 스코틀랜드로 돌아간다면 아직도 몬트로즈가 건재한 상황(지난회 참고)에서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 뻔했다. 결국 고심끝에 스코틀랜드는 "이럴바에야 돈이나 벌자"는 결정을 내렸다. 20만 파운드에 국왕을 잉글랜드측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물론 엄연히 스코틀랜드의 왕족인 스튜어트 왕가의 대표를 오랜 적이던 잉글랜드에 팔아넘긴 이 행위는 두고두고 국민서약파에 오명을 남겼다.

1647년, 찰스 1세는 잉글랜드 의회의 관할 하에 일단 감금되었다. 물론 국왕은 그 상황이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스코틀랜드도 마찬가지였다. 크롬웰 휘하의 신형군의 세력이 점차 잉글랜드 의회를 압도하면서 급진파가 국왕에게 어떤 짓을 저지를지 스코틀랜드쪽도 걱정이 되었다. 결국 스코틀랜드 내에 온건파가 득세하면서 국왕과의 연락이 재개되었다. 결국 찰스 1세는 런던에 명예롭게 복귀하는 대신에 장로교회를 잉글랜드에 세우고,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인들과 동등한 상업적 권리를 누린다는 내용의 비밀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내의 왕당파 세력과 손을 잡고 다시 군대를 일으켰다. 2차 내전의 발발이었다.

그러나 야심차게 시작되었던 2차 내전은 올리버 크롬웰의 강력한 무력 앞에서 무력하게 끝나버렸다. 웨일스에서 일어난 반란과 남부 잉글랜드의 왕당파 봉기는 모두 크롬웰과 그의 막강한 철기대(Ironsides)에게 짓밟혔다.

이어서 크롬웰의 군대와 스코틀랜드군이 8월 17일에 프레스턴에서 정면충돌했다. 이틀에 걸친 처절한 전투는 스코틀랜드군의 완패로 끝났다. 스코틀랜드군의 전사자는 2천 명에 달했다.

이 패배로 스코틀랜드 내에서 온건파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다시 급진파가 스코틀랜드를 장악하였고, 이들은 종교적 관점이 비슷한 크롬웰과 손을 잡았다. 여기에 더해서 찰스 1세의 운명은 이제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2차 내전의 발발은 국왕이 존재만으로도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해주었다. 크롬웰이 보기에 찰스 1세는 사라져야만 했다.

1648년 12월, 크롬웰은 '프라이드의 숙청'을 통해 의회 내의 온건파를 제거하였고, 런던은 크롬웰의 병사들이 장악하였다. 이어서 국왕은 반역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스코틀랜드는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스코틀랜드는 국왕의 자의적 통치에 대해서는 잉글랜드와 손을 잡고 저항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찰스 1세는 잉글랜드의 국왕이면서 동시에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졌다. 만일 반역혐의가 확정된다면 찰스 1세는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 과연 잉글랜드에게 스코틀랜드 국왕의 머리를 자를 권한이 있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재판은 강행되었고, 찰스 1세에게는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1649년 1월 30일은 날씨가 추웠다. 추운 날씨에 떠는 것이 두려움에 떠는 것으로 보일까 염려한 찰스 1세는 두 벌의 셔츠를 겹쳐입고 화이트홀의 궁전을 나섰다. 이어서 단 한번의 도끼질에 두 왕국의 국왕의 머리가 떨어졌다.

한 주 후에 잉글랜드 의회는 공식적으로 왕정을 폐지하였고, 이렇게 해서 잉글랜드에서는 공화정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찰스 1세의 처형 이후 채 한 주가 지나기도 전에 스코틀랜드는 죽은 국왕의 18세된 아들을 대브리튼과 프랑스, 아일랜드의 왕 찰스 2세로 선언하였다.

물론 스코틀랜드는 새 왕에게 전 왕과 같은 자의적인 통치권을 허락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찰스 2세가 왕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할 터였다.




몬트로즈 후작의 최후

유럽에 망명중이던 몬트로즈 후작에게도 찰스 1세의 처형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이틀간 방에 틀어박혀서 주군의 죽음을 애도한 후에 복수를 선언하였다.

찰스 2세 입장에서도 스코틀랜드의 국민서약파 정부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몬트로즈를 위시한 왕당파에 의해 옹립되는 편이 더 나았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몬트로즈는 최대한 병력을 끌어모았다.  그는 우선 덴마크와 독일 용병들을 고용한 다음 1650년 3월 오크니로 건너가 천 여 명의 병사를 더 모았다. 물론 오크니 병력은 전혀 훈련이 되지 않은 신병들이었다.
제임스 그레이엄, 1대 몬트로즈 후작

몬트로즈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갔을 때, 왕당파들의 지지를 통해 더 많은 병력을 확보하리라 기대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예전에 그의 군대가 벌인 짓 때문이기도 했다.

서약파 정부에게 몬트로즈의 귀국 소식은 악몽의 부활이었다. 특히 예전에 그의 하이랜더들이 보여주었던 용맹성이 떠오르자, 정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몬트로즈가 하이랜드로 가서 병력을 모으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정부는 노련한 군인 아치볼드 스트래컨 중령이 이끄는 부대를 급파하여 몬트로즈를 저지하도록 하였다.

몬트로즈는 비록 기대하던 지지는 얻지 못하였지만, 군사적 재능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점을 과시하였다. 그는 4월 25일, 카비스데일에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지지자들의 결집을 기다렸다. 지지자들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가 진을 친 곳은 상당히 험준한 곳이었으며, 야전축성도 훌륭했다. 아무리 수가 많은 대군이라고 정면공격은 많은 피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지형이었다. 그리고 사실 스트래컨 중령의 부대는 급히 파견되었기 때문에 그 수도 300여 명에 불과했다. 몬트로즈의 군세는 1200명이었다.

그러나 몬트로즈의 약점 중 하나였던 정찰에 대한 소홀함이 모든 것을 그르쳤다. 그는 적군의 규모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눈앞에 얼쩡거리는 기병 한 부대가 적의 전체 전력이라고 믿었다. 이들을 쉽게 섬멸한다면 왕당파들을 결집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전군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사실 스트래컨 중령은 적은 병력을 최고로 활용하여 매복시키고 몬트로즈 백작의 군대를 개활지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리고 몬트로즈의 군대가 완전히 덫에 걸리자, 중령을 일제공격 명령을 내렸다.

왕당파 군대의 수적우세는 전투 개시 몇 분만에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격에 왕당파 군대의 선두 기병들이 우수수 말에서 떨어졌다.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던 오크니 징집병들은 아비규환이 펼쳐지자 그대로 대열을 허물고 도망쳐버렸다. 그나마 방어대형을 펴고 버텼던 것은 덴마크와 독일 용병대였으나, 이들은 상황이 도저히 가망없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바로 항복해버렸다.

몬트로즈 후작의 신화가 완전히 끝장나는 순간이었다. 400여 명의 왕당파 병사들이 전사하였다. 정부군 피해는 한 명에 불과했다. 몬트로즈는 간신히 혈로를 뚫고 탈출했다. 그러나 얼마간의 고된 도주끝에 결국 체포되는 신세가 되었다. 몬트로즈는 이미 결석재판에서 반역죄가 확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다시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1650년 5월 21일 공개적으로 목이 매달린 후에 머리가 잘리고 사지가 찢겼다.

그의 잘려진 머리는 에든버러에 내걸렸고, 팔과 다리는 에버딘, 글래스고, 퍼스, 스털링의 성문에 각각 전시되었다. 이렇게 해서 군사적으로 뛰어났으나 결점도 많았던 후작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불필요한 전쟁

몬트로즈의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찰스 2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몬트로즈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서약파 정부의 조건에 따라 스코틀랜드의 왕관을 써야만 했다. 물론 찰스 2세 입장에서야 별로 행복하지 않았겠지만, 사태는 이것으로 무사히 해결되었으며, 분쟁의 불씨도 사라졌다고 모두들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잉글랜드쪽에서 터져나왔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인들에게 국왕은 기본적으로 유력 귀족들 중의 가장 우두머리였으며, 스코트랜드가 찰스 2세를 받아들인 것도 국가를 한데 묶는 상징적 구심점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는 중세 스코틀랜드 시절부터 유래한 개념이었다. 반면에 잉글랜드는 16세기 튜더 시대의 정부 혁명을 거치면서 국왕의 행정적 권한과 상징적 권위가 크게 강화되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국왕권 개념이 오해의 시작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자신들이 애써서 국왕이 더이상 자의적으로 통치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몬트로즈의 군대를 패배시킨 것으로 그런 위험은 끝났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이다. 즉..

'우리가 죽인 왕의 아들을 왕으로 앉혔어? 무슨 생각으로?⇒지들 멋대로 (전제)왕정복고?⇒그러고보니 스코틀랜드가 찰스 1세와 공모해서 잉글랜드에 쳐들어온적 있었지??⇒이것들이 설마 공화국을 뒤집을 생각으로???⇒게다가 우리가 죽인 왕의 아들이야????⇒잉글랜드 피바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스코틀랜드로서는 위와 같은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음에도,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7월 22일, 올리버 크롬웰이 직접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버윅에서 국경을 넘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오랜 반목의 역사 중에서도 아마도 가장 불필요했던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덧글

  • 앨런비 2012/08/18 17:17 #

    엄허! 짤이 내글 같다!!
  • Mr 스노우 2012/08/19 11:34 #

    음.. 근데 기대했던 효과는 없는듯요-_-;
  • 셔먼 2012/08/18 17:40 #

    이제 철기군과 신형군에게 박살나는 일이 남았군요.;
  • Mr 스노우 2012/08/19 11:34 #

    어익후 스포일러입니다 ㅋ
  • 행인1 2012/08/19 13:31 #

    잉글랜드 내전이 잉글랜드-스코클랜드 전쟁으로 비화되는군요.
  • Mr 스노우 2012/08/19 19:06 #

    뭐 잉글랜드 내전이라고는 해도 스코틀랜드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내내 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큰 변화는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 눈팅 2012/08/19 18:24 # 삭제

    스노우님의 연재해주시는 투쟁사는 아주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근데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이 당시 잉글랜드(가 주도하는 대브리튼)의 프랑스 영토는 백년전쟁을 끝으로 다 잃어버린게 아닌가요? 스코틀랜드가 찰스2세를 대브리튼과 (이전에 잉글랜드가 강제로 합병한)아일랜드의 왕으로 선포하는것은 이해가 되지만 프랑스의 왕으로 선포하는것은 무슨 근거로 하는건지 이해가 안됩니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그당시까지만 해도 대브리튼의 프랑스 영토가 남아 있던 것인가요?
  • 눈팅 2012/08/19 18:46 # 삭제

    아! 기억을 더듬어 보니 백년전쟁 이후 칼레가 영국령으로 남아있었지만 그것도 나중에 프랑에게 뺏겼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찌됫던 이번 포스팅 시점 이전에 프랑스내 영국령은 완전히 없어진걸로 알고 있는데 스코틀랜드의 찰스 2세의 프랑스왕 선언은 어떤 의미기 내포된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 Mr 스노우 2012/08/19 19:07 #

    영국이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한 뒤에도 프랑스 왕위에 대한 합법적인 계승자라는 주장을 포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지요. 실제로 영국 왕실이 프랑스의 왕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포기한 것은 19세기에 와서야 이루어집니다.
  • 눈팅 2012/08/19 19:34 # 삭제

    아!~ 그러니까 백년전쟁의 원인중 하나였던 영국왕이 프랑스 왕위 계승권자라는 주장을 그때까지도 하고 있었군요~ 찰스 1세만 해도 왕비가 프랑스 공주였는데 이때까지 영국왕이 계속 프랑스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혼사를 성립한것이 참 신기합니다. ㅋㅋㅋ
  • 위장효과 2012/08/20 10:54 #

    아직도 합스부르크-로트링엔 가에서는 토스카나 대공의 작위를 유지하고 있는데 19세기까지 프랑스 왕위 계승자 주장한 거야 뭐...별 것도 아니죠^^;;;.
    (그런데 7월 혁명-2월 혁명-루이 나폴레옹 쿠데타-제 3 공화정의 시작등 기회도 많았는데 그 사이 영국 국왕이 프랑스 왕위 계승권 주장안한것도 나름 재밌긴 재미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프랑스의 공화주의자든 왕정복고파든 일치단결해서 뭔가 사단을 냈겠지만)

    다음편: 완전히 오해에서 벌어진 전쟁.
  • Mr 스노우 2012/08/20 23:18 #

    헨리 8세가 루터 비판해서 얻은 신앙의 수호자 타이틀을 종교개혁 이후까지 영국 왕실이 계속 사용한것도 있죠 ㅋ 영국이 프랑스 공화국을 승인해버린 이상 그 계승권을 다시 주장하긴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 위장효과 2012/08/21 07:14 #

    그건 지금도 쓰고 있지요. 참 보면...^^

    (채널 제도가 영국령인 것도 노르망디 공작의 영토란 근거때문이라더군요. 뭐냐 이거!!!)
  • Mr 스노우 2012/08/21 09:01 #

    뭐 그냥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고 한번 받은건 절대 바꾸지 않는 영국인의 특성이라고 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ㅋ
  • 기번 2012/08/25 20:23 # 삭제

    행보가 나오는 거 보니 스노우님은 군대 갔다 오신 모양?
  • 알파캣 2012/08/26 22:46 #

    크롬웰은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었나봐요.. : ㅇ
  • Mr 스노우 2012/08/27 08:31 #

    좀 복잡한 인물이죠. 온건파적인 모습과 급진파적인 모습을 모두 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아일랜드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최악의 대량학살자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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