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잉글랜드 투쟁사 (35)-명예로운 혁명? ㄴ스코틀랜드-잉글랜드 투쟁사

침공

1688년 10월 19일, 빌렘 공은 네덜란드를 떠나 잉글랜드를 향해 돛을 올렸다. 무려 60척의 군선과 500척의 소선으로 구성된 대함대가 14,000여 병력을 싣고 그를 따르고 있었다.11월 5일, 그의 군대가 상륙했고, 빌렘은 신중하게 엑세터를 향해 행군했다.

이 초대형 비상사태 앞에서 국왕 제임스 2세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는 급히 자신에 대한 저항을 초래했던 법령들을 취소했지만 그것으로 떠나간 신민들의 마음을 붙잡기는 역부족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지푸라기를 잡듯 양보한다고 해서 그걸 진심으로 믿어줄 사람이 있을리가 없는 법이니까.

물론 잉글랜드의 국왕으로서 제임스는 빌렘의 군대를 압도하기에 충분한 대군을 보유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의 충성심을 믿을 수 있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결국 왕은 한 연대를 소집한 다음 자신의 정책을 인정하든지, 무기를 내려놓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두 명의 장교와 몇몇 가톨릭 교도들을 제외한 전원이 무기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스튜어트 왕가의 왕들은 언제나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권력기반인 스코틀랜드가 있었다.(물론 찰스 1세는 배신당했고,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를 가혹하게 대했고, 제임스 2세는 그 정책을 직접 집행했지만 그건 넘어가자-_-) 그리고 제임스 2세가 찰스 2세의 대리로서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면서 다진 기반도 있어서, 스코틀랜드 내에는 제임스 2세의 지지자들이 제법 있었다. 국왕은 긴급히 스코틀랜드 부대의 소집령을 내렸다. 던디 자작이 왕명을 받들어 소수의 수비대만 에든버러 성을 나섰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없었다.

왕은 네덜란드군을 상대하기 위해 잉글랜드 부대를 우선 집결시켰으나, 그의 고위 장교들이 줄줄이 빌렘에게로 도망쳤다. 그 중에는 몬머스 공의 반란을 빈압한 이후 제임스 2세의 각별한 총애를 받던 존 처칠 경(훗날의 말버러 공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왕에게 더 치명적인 타격은 둘째딸 앤의 배신이었다.

이에 제임스 2세는 더 이상 저항할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휘하의 잉글랜드 군대를 해산시켰다. 스코틀랜드군은 도중에 목표를 잃어버린 상황이 되버렸다. 그는 여전히 지지기반이 있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계속 저항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신에 도망을 택했다.

제임스의 도주 소식이 알려지자 스코틀랜드에서도 그의 지지기반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를 갈아오던 서약파가 다시 전면에 나타났고, 반가톨릭 감정이 전국을 휩쓸기 시작했다.

도망치던 제임스 2세는 그만 켄트의 어부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공포에 떨며 며칠을 보낸 뒤, 런던으로 되돌려보내졌으며, 왕궁 안에 감금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빌렘 공은 난감해졌다. 제임스는 더이상 별 위협은 되지 않았지만,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그는 어디까지나 외국인이었고, 따라서 제임스를 함부로 다루는 것은 동정여론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거기다 제임스는 바로 빌렘의 장인이었으니 영 그림이 좋지가 못했다-_-;

이에 빌렘은 제임스를 '외국으로 도망치기 매우 용이한' 로체스터로 보냈다. 그리고 제임스는 순순히 프랑스로 도망쳤다. 이렇게 해서 그의 통치는 끝이 났다.

1689년, 런던의 국민협의회는 제임스 2세는 '국왕과 인민 간의 계약을 깨뜨렸으며, 따라서 사실상 퇴위한 것'으로 선언하였고, 빌렘 공에게 권리선언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이 선언을 기초로 하여 빌렘 공과 메리를 각각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공동군주 윌리엄 3세와 메리 여왕으로 선포하였다. 

 

유혈

이 일련의 사건은 명예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피를 흘리지 않아서 명예롭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가지나 잉글랜드에 국한된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에든버러 폭동 이후 스코틀랜드는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엄청난 혼란 상태에 빠졌다. 나라는 극심한 분열 상태에 빠졌다. 재커바이트, 즉 제임스 왕의 지지자들은 여전히 남아있었으며, 빌렘의 지지자들인 휘그파와 대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에든버러에서 열린 협의회는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때 회의에 두 통의 편지가 전달되었다. 한 통은 윌리엄 3세에게서, 한 통은 제임스 2세에게서 온 것이었다. 윌리엄의 편지는 우호적이고 정중했으며, '프로테스탄트 종교와 고래의 법과 왕국의 자유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하고 있었다. 반면에 제임스의 편지는 오만하고 거칠었으며, 모호한 협박을 담고 있었다.

이것으로 협의회 내에서 제임스 2세에 대한 동정론은 완전히 사라졌다. 4월 2일, 에든버러 협의회는 제임스 7세가 왕관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박탈당했음을 선언하였으며, 그에 따라 공석이 된 왕위를 잉글랜드의 왕과 여왕에게 양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달리 이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지를 않았다. 스코틀랜드에는 여전히 상당한 세력의 재커바이트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임스 2세의 명을 받들어 스코틀랜드군을 이끌고 갔던 던디 자작은 제임스가 싸움을 포기하는 바람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북부로 가 지지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때 제임스 2세는 프랑스에서 다시 아일랜드로 건너가 더블린에서 자신의 왕국을 회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던지 자작은 자신이 아일랜드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결국 스코틀랜드는 다시 내전으로 얼룩지게 되었다. 던지 자작은 북부의 하이랜드 씨족들로부터 2,500명 가량의 지원군을 모으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아일랜드로부터 지원군은 3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맥케이 장군이 이끄는 정부군이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북상했다.

1689년 7월 27일 킬리크랭키에서 양군의 일전이 벌어졌다. 재커바이크 군은 대략 3천 명, 정부군은 4천여 명이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던디는 공격 명력을 내렸다. 그의 하이랜드 전사들은 예전부터 싸우던 방식대로 싸웠다. 그들은 정부군을 향해 일제히 머스킷 사격을 가한 후에 브로드소드를 빼어들고 돌진했다. 정부군 보병들은 이들을 향해 연속해서 머스킷 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하이랜더들의 돌격은 늦춰지지 않았다. 결국 정부군 병사들이 총검을 꽂을 새도 없이 하일랜더의 물결이 이들을 휩쓸어버렸다.

킬리크랭키 전투

전투는 불과 몇 분만에 재커바이트의 승리로 끝났다. 정부군 사상자는 2천 명에 달했다. 재커바이트 사상자는 600여 명이었다. 여러모로 대단한 승리였지만 결과는 오히려 재커바이트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불행히도 승장인 던디 자작이 팔에 총상을 입고 다음날 사망해버렸던 것이다. 이는 재커바이트에게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지도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재커바이트 군대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지휘권은 아일랜드 부대의 지휘관인 알렌산더 캐넌 대령에게 갔지만, 부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하이랜더들이 여기에 분개하였던 것이다. 결국 가장 막강한 하이랜드 족장 어윈 캐머런 로시엘 경이 자기 씨족과 함께 이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까지 스코틀랜드의 추밀원은 지난번 패전 이후 나라를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도주할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커바이트 군대의 분열상과 던디 자작의 죽음을 알고 난 뒤로 마음을 바꾸었다.

결국 덩켈드에서 두번째 충돌이 일어났다. 캐넌 대령은 하이랜더들 일부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지원병력을 더 끌어모아 보강된 5천여 부대로 덩켈드를 공격했고, 1200명에 불과한 정부군은 악착같이 버텼다. 이번에는 지형이 재커바이트를 돕지 않았다. 집들이 들어찬 덩켈드의 좁은 거리에서는 무시무시한 하이랜드 돌격 전법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재커바이트군이 정부군을 마지막까지 몰아붙였으나 결국 무너뜨리지는 못하였다.

이 전투 이후 재커바이트의 기세는 더더욱 수그러들었다. 결정적 계기는 아일랜드에서 왔다. 보인 강 전투에서 제임스 2세가 결정적 참패를 당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제임스 2세의 복귀 가능성은 영영 사라져버렸다. 1690년 5월 1일에는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재커바이트 부대가 패퇴하였다. 이렇게 해서 윌리엄 3세의 지배권은 공고해졌다.

 

학살

이제 뒷처리가 남아있었다. 윌리엄 3세는 반란에 가담한 하이랜드 씨족들에게 사면을 약속하면서 그 대신 1692년 1월 1일까지 자신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라고 요구하였다. 승자의 아량을 담아서 서약을 하는 씨족장들에게는 돈과 작위도 잔뜩 안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살기 위해서 달리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봉건적 맹세에 충실한 많은 족장들은 제임스 2세에게 전갈을 보내 새 왕에게 충성 서약을 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중에는 글렌코의 맥도널드 씨족의 족장 알라스데어 매클레인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제임스 2세는 한참 뭉그적대다가 늦게야 겨우 허락해주었다. 그 허락이 하이랜드에 도착한 것은 12월 28일이었다.

 

매클레인는 1월 1일까지 충성서약을 하기 위해 무지하게 노력했다. 그는 새로 지은 포트 윌리엄에 도착했으나 그곳 지휘관은 자기가 서약을 받을 위치가 아니라고 하며 인버라레이의 주 장관에게 가라 했다. 인버라레이에 간신히 도착해보니 장관은 자리에 없었다. 결국 그의 서약이 에든버러에 도달한 것은 1월 6일이 되서였다.

정부는 경고 차원에서 본보기가 하나쯤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불행히도 며칠 늦은 매클레인의 씨족이 그 대상이 되었다. 그들이 외부 공격에 취약한 곳에서 살고 있었던 점도 원인이 되었다. 윌리엄 3세가 임명한 법무장관은 맥도널드 씨족은 왕국 내의 유일한 교황주의자들이기 때문에 가혹하게 대해도 상관없다고 주장하였다.(그러나 사실은 성공회 신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윌리엄 3세는 이 결정을 승인하였다. 2월에 아가일 보병 연대의 선발부대가 글렌코에 도착했다. 맥도널드 씨족은 이들을 하일랜드의 관습에 따라 환대하였다. 외견상 이들의 임무는 세금징수였고, 사실 부대원 자신들도 그런 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이들은 맥도널드 집안 사람들과 함께 며칠을 즐겁게 지냈다. 그리고 며칠 뒤 후속 부대가 새로운 명령서를 들고 왔다. 그리고 이 명령서에 진짜 임무가 쓰여져 있었다.

 

다음날 새벽 5시, 장교 두 사람이 알라스데어 매클레인의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족장을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그것을 신호로 모든 집에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족장의 아들들과 손자는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나머지는 남녀소소 가릴 것 없이 기계적으로 살육당했다. 최소 38명이 정부군에게 살해당했고, 그보다 더 많은 수가 탈출 시도중에 눈보라 속에서 죽어갔다.

 

글렌코 학살 추모비

이 사건은 하이랜더들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졌다. 본보기를 보여 반란의 싹을 없애버리려는 의도로 계획된 이 학살은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의 가슴 깊숙한 곳에 분노를 심어주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덧글

  • 앨런비 2014/01/04 14:01 #

    아아 재커바이트 하일랜드 차지-_-; 사실 마지막 연재에서 나올 부분이 가장 기대된다능 히힣.
  • Mr 스노우 2014/01/22 01:17 #

    계속 쓸까 말까...;;
  • 迪倫 2014/01/04 14:12 #

    "Going dutch"같은 책에서는 빌럼의 영국 도착이 실제 해병대를 앞세운 군사작전이었다고까지 묘사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침공'이 어떻게 '인수합병'과 같은 평화적 과정으로 전개되었는지 이후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이 장점을 흡수하여 네덜란드를 넘어서게 되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부분은 별로 언급이 없어서 잘몰랐는데 포스팅 잘읽었습니다.
    스노우님 며칠 지나긴 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책에 대한 정보: http://www.amazon.com/Going-Dutch-England-Plundered-Hollands/dp/0060774096
  • Mr 스노우 2014/01/22 01:16 #

    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슈타인호프 2014/01/04 18:46 #

    저런 본보기 치고 목적을 달성한 사례가 거의 없죠--;;
  • Mr 스노우 2014/01/22 01:17 #

    사실 맞으면 원한을 품는건 당연한건데 그걸 생각 못하는 경우가 꽤 많은것같습니다-_-
  • 델카이저 2014/01/22 09:29 #

    대개 본보기는 하는 놈이 짜증이나서 화풀이하는 경우가 많은지라;;;;

    차라리 반란분자로 찍어놓고 당당하게 때려눕혔으면 납득이나 했을텐데 세금 징수하는 척하고 들어가서 기습한거니 이건 비열하기도 짝이 없죠;;;
  • Mr 스노우 2014/01/23 11:26 #

    별로 저항할 뜻도 없던 자국민한테 저지른 만행인데다 방법까지 그랬으니 비열한것 맞죠;;
  • 위장효과 2014/02/10 17:28 #

    쓸데없이 본보기 만들었다 오히려 혹만 더 붙인 경우는 역사에 너무도 선례가 쌓여있거늘...

    물론 단기적 요법으로는 효과가 있긴 합니다만 문제는 약효가 짧다는 거.
  • Mr 스노우 2014/02/13 23:15 #

    당장 한국사만 봐도 수두룩하죠...
  • 기번 2014/03/09 20:49 # 삭제

    나중에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이 터지죠?
  • 학생 2014/04/03 11:04 # 삭제

    계속 써주세요~ 재밌어요~
  • Mr 스노우 2014/04/04 11:54 #

    노력중입니다ㅠㅠ
  • 대공 2016/12/21 01:19 #

    이게 피의 결혼식 모티브가 된 사건이군요
    원칙도 뭐고 없으니 오히려 분노를 심어줄수 밖에 말이죠
  • 위장효과 2016/12/21 08:01 #

    오히려 피의 결혼식 모티브라면 고대 로마 시대에 있었습니다. 카라칼라 황제가 파르티아 왕녀와 국혼하겠다고 해놓고는 주요 귀족들이 하객으로 모이자 약속 바꾸고 대학살극 벌인 적이 있거든요.
  • 대공 2016/12/22 01:03 #

    그 미친놈이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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