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왜 죽었는가 (2) homo religiosus


신성모독죄?

일반적으로 예수는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선언하였고, 이 때문에 신성모독 혐의로 처형되었다고 많이 이야기된다. 그런데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이러한 발언은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이들이 당시 유대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자칭하는 것은 신성모독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복음서의 예수 재판 기록에서 대사제의 마지막 질문도 그렇고, 그걸 영화화한 장면을 보면 예수가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좌중이 경악하는 묘사가 꼭 나온다.

하지만 '하느님의 아들' 그 자체만은 그렇게 심각한 호칭이 아닐수도 있다. 유다인들의 집단적 정체성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면 너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라고 파라오에게 말하여라.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탈출기 4:22)


동시에 이는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에게 주어진 칭호이기도 했다.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시편 2:7)


이것은 신적 본질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기보다는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상징하는 언어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사람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다만 특이한 점은 예수가 하느님을 아람어로 '아빠(abba)'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복음서나 바오로 서신이 모두 이 단어를 아람어 원어로 기록한 것을 보면, 이것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높으며 당대 사람들에게도 신기하게 보였던 것 같다. 헬렌 본드에 따르자면, 당대 다른 유다인들도 하느님을 이렇게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가 일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드문 표현이라고 한다. 그래도 미약하나마 증거가 있다는 말은, 이렇게 부르는게 죽을죄는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을 한국어처럼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다 큰 성인들도 자주 썼던 단어여서 그것과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어쨌든 개인적인 친밀함을 표현하는 뜻이긴 하다. 아무튼 예수가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 개인적인 친밀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신성모독으로 몰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그렇다면 결정적인 혐의는 무엇이었을까?



예언자 예수

물론 예수가 처형되는데 있어서 가장 직접적인 사건으로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이른바 '성전 정화' 사건이다. 그런데, 사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왜 성전을 정화했는지 정확한 동기가 서술되어있지 않다. 그저 상인들을 쫓아내면서 그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할 뿐이었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예수가 상인들의 착취나 그들과 결탁한 종교인들의 부패에 분노했다거나, 아니면 예수가 성전의 전례 중심 종교에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이다. 가끔 일부 교회 설교에서는 예수가 '형식주의적인' 유다교에 반대했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최근 해석은 조금 다르다. 물론 사람 사는 세상이니 부패도 있고, 커미션도 있었겠지만 1세기 유다인 종교지도층이 다른 시대보다 특별히 크게 부패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리고 예수는 성전의 기능이나 전례를 부정한 적이 없다. 지난번에 살펴보았듯이 대부분의 증거는 예수가 유다교의 규정과 전례를 충실히 지켰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 '상징적인 행위'였다. 성전 상인들의 활동 없이는 성전의 기본적인 업무인 전례가 진행될수가 없다. 최근 학자들이 주장하는대로, 예수는 성전 자체나 성전중심 종교에 반대했다기보다는, 성전의 기능 정지, 더 나아가 성전의 파괴를 상징적으로 예언한 것이다. 다시말해 그것은 '지금 성전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상징적 행위였을뿐, 대대적인 난동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전에는 유다인 경비대도 있고 바로 인근에 로마군 주둔 병력도 있다. 이들의 주의를 끌만한 소요였다면 바로 진압당했을 것이다.)

예전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 예수의 '비유다인'적인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20세기 중반 이후의 연구는 유다인으로서의 모습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최근의 학자들이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바는, 예수의 가장 큰 정체성은 유다교 예언자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접근했을때, 성전 정화의 의미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낸 예수와 마찬가지로, 구약의 예언자들은, 결혼이라는 상징을 이용한 호세아나 멍에를 짊어진 예레미야처럼, 다양한 상징을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구약시대 예언가들 상당수는 성전이나 정치 및 종교 기득권층과 갈등관계에 있었다. 성전의 파괴를 두 차례나 예언한 예레미야나, 북왕국에서 기득권층의 부패와 사회적 불의를 비판하다 추방당한 아모스가 대표적이다.

사실 성전 정화 사건뿐이 아니라 예수의 행적과 설교 전반을 보면, 아모스에서 세례자 요한에 이르기까지 유다교 예언자들의 전통이 매우 짙게 드러난다. 특히 아모스, 예레미야, 이사야 이 세 예언자와 많이 닮아있다. 물론, 예수 사후에 그리스도론이 정립되면서 예수를 이사야서에 예언된 '고난받는 종'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이사야의 예언 및 메시지와 동일시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살펴보면, 구약 시기 예언자들이 활동한 시기는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였다. 1세기 팔레스타인도 마찬가지였다. 헤로데 왕조 시절 유대는 헤로데 왕가의 왕들이 추진한 계획적인 헬레니즘 도시 건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예루살렘도 성전을 비롯한 각종 건설사업이 진행되었고, 갈릴레아 인근에도 세포리스와 티베리아스 두 도시가 세워졌고, 이러한 도시화는 주변 농촌 지역(예수의 고향을 포함한)에 부의 양극화를 포함한 상당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불러왔다. 이 시기 농촌사회의 불안정을 이러한 도시화 현상과 연결짓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를 사회혁명가나 개혁가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예수세미나'의 시각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예수의 모습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샌더스의 지적대로 예수는 정책을 입안한 적도 없고, 체계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만들지도 않았기 때문에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사회개혁가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로마의 공권력에 도전하는 투쟁 조직을 세운것도 아니다. 예수가 전한 핵심적 메시지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였다. 따라서 그에게 가장 적절한 명칭은 어디까지나 유다교 예언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에게 정치적인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샌더스가 그린 예수 역시 종종 지나치게 사회적인 면을 과소평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유다교 예언자들 스스로가 기본적으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이사야의 영향력은 그가 공적 삶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드러난다.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복음 4:17-19)


이것은 한 마디로 예수가 자신의 사명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일종의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예수가 가르친 복음은 대부분 '하느님의 나라'관련된 것이었는데, 거기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게 바로 억압받고 가난한 이들이었다. 사실 척박한 부족시대의 유산이긴 하지만 유다교 주류 해석에 있어서 하느님의 복을 받았다는 증거는 부와 장수였고, 저주를 받았다는 증거는 가난과 질병이었다. 이러한 주류 신학에 도전했던게 구약의 예언자들이었고, 예수는 그 전통을 충실히 계승했다.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사야 1:17)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이사야 58: 6)


또한 예수의 '하느님 나라', 혹은 '하늘 나라'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내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복음서에서 '나라', '왕국'등으로 번역되는 원어 표현은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다. 이는 공간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왕권, 왕의 통치를 가리키는 용어다. '하느님의 나라'는 기본적으로 현세적인 개념이며, 하느님의 정의로운 통치가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에 나타난 대로 예수는 인간이 죽어서 그 나라에 들어가는게 아니라, 그 나라가 바로 이 지상에 이루어질 것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종말론적 예언자'로서 예수는 이러한 점을 의미한다. 요즘 말하는 것처럼 곧 세상 종말이 온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런게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시기에 진행된 도시화와 상업화는 부유층도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빈민층도 만들어냈다.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도 예외는 아니었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그랬듯이, 예수 자신이 읽었던 이사야의 예언서가 그랬듯이, 예수는 사회의 소외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가 성전에서 행한 일은, 특별히 상인 몇몇이 부패했거나 성전 전례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성전이 (자신의 원래 본분인)이러한 일들을 망각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였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마치 예레미야가 예언했듯이, 성전 자체가 파괴될 것이라는 '종말론적' 예언이기도 했다. 이쯤 되면 기득권층이 불안을 느끼는게 당연하지 않을까?




예수의 죽음

물론 예수 자신도 이러한 행위의 결과를 예측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최후의 만찬이라는 의식을 행한 것도 다가오는 최후를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가 그랬듯이 기득권층을 비판했던 구약 시대 많은 예언자들의 운명이 그러했고, 바로 얼마 전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그러했다.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헤로데 안티파스의 결혼 건과 관련지어서 설명하지만, 요세푸스의 기록은 조금 다르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 따르면 안티파스는 요한이 반란을 선동할까 두려워 처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둘은 상충되는 기록은 아니다. 백성의 지지를 받는 종교 지도자가 자신을 강력히 비판한다면 권력자는 두려워질수밖에 없다. 거기다 민중들의 소요가 드물지 않았던 지역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요한의 죽음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수나 요한의 가르침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고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정치와 떼어서 설명하기 힘들때가 많다. 더욱이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위에서 보듯이 사회적인 면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거 다 제쳐놓고서라도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은 기득권층에게는 '현 사회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라는 선언으로 들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유, 그리고 구약의 예언자들이 박해받은 이유와 동일한 이유로 죽었다.

지난번에 말했듯이, 바리사이는 예수의 죽음에 별 관련이 없다. 사실 복음서 후반부로 갈수록 바리사이의 비중은 희미해진다. 대신 진짜 기득권층인 성전 사제들과 장로들이 예수의 주 적대자가 된다. 예수의 체포를 주도한 것도 이들이었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으로 봤을때 예수의 죽음의 배후에는 로마 권력이 있었다.

대중적 인식은 '산헤드린은 사형선고를 내릴 권한이 없어서 예수를 억지로 정치범으로 몰아 로마에 넘겼다. 로마는 예수가 무죄인걸 알고 풀어주려 했지만 군중이 무서워서 죽였다.'인데, 여기도 사실 문제가 많다. 일단 예수는 행위나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히 당대 사람들의 눈에 정치범으로 불릴만 했다.

그리고 산헤드린에 사형선고를 내릴 권한이 없었다는 통설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여기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몇몇 증거는 유대 법정도 때에 따라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종교법을 어겼을 경우 투석형을 내릴 수 있었고, 성전에서 '이방인의 뜰'을 벗어나는 외국인은 로마 시민이라도 처형할 수 있었다. 즉, 어쩌면 예수를 종교범죄자로 몰아 처형할 수도 있었는데도 굳이 로마에 넘겼다는 것이다. 이는 이 사건이 로마에게 넘겨야 뒷탈이 없는 사건이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여기에 대해서 흥미로운 사건이 하나 있다. 대략 AD 60여년 경에 또다른 동명이인인 예수라는 인물이 살았다. 재미있게도,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의 파괴를 예언한것까지 나자렛 예수와 비슷하다. 그리고 우리의 예수와 마찬가지로 이 양반도 유다 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심문당한뒤 로마에 넘겨졌다. 그리고 로마쪽의 심문 결과는 "뭐야 미친놈이네ㅋ" 정도였다. 결국 이 양반은 좀 얻어맞고 풀려났다.

이 사건이 말해주는 것은, 로마 당국의 눈에 나자렛 예수는 이 사람보다 더 위험한 존재로 보였다는 사실이다. 30년뒤 인물인 예수는 심문 과정에서 횡설수설했지만, 나자렛 예수는 일관되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분명한 정치적 함의를 담고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수가 아니더라도 나자렛 예수에게는 추종자들이 있었다. 게다가 시기는 유다인이 '압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 기간. 이쯤 되면 로마 당국도 신경이 날카로워지는게 당연하다.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죄수 한 사람을 풀어주는 전통을 적용하려다 실패했다는 등등의 이야기는 이후 그리스도교 교회가 로마 당국에 어필하기 위해 만들어내었을 가능성이 높다. 죄수를 명절마다 사면해주는 전통이 있었다는 기록도 찾아보기 힘들거니와, 그런 위험한 죄수(바라빠 역시 복음서의 뉘앙스로 보면 정치범일 가능성이 다분하다)를 분위기가 잔뜩 고조된 축제 기간에 풀어주는 미친 짓을 했을리도 없다.(단 죄수 사면 퍼포먼스와 유사한 일회성의 사건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며, 여기에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퍼포먼스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기록으로 봤을때 대사제 카야파와 빌라도는 대단히 손발이 잘 맞았다. 그는 간단한 절차를 거쳐 곧바로 예수를 처형했을 것이다.

결국, 예수는 신학적인 논쟁때문이 아니라, 군중을 선동해서 소요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실질적인 가능성 때문에 그런 소요를 막고 질서를 유지하는게 주 임무인 유다인 대사제에게 체포당했고, 로마 당국에 의해 위험한 정치범으로 판단되어 처형되었던 것이라고 보는게 타당하게 여겨진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머리 위에 내걸렸던 <유다인의 왕>이라는 팻말은, 로마가 아닌 다른 존재나 질서에 의한 '바실레이아'를 주장하는 이는 이런 운명을 맞게 될 것이라는 직접적인 경고였다.



참고

E. P. Sanders, The Historical Figure of Jesus (London, 1993).
Helen K. Bond, The Historical Jesus: A Guide for the Perplexed (London, 2012).
Gerhard Lohfink, trs. by Linda M. Maloney, Jesus of Nazareth: What He Wanted, Who He Was (Collegeville, 2012).



핑백

  • 스노우 씨의 거주지 : 역사적 예수의 수난 (1) 2016-03-24 13:25:26 #

    ... 는가? 필자는 대략 작년 이맘때쯤에, 이 카테고리에 간략하게 예수가 죽음을 맞아야 했던 이유를 역사학적 입장에서 서술해본 적이 있다. http://charger07.egloos.com/4076745 간략히 요약하자면, 예수는 유다교 예언자의 전통에 서있던 종말론적 예언자였고, 그의 급진적인 하느님 나라 운동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랬 ... more

덧글

  • 킹오파 2015/04/02 12:55 #

    뭐 개인적으로 예수는 유대교 개혁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의 추종자들이 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한거 같은데... 그만큼 센세이셔널한 인물은 맞음. 가난하든 부자이든 모두 평등하다는 마인드는 그 당시 기준하에서는 상상 조차 할수 없는 일이니깐. 아마 죽을 각오는 하고 그런 주장을 했겠죠.
  • Mr 스노우 2015/04/03 05:13 #

    하느님의 아들 문제는 깊게 들어가면 역시 좀 복잡한 문제긴 한데... 이에 대해 복음서도 각각 전승이 다르니까요.
  • 귀여운 순록 2015/04/02 23:42 #

    다소 잔인한 성격이었고 반란과 소요를 막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던 빌라도를 생각하면 예수를 풀어줬을리가 없죠. 오히려 증거가 좀 부족해도 잡아죽이려 들지 않았을까...
  • Mr 스노우 2015/04/03 05:11 #

    로마식 사법 절차나 변호사 등등의 권한은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을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물론 본문에 서술한대로 정말 로마 입장에서 별 위협이 안된다면 굳이 죽이려 들지는 않았겠습니다만..
  • AvisRara 2015/04/03 01:08 #

    요게 좀 미묘한 부분이 있는게 스노우님께서 소개한 주장을 반박하는 견해로 어째서 예수 일당 중에서 '예수'만 처형당했는가 하는 질문이 있더군요. 보통 반란을 꾸미거나 선동한 경우 주모자와 핵심 동조자들을 함께 체포 혹은 처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을텐데(실제로 제자들의 반응은 그러했고-도주, 은신- 결과적으로 그들이 예수사건을 전파하기도 했고) 빌라도는 일당을 추적하는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대사제 측에는 그런 기미가 보이죠.(베드로의 부인否認, 사도행전) 다만 적극적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데 아마도 카리스마적 인물에 의존하는 예언운동의 특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쪽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윗글의 견해에서 로마의 입장만 수정합니다. 실제로 위협을 느낀 것은-이스라엘 예언 문화에 익숙한- 사두가이 계열의 유다 지도층이었고 로마로부터 지도력을 의심 받던 빌라도(빌라도는 좋은 사람도 유능한 사람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유다 부임 초기부터 지나치게 강압적으로 통치해서 유다인들에게 뿐 아니라 로마에서도 좋은 평을 받지는 않았던 듯 합니다. 유다인 지도자들은 이런 빌라도를 협박합니다.-그를 풀어준다면 당신은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는 예수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쉽게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입니다.(전통적인 해설에 좀 더 가깝죠.) 로마 행정관에게 식민지 백성 한두명 죽는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빌라도가 걱정한 것은 예수가 일으킬 소요가 아니라 유다 지도자들이 일으킬 소요 혹은 고발-어느 쪽이든 로마당국에 의해 그의 지도력이 의심받을만한 일-이었고 예수는 가야파의 말대로 모두를 위한 희생양으로 처리됩니다.

    세줄요약
    1. 유다인 지도층은 예수에 대해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
    2. 빌라도는 정치적 입지가 불안했다.
    3. Profit!!

    ps. 이쪽에서는 유다인의 왕(INRI)이라는 죄목을 을에게 끌려가게 된 갑의 짜증으로 이해하더군요.
  • Mr 스노우 2015/04/03 05:14 #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렇게 생각해볼수도 있겠지요. 예수는 이 시점까지는 정치적 소요를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분자이지 본격적으로 반란을 선동하거나 계획하지는 않았습니다. 본격적인 저항 조직이 있었던것 같지도 않구요. 예수 사후 제자들의 활동도 흔히'부활'이라고 이야기되는 어떠한 사건을 체험한 뒤의 일이지(죽은 자의 부활은 당연히 역사학적으로 입증할수 없는 사건이지만, 제자들이 예수 사후 무언가 강렬한 영적 체험을 했다는 것만은 대다수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예수 체포 직후에는 어이없을 정도로 와해되는 모습을 보였지요. 그런 상황에서는 잠재적 지도자 한 명만 잡아 족쳐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 사건만 봐도, 예수 처형과 상당히 흡사한 시나리오인데, 안티파스가 요한이 백성들을 선동할 것을 두려워하여 처형한 케이스거든요. 하지만 이때도 요한만 제거했지, 그 제자들은 건드리지 않았던 것과 비슷합니다. 둘 다 본격적인 반란조직을 결성한게 아닌만큼 머리만 쳐내도 알아서 사그라들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면 유다 지도층이 소요을 일으켰을까?도 글쎄요.. 기본적으로 이 시대의 유다 지도층, 즉 성전 사제들은 과거와 달리 로마 당국이 직접적으로 임명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과연 이들이 소요를 일으킬 수 있었을지 의심이 갑니다. 이들의 권위와 권력은 반 이상 로마의 제국질서에서 나오는 것이거든요. 로마가 이들에게 맡긴 임무는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키지 않고,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는 건데 이들이 소요를 일으킨다면 그 임무를 정면으로 거부하는게 되겠지요. 빌라도는 조금만 수틀려도 사제들을 교체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카야파는 이 시기 사제들 중에서는 눈에 띌 정도로 오래 대사제 직을 수행했습니다. 그건 그 사람이 유능했다는 말이고, 특히 빌라도로 대표되는 로마 당국과 협조가 원활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또한 빌라도가 유대 문화에 무지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류의 카리스마 형 예언자들이 군중 소요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쯤은 알았겠지요. 더욱이 성전 사건도 있었으니.. 그런 경우 적절하게 처리하는 것은 분명 빌라도의 직무 중 하나였습니다.
  • AvisRara 2015/04/03 18:37 #

    저도 대체적으로 이쪽과 저쪽 사이의 어디쯤 되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몇가지 위 이야기를 분명히 하기 위해 첨언을 한다면-제가 혼동하기 쉽게 써놨네요-_-;;- 저 의견이 주목하는 부분은 빌라도가 처한 상황과 반응입니다.

    필론과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기존의 유다총독들에 비해 강압적인 통치를 했기에 많은 유다인으로부터 반감을 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10년이나 유다총독직에 머무는데 (이것이 그의 통치에 대한 로마의 신뢰이건 아마도 하급 귀족이던 그를 무시하여 오지에 박아둔 것이건 간에) 그러려면 유다인들을 단속하고 황제나 시리아 총독에게 탄원할 수 있는 지배층-유다 대사제와 최고의회-의 협력이 절실했고 실제로 받아낸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 문제에 와서 빌라도는 심문 결과 '망상쟁이'로 취급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경우 유다 지배층이 자신에 대한 협력을 철회할 수 있고 그것이 유다인들의 소요를 방치하거나 조장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에 대해 로마에 고발할 수도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 로마 시민권자(혹은 로마의 친구이자 동맹자)이기도 할 테니 말입니다. 저는 후자 쪽이 빌라도에게 더 위협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빌라도는 사마리아 학살 건으로 인해 36년 시리아 총독에게 고발당해 황제에게 해명하기 위해 로마로 떠난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마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빌라도는 반란의 기미를 진압하기 위해서라기보다-예수는 12명으로 된 심복을 통해 조직을 구성하고 파견하여 지지자들을 모았습니다. 진짜 반란이라면 후속 조치가 있어야 겠지요.- 유다 지도자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마지못해-예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가 침해당한 부분에서- 예수를 사형에 처한 것에 가깝지 않을까 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문제는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헤로데에게 헤로디아는 하스모네아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하여 유다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회였지만 요한의 비난은 많은 유다인들의 불만을 일으키고 -실제로 그를 몰락시킨- 나바테아의 불만을 지지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또한 잔치에서의 약속은 토호들에게 그의 권위와 신뢰를 드러내는 자리였기에 물러서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투옥해서 고립시키고 지지자들의 반응을 확인한 후이니 더 쉽지 않았을까요?
  • 2015/04/03 18:3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Mr 스노우 2015/04/04 05:27 #

    뭐 사실 단적으로 결론을 내리는건 불가능하죠. 사료가 극히 제한되있으니까요. 그저 정황증거를 가지고 최대한 추측을 할 뿐이지요. 저는 당시 유대의 권력 구조를 볼때 빌라도가 예수를 처형하는걸 망설일 이유가 딱히 없었다고 보는 것이고, 그 권력 구조상에서 빌라도와 유다교 대사제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협조하는 관계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고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시기의 대사제는 유다 민족의 대표라기보다는 절반은 제국의 공무원이라고 보는게 더 정확할수도 있으니까요. 이 사제조직이 유다인을 선동해서 소요를 일으키는건 자기 기반을 스스로 파버리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데 이들이 그 점을 몰랐을리가 없지요.

    그리고 예수의 핵심 메시지인 '하느님 나라'가 이미 명확한 정치적 함의를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빌라도와 유다 지도층의 관계가 어떻든간에,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성격 자체만으로도 빌라도가 예수를 죽이는 것을 망설일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이상이 제가 판단한 바고, 학문적 영역에서는 어떤 주장이든 반론이 나오는게 당연한 일이죠 ^^
  • AvisRara 2015/04/05 02:20 #

    제 생각에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내용이 상당부분 비슷한 것 같습니다.(뭐, 제가 잘 못 생각할 수도 있지만요^^;;) 다만 그 가운데에 제가 오해하게 표현했나 싶은 것이 있어서 조금 덧붙이고 싶습니다.

    저 역시 빌라도와 유다 지도자들은 협력적인 관계 이상으로 협력할 수밖에 없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의 지배는 유다 민중들에게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불만을 전통적 권위와 여러가지 제의, 축제를 통해 억제하고 해소하는 역할을 대사제를 비롯한 유다 지도자들이 로마에 제공하지 않았나 싶습니다.(로마는 그들에게 권력과 무력을 제공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빌라도가 대사제와 유다인 지도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기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폭동을 주도할 리는 없지만 태업만으로도 불안을 야기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시위'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 역할이 충분하지 않았을 때(대사제와 지도자들의 영향력 상실, 그 일부가 마찰을 주도) 1차 유대전쟁의 원인 중의 하나가 되니 말입니다.

    게다가 제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소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유다 총독의 권한이 막강하다 할 지라도 로마 시민권이 있거나 '로마의 친구'로서 대우받았을 일부 인물들은 황제나 유다 총독의 상관인 시리아 총독에게 고발이나 탄원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빌라도가 이 부분을 '더' 껄끄러워하지 않았겠냐는 것입니다. 말씀하신대로 빌라도에게 이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식민지 촌놈 하나 없애는 것은 일도 아니지요.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제한적 정치 집단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빌라도의 심문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예수의 대답은 그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요한이 사기를 친 것이라면 별 수 없지만...^^;) 반란의 징후-무장, 병력의 이동-가 보이지 않는 다는 점은 빌라도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예수의 진술('내 부하들이 싸워')에서도 나타납니다. 빌라도는 반란이 아닌 폭동을 칼이 아니라 몽둥이로 진압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1. 빌라도와 대사제는 협력관계 다만 유다의 권력을 두고 미묘한 긴장관계(조선시대 고을 수령과 아전?^^)
    2. 주도권은 빌라도에게 있으나 그 자신의 행적에서 보이듯 대사제 카야파는 정치적 수완이 좋은 자
    3. 예수 문제로 대사제는 빌라도를 압박(+부탁)
    4. 방치했을 때 실제로 위험해질 요소도 있고 유다인들을 경계시킬 본보기
    5. 빌라도는 마지못하는 척 받아들임('너 나한테 빚 진 것임' ㅋㅋㅋ)

    이렇게 진행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대사제가 로마인의 손을 빌린 이유에 대해서는
    1. 예언자로 주목받는 인물에 대해 직접적인 위해는 정치-종교적 부담
    2. '다윗의 후손'으로서 예수에 대한 기대를 꺾기 위해 그의 무력함을 드러냄 - 지지율 하강
    3. 빌라도의 권위를 존중하고 있다는 점과 로마의 친구로서 충성심 어필
    등등



    ps.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제가 이 의견을 냈다고 여기실까봐(김치국인가요?^^;) 첨언하면 대부분 제 의견은 아니고 저 역시 관련업계에 몸 담고 '있을 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들입니다.

    ps.2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으면 트랙백 할 걸 그랬습니다. 스노우님께 죄송하네요.
  • Mr 스노우 2015/04/05 11:36 #

    저도 크게 다른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 주장도 몇몇 학자들의 최근 주장들을 공부하면서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주장에다가 제 생각을 덧붙인거구요.

    다만 요한복음 문제 말인데요. 예수와 빌라도의 대화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발언은 다른 복음서에는 전무하고 오직 요한에만 나오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고 말하기는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역사적 예수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서 요한 복음서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사료로 거의 이용되지 않습니다. 요한 복음에 서술된 예수의 발언은 실제 역사적 예수의 발언이라기보다는 예수의 생애에 대한 요한 공동체의 묵상이자 신앙고백이라는게 많은 학자들의 주장이지요. 가장 일찍 기록된 복음서로 대부분이 동의하는 마르코 복음계열 복음서의 예수와 요한 복음이 서술하는 예수의 발언은 너무나도 다르거든요. 이건 그리스도론이 정립되어가는 과정에서 봐야지 요한 복음서가 사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역사적 예수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일찍 서술된 복음서들이 해당 장면에서 이에 대한 언급이 전무한 상태에서 요한 계열의 서술에 신뢰를 보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 5thsun 2015/04/08 10:16 #

    저는 개인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서.

    당시 복음서 저자들이 무슨수로 심문과정을 알았지?

    당시 로마와 유대가 지금처럼 심문을 기록해서 요구하면 심문내용을 공개하는 세상도 아니었을탠대...

    거기 배석한 사람들은 성서의 묘사에 따르면 빌라도와 그 똘마니, 대제사장과 그 똘마니 들 뿐이었는데

    대제사장이나 빌라도 혹은 그 똘마니들이 기독교로 개종이라도 하기 전에는 심문 내용을 알 수가 없을탠대...

    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 BigTrain 2015/04/03 16:37 #

    1. 성전 사제들이 바리새파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레위인들처럼 전문 사제집단 쯤 되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군요.
  • Mr 스노우 2015/04/04 05:28 #

    아무래도 익숙한 내러티브라서 그런 인상을 갖게 되는데, 실제로 사제집단은 사두가이죠.
  • 별의내공 2015/06/02 15:09 #

    역사적 예수에 대해 최근 찾아보고 있는데, 이 블로그 내용 또한 괜찮네요. 앞으로도 역사적 예수 관련한 블로그글을 써주시면 더욱 감사드리겠습니다. 특히 모 위키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내용 중 잘못된 점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그 위키 내용을 그대로 믿기는 조금 곤란해서요. 이전에는 리그베다 위키엿지만, 그 내용이 전부 '나무 위키'라는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ps. http://charger07.egloos.com/3465011 여기에도 댓글 달았습니다. ㅎㅎ
  • Mr 스노우 2015/06/02 18:32 #

    그 위키 내용 제가 일부 수정해놓긴 했는데 워낙 반종교 꼴통들이 많아서 말이죠. 역시 답은 학술서를 찾아 읽는거라고 생각합니다. 국내는 거의 예수 세미나 쪽의 책들만 번역되 있지만, 그쪽 책들도 읽어보시고 제가 인용한 샌더스 등의 책도 읽어서 균형을 맞추시는게 도움이 될겁니다.
  • 별의내공 2015/06/07 16:35 #

    나무 위키에서 역사적 예수 항목을 찾아봤더니, 예수 세미나 인원이 500명에서 50명으로 줄었더라고 하더라구요. 그래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그 쪽에서만 하는게 아니었군요. 음, 그러면 그쪽 책도 읽어보겠습니다. 그런데, 헤르도토스나 투키디데스의 기록들을 비판한 주석서에는 무엇무엇이 있나요?
  • Mr 스노우 2015/06/08 05:59 #

    그래도 예수 세미나의 연구성과는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현재 나오는 역사적 예수 관련 연구서라면 반드시 긍정이든 반박이든 반드시 인용하고 넘어가야 하는 학자가 존 도미닉 크로산인것만 봐도요. 고대 사서 주석서는 아마존에서 commentary herodotus나 thucydides로만 검색해도 많이 나올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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