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는 어떻게 개신교 국가가 되었는가 History-근동, 서양사


링크된 지난번 포스팅에서, 메리 튜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소개한바 있다. 여기서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메리 튜더의 즉위 당시 잉글랜드 국민의 대다수는 여전히 가톨릭이었으며, 따라서 메리 튜더의 종교정책은 역시 흔히 생각되는 것보다 상당히 성공적이었다는 최근 연구 결과를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잉글랜드는 개신교 국가가 되었는가? 헨리 8세의 개혁과, 에드워드 6세의 더욱 개신교적인 개혁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가톨릭이었던 잉글랜드는, 어떻게 스튜어트 왕조 시에는 철저한 개신교 국가가 되어 가톨릭을 탄압하고, 가톨릭 국왕을 몰아내기에 이르렀을까?



중세 말-튜더 초기 잉글랜드의 종교

전통적인 해석은 중세 말 잉글랜드의 종교적 상황을 매우 비관적으로 묘사해왔다. 부패에 젖어 활력을 상실한 교회, 서로 유리된 대중과 성직자, 의미도 모른채 기계적으로 라틴어 기도문을 읊어대는 미사, 그저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종교생활 등등이 그 대표적인 이미지이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자면 종교개혁은 필연이고, 역사의 '올바른' 진행방향이 된다. 기존 해석을 따르는 개설서는 여기에 더해서 말한다. "본래 영국사에는 교황권과 왕권이 대립해온 유구한 전통이 있었고, 대륙과는 독립적인 종교적 전통이 있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기반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그런 순진한 이분법이 통하지도 않는다. 수정주의와 재해석의 물결은 단순히 지난번에 소개한 메리 1세의 종교정책 뿐만이 아니라 중세 말, 근대 초의 종교사에 대한 전반을 뒤흔들었다. 새로운 연구와 사료 해석이 기존의 휘그적 담론이 놓치거나 무시했던 중세 말 잉글랜드 종교의 다양한 얼굴을 밝혀놓았던 것이다.

첫째로, 중세 말 잉글랜드의 가톨릭 교회는 과연 프로테스탄트로의 전환이 아니면 치유될 수 없을만큼 부패된 것이었는가? 이 부분에 있어서 지난번 메리 1세 관련 포스팅에서 설명한, 결정론과 시대착오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일단 이 시기 가톨릭 교회에 여러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은 여러 사료로 입증이 되며,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잉글랜드의 개신교화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실 이 시기에 지적된 교회의 문제점들 중 새로운 것은 거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역사 내내 교회와 사회에서 지적되어온 문제였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도 이 문제들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했으며, 그들이 이상향으로 추구했던 저 옛날의 초대교회도 이런저런 문제들이 심각했다.

제도교회도 엄연히 인간이 만든 조직이라 그 사회의 모든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까지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는 끝없는 자기쇄신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한도를 넘어 부패하면 어김없이 쇄신운동이 일어났다. 중세 전성기의 수도원 운동과 개혁 교황들의 등장, 중세 말의 신비주의 운동은 모두 이러한 쇄신 운동의 일환이었다. 종교개혁 시기의 가톨릭 교회가 이러한 자정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일 그랬다면 지금까지 가톨릭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물론 가톨릭 쇄신 운동은 개신교 개혁에 대한 반작용, 즉 반동 종교개혁일 뿐이라는 견해가 예전에는 널리 퍼져있었지만, 현재 학계는 이를 지나치게 치우친 견해로 보고 있으며, 따라서 '가톨릭 종교개혁'이라는 용어가 대신 쓰이고 있다)

기존 개설서에서 말하는 잉글랜드 내의 교황권에 반발하는 전통도 문제가 있다. 이것은 영국사를 자유와 계몽을 향한 움직임으로 해석한 전형적인 휘그식 해석이다. 그러나 국왕과 교황의 대립은 중세 내내 있어온 문제였고, 그것이 개신교 개혁의 기반이 된다고 보는 것은 확대해석이나 결과론적 오류다. 골수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스페인에서도 이런 갈등은 끊임없이 있었다. 애초에 이것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수장으로서의 교황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실제 국가인 교황령의 수장인 교황과 국왕의 현실정치 상에서의 갈등이었다.

둘째, 중세 말 잉글랜드의 종교는 과연 소위 '재미도 감동도 없는' 관습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는가? 개신교 개혁만이 이 죽어버린 교회에 활력을 되찾아주었다고 할수 있는가? 현재의 연구들은 정반대를 가리키고 있다.

당연히 당시 미사는 모두 라틴어로 행해졌다. 하지만 반드시 모든 말을 알아들어야지만 그것이 참석하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종교활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 행위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절대적인 존재의 현존, 더 나아가 그러한 초월적 존재와의 일치를 체험하면서, 현실을 초월하는 느낌, 즉 '거룩함'을 경험하는 것에 있다. 많은 증거는 중세 말의 수많은 대중들이 이런 '거룩함', 혹은 '신성함'의 체험을 갈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세 말, 근대 초의 가톨릭 전례들, 특히 대미사는 이러한 체험을 위해 시각적, 청각적으로 세심하게 짜여진 전례였다.

그리고 이를 돕기 위한 보조도구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Lay Folks' Mass Book과 같은 영어로 된 서적이었다. 이 책은 각 전례마다 사제가 어떤 동작을 할때마다 평신도가 어떤 지향의 기도를 바칠 것인지를 세심하게 알려주고 있다. 가톨릭 교회라고 해서 자국어를 통한 신자 교육에 무관심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또 하나 고려해야 할 점은, 중세 잉글랜드 사람들의 삶에서 본당 사목구(parish)가 차지하는 위치이다. 이 사목구는 사실 중세 말 사람들에게 삶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태어나서 교회에 등록되고, 죽어서 교회 묘지에 뭍혔다. 그리고 이들이 함께 참여하는 영성체는 말 그대로 같은 지역 사람들의 연대를 확인하는 공동체 의식이기도 했다. 많은 사료는 평신도 주민들이 결코 종교행사에 수동적으로 반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능동적으로 스스로의 종교적 환경을 만들어나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제와 주민들 간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기성 교회에 대해 대중적 차원에서 눈에 띄는 불만은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이후 종교개혁자들의 주된 공격 대상이 된 연옥교리, 성인공경, 성상, 교회 장식들은 오히려 대중적으로 매우 인기있는 종교적 요소들이었다.

물론 교리적으로 근본적인 도전을 해온 집단은 있었다. 롤라드파라고 불린 존 위글리프의 지지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Ben R. McRee가 지적했듯이, 이들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였는가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절대다수의 대중들은 기성 종교에 굳건히 연결되어 있었음은 명확한 사실이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

헨리 8세가 얼마나 확고한 개혁 정신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실 그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군주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종교정책을 바꿔나갔기 때문에, 판단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개혁 이후에도 독일의 개신교 군주들과 연계할 필요가 있을때는 개신교와 유사한 정책을 적용하였고, 다시 카를 5세나 프랑수아 1세와 연계할 필요가 생기면 다시 정책을 되돌려서 가톨릭적인 전례를 실행하곤 했다. 일단 많은 학자들은 헨리 8세가 스스로를 개신교 신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보고있다.(물론 말년의 정책은 이후 영국의 개신교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국왕 자신의 종교적 취향도 개신교보다는 가톨릭 취향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점들은 영국 성공회 신학자들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헨리 8세의 개혁과 영국 국교회가 기반을 잡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수도원 폐쇄도, Peter Cunich가 지적하듯, 개혁적 열망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계산과 재정적 필요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어찌되었건 이러한 종교정책이 대중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다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Scarisbrick은 당시 종교개혁에 대한 반응을 크게 세 분류로 나눈다. 소수파였던 열정적 지지자, 역시 소수파였던 적극적 반대자, 그리고 다수의 방관자. 그러나 이 방관자들은, 직접적인 행동을 옮길 마음은 없었으나(사실 이건 반역이나 마찬가지니 당연한 노릇이다), 상당히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그리고 매우 쉽게 적극적 반대자로 돌아섰다.
헨리 8세의 종교정책에 반발한 '은총의 순례' 봉기군의 깃발


그 계기가 바로 앞서 말한 수도원 폐쇄다. 기존의 휘그 시각은 수도원을 부패와 악의 소굴로 묘사했고, 수도원 폐쇄를 통해 영국이 로마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독립된 근대국가로 설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사실 수도원 폐쇄는 헨리 8세에게 막대한 자금을 안겨주었으나, 국가 전체로서는 상당한 부작용을 남겼다. 첫째로는 수도원이 담당하고 있던 초등교육의 황폐화가 있었고, 둘째로는 역시 수도원이 담당하던 빈민구제 시스템이 막대한 타격을 입은 것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잉글랜드 대중 신심의 한 축이었던 수도원이 사라짐으로서 나타난 영적 공허감을 들 수 있었다.

이것은 결국 1536년, '은총의 순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대대적인 민중봉기로 이어졌다. 이 봉기의 기세는 무서워서 왕은 일시적으로 이런저런 타협책을 내놓아야 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건 시간끌기에 불과해서 이듬해에 2차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엔 대비를 하고 있던 왕은 반란을 대단히 잔인하게 진압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어쨌든 이것은 헨리 8세가 자신의 종교정책을 적용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앞서 설명한 중세 말 근대 초 잉글랜드의 가톨릭적 대중 신심의 생명력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잉글랜드의 프로테스탄트화

이렇듯 새로운 영국 국교회에 대한 대중적 반발이 강한 상화에서, 메리 1세의 성공적인 가톨릭 부흥책까지 거친 잉글랜드는 어떻게 그렇게 열성 개신교 국가가 되었을까?

당연히,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할 무렵에도 잉글랜드에서 가톨릭 세는 상당히 강했다. 일단 엘리자베스는 전략적으로 중도 노선을 택해야만 했다. 엘리자베스의 프로테스탄트 국교회는 에드워드 6세가 추구한 정책에 비하면 상당히 온건하고 중도적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뿌리깊은 잉글랜드의 가톨릭 전통을 쉽게 되돌릴 수는 없었다. 1569년에 다시 한번 대규모 가톨릭 봉기가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다시 한번 잉글랜드(특히 북부)에서 가톨릭 교회가 받던 대중적 지지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신학 교수들을 프로테스탄트로 교체했다. 여기서 양성한 개신교 성직자들이 점진적으로 각 사목구의 사제직을 맡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사목구는 잉글랜드 주민들에게 삶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행해지던 전통적인 신심 활동들과 전례는 이들에게 영적 고양을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종교개혁과 수도원 폐쇄는 이러한 부분을 빼앗아갔고, 많은 대중들은 여기에 불만을 품었다. 헨리 8세-엘리자베스 1세 시기에 일어난 민중봉기들이 이를 증명한다. Cunich가 지적했듯이, 대중들이 느낀 상실감과 옛 전례에 대한 향수, 영적 공허감이 프로테스탄트의 이신칭의 교리와 예정설 등으로 채워지기까지는 수십년의 세월이 걸렸다. 즉, 잉글랜드의 개신교화는 대단히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핵심은, 엘리자베스 1세가 이 수십년의 세월을 살아내었다는 것이다. 그 사이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잉글랜드의 원민족주의가 자극되면서 가톨릭이 잠재적 반역자로 몰린 점등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인 요소는 엘리자베스의 장수였다. 여왕이 끈질기게 개신교화 정책을 펴며 가톨릭을 탄압하는동안, 각 사목구의 사제들은 개신교 성직자들로 대체되었고, 가톨릭 시절을 기억하고 향수를 품던 세대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하나 둘 자연스럽게 사라져갔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는 태어날때부터 국가 정책에 의해 개신교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세대였다.

잉글랜드는 이렇게 해서 개신교 국가가 되었다.



참고문헌

Jeremy Black, A Short History of Britain (2nd ed. London, 2015).
Ben R. McRee, "Traditional Religion", in Robert Tittler and Norman Jones (eds.) A Companion to Tudor Britain (Chichester, 2009).
Peter Cunich, "The Dissolutions and their Aftermath", in A Companion to Tudor Britain.
J.J. Scarisbrick, Henry VIII (London, 1997).
Eamon Duffy, The Stripping of the Altars: Traditional religion in England, c.1400-1580 (London, 1992).

덧글

  • 불의타 2016/01/25 15:47 # 삭제

    오랜 기간동안 일관된 정책에 의해, 영국이 개신교 국가가 된거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Mr 스노우 2016/01/25 19:25 #

    감사합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한해서는 그렇습니다.
  • 연성재거사 2016/01/25 16:48 #

    결국 정책을 주도하던 국왕이 오래 살아있었던 것의 영향이 있다는 것이군요.........역시 오래 살고 봐야.......(야!)
  • Mr 스노우 2016/01/25 19:25 #

    그렇죠. 메리 1세가 그만큼 살았다면 영국이 가톨릭 국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까요.
  • BigTrain 2016/01/25 17:39 #

    확실히 왕정국가에서는 왕의 수명 등에 따라 거대한 변화가 따라오는 것도 가능하겠네요. 44년을 즉위했으니 근 한 세대 이상 꾸준히 인적자원을 갈아치운 셈인데, 안 바뀔 수가 없겠습니다.

  • Mr 스노우 2016/01/25 19:27 #

    다른 측면으로 보면, 그만큼 대중신심이 끈질기게 남아있다는 뜻도 되지요. 엄청난 권력을 가진 국왕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한 세대가 다 지나서야 그것이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니까요.
  • 로자노프 2016/01/25 21:03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근데 결국 여왕이 오래 살았다는게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건 이해는 가지만 뭐랄까.......... 뭔가 허탈하네요.
  • Mr 스노우 2016/01/29 00:05 #

    뭐.. 때로는 별거 아닌것처럼 보이는게 의외로 큰 영향을 미치는것도 있고, 역사라는게 복잡하기도 하면서 종잡을 수 없이 전개되는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한다는게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도 하구요.
  • DeathKira 2016/01/25 23:02 #

    어찌보면 극적인 어떤 사건보다는 이렇게 서서히 변하는 게 역사에 있어서 더 흔한 모습이 아닐까 싶네요.
    (국교회 입장에선)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준 셈이군요.
  • Mr 스노우 2016/01/29 00:07 #

    물론 시간만 끌면서 기다리기만 했던건 아니고, 적극적으로 잡아 족치기도 하고 사람 바꿔서 포석도 깔아두고 그랬지요. 아무튼 인간 사회라는게 복잡한 조직이다보니, 실제로 '혁명적'으로 1-2년 안에 확확 바뀌는 그런건 잘 없지요.
  • 함부르거 2016/01/26 01:42 #

    의외로 '오래 사는 것'의 효과는 강력하죠.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그렇고... 경쟁자들보다 단지 오래 산 것 뿐인데 승리자가 되는 거 말입니다. 뭐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는 것도 능력입니다만.
  • Mr 스노우 2016/01/29 00:08 #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흔히 생각하는 막강한 국왕인데도 그저 시간 갈때까지 버티는게 최상이었으니, 민중 신심이나 문화가 생각보다 높으신 분들의 영향력을 크게 안받는 경우도 있다는걸 잘 보여주지요.
  • 네리아리 2016/01/26 10:50 #

    현실은 역시 극적이지도 않고 드라마틱하지도 않죠 -_-)~
  • Mr 스노우 2016/01/29 00:09 #

    작은 차원으로 간다면 극적인 일도 많이 일어나지만, 장기적으로 큰 영향을 주는 사건들이라면 대체로 천천히 변하는게 더 많지요.
  • 2016/01/26 17:5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1/29 00:1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빼뽀네 2016/01/29 10:13 #

    정책에 대한 결정권 및 실행력을 모두 쥐고 있는 군주제의 위력이 잘 발휘된 일이었군요.

    그런데 영국의 국왕들이 신교를 강화하는 쪽으로 종교 정책을 취한 것은 왕권 강화를 목표로 했기 때문인지요?
    특히 영국국교회의 경우 국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던 것인가요?
  • Mr 스노우 2016/01/29 12:08 #

    1.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볼수도 있습니다. 흔히 엘리자베스 즉위로 잉글랜드가 성공회가 되었다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전통신앙이 그 막강한 군주의 위력 앞에서도 끈질기게 버텼다는 말이 되니까요.

    2. 왕권강화라는 확고한 장기적 비전이 있었는지는 사실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게 꼭 개신교 개혁으로만 가능했는가에서 논란의 여지도 많구요. 프랑스, 스페인처럼 전통종교를 유지하면서 바티칸과의 타협, 줄다리기를 통해서도 충분히 왕권 강화를 이루어낸 경우도 있으니까요. 사실, 혼인무효만 이루어낼수 있었다면, 헨리 8세는 가톨릭으로 남아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겁니다.
  • 빼뽀네 2016/01/29 16:26 #

    1. 네 말씀하신 부분은 본문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볼 때 더욱 흥미가 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러한 다수의 삶의 양식이 군주의 일관적인 정책 실현으로 결국 바뀌게 된 것이니까요.

    이번에 작성하신 글을 통해 어떤 정책이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둘째치고)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일관적인 시행이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1인자가 장기적으로 통치를 행할 수 있는 군주제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2. 답글을 통해 알려주신 것처럼 기존 카톨릭 세력과의 타협도 가능한 선택지였다면 더욱 궁금증이 생기네요.
    다수의 (카톨릭적) 삶의 양식을 이토록 끈질기게 뒤바꾸려 한 목적이 말이에요.
  • Mr 스노우 2016/01/30 00:45 #

    군주 개인의 목적을 물으신다면, 헨리 8세는 당연히 혼인무효건이지요. 이것만 해결한다면 기꺼이 가톨릭 신자로 남을 사람이었고, 교황도 사정 들어주려고 했는데 국제정세상 어려웠다는게 문제였고..

    엘리자베스 1세야 그 개인 백그라운드를 생각해볼때 프로테스탄트가 될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리고 종교가 곧 정치 이데올로기인 시대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신민들의 종교를 자신과 같은것으로 바꿔놔야 아무래도 덜 불안하겠지요. (아니면 프랑스의 앙리 4세처럼 자기가 바뀌거나 해야겠지만,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었을테고..)
  • 빼뽀네 2016/01/30 07:40 #

    아 친절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종교가 곧 정치이데올로기라는 관점에서 봐야하는군요.
    조선 후기 왕들이 스스로 도학군주를 자처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하는군요.
  • 키키 2016/01/30 21:14 #

    사실상, 엘리자베스가 잉글랜드의 성공회를 만든 셈이군요.

    그렇다고는 해도, 잉글랜드가 옆 히베르니아하고 비교해볼때 기이하게 가톨릭과 인연이 없는 지역인 것 같습니다.
    성 패트릭이 잉글랜드인임에도 불구, 아일랜드의 가톨릭화를 먼저 이루어내구요.
    가톨릭화도 기이하게 더디고.. 봉기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100년도 안되서 개신교화되고..

    아마도, 런던이 한자 동맹이었기 때문에 개신교에 친숙해서가 아닐지?... '은총의 순례'로 알려진 저 가톨릭 봉기도 그 시작은 잉글랜드 북쪽이거나, 웨일즈가 아닐까 싶은데요.. ㅎㅎ
  • Mr 스노우 2016/01/31 01:05 #

    네 전반적으로 런던과그 부근이 프로테스탄트 세가 컸고, 북부가 가톨릭 지역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은총의 순례 봉기와 엘리자베스 시대의 봉기도 북부가 중심이었지요.

    사실, 근대 이전에 수도라는건 기본적으로 국왕과 그 측근들이 사는 곳임을 감안할때, 런던과 캔터베리가 있는 남부가 프로테스탄트 세가 그나마 높았다는 것은 당연한 노릇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번 메리 1세 포스팅에도 언급했듯이, 그래도 에드워드 6세가 죽을 당시, 그 런던과 남부 잉글랜드의 프로테스탄트도 대략 3분의 1정도로 파악된다고 하니, 개신교 지역이라고 말하기는 힘들겠지요.

    제가 본문에 썼듯이, 중세 말 잉글랜드 가톨릭 교회의 활력과 대중적 지지를 볼때, 잉글랜드가 가톨릭과 인연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국왕이 작정하고 정책을 펴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데, 100년이면 상당히 오래 걸린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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