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의 수난 (1) homo religiosus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이번주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아주 중요한, 1년 중 가장 중요한 절기이다.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하지만, 역사적 연구에서도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수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외로 잘 모르는 사건이기도 하다. 예수의 수난 이미지는 교회에서 보여주는 성극이나 숱한 영상매체를 통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매체들은 대부분 4복음서의 이야기를 적당히 섞어서 만든다. 그래서 이 4복음서가 의외로 상당히 다른 버전의 수난 전통을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떠오르지 않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역사 연구는 예수의 수난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필자는 대략 작년 이맘때쯤에, 이 카테고리에 간략하게 예수가 죽음을 맞아야 했던 이유를 역사학적 입장에서 서술해본 적이 있다. http://charger07.egloos.com/4076745 
간략히 요약하자면, 예수는 유다교 예언자의 전통에 서있던 종말론적 예언자였고, 그의 급진적인 하느님 나라 운동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랬듯이 권력층을 불편하게 할 주제였다. 이 운동이 갈릴레아에 머물러 있을때에는 헤로데 외에는 딱히 충돌할 여지가 없었으나, 군중들의 분위기가 쉽게 고조될 수 있는 축제 시기의 예루살렘에서는 전혀 아니었고, 이 때문에 로마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다.

올해의 포스팅은, 좀 더 세밀하게 수난 내러티브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과연 예수의 생애 마지막 날들에 일어났던 날들은 어떤 일들이었을까?



사료

역사적 예수 연구의 권위자, 게자 버메스(Geza Vermes)가 지적했듯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예수에 대해 다양한 주장을 내세우는 여러 연구자들 대다수가 거의 유일하게 동의하는 부분이다. 우선 가장 오래된 자료, 예수 사후 대략 20-30년 내에 쓰여진 사도 바울로의 서신이 이를 언급하고 있고, 그 외에 당연히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있고, 타키투스와 요세푸스(논란이 있는 대목이나 학계의 중론은 요세푸스의 전체 기록을 가필로 보지는 않는다), 탈무드에 각각 간략한 언급이 있다.

그러나 복음서를 제외하면, 수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서술한 자료는 없다. 가장 오래된 기록인 바울로의 서신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비천한 죄수가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느냐?'는 외부의 공격에 대한 답변으로 쓰인 것이라, 그의 서술한 십자가 처형의 신학적 의미에 집중되어있다. 즉, 상세한 사건의 기록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역시 가장 상세한 기록은 4복음서인데, 문제는 이들 복음서들 간에 상충되는 부분이 매우 많다는 것(사전지식 없이 읽어본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다)과, 복음서들이 현대적인 기준에서 사건을 사실대로 서술하는 역사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위의 사도 바울로가 예수의 처형을 언급한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가 가장 비천한 죄수들이 받는 형벌인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사실은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아킬레스건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시편과 예언서 등 구약 성서의 모티브들을 동원해서 신학적 해석을 만들었다. 복음서의 내러티브는 이러한 해석의 결과물이다. 즉, 복음서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수난의 의미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고, 그 해석을 위한 재구성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역사적인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재구성이나 윤색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R. E. 브라운 같은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수난 내러티브의 전반적인 아웃라인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이 상당수 학자들의 견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사료비판과 역사학적 방법론을 통한 분석이다.

한 가지 덧붙이려는 것은, 복음서의 내러티브가 역사적 사건의 충실한 보도가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가치가 없다거나 왜곡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 사후, 그 사건에 대한 여러 교회 공동체들의 깊이있는 묵상의 결과다. 그것이 역사적 사건을 있는대로 전해주는 것은 아니나, 그 사건의 의미가 이후 교회 공동체에 어떻게 각인되고 기억되었는지를 상징과 은유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가 아주 오래전에 고대 이스라엘 역사 관련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21세기 기준으로 객관적 팩트가 아니라고 해서 반드시 Truth가 아닌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서술을 복음서 저자들이 의도한 신학적 묵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일때 발생한다. 수난 내러티브의 문자적 읽기는 역사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초래한바 있다. 가령, 옛날에는 성주간에 수난 내러티브에 기초한 수난극을 교회에서 본 사람들이 무고한 동네 유대인들을 끌어내서 린치를 가하는 일이 빈번했다. 따라서 수난 내러티브를 신학적으로 읽는 일 못지 않게, 역사학적으로 탐구하는 일도 반드시 필요하다. 둘은 어느 하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이른바 성전 정화라는 사건

예루살렘 입성 이후, 예수의 죽음에 가장 크게 일조한 사건은 역시 성전에서 벌어진 사건이었을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잘못된 이해가 난무하고 있다(모 위키를 보면 대중적인 시각을 잘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예수가 종교계의 부패에 분노하여 채찍을 휘둘렀다는 인식이 많다.(여기다 상인들과 경호원까지 채찍으로 제압했던걸 보면 싸움 좀 했을거라는 상상들까지 하고있다...-_-)

일단 이 사건은, 성전 내 상인들을 예수 혼자서 모조리 제압하는 그런 사건이 아니다(-_-). 예루살렘 성전 앞뜰은 조그만 마당이 아니라 거대한 광장이었다. 게다가 한창 시끄럽고, 북적거리는 축제 기간이다. 한 구석에서 소란이 일어난다고 해도 알아차리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모든 사람의 주목을 끄는 대규모 소동이었다면 당장 성전 경찰이나, 인근 안토니아 요새의 로마군이 출동했을 것이나, 그런 일은 기록에 없다. 물론 사건 이후 사제들에게 보고는 들어갔을 터이고, 그것이 예수의 운명을 결정짓는데 일조했겠지만.

사실 오래전에는 학계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서 예수가 성전의 전례중심 종교에 반대했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예수의 유다인적인 모습을 최대한 제거하고, 오로지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로만 보려는 시각의 일환이다.

그러나 요즘 인정받는 설은, 이 행위가 매우 상징적인 행위였으며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전통을 계승하는 행위였다는 주장이다. 이미 작년 포스팅에 다룬 이야기라 짧게 서술하자면, 예수는 충실한 유다교 신자로 살았으며, 상당수의 증거는 그가 유다교의 정결법을 지키고 성전 중심의 종교를 존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동시에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이 자신의 정당한 지위를 회복하는 가치전복적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카리스마적 예언자였다. 성전에서의 행위는 그 일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가 성전에서 상인들과 충돌한 것은, 그들이 부패한 종교계와 결탁했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 시대의 유다 종교와 사제들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구가 축적되어있지만, 그들이 크게 부패했거나 타락했다는 증거는 딱히 없다. 그리고 환전상과 제물을 파는 상인들은 당시 성전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 꼭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이들이 있어야지만 성전의 전례가 진행될 수 있었고, 예수는 이 전례에 반대한 적이 없다. 오히려 헬렌 K. 본드(Helen K. Bond)의 주장대로,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예수는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발생시키는 사회 자체에 일관적으로 비판을 가했다. 성전에서의 행위는 이 비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이 점도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과 비슷한 부분이다.


나는 너희의 축제를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하여도 받지 않고,
살진 짐승을 바치는 너희의 그 친교 제물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 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 21-24)


구약의 예언자들은 위와 같이 거친 어조로 성전을 공격했지만, 결코 성전 전례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입장은 전례를 드리기 이전에 사회에 '공정과 정의'를 바로 세우는게 먼저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 성전은 파괴될 것이라고 이들은 예언하였다. 예수의 입장도 이들과 같았을 것이다. 성전의 기능에 꼭 필요한 상인들을 쫓아내는 행위는 성전의 기능 정지, 더 나아가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예수의 체포 결정

성전은 1세기 유다인들의 정치적, 정신적, 물질적 중심지였다. 그러한 성전에 대해 민감한 말을 하는 것은 당연히 위험에 빠질수 있는 일이었다. 앞서 예수와 구약의 예언자들 간의 유사성을 이야기하였다. 본드의 지적대로, 예레미야는 예수처럼 성전의 파괴를 상징적으로 예언한 덕분에 죽을 뻔했다.

그리고 예수의 동시대에도 성전 파괴를 예언한 카리스마적 예언자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모두가 예수처럼 처형당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시기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파스카 축제 기간이었고, 예수에게는 추종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예수는 갈릴레아에 있을때부터 헤로데 안티파스 왕을 정치적으로 불안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루카복음에 따르면 헤로데는 실제로 예수를 죽이려고 했고, 예수는 바리사이파의 도움으로 갈릴레아를 탈출한다.(1년 전에 쓴 글에도 있지만, 바리사이파는 예수와 율법 해석으로 대립하거나 논쟁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때에 따라 가깝게 지내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리사이파는 예수의 죽음에 관여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하여, 유다인의 대사제 카야파는 예수가 사라지는 편이 성전과 민족의 안위를 위해 더 낫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카야파는 복음서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로마 당국에 넘기는 역할을 부여받은 인물로, 덕분에 이후 2천년간 수난 내러티브에서 비열한 악역의 역할을 맡아왔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의 목적은 누군가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명심하고, 카야파의 모티브를 한번 탐색해보기로 하자.

대다수의 고대 인물들이 그렇긴 하지만, 요셉 카야파에 대해서 밝혀진 바는 매우 적다. 그 악명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서도 카야파 개인에 대해 알 수 있는 묘사는 많지 않다. 가장 상세한 정보는 같은 사제계급 출신이었던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로부터 나온다. 카야파는 대사제까지 올라갔던 걸 감안하면, 부유한 토지귀족 출신이었을 것이다. 사제 귀족 가문, 즉 사두가이파로서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많은 시간을 보냈을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1세기 유다에서 대사제들은 까다로운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이 시기 로마제국은 유다를 운영하는 일은 토착 귀족들에게 대부분 위임하고 있었다. 카이사레아에 거주하는 유다 장관(프라이펙투스)의 주 업무는 치안과 국경방어였다. 따라서 사실상의 국가 운영은 대사제를 포함한 유다 귀족들의 소관이었다.

이 중 대사제의 의무는 하느님과 그 백성들의 중재자 역할, 즉 성전의 전례가 끊이지 않고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전과 관련된 경우 정치적인 업무(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사회가 아니었으므로)도 수행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로마 당국과 백성들 간의 중재야 역할을 해야만 했다.

간혹 이 시기 유다의 사제 집단이 친로마파나 로마 압잡이 정도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이들의 고충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 입장에서 소중한 성전과 현재의 자치를 지키려면, 로마와의 마찰을 최소화해야 했다. 그러려면 백성들의 불만도 적당히 달래면서 로마의 체면도 만족시켜주어야만 했다. 이들 중 다수는 헤로데 대왕 사후 일어난 봉기에서 로마군의 위력과, 로마가 팍스 로마나에 저항하는 이들을 얼마나 가혹하게 다루는지를 두 눈으로 지켜본 이들이었다. 이들이라고 자존심 높은 유다인 귀족들인데 로마의 통치를 좋아했을리는 없었겠지만,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모두의 이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카야파는 대단히 유능했던 것 같다. 로마의 장관은 마음에 안들면 얼마든지 대사제를 바꿔버릴 권력이 있었다. 예수 시기 장관이었던 본시오 빌라도의 전임자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같은 경우 대사제를 세번이나 갈아치웠다. 대사제에 임명된 뒤 카야파는 최장기 재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라투스 시기는 물론, 빌라도 재임 시기에도 내내 재직했다. 이 말은 유다 장관들이 만족할 만큼 일을 잘 했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뜻이다. 또한 딱히 유다 백성들이 그를 반대했다는 증거도 찾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고 성전 유지를 최우선으로 삼는 이들의 입장과 급진적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주장하며 지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중심이 되는 나라를 외친 예수의 주장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파스카 축제 기간에 예수의 주장과 행동은 이들에게 불안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을 것이다. 물론, 예수에 대한 전승은 그가 비폭력을 견지했으며, 군사적 메시아의 역할을 명백히 거부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사제들 입장에서는 안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소요 사태가 일어난다면 이들에게 최대의 악몽이 실현될 수 있었다. 바로 로마군이 개입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요한 복음서의 다음 기록은, 사실이든 가공이든간에 당시 사제들의 모티브를 비교적 정확하게 담고 있다.


"저 자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 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복음 11: 48-50)


헬렌 본드의 지적대로, 이들 입장에서는, 성전의 가치와 비교해서 갈릴레아 출신의 일개 평민 하나의 목숨이 무엇이 중요했겠는가?


(전체적인 참고문헌은 내일 올릴 예정인 다음 포스팅에서 글을 마무리하면서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덧글

  • 앨런비 2016/03/24 13:44 #

    여기서도 눈에 띄는 이름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여튼 성서역사학에서 판본비교나 그당시 생활상 및 기록과의 대조는 당연한 것인데 주로 종교를 까는 목적으로'만' 말하는게 이바닥에 흔한듯(...)
  • Mr 스노우 2016/03/24 23:22 #

    하지만 이 연구들은 대부분 다양한 종파에 속한 신학자들이 한 것
  • 네리아리 2016/03/24 19:14 #

    잘 읽었습니다. 특별히 흠잡을 곳이 없는 좋은글이네요.
  • Mr 스노우 2016/03/24 23:21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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