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의 수난 (2) homo religiosus

최후의 만찬

체포 결정이 내려졌을 무렵, 아니 그 이전부터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까? 복음서에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대목이 여러 차례 나온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 예수의 발언이었는지, 예수 사후에, 예수의 처형을 구약에 이미 예언된 것으로 포현하기 위해 첨가된 전승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그 전승 중 적어도 일부는 역사적 예수에게로 소급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우선 예수는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을 보았다. 그 예언자들 상당수는 권력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죽을 위기에 빠졌다. 당장 예수의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의 운명만 봐도, 예수가 자신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죽음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복음서 전승은 이 시점에서 예수가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가졌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사도 바울로 서신도 이 부분을 명확히 하고 있고, 딱히 의심할 부분은 없을 것 같다. 물론 복음서에 기록된 식사 내용은, 이후 교회가 예수의 죽음에 부여한 의미가 짙게 깔려있어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최후를 직감한 예수가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식사를 함께 했다는 사실만은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성체성사에서 표현되는 행위, 즉 빵을 쪼개어 나누고 잔을 돌리는 것은 일반적인 식사의 행위다. 그러나 십자가의 처형 이후 제자들에게 그날 밤의 그 행위는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최후의 만찬이 언제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제일 먼저 쓰여진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그리고 그 전통에 선 나머지 공관복음서)는 이 식사가 파스카 식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다인의 하루는 해가 지면 시작하여 다음날 해질녘에 끝나기 때문에, 이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파스카 축제일 저녁에 식사를 하고 다음날(여전히 파스카 축제일, 니산 달 15일)에 죽은 것이 된다. 반면에, 요한 복음서는 예수가 파스카 하루 전날(니산 달 14일)에 죽었다고 기록한다. 사실,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함에 있어서 주 사료는 마르코 복음서이고, 요한 복음서는 많이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요한 복음서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학자들도 상당히 있다.

일단, 두 기록 모두 상당히 상징적이고 신학적 의미에 따른 서술이지,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님을 먼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마르코 복음서는 최후의 만찬에 마지막 파스카 식사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여기서 제정된 성찬례는 곧 새로운 파스카 식사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반면에 요한 복음서는 예수 자신을 파스카 어린양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한 복음서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날은 파스카 축제를 위해 어린양들이 도살되는 날(축제 준비일)이다.

요한 복음서의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고 보는 학자들은, 마르코 복음서 내에 있는 불일치(대사제가 축제 이전에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언급한다), 최후의 만찬이 파스카 식사라면 그에 따른 의식과 쓴 나물, 어린양이 등장해야 하는데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 그리고 파스카 축제 당일에 십자가 처형을 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체포와 심문

예수의 체포와 심문 이야기도 각 복음서마다 전반적인 아웃라인을 제외하면 상이하게 다르다.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으로 끌려가 정식 재판을 받았다.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가 전임 대사제이자 카야파의 장인인 한나스에게 먼저 간단한 심문을 받고 카야파에게 보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카야파에게 받은 심문이나 재판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많은 경우에는 마르코 복음의 전승이 요한 복음보다 더 역사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됨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만찬의 날짜 설정처럼 많은 학자들은 심문 내러티브에 있어서 마르코 복음보다 요한 복음쪽을 더 선호한다. 버메스의 지적대로, 당시 유다교의 재판은 상당히 엄정한 형식에 따라 이루어졌다. 사형죄를 논할만큼 중대한 사건이 한밤중에 대충 이루어진다는건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1년 중 가장 사제들이 바쁠 이 시기에, 성전 업무를 제쳐놓고 사제들을 모조리 소집해서 정식 재판을 열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그런 면에서 이미 예수의 운명은 합의가 되어있었고, 체포해서 아주 간단한 심문만 한 뒤에 곧장 빌라도에게 보냈다는 편이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심문 내용 역시 얼마나 정확하게 복음서에 기록되어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예수의 제자들이 이런저런 연줄을 통해 재판의 전말을 얻어들었을 가능성도 있고, 예루살렘 내에도 예수에게 동정적인 이들이 있었을 가능성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몇몇 역사적 디테일만은 전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요한 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서는 심문에서 대사제가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 혹은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인지 밝히시오"라고 요구를 한다. 다시 한번 밝히지만, 이 심문 내용이 역사적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일단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질문의 성격은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흔히 생각하듯이 이것은 "당신이 신이냐?"라는 질문이 아니다.

크레이그 에반스(Craig A. Evans)가 지적하듯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하느님의 아들'은 곧 이스라엘의 임금에게 주어지는 칭호였다. 이스라엘은 집단적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고, 왕은 그 정치공동체를 대표하는 의미로 가장 특별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나는 그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하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역대기 상권 7:12-13)


즉, 이 질문은 상당히 정치적인 질문이다. 대사제의 질문의 진짜 의미는 "당신이 다윗의 왕통을 이을 '메시아-왕'이오?"이다. 로마 당국이 관심을 가질만한 사람인지를 확인하려는 질문이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는 "그렇소"라고 답하지만, 마르코 복음의 다른 판본과 마태오 복음서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였소" 라고 답한다. 후자는 양쪽으로 해석될수 있는 모호한 편이지만, 부정의 의미가 더욱 강하다. 사실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이 지적하듯이 예수 전승은 거의 일관되게 전 생애에 걸쳐서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왕'으로 호칭하지 않았고, 다른 이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반면에, 이어서 한 대답인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는 대답은 예수의 종말론과 상당히 흡사하다. 이건 구약성서 다니엘 7:13의 환시와 시편 110을 인용한 대답이다. 특히 다니엘 7:13의 주인공인 '사람의 아들'은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주로 사용한 표현이다. 그리고 해당 본문은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백성들을 재판하는 위치에 선다는 내용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가 임박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 나라가 오면, 옛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이 회복될 것이라고 보았다.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수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로 보았다. 열두 제자를 뽑은 것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새로운 나라에서 예수가 자신의 역할을 무엇으로 보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대체로 스스로를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 마지막 예언자이자, 새로운 왕국에서 다니엘서의 '사람의 아들'과 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았다는 의견이 많다. 하느님을 대리하는 통치자이자, 백성과 하느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만일 이 심문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대사제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을 것이다. 예수가 말한 역할, 하느님과 백성 간의 중재자는 옛 이스라엘 왕국에서는 왕의 고유 역할이었고, 지금은 대사제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에반스 교수의 주장을 인용하자면, 첫번째 질문(하느님의 아들이오?)은 로마 당국과 관련이 있는 정치적 질문이었고(예수는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했지만), 둘째는 유다인 사제들 자신들과 관련이 있는 질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첫번째 질문, '하느님의 아들' 질문 때문에 예수가 신성모독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많이들 생각하지만, 사실 이건 정치적 질문이고, 또한 야웨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게 아니라면 신성모독을 적용하기는 어렵다. 헬렌 본드의 주장대로, 예수의 사형 선고 죄목은 '거짓 예언자로서 이스라엘을 잘못 인도한 죄'였을 것이다. 이건 신명기 규정에 따라 사형을 받을 수 있었다. 자신을 메시아라고 선언하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신성모독도 죽을 죄도 아니었다.(훗날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바르 코크바와 같은 봉기 지도자들도 똑같이 했다) 그런데 그걸 입증하지 못한다면, 그건 거짓 예언자라는 뜻이었고 그건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빌라도의 재판

그렇다면 예수는 왜 로마 당국에 넘겨졌을까? 일반적으로는 유다인 법정에 사형선고를 내릴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고대 사회의 법률에는 반역죄 외에도 사형선고를 받을 죄들이 많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로마 당국의 주 업무는 치안 유지와 방어였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간통죄나 그외 율법에 따라 서형선고를 받을 죄들을 일일이 가져와 로마 장관의 결재를 받아야 했다면 그 업무량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실제로 유다인들도 종종 자체적으로 사형선고를 내리고 집행(주로 투석형)했다는 기록도 나타난다.

유다인 사제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긴 이유는 무엇보다도, 예수를 체포한 이유가 그가 군중을 선동할 수도 있다는 정치적 이유였기 때문이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부른 이들은 꽤 많았다. 앞서 말했듯이 이는 상당한 정치적, 군사적 함의를 담은 용어였다. 게다가 예수 자신은 이런 군사적 메시아 칭호를 거절했지만, 그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사회적 약자와 가난하고 압제받는 이들을 중심에 두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정치적 함의가 있었다. 잠재적 '유다인들의 왕'은 분명히 로마 사법의 관할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카야파와 다른 사제들은 로마 당국에 자신들이 '질서 유지'라는 로마가 자신들에게 기대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복음서는 빌라도가 예수와 진리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어떻게든 예수를 풀어주려 하지만 유다인들과 사제들에게 밀려 사형선고를 내린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이후 2천년간 반유대주의의 근거가 되어 무서운 결과를 촉발했다. 하지만, 역사상의 빌라도는 절대로 그런 사려깊은 인물이 아니었고, 자신이 위험하다고 본 유다인들을 가차없이 제거한 인물이었다.

일단 사제들이 계속해서 오랜시간 빌라도의 관저에 머물면서 그를 압박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파스카 축제 준비일은 예루살렘 사제들에게 가장 바쁜 날이었다. 일반적으로 사제들은 돌아가면서 근무하는 파트타임이지만, 이 시기만은 모든 사제들이 풀타임으로 근무해야 했다. 그만큼 성전의 제사 업무가 폭증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업무를 팽개치고 예수 재판에만 몰두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군중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빌라도를 압박하는 장면도 과장이 심하다. 일단 빌라도는 수틀리면 얼마든지 유다인들을 학살한 전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최고 권력자를 한낱 점령지 군중들이 협박할 수 있을까? 제임스 던도, 성서의 빌라도 묘사는 예수 처형의 책임을 로마 당국에서 유다인 권력자들로 옮기려는 초기 교회의 정치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단언하고 있다.

빌라도의 재판도 예수가 '왕 참칭자'인자 여부와 집중되었을 것이다. 아마 예수가 거짓 메시아이며, 군중들을 선동할 위험이 있다는 대사제의 의견도 첨부되었을 것이다. 빌라도와 대사제 카야파의 원만한 관계와, 빌라도 자신의 성향으로 미루어보건대, 그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는 것 자체가 예수의 죽음의 궁극적 죽음이 누구의 책임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오로지 로마 제국만이 십자가형을 내릴 수 있었다.

판결이 내려진 뒤, 복음서는 예수가 채찍질을 당하고 병사들에게 조롱을 받았다고 전한다. 십자가형 이전의 채찍질은 여러 기록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는 전혀 기록하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서 저자들에게 전혀 핵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많은 고대 저자들이 이 태형의 가혹함을 증언한다. 하지만 사실 때리는 사람 마음대로였기 때문에 개인차가 심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죄수가 십자가에서 더 오래 살아남아 괴로움을 맛보기를 원할경우 좀 살살 때렸다. 그러나 예수는 스스로 십자가를 지기도 힘들었고, 하루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상당히 가혹한 매를 맞았을 가능성이 높다.(단 출혈과다나 쇼크로 도중에 죽지 않고, 십자가에서 대여섯시간 정도는 버틸 수는 있을 정도의 강도로 맞았을 것이다)



죽음

십자가형은 고대의 형벌 중 가장 끔찍한 처형 방법 중 하나였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들 중 상당수는 여러 날 동안 고통을 겪다가 죽었다. 또한, 십자가형은 일반적으로 노예와 반역을 저지른 비로마 시민에게만 적용되는 형벌이었고, 이 때문에 이 형벌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비천한 신분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키케로는 이를 가리켜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crudelissimum taeterrimumque supplicium)'이라고 불렀다.

죄수는 일반적으로 십자가의 가로기둥만을 지고 형장으로 갔다. 채찍질을 당한 죄수에게 가로기둥과 세로기둥을 합한 십자가는 견디기 어려운 무게였을 것이다. 더욱이 사료에 따르면 예루살렘 인근에는 나무가 매우 귀했다.(유다 전쟁 당시 티투스는 공성무기를 만들기 위해 매우 멀리서 나무를 날라와야만 했다) 따라서 십자가의 세로기둥은 형장에 영구적으로 세워져서 재활용되었을 것이다.

복음서는 예수가 체력이 많이 떨어져있어서 형장까지 십자가를 지고 갈 수가 없었고, 키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이후 교회가 굳이 끼워넣을 필요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 사실성을 의심할 이유가 별로 없다.(이런 absence of purpose는 역사학자들이 사료의 진실성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도구 중 하나다) 이 이야기는 또한 이 시점에서 예수를 도와야 할 친지와 제자들이 완전히 그를 버렸음을 보여준다.

죄수가 정확히 어떻게 십자가에 매달렸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68년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으로 보이는 예호난이라는 젊은이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그의 발목뼈에는 4.5인치 길이의 못이 박혀있었다. 유골의 형태로 보아 그는 두 다리를 나무 양쪽으로 벌린 상태에서 발목 측면에 각각 하나씩의 못이 박혀 십자가에 고정되었다. 못이 나무에 박히면서 끝이 구부러졌기 때문에 유가족이 시신을 수습할때 못을 빼낼 수 없었던 것 같다. 반면에 팔에서는 못이 박힌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못이 관통한채 발견된 발목뼈

이에 따라 많은 학자들은 죄수의 발목에 못을 박아 십자가에 고정시켰으나, 팔은 그냥 묶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이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여러 변형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손발 모두에 못이 박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복음서에서 손과 발의 못자국 언급이 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어찌되었건, 중요한 것은 어디에 못이 박혔는가가 아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들의 사인은 못이 박힌 것으로 인한 출혈이 아니라, 매달린 자세로 인한 질식사였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의 머리 위에는 티툴루스(titulus)라고 불리는 죄명패가 부착된다. 복음서는 예수의 명패가 '유다인의 임금 나자렛 예수'였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역사적으로 사실이었을 것이다. '유다인의 임금'은 이후 그리스도교 교회가 예수를 해석하거나 부른 칭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헤로데 대왕의 칭호였으며, 정치적인 칭호였다. 이 죄명패는 로마가 예수를 죽인 명확한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로마의 통치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한 왕권을 주장한 이는 이런 운명을 맞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고통 속에서 예수가 어떤 생각을 하였을지는 알 길이 없다. 복음서는 십자가상의 예수 어록을 각각 다르게 전한다. 이 중 상당수는 구약의 인용이거나 이후 교회가 생각한 예언의 성취를 언급한 것이라 역사적 사실성을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단 하나,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만은 실제로 예수가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고 있다.

일단,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에서 이 부분은 아람어가 직접 인용된 경우다.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하느님을 부를때 사용한 '아빠(abba)'나 '아멘' 같은 표현처럼, 예수가 직접 사용한 언어인 아람어로 기록된 단어들은 예수 자신에게까지 소급될수 있는 오랜 전통인 경우가 많다. 둘째로, 시편 비탄의 노래의 일부인 이 표현은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상당히 당혹스러운 표현이어서, 누가 일부러 지어냈을 가능성은 상상하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여기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버메스는 이 외침을 절망감에 사로잡힌 한 인간의 솔직한 울부짖음으로 해석하였다. 버메스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이 죽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끝마치리라고 생각했다. 즉, 자신이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오자 절망에 빠져 이렇게 외쳤다는 주장이다. E.P. 샌더스의 해석도 비슷하나 어디까지나 가능성 중 하나라고 여지를 남기고 있다.

반면에 제임스 던은 예수가 자신이 계승한 예언자들의 운명과 스승인 세례자 요한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이상, 자신에게도 죽음을 분명한 가능성으로 인식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예수가 새로이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서, 자신이 하느님의 종말론적 대리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보았다는 데에는 '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예수 상을 주장하는 다수의 연구자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만은 그 죽음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글 제일 첫문단에 설명했듯이, 예루살렘 사건 이후,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본드의 주장대로, 그 시점부터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도래할 하느님의 나라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로 시작되는 시편 22편은 고통받는 의인의 노래다. 이 시는 전반적으로 비탄의 노래이지만, 결국 의인이 하느님에 의해 신원되며 마무리된다. 던이 지적하듯이, 2성전기 유다교에서는 의인이 비록 고통받고 죽더라도 죽음을 넘어 궁극적으로 신원되리라는 믿음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현세에만 집중하는 전통적인 유다교와는 사뭇 다른 이런 믿음은 결국 부활신앙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주로 지혜서나 마카베오서 같은 제2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니엘서의 환시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되고, 시편의 몇몇 부분도 이러한 부분에서 해석되었다. 그렇다면 예수도 그러한 맥락에서 죽어가며 시편의 이 구절을 읊었을 가능성이 높다. 던은 더 나아가, 이런 신원의 희망의 한 표현으로 예수가 부활의 희망을 품었을 가능성도 제시한다. 다만 실제로 그랬다면, 당대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부활 신앙은 다른 의인들이 살아날때, 즉 마지막 심판의 날에 최종적인 부활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매장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고통은 짧게 끝난 편이었다. 그는 수 시간 내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다. 그 뒤에 그의 시신이 어떻게 되었는가는 의견이 갈린다. 일반적으로 로마는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에게 제대로 된 장례를 허락하지 않았다. 시신은 일반적으로 썩어없어지거나 짐승밥이 되어 사라질때까지 십자가에 매달려있었다. 그 과정 자체가 제국에 반항한 자의 최후에 대한 섬뜩한 경고였다. 그런 면에서, 도미닉 크로산은 예수의 시신이 같은 운명을 맞았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을 당하고도 매장된 유골이 발굴된 예도 있고, 드문드문 매장이 허락된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아무래도, 시신에 대한 유다교의 관습법과 적당한 타협이 이루어져서 유다에서는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에게도 매장을 허락한게 아닐까 싶다. 그런게 아니라면 민감한 축제 기간이라는걸 고려해서 약간의 자비를 베풀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복음서에 기록된대로 예수는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치며 

이상의 정리가 복음서의 기록을 비판적 방식으로 읽고, 또 여러 정황증거와 역사학적 방법론을 동원해서 해석한 예수의 수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성전에서의 사건-최후의 만찬-체포와 심문-처형과 매장이라는 전반적인 아웃라인에는 상당한 의견의 일치가 있으나, 세부적인 디테일에 있어서는 여러 연구자들의 의견이 상당히 갈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여기에서 다수의 학자들이 지지하는 설은 있어도, 확고한 정설은 없다. 이 부분에 있어서 당혹스러워할 분들도 있겠지만, 고대 역사의 많은 사건들의 재구성도 사료 유무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덧붙이며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참고문헌

James D. G. Dunn. Jesus Remembered (Cambridge, 2003), 국내 출판명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새물결플러스. 2012.
E. P. Sanders. The Historical Character of Jesus (London, 1993).
Raymond E. Brown. The Death of the Messiah: From Gethsemane to the Grave (New York, 1994).
Dale C. Allison. Jesus of Nazareth: Millenarian Prophet (Minneapolis, 1998).
Geza Vermes. The Passion (London, 2005).
Helen K. Bond. The Historical Jesus: A Guide for the Perplexed (London, 2012).
--------------. Caiaphas: Friend of Rome and Judge of Jesus? (Louiseville, 2004). 
--------------. Pontius Pilate in History and Interpretation (Cambridge, 1998).
Craig A. Evans. Matthew: New Cambridge Bible Commentary (Cambridge, 2012).
John Granger Cook. 'Envisioning Crucifixion: Light from Several Inscriptions and the Palatine Graffito', Novum Tantum 50 (2008), 262-285.

덧글

  • 앨런비 2016/03/25 13:49 #

    관련해서 4대복음은 대충봐도 친로마적으로 서술할려고 한 느낌이 나타나는 것도 예전부터 지적되는 것일텐디 -ㅅ-
  • 나인테일 2016/03/25 15:13 #

    사형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 형이 아니니 사형 정도 되면 로마 총독 승인이 필요한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아무리 바쁜 일이 많았다고 해도 사형의 가부 결정은 당연히 중요 결정이겠죠. 조선시대에도 사형수 재판은 왕이 직접 관여했는걸요. 지금도 사형 집행은 대통령이 결정하고요.

    야매 법정에서 사회적인 관심을 받는 사람을 대충 사형 때려도 총독이 신경 안 쓸 정도로 당시 예루살렘이 무법천지도 어니었을거고요.
  • Mr 스노우 2016/03/25 15:27 #

    이 글의 내용은 현대 학계의 연구성과를 정리한 것이지 제가 마음대로 추측한 것이 아닙니다.

    우선 고대 로마는 조선이 아니고 현대국가와도 다릅니다.대체로 속주 통치는 토착 엘리트에게 위임하는게 거대 관료조직을 운용하지 않은 로마의 제국운용 방식이었습니다.

    몇몇 자료에서도 유다인 법정에서 자체적으로 사형 판결이 가능했다는 증거를 찾아볼수 있구요. 가령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방인의 뜰을 벗어난 비유다인은 설령 로마시민이라도 로마에 보고할 필요 없이도 사형시킬 권한이 있었습니다. 이건 엄연히 로마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지 무법천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 위장효과 2016/03/25 17:44 #

    요한복음서에서 그렇게 기술했거나 혹은 제대로 목격한 증인없이 흘러나온 이야기를 기반으로 해서 적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복음서내의 기술로만 봐도 예수 재판은 당대 산헤드린 법정의 원칙은 전부다 깨진 엉터리 재판이기도 했지요-아무리 당시 제사장들입장에서는 "저 불순분자 빨리 해결해야겠다!"라고 경각심이 들어서 속전속결로 일을 해치워야 할 수 밖에 없었다지만-. 산헤드린 법정의 재판 규칙보니까 로마 법정하고 맞먹을 정도로 절차가 잘 되어 있더라고요(거의 현대의 사법기관 수준)
  • Mr 스노우 2016/03/25 18:36 #

    요한복음에는 재판 기록 자체가 없습니다. 로마에 넘기기 전 간단한 예비심문 수준이지요.
  • Esperos 2016/03/26 01:49 #

    문뜩 생각이 나는데 제가 본 어떤 책에서는 복음서가 상당히 1차 증인의 증언을 많이 수록한 자료로 여기더군요. 무슨 책이었는지는 적어놓질 않아서 한참 찾아봐야 할 듯하지만...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책임을 묻지 않으려고 했던 초대교회 인사들의 의향이 여실히 드러난 전설 중 하나가 "훗날 빌라도는 회개하고 주교가 되었다."라는 것이었죠. 동방교회 일부에서 저 전설 때문에 빌라도는 성인 취급한단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모든 사람이 동의한 것은 아니라 반대로 빌라도를 유다처럼 취급한 문서도 있지요.
  • Mr 스노우 2016/03/26 12:03 #

    1차 증인으로부터 시작된 전승을 수록한것은 분명히 사실일 것입니다. 다만 그 기억이 세월이 흐르면서 변형이 되었을테고, 흔히 post-easter라고 표현하는 시기의 신학적 경향과 유다인과의 관계 등등이 복합적으로 복음서 서술에 영향을 미쳤겠지요. 거기다가 구약의 모티브를 차용한 서술 방식도 있고.. 그러니 역사적 예수에 대해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세부적인 부분이 상이하게 다른것도 사실 당연한 일이지요.
  • ㅇㅇ 2016/03/26 13:21 # 삭제

    크레이그 에반스는 빌라도의 실제역사/복음서의 이미지 차이에 대해, 실제역사의 빌라도는 대중적으로 알려진만큼 잔혹한 폭군은 아니었고, 복음서의 빌라도는 적절한 정치적 타협을 하고 책임회피를 하는등 실제 이미지와 크게 다르게 볼것도 없다고 주장하던데...이점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시나요?
  • Mr 스노우 2016/03/26 23:52 #

    백성을 잔인한 방식으로 통치하는 지도자라고 해서 기민한 정치가가 아니라는 법은 없지요. 빌라도는 상당히 오래 유다 장관으로 재직하였고, 정치세계에서 생존하는 방법만큼은 잘 알고 있던 사람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반란의 싹이 보인다 하면 여러 사람 죽이는것도 마다하지 않던 통치자라는 것도 역사에 명확히 기록된 사실이지요. 사실 복음서도 분명 역사적 기억에 기반한 전승인만큼 자세히 읽으면 이런 부분이 군데군데 드러납니다. 하지만 수난 내러티브에 있어서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서 빌라도의 모습이 적당히 윤색된 부분도 부정하기 힘듭니다. 따라서 수난 내러티브 몇몇 부분에 나타나는 예수에 동정적이고 우유부단한 빌라도의 이미지는 사실과 다르다는게 많은 학자들의 주장이고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 AvisRara 2016/03/27 22:37 #

    흥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Mr 스노우 2016/04/03 23:56 #

    감사합니다 ^^
  • 멍청한 눈의여왕 2018/07/06 15:23 #

    매장되었다면 그 무덤은 복음서에서 설명하는데로 귀족들이나 사용할법한 무덤이라는것에 동감하시는 건가요? 아리마태아의 요셉 이야기는 심각한 문제를 너무 편리하게 처리하고 있고, 요셉 이야기가 전승의 발전 과정을 따른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예수의 시체를 고급스러운 무덤에 안치시키라 명령하였다. 물론 역사적 증거는 없다.\' 라고 말하는 것과 요셉 이야기의 차이가 있을까요? 요셉은 갑자기 등장해서는 무덤 문제를 해결하고는 퇴장해 버렸는데 지나가던 엑스트라일 뿐이니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람인지조차 다룰 수 없습니다. 요셉이 없었다면 빈 무덤과 육체적 부활 신앙은 존재하지도 않았을텐데(최대 영적 부활을 주장했겠죠.) 다수의 학자들이 무덤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십자가 처형자의 유골은 역사상 단 한구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오히려 발견되지 않는 편이 더 좋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단 한구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십자가 처형자들의 유골의 실종률이 높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는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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