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초의 군대 History-근동, 서양사

들어가며

중세 유럽 사회에서 전쟁은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회 엘리트들은 기본적으로 전사였으며, 그 정점에 선 국왕의 가장 기본적인 소임은 내부적으로는 자신의 왕국과 신민을 보호하는 것이었고, 외부적으로는 자신의 권리를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지켜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군대, 특히 중세 초기의 군대에 대해서는 여전히 대중적으로 잘못된 이해가 많이 자리잡고 있다.


기존 시각: 무질서한 군중의 군대?

일반적으로 중세의 전쟁과 군대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중장갑을 한 기사들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이 기사들이 무식하고, 못 배웠고, 돌격밖에 모르는 바보들이라고 생각한다. 이 무식한 닥돌 기사들과 어중이떠중이 징집된 보병들로 구성된 군대가 일반적으로 중세 초 군대 하면 많이들 떠올리는 이미지인 것 같다. 학계에서는 중세가 과거 통용되던 '암흑 시대'의 이미지를 벗은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중세 초의 군대는 이런 이미지를 온전히 못 벗어나고 있다.(중세 군사사 연구가 중세사 연구의 주류가 아닌 탓도 클 것이다)

사실 여기에는 중세에 대한 편견 외에도, 사료의 문제도 있다. 중세 초의 전쟁을 다루는 연대기는 비교적 많은 편이지만, 대체로 그 서술이 매우 간략해서 전술적 디테일을 복원하기가 매우 힘들다. 둘째로, 이런 전투 이야기를 서술한 연대기 작가들은 여전히 고대 로마의 역사서술 전통에 서 있었기 때문에, 리비우스를 비롯한 로마 역사가들의 언어를 빌려다가 연대기를 썼다. 따라서 이게 실제로 당대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중세가 기사와 기병의 시대라는 이미지는 대부분 기사문학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것은 당연히 중세 귀족들의 이상화한 무용담과 전투 이야기로, 실제 전투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흔히 초기 중세, 즉 카롤링 왕조의 군대나 앵글로색슨 왕조의 군대 들은 어중이떠중이 잡다한 개별 전사들의 집합체로 연상될 뿐, 조직을 갖춘 군대라는 인상을 잘 떠올리지 못하게 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역사학자들의 인식도 그러했다. 1887년, H. Brunner는 초기 중세의 군대는 형편없이 무장하고, 잘 조직되지 못했으며, 대체로 보병인 군대였는데, 이슬람 기병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카를 마르텔에 의해 돌격을 주무기로 삼는 중장기병 전술이 개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샤를마뉴의 봉건제국이 건설되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 주장은 이후 오래도록 정설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재평가

이에 대해 반박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무려 1970년대에 들어서였다. 이 시기에 들어와 Brunner 테제에 대한 여러 방향에서의 공격이 터져나오게 된 것이다. 첫째로, 중세 초의 군대가 오로지 중무장 기사의 충격전술에만 의지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학자 P. Contamine은 중무장 기사에 의한 충격 전술은 사실 중세 초기가 아니라 훨씬 뒤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카롤링 군대의 힘은 오히려 그동안 무시되어왔던 조직력과 수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설은 점차 많은 지지를 얻어가고 있다.(물론 모든 학설이 다 그렇지만, 반박도 있다) 그렇다면 현재 학계에서 논의되는 중세 초기 군대의 조직력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많은 군사사가들도 그동안 중세 군대의 조직력을 매우 낮게 평가해왔다. 1944년에 J. D. Hittle은 "군사적 지식은 로마 제국 멸망과 중세의 도래 이후로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14세기가 되서야 근대적 군사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게 나타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80년대 이후 중세 군사사 연구가 급격히 발전했지만, 대체로 일반인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던 분야라 여전히 대다수의 중세 군사사 비전공자들의 시각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카롤링 왕조 군사사를 연구한 학자 Bernard S. Bachrach는 그 시기 군대가 어떻게 전역을 계획하고 준비했는지의 문제에 집중하여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그가 특히 주목한 사료는 샤를마뉴의 사촌 성 아달라르가 남긴 책자, De ordine palatii였다. 이 책자에는 초기 카롤링 정부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가 서술되어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피핀 1세와 샤를마뉴가 정기적으로 소집한 회의였다.

이 회의를 통해서 군사적으로 어디가 원정이 필요한지가 의논되고, 그 해의 원정계획이 짜여졌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회의를 위해 다량의 정보들이 수집되고, 보고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간략한 사료지만, 기록은 상당히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정보 수집과 분석이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이렇게 분석된 정보는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보고서(capitula)의 형태로 멤버들에게 전달되었다. consiliarii로 표기된 이들 멤버들은 seniores(아마도 경험과 나이가 충분한 귀족들을 가리키는 듯 함)와 praecipui consiliarii(특별한 조언자)라고 불리는 이들로 나뉘었다. 이 회의가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을 감안할때, Bachrach는 praecipui consillarii는 군사전문가들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요한 점은, 앞서 말했듯이 이 보고서가 서면으로 전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세 초의 귀족과 기사들이 글도 읽을 줄 모르는 돌대가리들이었다는 일반적인 이미지에 정면으로 반대된다. 사실 카롤링 왕조는 행정, 군사,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궁정 귀족들의 교육에 대해 상당히 높은 스탠다드를 유지한 편이었다. 또한 회의에서 논의된 사실은 상당히 세심한 보안유지 작업이 행해졌다. 이러한 면을 종합하여, Bachrach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카롤링 왕조 시대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작전 참모조직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중세 초 군대의 또다른 능력은 보급 및 군사 인프라와 관련된 부분이다. 흔히들 이 "암흑시대"의 전사들은 무식하고, 돌격밖에 모르는 바보들이어서 숫자 같은 거에는 약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봤듯이, 이 시대의 군사전문가들은 문맹도 아니었을뿐더러, 산수 능력도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 카롤링 왕조의 군대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대군을 유지했다. 이런 군대가 단순히 현지조달만으로 살아남기는 어렵고, 이런 군대를 유지할 책임을 맡은 이들이 산수 능력이 심하게 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흔히 알퀴누스가 썼다고 알려진 수학문제집 Propositiones ad Acuendos Juvenes가 이 시기 카롤링 궁정학교에서 청년 교육에 쓰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흔히 간과되는 사실이 인프라 정비다. 흔히 로마 제국의 방대한 도로망이 중세에는 완전히 버려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워낙 로마의 토목공사 실력이 좋아서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거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중세의 군사 지휘관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 도로망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로마가 멸망했다고 해서 각 지역의 행정조직이 일시에 싹 사라진 것은 아니다. 카롤링 왕조는 지역 책임자들을 통해서 로마제국이 남긴 도로와 다리를 수시로 정비해서 사용 가능한 상태로 유지시켰다.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 왕조도 비슷한 정책을 시행했다.



나오며

이러한 점들을 종합하여, Contamine부터 시작하여, Bachrach, J. France, J.F. Verbruggen(단 그는 카롤링 왕조의 기병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주장에는 반대하였다) 등 최근 학자들은 중세 초의 군대, 특히 카롤링 왕조의 군대가 흔히 생각되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조직력과 보급력, 뛰어난 보병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유럽의 군대가 오합지졸의 중세 초 군대에서, 몇몇 급격한 변화를 거쳐 근대의 전문화된 프로 군대로 진보했다는 기존 시각은 달라지고 있는 추세다.




참고문헌

Maurice Keen, Medieval Warfare: A History (Oxford, 1999).
John France, 'Recent Writings on Medieval Warfare: From the Fell of Rome to c. 1300',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65 (2001), pp. 441-473.
Bernard S. Bachrach, 'Charlemagne and the Carolingian General Staff',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66 (2002), pp. 313-357.

덧글

  • 연성재거사 2016/04/17 12:10 #

    잘 읽었습니다. 항상 스노우님 글 덕분에 기존의 시각을 재고再考하는 부분에 대해서 많은 영감을 얻습니다.^^
  • Mr 스노우 2016/04/18 00:29 #

    감사합니다 ^^
  • 로자노프 2016/04/17 13:12 #

    그런데... 카롤링거 왕조가 붕괴된 후, 그러니까 9세기 말에서 어느정도 중세 유럽이 안정되는 11세기 중엽 사이의 그 기간까지 그 시스템들이 제대로 유지됬는지요?
  • 슈타인호프 2016/04/17 14:51 #

    그건 좀 힘들지 않았을까요. 일단 군대 규모가 줄면 유지능력에 대한 요구도 줄게 마련이라...
  • Mr 스노우 2016/04/18 00:13 #

    일단 Bachrach 교수는 샤를마뉴 이후의 카롤링 왕조의 왕들과 그 후계자들, 독일 오토 왕조의 왕들이나 동시대 잉글랜드의 군 동원 및 유지 매커니즘에서 특별히 급격한 단절은 없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때그때의 정치적 소요나 군사적 위기 정도에 따라서 유동적인 부분은 있었겠지만, 특별히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고 보는게 현재 주장인듯 합니다.
  • DeathKira 2016/04/17 14:34 #

    조금 궁금한 것이 같은 중세 초라곤 해도 카롤링거 시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럼 메로빙거 시대(5C후반~8C초 정도?)에는 기존의 설이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가는 건지는 좀 궁금하네요.
  • Mr 스노우 2016/04/18 00:29 #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부분인데, 메로빙 왕조의 군사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사료가 너무 적기 때문에 뭐라고 말하기가 힘들다는 점입니다. 현재 메로빙 군대의 '야만족'스러운 성격을 강조하는 주장과, 고대 로마 군대의 유산을 계승한 부분을 강조하는 주장(이 경우는 메로빙 왕조가 이미 상당히 잘 조직된 군대를 보유했다고 봅니다)이 부딪치고 있습니다.

    다만, 가장 최근에 출간된 Leif Inge Ree Petersen의 책을 봐도 그렇고, 메로빙 왕조를 포함한 프랑크 군대가 그동안 과소평가되어왔던 것만은 분명해 보이고, 기존 견해처럼 단순히 무지한 야만족 군대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 ㅇㅇ 2016/04/18 09:23 # 삭제

    서로마가 살아있던 시절에도 야만족들이 로마의 전략과 전술을 모방해서 무시하기 힘든 군사집단으로 자라났는데, 로마가 망했다고 그 경험들이 몽땅 사라졌을리는 없겠죠.
  • 유니콘 2016/04/18 22:23 #

    사실 앵글로색슨족 군대가 오합지졸로 묘사된걸 제가 최초로 본게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이었는데 사실 아동용 역사입문서라 또 책임 너무 가혹하게 묻기는 그렇지 않은지 합니다(.....)
  • 2016/06/17 13:3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6/21 01:1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기번 2016/09/20 22:19 # 삭제

    중세 시대의 과학 산업, 농업기술은 고대 로마보다 더 발달했죠. 고대 로마시대에는 농업기술이 미천해서 라인 다뉴강 너머의 동유럽을 개간하지 못해서, 게르만의 영역으로 존재했는데..중세 시대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동유럽에서 개간과 농업이 가능해졌죠.

    고대 그리스 로마의 사상, 학문, 과학기술은 모두 기독교 수도원을 중심으로 보전되고 있었기에 로마 가톨릭은 메로빙, 카롤링 왕조에게 선진기술과 학문을 전수하면서 유럽을 기독교 세계로 만들어 갑니다.
  • 기번 2016/09/20 22:23 # 삭제

    중세 시대에 중국에서 전래된 화약, 나침반, 인쇄술을 활용해서 총포 등의 신무기를 최초로 만든 건 가톨릭 신부였죠. 중국인들은 단지 화약을 장난감 수준으로 활용했지만, 로마 가톨릭은 화약의 무한한 잠재성을 파악해서 최초로 서구식 총포를 발명했죠.

    흔히 로마 가톨릭이 서구과학의 창조와 발전을 저해했다는 오해가 많은데. 중세 시대에 게르만에게 로마의 학문과 과학, 사상, 기술을 전수한 게 가톨릭이죠.

    그래서, 가톨릭의 지원을 받은 프랑크가 로마의 영광을 잠시나마 재현할 수 있었죠.

  • 기번 2016/09/20 22:26 # 삭제

    중세 유럽에 대해서 여전히 신화와 전설, 무지와 환상에 쌓여 있다는 사실을 느끼네요.

    고대 그리스 로마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발전이 1000년은 앞섰을 거라고 주장하시는 님들이 많은데
    스노우님의 글을 보면 오히려 중세의 문화와 과학이 고대 로마를 능가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중세 유럽이 단순히 기독교의 무지와 광신 속에서 야만적인 암흑기에 쌓였다는 인식이 지배하는 이유가
    뭘까...궁금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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