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개혁에 대한 오해 몇 가지 (2) History-한국, 동양사

1. 이상은 좋지만 현실은 다르지 않나요???

지난번 포스팅에서, 정도전과 그의 급진개혁파 사대부 동료들의 정치개혁안은 결코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재상이 모든걸 다 해먹는 체제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나올 수도 있을것이다.


"어찌됬건 그건 관료제가 이상적으로 잘 굴러갈때 이야기고, 재상들이 썩어빠지고 대간도 제대로 견제를 못하는 상황 되면 어떡하나요? 임금은 하나고 신하들은 다수인데, 딱 세도정치 시대가 그렇게 된거 아닌가요???"


너무 암울한 경우만 상상해서 써놓은것 같지만, 사실 '임금은 하나고 신하는 다수라 군약신강이 되기 쉽다'는 매우 들어보기 쉬운 명제다. 하지만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역사에서 어느 경우에나 통하는 공식적인 진리는 없다. 조선의 체제를 보고 '군약신강'이라는 평이 나온 것은 그 특수한 맥락과 배경을 살펴야 할 문제다. 단순히 임금이 신하에 비해 수적 열세라서가 아니다.
애초에 이양반이 한마디 했다고 그게 바로 진리가 되는것도 아니고...

일단 저 명제가 통하려면, 신하들이 혈연 등으로 얽히고,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매우 협소한 집단이라 일치단결해서 외로운 임금을 압박하는 형세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시기 조선의 관료들이 과연 그런 단일한 집단이었는가? 사실은, 신생 조선의 관료집단이 정확히 그런 집단이 되는것을 방지하는것이 바로 정도전과 조준을 비롯한 개혁파 사대부의 주 목표였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개혁안 자체가 이들이 경험한 고려 말의 정치현실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고려의 정치판이야말로 이중삼중의 혼인동맹으로 얽힌 소수의 명문 귀족가문이 도당의 재상 자리들을 차지하여 정국을 주도하는 케이스였다. 따라서 고려의 재상들은, 정도전이 구상한 '재상'과는 다른 의미로 강력했다. 여기에는 중세 체제의 한계도 있지만, 어쨌든 조선에 비해 정부 각 부서의 통일성과 확실한 계통이 부족한 탓이 컸다. 그러다보니 각사를 주관하는 재상들의 '독립적인 권력'이 막강했다. 이 재상들, 즉 명문 세가의 대표들은 과거와 음서를 통해서 정계를 지배했다.  

그나마 고려가 제대로 굴러갈 때에는 이 가문들이 나름대로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정국을 안정적으로 운영했지만,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과 외침으로 사회 체제가 흔들리면서 우리가 잘 아는 막장의 상황이 펼쳐지게 되었다. 권문세족들이 권력투쟁과 땅따먹기에 열중하면서 마음껏 부패하는 동안, 일련의 막장왕들이 등장하여 역시 멋대로 놀아제끼며 현상을 묵인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당연히 개혁파들의 절박한 당면과제는 이런 상황을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만 이색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는, 어디까지나 고려의 전통적인 귀족 연합정권을 유지하면서 그 체제 내에 신진 세력을 흡수하여 관료의 자질을 향상시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인 반면, 정도전과 조준 파는 아예 고려와는 판이하게 다른 관료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주장이었다는데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급진파는 바로 위의 문제제기를 방지하기 위해, 소수의 귀족들이 주도하는 협소한 정치시스템이 아니라 전국의 모든 사족들에게 개방된, 그러니까 중국에서 시작된 교과서적인 관료제를 체계적으로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도전과 조준이 추구한 학교의 육성과 과거제 개혁, 다양한 방식의 지방 사족 등용안은 바로 이를 위한 수단이었다.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중앙정계에 새로운 피를 수혈받아, 관료집단이 고인 물이 되지 않도록 하고 고려때처럼 소수의 명문세가가 정치를 독점하는 현상을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스템에서 재상은 더이상 고려 말과 같이 이해관계가 일치하며 막강한 힘을 가진, 그래서 왕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소수의 귀족 집단의 좌장들이 아니라, 왕이 합법적으로 등용하고 해임할 수 있는 관료집단의 대표가 된다.




2. 그래봐야 사대부 중심의 엘리트주의 아닌가요??

뭐, 조선 건국을 주도한 개혁파에게 민주주의 사상을 기대한 사람이 계시다면 대단히 미안하지만, 정도전과 조준은 14세기 사람이며 이들이 참고할 수 있는 모델이란 이 땅의 역대 왕조들과 중국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국정운영에 필요한 지식은 여유시간과 재산이 있는 사람만이 습득할 수 있는 것이고, 아무리 법적으로는 양천제였을지 몰라도, 현실적으로 이 시대에 그 조건을 갖춘 사람들은 사실상 사족들뿐이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사대부의 나라 조선'이라는 말에 자동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 시기 사대부는 말 그대로 유학을 공부해서 관료가 될 소양을 갖춘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출신도 다양했고, 중앙의 명문세가처럼 특권층이라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어찌되었건 중앙귀족의 좌장들로 재상 자리와 요직이 채워지고, 그 밑의 자리나 행정 서리직들도 그들과 연계된 이들로 채워지던 고려 말의 상황과 비교할때, 지배층을 전국의 사족으로 확대하고 최대한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려고 했던 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시도였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3. 그래도 태종, 세조는 왕권을 강화한거 아닌가요???

이방원의 쿠데타로 정도전은 살해되고 조준은 실권을 상실했다. 그리고 정도전과 조준의 정치적 반대세력들이 주도권을 잡았다.(태종의 측근들을 보면 종친과 무장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색 계열이나 구귀족들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것은 거창한 '왕권주의'와 '신권주의'같은 정치철학적 대결이 아니다. 태종은 권력을 원했고, 따라서 정도전의 반대파인 개혁 반대세력과 손을 잡아야만 했을 뿐이다.

다시 한번 던컨 교수의 지적을 반복하자면, 이들은 태조 대의 개혁에 의해 상실했던 기득권을 죄다 회복했다. 태종실록은 이때 실시된 과거에서 실력 있는 자들은 모조리 떨어지고, 대신 세도가의 어린 자제들이 뽑혔다고 증언한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태종 자신은 보수파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임용한 선생님의 지적대로, 온건 개혁파였던 이색 계열은 정도전과 조준의 근본적인 개혁은 거부했으나, 고려의 구체제는 수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 속하는 좌의정 하륜이 그 탐욕스러운 이미지에 안어울리게 격노하여 다시 뽑을 것을 지시했다는 데서 이런 점을 파악할 수 있다.
하륜: "내 좌우명: 최소한의 정도는 지키며 해먹자"

그러나 어찌되었건 인맥으로 얽힌 귀족집단의 힘은 분명했고, 태종도 이들의 특권을 상당부분 보장해주었다. 정도전, 조준이 구상했던 광범위한 인재등용과 공정경쟁은 크게 후퇴하였다.(결과적으로 고려 말의 귀족집단과 조선 전기의 지배층 간에 강한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설은 현재 학계에서 강한 지지를 얻어가고 있다) 사실 그런 면에서 태종은 권력을 잡은 대가로 상당히 어려운 딜레마를 떠맡은 셈이 되었다. 고려 말의 막장스러운 상황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정도전의 개혁을 이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태종은 공신과 세가의 특권을 보장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이들을 견제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는 타고난 쇼맨십과 능력으로 이 점을 해나갔고, 필요하다 싶으면 피의 숙청으로 본보기를 보였다. 이것이 태종을 왕권의 화신으로 후대에 보이게 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태종 자신의 능력에서 기인한 바가 크며, 정도전과 조준이 구상한, 안정적인 시스템에 기반한 초월적인 군왕 및 건전한 관료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 명문 세가들의 특권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도를 넘을 정도로 커지거나 부패하지 못하도록 견제해야 한다는것은, 결국 국왕 개개인의 능력에 크게 의존하는 체제라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상황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면서 정국의 안정을 이뤄낸 것은 대단한 능력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조선의 왕권이 그 이전에는 약했다가 태종때 갑자기 강해졌다거나 한건 아니다.

세종은 타고난 성실함과 국가 시스템이 돌아가는 매커니즘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통해, 태종이 구축한 중도적인 체제를 더욱 세련되게 다듬었다. 그래도 고위 관료와 세가의 특권은 여전했으나(사실은 더 강화되었다), 특권층에 대한 국왕의 견제장치에 대한 고민도 더욱 진행되었고, 그 와중에 정도전과 조준의 정책과 비슷한 취지의 정책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책기조는 문종조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가령, 세종과 문종이 신임하였으며, 문종의 고명대신이었던 김종서는 흔히 드라마에서 신권 세력의 수장격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그의 가문은 고려 초와 말의 주요 귀족 가문에 들어가는 명문은 아니었다. 그는 국왕의 뜻을 충실하게 받드는 신하였다. 이런 노력들 덕분에, 정도전이 바랐던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고려 말보다는 훨씬 개선된 정부 시스템을 구축해갈 수는 있었다.

이렇듯 태종 이후의 국왕들은, 근본적인 제도개혁을 추구한 정도전과는 달리, 타협적이지만 폐단이 지나치게 커지지 않는 방식으로 정국을 운영해갔다. 그러나 이러한 견제 시스템마저도 세조의 쿠데타로 치명타를 입었다. 

세조의 집권을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보는 것은 완전한 오해다. 그와는 정 반대로, 세조가 한 일은, 지두환 선생님의 논문에 정확히 지적된대로, 자신의 집권을 위해 세종과 문종이 힘들여 육성한 비특권층 출신 관료들과, 적법한 왕권의 보유자인 단종의 친위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종친들을 몰살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도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지 않았나요???" 라고 물을 수 있겠지만, 왕이 포악하게 굴고, 경연 안하고, 멋대로 대신들 패대기치는게 과연 진정한 왕권 강화로 보이는지 스스로 생각해볼 일이다. 세조가 폼잡고 있는 사이 그의 공신들은 특권층이 되어 태종, 세종 때의 상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비대한 집단이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조 때에 사실상 완성된 것과 다름없는 경국대전은, 임용한 선생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태종과 세종이 그나마 최소한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 만들어놓았던, 특권층에 대한 견제 장치들이 상당수 사라진 상태로 완성되었다.




그래서 결론은

이상의 복잡다난한 서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매우 쉽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왕권강화". "왕권과 신권의 대립" 같은 용어들은 조선 전기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그 매커니즘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부족하다는 점이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 같은 딱딱 떨어지지만 너무 이분법적이고 단순한 용어에 지나치게 얽매이고, 또 '총재정치'라는 단순한 한 단어로 정도전의 정치사상을 규정해버린 바람에, 정도전과 조준을 비롯한 급진개혁파들이 심혈을 기울여 다듬은 개혁안이 가지고 있었던 진정 혁신적이고, 포괄적인 면모는 상당부분 잊혀지고 말았다.

특정한 용어 하나로 모든걸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문제를 부른다. 모든 시대와 사회는 나름대로의 독특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사건이든 정책이든 그것이 탄생하게 된 사회적, 시대적 맥락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인간사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옛날에 살았던 조상님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참고문헌

삼봉집
조선왕조실록

임용한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혜안, 2007).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혜안, 2002). 
존 B. 던컨, 김범 역 『조선왕조의 기원』, (너머북스, 2013).
지두환, 「세조 집권 과정에서의 내종친의 정치성향」, 白山學會 99 (2014), 5.-38.
부남철, 「정도전의 유교국가론과 주례」,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3號 (2008), 327-357.
김석근, 「조선의 '건국'과 '정치체제 구상'에 대한 시론적 접근-몇 가지 쟁점과 관련하여」,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7(2) (2008), 5-27.
김인호, 「정도전의 역사인식과 군주론의 기반」, 한국사연구 131 (2005), 257-284.
도현철, 「정도전의 정치체제 구상과 재상정치론」, 한국사학보 9 (2000), 169-196.


덧글

  • 위장효과 2016/08/04 13:58 #

    하여간 세조가 개갞끼. 할아버지,아버지,형이 기껏 만든 걸 망쳐놨으니.(야)
  • Mr 스노우 2016/08/05 22:52 #

    그 기껏 만든것도 초기 개혁의 이상이 상당히 후퇴한 상태라는걸 감안하면 더 심각하죠
  • 로자노프 2016/08/04 14:33 #

    결국 세조가 웬수군요. 세조가.
  • Mr 스노우 2016/08/05 22:52 #

    사실 이 글의 핵심은 세조가 아닌데... 세조는 이미 상당히 중도적으로 변한 개혁에서 마지막 남은 안전장치를 제거한 셈이죠.
  • 111 2016/08/04 14:48 # 삭제

    아 수양대군 선생님 차라리 태조 유산을 받들어 요동으로 가서 여진족들의 왕이 되시지 ㅠㅠㅠ
  • 11111 2016/08/04 15:08 # 삭제

    이번글도 저번글같은...
  • 까마귀옹 2016/08/04 15:12 #

    생각해보니까 정도전 척살한 인물이 '이방원'이 아니라 '이유'였다면 정말 끔찍하군요.

    태종이 그래도 그만한 인물이고 성과를 직접 보여줬으니까 정도전 척살하고도 욕을 덜 먹는거지, 아니었으면.......
  • Mr 스노우 2016/08/05 22:53 #

    그게 정도전 개혁 실패가 남긴 가장 아쉬운 유산입니다. 그만한 인물이 아니더라도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관료제가 수포로 돌아간거..
  • 2016/08/04 17:1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8/05 22:5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무리수 2016/08/04 17:51 # 삭제

    신하들이 일치단결했죠. 국가에 세금 안 내는것에 말입니다.
  • Mr 스노우 2016/08/05 22:54 #

    맘대로 생각하슈
  • 435345 2016/08/09 12:59 # 삭제

    별로 대단한 반박은 아니네요 실망
  • 유니콘 2016/08/04 22:22 #

    결국 사람들의 아쉬움은 그게 아닐지합니다..... 정도전 이방원의 결합의 시너지가 일어났으면 어땠을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다만 정도전이 저걸 실행을 해보기도 전에 끔살당하게되는지라(.....) 여튼 이후 의외로 잔당들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인 태종과 무조건적인 반대편끔살과 공신들이 본인의 난폭한 행위들을 참는 대신 공신들에게 무한관용을 베풀며 센척한 세조는 비교하면 태종에게 미안하죠(.....)
  • Mr 스노우 2016/08/05 22:49 #

    태종은 위협이 될만한 이들은 이미 다 죽인데다가, 본인도 어떻게든 개혁을 추진을 해야하고 보수파들을 견제할 필요도 있었으니까요. 그러자니 개혁파들을 어느정도는 남겨둬야죠.
  • 홍차도둑 2016/08/04 18:13 #

    압구정과 서울의 비대화가 시작된 것이 세조때부터니까요...
  • 누군가의친구 2016/08/05 01:53 #

    아무리봐도 세조가 손댄 결과의 악영향은 하나 둘이 아니라서 옹호하긴 참 어렵죠.
  • ㅎㅎ 2016/08/05 15:58 # 삭제

    전국의 모든 사족에게 개방된... 이란 개념이 성종대 시작된 사림의 제도권 진출을 댕기는 정도의 결과면 하느니만 못할지도.
  • Mr 스노우 2016/08/05 22:51 #

    그래서 극소수 중앙의 명문 귀족이 적당히 나눠서 더 해먹는게 더 바람직한 체제라구요?

    그리고 조선 중기의 사림과, 여기서 말하는 재지사족은 엄연히 다른 개념입니다만.. 어차피 조선 중기의 사림의 상당수는 중앙의 명문가들 출신이고. 전국의 인재등용은 정도전의 몰락 이후 사실상 물건너 간겁니다.
  • 앨런비 2016/08/06 12:41 #

    사실 젤 아쉬운건 방석이 세자된거...-__- 사실 방원이 같은 경우는 방석가 아닌 아닌 자신이 세자거나, 방과가 세자이기라도 했다면 정도전을 숙청했을지 의문이라.
  • 2016/08/06 12:54 # 삭제

    위 리플보고 생각난건데 이방원이 세자가 아니라도 장자인 이방우가 사실상 역할을 못 하고 있어 사실상 장자인 이방과가 세자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If긴 하지만 방석의 책봉이 너무 무리수였단 걸 생각하면..
  • 2016/08/06 12:58 # 삭제

    저 그리고 다른 궁금증인데 당시 환경이 정도전의 개혁을 받아들일수있었나요?
    전국의 사족에게 개방한다 하더라도 당시 교통이 안 좋아서제주도나 함경도 쪽 의 사족들은 사실상 빛 좋은 개살구가 되는 거 아닌가요?
    제가 너무 서울과의 거리에만 집중한 건 가요?
  • Mr 스노우 2016/08/06 22:46 #

    어차피 전근대에는 어느 나라나 그런 제약이 있을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정보가 빠르고 부가 집중된 지역이 과거에서는 유리하죠. 명나라도 강남 출신들이 과거에서 우세할수밖에 없었던 것처럼요. 그래서 정도전과 조준은 과거제의 그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천거제와 효렴 등을 보완정책으로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국가에서 대놓고 중앙귀족의 나눠먹기를 밀어주는 것과, 시스템상에서나마 지방 사족의 등용문을 확실히 보장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 ㅇㅇ 2016/08/09 00:02 # 삭제

    읽어본 지 오래되서 햇갈립니다만, <조선왕조의 기원>에서 던컨 교수가 주장한 것은 조선왕조의 건국 자체가 중앙귀족-사대부들이 무신정권-원간섭기 동안 입은 피해를 재건하기 위한 시도였고 그 결과 국가적으로는 중앙집권이 급속도로 진전되었다는 것이 아니었나요? 말씀하신 바와 책의 내용이 약간 맥락이 다른 것 같아서요. 그리고 <조선왕조의 기원>에서 정도전과 조준의 시기에서는 지배층을 전국의 사족으로 확대하려 했다는 내용은 어떤 부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 Mr 스노우 2016/08/09 13:29 #

    네 참고했다고 해서 제가 던컨 교수의 해석 프레임을 모두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닙니다. 재지사족의 등용 확대는 임용한 선생님의 저서에서 주로 참고했습니다.
  • 2016/08/11 18:0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8/11 19:0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지나가던과객 2016/08/20 16:45 # 삭제

    태조가 막내를 후계자로 안 세우고 장남이나 차남을 내세웠다면 세조가 집권할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그럴 경우, 훈민정음 창제는 어떻게 되는 것임?
  • 델카이저 2016/08/22 11:14 #

    양녕대군은 연산 이상가는 막장을 보여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만...-_-;;; 상당히 많은 쉴드거리가 있지만 세자시절에 양녕이 친 사고들은 레알 쉴드 불가 급으로 폭군이 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했습니다.

    혈통과 장자 세습이라는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왕위에 간 연산군이 어떤 왕이 되었는지 생각하면, 훈민정음이 문제가 아니고, 세조 정도면 그나마 나은 편이죠..

    게다가 세조가 쿠데타 성공한 것도 문종이 급사해서인데, 이거야 세종대왕이 어떻게 해볼 문제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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