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도대전의 재해석 (번역) History-한국, 동양사

이 글은 Richard Rafe Champion de Crespigny 박사의 저서 Imperial Warlord: 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Leiden, 2010)의 3장의 일부 The Guandu campaign: a reappraisal(p. 147-152)를 발췌하여 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볼드체는 중요해보이는 부분의 가독성을 돕기 위해 제가 추가하였습니다. 

de Crespigny 박사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의 교수(은퇴)였으며, 후한 왕조 연구에 있어서 국제적인 전문가입니다.


관도 전역: 재해석

이번 장에서는 다양한 역사서에 기록된 관도 전역의 서술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서술들은 전반적인 면에서는 정확하다고 봐도 될 듯 하다. 거대한 군대를 모은 원소는 바로 황하를 건너 관도에 위치한 조조의 방어선으로 진군했다. 비록 그의 군대는 조조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조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조조가 그의 보급창과 수송대를 파괴하자, 원소군은 혼란에 빠져 후퇴했다. 그의 참모들 일부는 그의 본대를 통해 조조를 견제하면서, 별동대를 파견해 적군의 취약점이 될 수 있는 측면이나 후방을 노리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원소는 그러한 가능성 대부분을 방치해버렸다. 다만 하급 지휘관인 한순과 독자적인 성격이 강한 유비만을 활용했을 뿐이었다.


이 이야기의 핵심에는 원소가 훨씬 더 막강한 세력을 가졌으나 제대로 활용을 못했으며, 융통성 없이 오판으로 공세에 나섰다는 가정이 깔려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원소가 실제로 조조보다 우세한 병력을 거느렸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사실 이 질문은 배송지 자신이 먼저 제기하였다. 그는 조조가 많은 전투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과정에서 적병들을 자신의 군대에 흡수하였음에 주목하였으며, 대표적으로 청주병이 된, 신뢰성에 문제가 있지만 이른바 30만이라고하는, 황건적들을 예로 들고 있다. 배송지는 또한 조조가 확장된 전선을 유지할 능력이 있었음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조조가 7만에서 8만에달하는 적병을 죽인 이야기에 주목하며, 정말로 조조가 지휘하는 군대가 그렇고 소수였다면 그것이 가능했겠는가에대해 의문을 표한다. “원소의 대군은 스스로의 손을 묶고 살육을 당하러 갔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는가?” 그는 양군의 수적불균형이, 조조의 성과를 강조하기 위해 과장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Leban이 지적하였듯이, 후대주석가들은 배송지의 주장을 거의 따르지 않았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몇 안 되는 이들도 원소가 우세한 병력을 거느리고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데 동의하였다. 그의 공격 계획은 따라서 과도한 자신감의 본보기가 되었고, 그의 패배는 완고함과 오만함의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우리가 양측이 통제하고 있던 인적자원의 측면과 전반적인 전략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다른 그림을 그릴수도 있다.


후한서 군국지에 따르면, 2세기 중엽 원소가 이후 통치하게 될 기주에는908,005 호와 5,440,340 명의 인구가 있었고, 조조가 다스리던 연주는 799,302 호와 3,394,597 명의 인구가 있었다. 그의 세력 중심지인 허창이 있는 영천군은 264,440 호와 1,436,513 명의 인구가있었다. 결국 차이는 대략 50여만 명 정도가 된다.


원소가 동쪽으로는 청주, 서쪽으로는 병주의 지배권을 주장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는 막 공손찬을 격파하고 화북 평원의 북부 지역의 명목상의 지배권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주의 대부분의 지역은 지방 세력가들의 손에 남아있었다. 선우보와 염유 같은 이들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조조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비록 원소가 태행산의 흑산적 집단들 다수를 격파하고 그의 조카 고간을 병주자사로 임명하긴 하였지만, 그 지역은 평정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흑산적의 전 지도자이자 공손찬의 동맹이었던 장연이 상산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원소가 아들 원담을 자사로 임명했던 청주의 경우, 그 주민 상당수가 수년 뒤 조조에게 넘어가버렸고, 영토는 원담과 공손찬의 장수 전해의 싸움으로 황폐화되었다. 게다가 조조의 동맹인 장패의 공격을 받는 상황이었다. 원담 자신도 결국 조조와의 전쟁에 참전하게 되지만, 다수의 병력을 데려올 여유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반면에, 여남이 말썽이긴 했지만, 조조는 막 서주의 여포를 정복한 뒤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기반인 영천군과 유주를 잇는, 유주 동서쪽의 지역들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후한 시기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그 지역은,조조의 고향인 패국을 포함하여, 250만 명 가량이며, 그것도 서주를 제외한 수치이다. 여포의 패배와 원술의 몰락, 그리고유비의 축출은 회수 이북에 심각한 경쟁자가 이제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 지역을 지키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수비대를 두어야 했지만, 그곳의 자원은 충분히 활용 가능했다.


따라서, 199년에, 비록 원소가 마침내 공손찬을 제거했다고 해도, 그는 남쪽으로부터 점차 커져가는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는 고향인 여남으로부터의 지원을 기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조의 신하 만총이 그의 세력을 격파하거나 몰아낸것으로 보인다. 명색이 그의 동맹이었던 형주의 유표는 끼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유표는 남쪽으로는 반기를 든 태수 장선을 상대해야 했고, 그의 장군 황조는 장강 하류의 손책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199년에 장수가 조조에게 귀순하면서, 거대한 남양군의 잠재력을 선물로 가져왔고,그곳에는 2백만 이상의 주민이 있었다.


같은 시기, 원소가 공손찬에게 최후의 승리를 거두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는 것과, 조조가 다른 일들에 전념하며 종종 패배를 겪던 때를 틈타지 못했다는 사실은, 원소의 군사력과 힘이 흔히 이야기되는 것만큼 강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200년초, 그는 조조로부터 양면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황하 북부의 하동군이 조조의 통제 하에 있었다. 동쪽으로는 조조의 수하이자 동맹인 장패가 북상하여 청주로 향하고 있었다. 원소는 결코 북중국을 온전히 지배하지 못했다. 그의 세력은 기주를 지배하는 것 이상을 크게 넘지 못했고, 조조는 그를 향해 직접적, 간접적으로 양면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원소의 공격은 약한 적을 상대로 한 공세라기보다는, 너무 늦기 전에 적의 심장부를 치려는 시도로 보아야 한다. 말할것도 없이, 적지로 그렇게 깊숙이 진격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작전이다. 보급선이 길어지고, 하나의 전투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작전이기에더욱 그렇다. 그러나 원소가 오만하거나 지나치게 자신만만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조조의 불어나는 세력에 압도되기 이전에 필사적으로공세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을 위해, 원소는 분명 거대한 군대를 모았다. 그리고 청주를 맡고 있어야 할 그의 아들 원담이 그와 동행했다는 것 자체가,원소가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다 모았음을 시사한다. 같은 측면에서, 그가 여남으로 파견한 것은 그의 장수들이 아니라 유비였다. 그리고 허창을 침공했다가 조인에게 격파당한 한순은 상장급이 아니었다. 원소는 이 작전들이 가진 가능성을 무시했던것이 아니라, 조조를 상대하는 그의 주 공세에서 병력을 빼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 도박이 성공할 가능성은 있었다. 원소가 조조의 중앙 방어선에 더 우세한 병력을 집중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조조는 당연히 깊은 근심에 빠졌다. 만일 원소가 돌파에 성공했다면, 조조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을테고, 후방으로부터 그의 방어선을 둘둘 말아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황하로부터의 철수작전을 통해 적군을 그의 홈그라운드에 잘 준비된 위치로 끌어들였고, 거기서 원소의 긴 보급선과 후방 식량고는 매우 취약해졌다. 게다가 조조는 전반적으로 수적 열세이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전역 종반부에, 그는 오소의 순우경을 향해 대규모 습격대를 이끌면서도, 관도에 장합과 고람의 마지막 공격을 막아내기에 충분한 병력을 남겨놓을 여력이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관도 전역은 다르게 보인다. 군사적 취약성 때문이었든, 불운이나 주도권 상실 때문이었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원소는 몇몇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가 처음한복으로부터 기주를 장악하면서 얻은 성과를 발전시키는데 실패했다. 같은 시기, 위험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황하와 회수 사이에서 놀랄만한 성과를 이룩했다. 199년에 원소는 마침내 공손찬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 이제 조조와 그의 동맹들로부터 꾸준한 침입에 직면하게 되었다. 마지막 주사위를 던지는 것처럼, 원소는 직접적이고 집중된 공격으로 그의 라이벌을 압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조는 준비가 되어있었고, 잘 준비된 전역에서 그는 원소가 부대를 과도하게 확장시키도록 유도하고, 보급선을 끊었다. 원소는 실패했다. 그러나 원소의 전략은 후대 역사가들과 주석가들이 그린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가장 경험 많고 유능한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조조의 전략은 그의 고대 멘토 손자가 제안한 모델이었다. 조조는 적이 잘못된 행동을 취하도록 유도했고, 자신이 선택한 지형에서 싸우도록 했으며, 적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타격해 적군의 사기를 꺾음으로써 적을 격파했던 것이다.



덧글

  • 진냥 2016/08/23 15:00 #

    요즘 하버드 중국사를 읽고 있는데, 과문하나마 안다고 할 수 있었던 중국사를 서양 역사학자들의 언어로 읽는 게 참 쏠쏠하더군요. 남북조의 문벌 귀족이 great families...!!!
  • Mr 스노우 2016/08/24 20:08 #

    헉... 혹시 원서로 읽고 계신겁니까;;;;;
  • 진냥 2016/08/24 20:19 #

    그럴리가요/엄근진 시리즈 번역출간되었어요.
  • Mr 스노우 2016/08/24 22:45 #

    아하... great families라는 말 때문에 그만...ㅎㅎㅎ 사실 서양에서 쓴 중국사 책은 인명이고 지명이고 알아먹기가 힘든게 제일 어렵더라구요ㅠ 이 글도 딸랑 몇 페이지 안되는데 번역하면서 꽤나 애먹었습니다ㅋㅋㅋ
  • 슈타인호프 2016/08/23 15:17 #

    오오 대단한 견해군요. 소개 감사합니다.
  • Mr 스노우 2016/08/24 20:09 #

    감사합니다 ^^
  • ㅇㅇ 2016/08/23 15:31 # 삭제

    정말 색다른 견해로군요.
  • 범골의 염황 2016/08/23 15:34 #

    삼알못이라 죄송합니다.
  • 로자노프 2016/08/23 15:56 #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다는 의견은 재미있네요. 동의도 가고. 근데... 예주 상당부분이 원소의 반란 요청에 대량호응해서 이통의 통제구역이나 허창 빼면 거의 모든 지역이 친원소반군의 차지가 됬고, 손책의 북상 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빠진 건 좀 그렇네요. 결과적으로 진등에 의해 허무하게 막힌 감은 있지만 손책이 대놓고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던 상황이라 서주쪽이 안정적이었는가는 글쎄올시다라서요. 표리부동한 서량의 군벌들도 변수가 될 여지가 있고 실제로 202년 원상의 공세 당시 마등은 초반에는 원상 편이었던 전례도 있거든요. 조조 역시 여러 개의 전선과 내부 불안 요소라면 꽤나 안고 있었다고 봐야될 겁니다.

    그리고 저도 이 부분은 정확한 건 아닙니다만 염유의 세력은 어느정도인지 의문이고 선우보는 순식간에 원소에게 박살나서 조조에게 도망가고 그 세력이 원소에게 흡수되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공손찬이 유주에서 명망 높던 유우를 죽여 민심을 잃었는데, 그 명망 높은 유우의 잔당들이 원소와 연합했다는 걸 고려하면 200년 기준 원소의 유주 통제력이 약했다고 보기도 무리 아닐까 싶네요. 거기다 원소가 흉노족, 오환족등과 친밀한 편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될 요소고요.
  • 델카이저 2016/08/23 16:05 #

    그래도 본문이 지적하는 것처럼 "잠재적인 동원능력"이 결코 원소에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지적은 굉장히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조조는 천자를 끼고 있으니까, 장기적으로 가면 이 동원 잠재력이 실제 병력으로 환원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원소가 관도 대전에서 까이는 이유가 "단기결전"을 고집했다는 점인데, 잠재력이 뒤쳐지지 않는 조조의 영지에, 실제로 원소가 기주 이외의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알려진 것처럼 확실하지 못하고, 원소의 동맹들이 하나하나 처집히는 상황에서 천자라는 명분이 있는 조조가 "더 크기 전"에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는 판단을 내릴 근거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전략적인 판세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또는 알려진 것처럼 원소가 압도적이지는 않았다는 건데, 상당히 의미있는 지적 같습니다.
  • 로자노프 2016/08/23 19:04 #

    근데 그 잠재적 동원능력에 대한 지적이 흥미롭지만 영 거시기하다고 보는게.. 협천자는 천자를 끼고 국정을 농단하는 권신으로 이 시기즈음부터 유비와 원소에 의해 변해버린데다가 암만 봐도 조조쪽 전선이 영 거시기하거든요. 강동의 손책세력도 무시 못 하고 이후 벌어진 상황을 볼 때 회남지역에서 돌발 변수가 생길 가능성을 조조도 고려는 해야했습니다. 실제로 수춘지역이 반란세력에게 장악당하는 일이 이즈음에 있었고... 거기다 유표를 아주 대비를 안 할 수는 없고 서량 군벌세력도 고려해야죠. 내부 불안정 요소도 아주 무시할 수 없고요. 조조가 이기고보니 휘하 인사들이 원소측과 내통하던 편지가 한가득 있었다지요.

    반대로 원소측의 통제력은 확실치 않지만 선우보가 갈려나갔다는 주장을 수용할 경우 유주 지역 통제력이 어느정도 됬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병주가 좀 의문부호지만 일단 원소는 후방세력 격인 이민족들, 특히 흉노와 오환족과 우호적인 관계였다는 점도 고려해야 될 것 같고요. 즉 후방 문제에 대한 걱정은 원소가 조조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었던 것 같다고 보거든요.

    뭐 전 그래서 관도를 이렇게 봅니다. '당장은 원소가 조조에 비해 압도적이다. 하지만 시간을 끌면 그 압도적인 격차가 줄어들어 어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힘도 압도적이고 최소한 강동과의 협공을 기대할 수 있는 이 시점에서 조조를 쓰러뜨린다.'이게 원소의 복안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 2016/08/23 16:0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8/24 20:0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연성재거사 2016/08/23 16:36 #

    여러모로 재미있는 지적이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Mr 스노우 2016/08/24 20:09 #

    감사합니다
  • 無碍子 2016/08/23 16:45 #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 Mr 스노우 2016/08/24 20:09 #

    감사합니다
  • 빼뽀네 2016/08/23 17:44 #

    매우 흥미로운 해석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Mr 스노우 2016/08/24 20:09 #

    감사합니다
  • 3인칭관찰자 2016/08/23 18:59 #

    흥미로운 견해 잘 읽고 갑니다,
  • Mr 스노우 2016/08/24 20:09 #

    감사합니다
  • 위장효과 2016/08/24 08:17 #

    하나 의문은, 후한서 군국지에 나온 당대 호수와 인구수를 그대로 군웅할거시대의 전력 계산에 대입하는 게 과연 타당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그러고보니 옛날 삼도 카페에서도 이 문제가지고 한 번 대박 쌈난 적이 있었지).
    황건의 난으로 특히나 하북 일대가 큰 타격을 받은 상황인데다가 원소가 하북에서 기반을 다지고 조조가 허창에다 천도하기까지의 기간동안 중원 일대에 전란이 지속되면서 엄청난 양의 유민도 발생하고 아예 사회 시스템이 박살난 상황-그리고 중소규모호족들이 반독립적 상태로 각각 세력을 키우던 상황-인데 그냥 산술적으로 기주 90만호, 연주 79만호의 세력이라고 계산하는 건 상당히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그 인적 자원이 그대로였다면 조조가 둔전제를 시행하네 10만호를 옮기네 하는 무리한 사업을 굳이 강행할 필요도 없었겠죠-
  • Mr 스노우 2016/08/24 20:07 #

    여기 번역해 올린건 사실 매우 작은 부분이고, 해당 책 전체의 내용과 문맥으로 판단하건데, de Crespigny 선생이 후한서 군국지를 인용한 것은, 조조와 원소의 근거지가 각각 가진 인적, 물적 잠재력의 한 예로 든 것이지, 후한서의 조사 결과가 조조와 원소의 대치 상황까지 그대로 이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애초에 후한 말 삼국시대가 박사학위 전공인 사람인데, 그 정도 모를 리도 없다고 봅니다.
  • 로자노프 2016/08/25 13:29 #

    그 문제 말인데 당대 저수가 원소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주는 전란의 화를 덜 당했다.' 연주의 경우 194년 조조와 여포가 1년여간 대격전을 벌였고, 거기에 메뚜기떼까지 추가됬던 상황이었음까지 고려한다면 기주가 연주보다 인구유출이 덜했을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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