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예수의 재발견 (1) homo religiosus


제목을 보고 뜬금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아마도 "예수가 유대인이었다는거 누가 모릅니까?"라고 반문하시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의외로 이 사실이 주목받은 것은 상당히 근래의 일이다. 그 이유는 성서비평학이 아직 완전히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의 미숙하던 사료 해석법도 한 몫을 했겠고, 안타깝게도 깊이 뿌리를 내린채 끈질기게 잔존해온 반유대주의가 큰 역할을 했다.

사실, 우리는 당연히 예수가 유다인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우리들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세계사 교과서라든지 도덕이나 윤리 교과서 등을 통해서 '예수는 협소한 유다교의 선민의식에서 벗어나서 보편적인 인류애를 추구하는 종교를 창시했다'라는 요지의 서술을 접한 기억이 있을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혈통은 유다인이되, 더 이상 유다인이 아닌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 관련 연구가 급진전을 이룬 최근 30여년 동안, 이러한 통설은 적어도 학계 내에서는 뒤집히게 되었다.




비유다인, 혹은 반유다인적 예수 상

서기 2세기, 그리스도교가 완전히 유다교로부터 분리되면서, 그리스도교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다교와 대비되는 것으로 설정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이때부터 수 세기에 걸쳐서, 예수의 '유다인적 모습'이 철저히 부정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략 18세기 후반부터, 현재 이른바 '옛 탐구(the old quest, 혹은 첫 번째 탐구the first quest)'라고 부르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지만, 대중적 인식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1860년, 프랑스의 종교사학자 에르네스트 르낭은 1863년 '예수의 생애'라는 저작을 서술한다. 이 책은 한 인간으로서 예수를 역사적 맥락에서 보려는 시도였다는 찬사를 받지만, 학문적 엄밀성에 한계가 많았고, 이 때문에 슈바이처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어찌되었건, 이 저작은 당시의 대중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많았는데, 여기서 르낭은 '근본적으로 예수에게서 유다인스러운 면은 전혀 없었고, 특히 예루살렘 입성 이후의 예수는 더이상 유다인이 아니었다'는 요지로 서술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당시 독일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의 거두였던 알브레히트 리츨은, 예수가 유다교와 율법을 거부했으며, 따라서 '그의 가르침과 유다인들의 가르침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분법, 즉 율법과 형식을 강조하는 유다교와 은총과 사랑을 강조한 예수의 대비는 거의 상식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대중적인 차원에서 이 영향력은 아직도 상당부분 남아있다.

사실 당시 역사적 예수의 탐구를 주도했던 독일의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당면 목표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가 강조해온 '신앙의 그리스도' 대신, 정말 합리적으로 믿을 만하고 현대(즉 19세기 말)에도 적용할 수 있는 '역사적(?)인 예수' 상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현대인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예수 상을 원하는 이들에게, 유다인으로서의 예수 상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리가 없다. 당시 유럽 전반에서 유다인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해본다면 더욱이.

물론 예외는 있었다. 예수는 오로지 1세기 유다인 종말론적 예언자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본 요한네스 바이스라든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첫 번째 탐구'의 종결을 가져왔다고 평가받는 신학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같은 이들이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1875-1965)

슈바이처는 지금까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주축이었던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자들이 만든 현대적인 예수 상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 예수의 핵심은 바로 '종말론'이었기 때문이다. 슈바이처의 해석에 따르면, 예수는 하느님이 곧 이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리라 확신하였고, 그것이 생각처럼 빨리 오지 않자 자신의 죽음으로 이를 이루려 했던 예언자였다. 슈바이처가 보기에 이 '역사적 예수'는 현 시대에는 그렇게 쓸모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이후 수 세대에 걸쳐서 살아남은 '영적 예수'였다. 이것은 역사적 예수의 죽음 이후 계속되어온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예수의 신비로운 관계를 의미한다. 이후 그가 봉사를 위해 아프리카로 떠난 것도, 바로 이 '정신'을 따라서였다.

그러나 넓게 봤을 때, 그는 어디까지나 예외였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현 시대의 문제점에 해결책을 제시하고,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역사적 예수'를 추구하고 있었다. 이 탐구를 완전히 끝장낸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잔인한 전쟁과 뒤이은 혼란은 19세기 유럽의 낙관주의에 종지부를 찍었고, 역사적 예수에게서 도덕적 롤 모델을 찾겠다는 시도는 공허한 것이 되어갔다.




전간기~20세기 중엽의 변화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많은 독일 학자들은 슈바이처의 비판을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연 역사적 예수를 학문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다. 이 시기에 루돌프 불트만을 필두로 하여 양식비평이 본격화되면서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양식비평의 연구에 따르면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선포된 그리스도'일뿐, 역사적 예수는 아니라는 말이 된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 신학자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 연구에 주로 집중하였고,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별로 진전되지 못했다.

덕분에 '비유다인'으로서의 예수 이미지는 계속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더 악화되었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본고장인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정권에 영향을 받은 연구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이는 발터 그룬트만 같은 이로, 그는 예수의 가족이 비록 유다교를 믿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인종적으로 유다인이 아니었으며, 예수는 유다교에 매우 적대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예수가 살던 갈릴레아는 사실상 이방인 지역이라든지, 그동안 혼혈이 많이 되어서 예수는 사실상 아리아인이었다든지 하는 별 괴상한 이론이 이때 다 나왔다.

아무리 예전부터 예수를 유다적 맥락에서 분리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나치 독일에 부역한 연구자들의 연구는 너무 대놓고 막나간 것인데다가, 두말할 것도 없이 학문적 가치가 제로였기 때문에 그 결과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시도, 그러나 끈질긴 옛 관점

1950년대는 역사적 예수 연구가 다시 재개된 시기였다. 이 시기의 연구를 앞서 1기와 구분해서 '새로운 탐구(The new quest)'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연구가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은 이전 시기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적 예수 연구를 사실상 포기해버리고, '선포된 그리스도', 혹은 '신앙의 그리스도'에만 집중한 결과, '정권의 입맛에 맞는 그리스도 상'의 등장에 효과적인 저항을 못하는 것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반성은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새로운 동기부여가 되었고, 더욱 발전된 학문적 방법론으로 무장한 불트만의 제자들에 의해 새로운 연구가 활발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의 방법론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복음서에서 후대에 첨가된 부분과 예수가 실제로 했을 가능성이 높은 구절들을 선별하면서, 학자들은 '뭔가 전례가 없는 독특한 것일수록 예수 본인에게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가설을 세우고, 적용하였다. 결과적으로 동시대 유다교와 유다인들에게서 나오지 않았을 것 같은 구절들, 그리고 명백히 후대 그리스도교 교회 공동체에서 하지 않았을 것 같은 구절들이 예수의 진짜 어록으로 판단되었다.

후자는 아직도 사용되는 방법론이지만, 문제는 전자였다. 그것 자체가 '예수가 동시대 유다인들과 똑같은 생각을 할리가 없다'는 편견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시기 연구가 이뤄낸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유다교와 관련된 측면에서는 Bornkamm의 주장처럼 '예수가 율법에 급진적으로 도전하였으며, 그래서 유다교 지도층의 위기의식을 자극해 처형되었다'는 견해를 답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뒤집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제3의 탐구-그 시작

20세기 후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인식과 그 연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일련의 연구들이 시작되었다. 사해문서를 비롯한 새로운 사료들의 발굴을 제2성전기 유다교에 대한 연구의 급진전을 가져왔고, 이는 결과적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학문적 물결의 시작을 1980년대로 잡는 이도 있고, 1970년대로 잡는 이도 있다. 이 연구 자체도 단일한 학파가 아니라, 매우 다양한 성향을 가진 학자들이 내놓은 다양한 연구들의 종합이기 때문이다. 다만 '유다인 예수'의 재발견이라는 측면에서, 1970년대부터 탁월한 연구성과를 내놓기 시작한 한 학자를 빼놓을 수 없다.

Geza Vermes (1924-2013)

게자 버메스(Geza Vermes, 1924-2013)의 인생은 그의 연구 못지 않게 드라마틱했다. 영국의 신학자였지만, 본래 그는 헝가리계 유다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정통 유다교 집안은 아니었고, 그의 집안은 이미 19세기때부터 세속화된 집안이었다. 그가 6살이던 1931년, 헝가리의 반유대주의가 점차 심해지자, 그의 부모는 혹시 모를 탄압을 피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그러나 이 개종은, 곧이어 헝가리가 추축동맹에 가담하면서,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이 때 헝가리에서 유다인이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버메스는 그 대안으로 가톨릭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공부는 곧 도피생활로 바뀌었다. 1944년, 그가 신학교에 재학중일때, 헝가리가 추축동맹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독일군이 진주해왔다. 다행히도 많은 가톨릭 사제들이 신변의 위험을 감수하고 그를 숨겨주거나 도피를 도와주었고, 그 덕분에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비록 그는 훗날 교회를 떠나지만, 이때 받은 도움을 감사하게 기억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같은 해, 헝가리가 나치 괴뢰정권 치하에 들어간 뒤 체포되었고 결국 강제수용소에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되었다.

전후에 헝가리는 소련의 점령 하에 들어갔다. 그는 이를 피해 벨기에로 옮겨가게 된다. 사제 서품 후에 그는 사목보다도 학문 연구에 더 큰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제2차 바티칸 공회 이전으로, 가톨릭 교회에 반유다주의가 남아있을 때라, 도미니코 회와 예수회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결국 유다인 출신 가톨릭 신자들이 세운 '시온의 노트르담 수도회'에 입회하여 활동하게 된다.

그 뒤로 그는 발견된지 얼마 안된 사해문서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했고, 그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시에 가톨릭-유다인 관계 증진을 위한 노력에 힘쓰고, 교회 내의 반유다주의를 없애기 위한 운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는 이후 2차 바티칸 공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면서 이 젊은 사제는 빠르게 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교회 내에서 상당한 불편함을 느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가톨릭 교회 내에서,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 대한 무시와 계속되는 반유다주의를 싫어했다. 물론, 미리 말해두자면 이 두 가지 다 1960년대에 크게 바뀌게 된다.

어찌되었건 그는 사제직을 떠났고, 얼마 뒤에는 아예 교회를 떠났다. 자신과 조상들의 정체성이었던 유다교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다고 독실한 유다교 신자가 된 것은 아니었고, 종교적으로는 상당히 리버럴한 입장을 견지했다. 아무튼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영국에서 결혼하고 정착했으며, 영국 학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영국에서 그는 역사적 예수 연구로 큰 학자적 명성을 얻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기존 그리스도교의 예수 인식은,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로서의 예수에 매몰되어 그의 유다인적 특성을 최대한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에, 유다인 학자들은 예수 연구를 거의 하지 않았다. 굳이 이 '자칭 메시아'에 관심 가질 이유가 없었을테니까. 반면에 버메스는 유다인이었고, 유다교 문헌에 정통한 학자였다. 동시에 가톨릭 사제 출신으로 정통 그리스도교 신학을 공부한 입장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 덕분에 그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그의 첫 저작, 'Jesus the Jew (1973)'는 제목부터 그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예수는 1세기 유대아라는 역사적 맥락에 확고하게 위치시켰다. 그는 예수를 '독보적인 개인'이 아니라, 1세기에 무수히 많았던 소위 '경건한 이', 즉 하시딤이라는 맥락에서 접근하였다. 이들은 구약시대 예언자의 전통을 잇는 이들로, 갈릴래아에서 많은 존경을 받는 이들이었다. 버메스는 이들과 예수 사이의 많은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점에 착안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그가 그려낸 예수는 근본적으로 '율법을 준수하고 경건한 유다인이며, 일련의 하시딤들 중 한 명으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의 연구에 비판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이것도 참 당연한 말인데, 비판점이 없는 연구란 존재할 수가 없다) 그의 연구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이후 수많은 후속 연구들에 중요한 의제들을 제공하였다.

버메스 교수는 2013년에 타계하였다. 현재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자 중 한 명인 제임스 D. G. 던은 다음과 같이 그를 평하였다. "그는 제3의 탐구에 있어서 세례자 요한이었다."

덧글

  • 로자노프 2016/10/28 18:43 #

    하시딤이면 율법주의계열 아닌가요? 좀 의외군요. 그리고 슈바이처가 튀어나올 줄이야.
  • Mr 스노우 2016/10/28 18:46 #

    그 율법주의라는것도 참 오해가 많은 개념인데, 다음 포스팅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 주제에서 슈바이처의 영향력이야 아직도 상당하지요.
  • 위장효과 2016/10/28 19:59 #

    사실 슈바이처도 상당한 수준의 엄친아이지요. 신학에서는 스노우님 말씀대로 "역사적 예수" 연구에 끼친 영향도 있고, 복음서연구, 사도 바울 연구 논문도 상당하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미 철학박사에 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음악에서는 잘 알려진 파이프오르간 연주자였고 바흐 연구에 있어서도-일설에는 프랑스인인 자신의 스승에게 역으로 바흐에 대해서 가르쳐줄 정도였다고-일가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프리카로 의료봉사하러 가겠다고 의과대학입학할때 주변의 친구들에 스승까지 나서서 반대할 만 하지요. 촉망받는 신학자+목사+철학자+음악가가 이 모든 거 버리고 의료봉사하겠다고 하니...(그냥 의사라면 또 몰라도)
    그런데 전공은 못 속인다고, 이 분이 의학박사 학위 논문 주제로 쓴 게 "예수에 대한 정신의학적 연구"였습니다...(하긴 정신의학계에서는 기독교 역사의 주요 인물에 대한 연구 논문들 제법 많이 쓰지요^^. 루터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도 있고...)
  • 2016/10/28 19:44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10/29 08:1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위장효과 2016/10/28 20:04 #

    또 다른 시리즈물의 시작이십니까^^??? 언제나처럼 기대.

    심각하고 진지한 글에 초치는 뻘댓글 하나 달자면, 역사적 예수 연구라면 조반니노 과레스끼도 한 몫 할 듯 싶습니다만^^;;;.

    -"바로 그 여론이 나를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 예수님은 들으셨지만 모른 척 하셨다. 당신도 한때 장발족이었고, 또한 반항적인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성나게 하신 적이 여러 번이었기 때문이었다.
    -"돈 까밀로, 나도 세상이 있을 때는 장발족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물론 빼뽀네가 어머니를 가리켜서 저 여자라고 불렀을 때는 기분이 좀 나빴다만."
    (도주)
  • Mr 스노우 2016/10/29 08:13 #

    시리즈라기엔 딱 세번만에 끝날것입니다ㅎ
  • 네리아리 2016/10/29 11:28 #

    ㄱ. 제임스 D. G 책 보면서 참 새로운걸 알게 되었죠. 보수주의/근본주의 개신교 신학교에선 아예 언급하지 않긴하죠. 저야 뭐 다행히(?) 진보적인 신학교에 다녀서 새관점도 자세히 배웠죠. 빡세게 말이죠. ㅂㄷㅂㄷㅂㄷ.

    ㄴ. 독일의 예수 아리안설은 정말 절묘하게 나치가 이용해 먹었죠. 새로운 관점에서는 신선했지만 정말 타이밍이 끝내줬고ㅡ
  • Mr 스노우 2016/10/29 18:18 #

    그래도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배우셨으니 다행입니다. 저는 독학으로 파려니 시행착오도 많고 힘들어서..ㅎㅎ
  • 네리아리 2016/10/29 22:17 #

    하지만 배운지 10년이 넘어서리 읍읍읍
  • 어떤날 2016/10/29 21:33 #

    글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 다만-
    1.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가장 먼저 소개할 학자로는 르낭보다는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ß)가 조금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이미 1835년에 관련 저작을 집필했었죠. 조금 더 올라가자면 바우어(Baur)를 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후 역사적 예수 연구가 주로 독일에서 강세이다보니 독일 학자로 시작하는 것이 이후 연관성하고도 연결이 매끄럽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2. 불트만과 관련해서 본문비평을 언급하셨는데요, 정확한 용어가 맞는가요? 제가 알기로 본문비평은 어떤 사본이 원본에 가장 가까운가를 비평하는 작업이기에 문서의 성격을 정의하는 것이 주된 작업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차라리 역사비평이 해당작업에는 더 적합한 비평이 아닐까 싶은데요. 또한 불트만이 워낙에 양식비평과 연관되어서 이야기되기 때문에 질문을 드렸습니다.

    3. 여담으로 1910년에 Drews 라는 역사학자가 '예수는 역사적으로 없었음'이라는 저작을 남겼다고 하네요. 지금이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주장이지만 당시에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진짜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나'라는 진지한 문제가 신학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에 대해 불트만 같은 학자는 리스크가 적은 방식을 선택합니다. 즉,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예수에 대한 선포는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불가지론과 더불어 불트만이 케리그마를 훨씬 강조하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 Mr 스노우 2016/10/30 01:17 #

    1. 네 저도 처음에는 라이마루스와 슈트라우스부터 시작할까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주제를 '유다인 예수'로 잡다보니, 르낭의 저서에 묘사된 반유다적 성격으로 시작하는게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초에 본래 집중하려던게 20세기 후반의 연구다보니, 그 이전은 최대한 간략하게 쳐낸것도 있구요. 그리고 제임스 던의 저작 Jesus, Paul and the Gospel (2011)에서 예수의 유다인적 성격을 논한 부분도 르낭부터 시작하기에 그것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2. 그 부분은 제가 단어를 잘못 사용한것 같습니다. 제가 참고한 서적에는 form crticism으로 되어있는데, 말씀하신대로 양식비평이 더 정확한 표현이네요. 이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3. 던 선생이 언급한 바인데, 한 세대에 한 명씩은 예수가 실존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이 등장한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지금의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그런 주장은 그냥 일축해버리는 분위기인것 같습니다.
  • 111 2016/10/31 10:44 # 삭제

    이런 주제는 참 재밌습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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