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예수의 재발견 (2) homo religiosus

제 3의 탐구-특징

앞서 살펴보았듯이, 새로운 탐구의 문을 열어젖힌 게자 버메스는 유다인이었다. 여기서 이 새로운 연구 트렌드의 중요한 특징이 드러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포스팅 전체의 주제인 '유다인 예수의 재발견'이겠지만, 그 외에도 연구자의 정체성이 중요한 특징이다.

그 이전까지 역사적 예수 탐구는 거의 전적으로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이 주도하였다. 그러다보니 이들의 프로테스탄티즘이 과거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데 장애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3의 탐구에서는 영미권 학자들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진다.(버메스도 헝가리 출신이고,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공부했지만 역사적 예수 연구 성과를 쏟아낸건 주로 영국에서였다) 또한 역사적 예수 연구는 더이상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이미 확인했다시피 유다인뿐만 아니라, 가톨릭, 불가지론자들까지도 대거 이 연구에 뛰어들게 된다.

그 말은 더 이상 역사적 예수 연구 자체가 그리스도교적 아젠다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예수는 이제 고대의 다른 많은 역사 인물들처럼 연구되기 시작하였고, 역사학적 방법론에 따라 예전보다 더욱 객관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하였다. 즉, 더이상 단순히 그리스도교 신학의 한 갈래라기보다는 역사학에 더욱 가까워진 셈이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포스팅에서는 이 연구들이 역사적 예수에 대해 탐구하고 논의한 결과들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E. P. 샌더스

게자 버메스의 뒤를 이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한 획을 그은 학자는, 미국의 신약학자, 에드 패리시 샌더스(E. P. Sanders, 1937~)였다. 그는 스스로를 '리버럴하고, 근대적이며, 세속화된 프로테스탄트'라고 규정지었지만, 지난 글에서도 언급한 19세기 독일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오류(역사적 예수를 자신들의 필요에 맞추어 해석하는)를 범하지 않기 위해 본인의 종교적 성향과 학문적 연구 간의 거리를 유지해왔다. 가장 최근의 저서에서도 그는 "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나, 그리스도나, 부활에 대해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말할 생각이 없다. 나는 신학자가 아니다. 나는 오로지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설명하려는것 뿐이다" 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E. P. 샌더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저서 <예수와 유다교 (Jesus and Judaism, 1985)>와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 (The Historical Figure of Jesus, 1993)> 등으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새 장을 열었다. 버메스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1세기 유다교에 있어서 탁월한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자신의 저서에서 예수를 그 1세기 유다교의 맥락 안에 확고하게 위치시켰다.

그가 그린 예수는 슈바이처의 전통을 잇는 '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예수 상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는 임박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예언자였고, 곧 기존의 세상과 질서가 완전히 뒤집혀서 하느님이 공정과 정의로 통치하는 나라가 올 것이라고 확신한 인물이었다. 동시에, 그의 예수는 버메스의 예수와 마찬가지로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경건한 유다인이기도 했다.

이 점만 보면 그렇게까지 획기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샌더스의 연구가 정말 중요한 이유는, 예수에 대한 인식 못지 않게 1세기 유다교에 대한 시각을 가히 혁명적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역사적 예수 연구는 대체로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이 주도해왔다. 루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 신학자들은 예수 당시 유다교를 '율법주의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해석해왔다. 바울로의 서간으로부터 '이신칭의' 교리를 발견했듯이, 이들도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선포하는 예수와, 율법으로 사람을 단죄하는 유다교를 대비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샌더스는 이들의 견해가 심각한 시대착오임을 지적하였다. 애초에 1세기 유다인들이 생각하던 '은총과 행위'는 16세기 루터나 그 후신들이 생각해온 것처럼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었다. 샌더스는 1세기 유다교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통해서, 유다교 전통 내에서 '은총'이 대단히 중요한 가치임을 발견하였다. 유다교는 하느님과 그 백성 이스라엘의 관계를 근본으로 하며, 구약에서 이 관계는 계약으로 표현된다. 샌더스에 따르면, 이 계약 자체가 유다인들에게 조건 없이 주어진 '은총'이다. 율법은 이 계약의 백성들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 가이드라인이지,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개념은 아니다. 반대로,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는 하느님이 마련해놓은 다양한 방법으로 속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영원히 단죄받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파기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후의 그리스도교 신학, 특히 사도 바울로의 구원론은 바로 이 1세기 유다교의 구원론에 확고하게 뿌리박은 채 출발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하여 샌더스는 1세기 유다교는 "프로테스탄트들이 말하는 소위 '행위구원'이나 '율법제일주의'가 아니다"라고 단언하였다.

바로 이런 면에서, 예전까지 부당하게 온갖 악명을 뒤집어쓴 바리사이파가 정당한 재평가를 받았다. 복음서에는 예수와 바리사이파의 대립을 공들여 묘사하는 대목이 많고, 이 때문에 이들은 항상 예수에게 달려와서 시비걸거나 음모를 꾸미는 이미지를 떠맡았다. 또한 앞서 봤듯이, 프로테스탄트 전통은 이들을 '율법주의'의 화신으로 묘사해왔다. 사실 슈바이처조차도 바리사이가 예수를 죽이는데 일조했다는 기존 시각을 답습했다. 샌더스는 이러한 기존 시각을 단호하게 반박했다.

우선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대한 탐구와 성서 본문에 대한 비평은, 성서 내에 묘사된 예수와 바리사이의 갈등 묘사가 상당히 과장되었거나, 후대의 첨삭임을 짐작하게 하였다. 게다가 1세기 유다교에 대한 탐구는, 예수와 바리사이의 논쟁은 죽고 살리고 하는 심각한 싸움이 아니라, 경전의 종교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일상적인 교리 논쟁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더해서 랍비 문학을 비롯한, 그리스도교적 렌즈를 통하지 않은 유다교 텍스트의 연구는 바리사이파에 대한 사뭇 다른 그림을 그리게 한다. 랍비 문학이나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바리사이파는 흔히 생각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관대하고 융통성 있기로 유명한 집단'이었던 것이다.

1세기 유다교는 근대 종교들처럼 특정한 도그마가 있고, 모든 구성원이 거기에 동의해야만 하는 종교가 아니었다. 구약성서를 보면 율법 규정이 매우 세세한 것 같지만 잘 보면 사실 그렇지도 않다. 가령,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규정을 보자. 흔히, 안식일에 일하면 안된다는 것이 유다교 율법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대체 '일'한다는게 과연 어떤 것인가? 방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들고 문 앞까지 가는건 과연 일인가 아닌가? 밥을 먹으려고 식기를 들고 부엌에서 식탁까지 가는건 일인가? 아닌가?

율법이 대체로 이렇다보니, 경전을 해석해서 실생활에서 지킬 수 있는 가이드라인으로 만들어주는 작업은 필수였다. 정해진 도그마가 없다보니 율법을 읽고 해석하는 이들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그리고 수시로 논쟁을 벌였다. 이런 상황이니 해석이 다르다고 '너 이단'하면서 단죄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예수와 바리사이의 논쟁은 이런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바리사이파는 율법의 정신을 지키면서, 최대한 민중들이 삶에서 잘 따를 수 있는 융통성 있는 규칙을 만들어주기로 유명했다. 자신들에게는 엄격했으되, 모두에게 그것을 지켜야만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점들을 살펴보면, 예수와 바리사이는 서로 다른 점보다 공유하는 점이 훨씬 더 많은 집단이었다. 때로는 논쟁도 벌였지만, 협력도 하고, 교류도 하는 그런 집단이었다는 뜻이 된다. 샌더스는 1세기 유다교 내에서는 성서에 묘사된 예수와 바리사이 논쟁 정도는 우습게 만들 정도로 격렬한 논쟁도 많았음을 지적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 유다교는, 후대에 심각하게 단순화해서 인식한 것과 달리, 상당한 다양성(diversity)을 가진 종교였으며, 주장이 다르다고 사람을 죽이는 종교도 아니었다. 그리고 율법주의에 얽매인 그런 종교도 아니었다. 이러한 유다교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함께, 샌더스는 예수 운동은 어디까지나 유다교 내의 쇄신 운동이었음을 지적하였다.(그리고 바리사이파의 많은 인물들도 엄연히 이 쇄신운동의 일부였다)

Helen K. Bond의 지적대로, 샌더스가 그린 이러한 예수상, 즉 종말론적 예언자이자 유다교 내의 쇄신운동가로서의 예수의 이미지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남겼다. 다만 비판점도 없지는 않았다. 우선 바리사이파를 비롯한 유다교의 재평가는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그래도 갈등 요소가 있었는데 그걸 너무 낮춰본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종교와 정치가 분리될 수 없는 사회에서 예수를 지나치게 종교적으로만 해석하여, 예수 메시지의 사회적인 측면을 과소평가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사실, 예수 운동의 사회적 측면도 곧 제3의 탐구의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게 된다.




리처드 A. 호슬리

1980년대는 여러모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요동치는 시기였다. 그중에서도 독특한 연구자를 뽑자면, 역시 리처드 호슬리 (Richard A, Horsely, 1939~)를 빼놓을 수가 없다. 호슬리 역시도 예수를 유다교의 묵시문학 전통에서 파악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를 사회적, 정치적으로 접근하려 했다는데서 샌더스의 주장 및 슈바이처의 전통과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기존과는 다른 연구 방법론, 사회학과 문화인류학의 방법론을 광범위하게 적용했다는데서 독창성을 찾을 수 있다.

그의 주요 저작들,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Popular Jewish Resistance in Roman Palestine (1987)이나 Sociology and the Jesus Movement (1989) 등에서 그는 예수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사회 혁명가로서 접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그려낸 1세기 갈릴래아의 풍경은 상당히 음울하다. 그곳은 계급갈등과 경제적 불평등으로 얼룩진 곳이었고, 그가 보기에 동시대의 종말론적 예언자들은 이러한 불평등에 대항하는 민중적 움직임의 맥락에 선 이들이었다.

호슬리의 시각에 의하면, 예수는 부유층과 권력자, 그리고 심지어 성전(이 점은 특히 버메스나 샌더스와 대비된다)에 반대하였고, 특히 로마 제국과 제국적 질서에 반대한 인물이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 불평등과 제국의 폭력적 질서가 지배하는 세상에 정확히 반대되는 나라가 된다. 따라서 로마 제국은 예수를 정치적 위협으로 판단하고 처형하였다는 것이다.

호슬리의 주장은 물론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의존한 사회학적 모델들에 적합성이 비판을 받았고, 이 모델에 근거하여 그려낸 갈릴레아 사회가 과연 역사적으로 올바른 재구성인지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었다. 또한, 예수의 메시지에서 '종교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제거하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자들이 의문을 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구는 예수가 활동한 갈릴레아의 물질적, 사회적 요건에 본격적으로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였다는 점과 예수의 메시지에서 그동안 흔히 무시되어왔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면에 주목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음 또한 부정할수 없다.




예수 세미나

1980년대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볼 그룹은 바로 일련의 미국 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된 '예수 세미나(The Jesus Seminar)'다. 예수 세미나는 1985년 미국의 학자들인 로버트 펑크와 존 도미닉 크로산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들의 연구방법은 여러모로 독특한데, 특히 회원들의 투표를 통해 예수 전승의 역사적 사실성을 검증하는 방식과, 기존의 공관복음 대신 토마스 복음서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 세미나에서 그려낸 예수 상 역시 상당히 독특하다. 이들은 이때가지 제3의 탐구에서 그려낸 '종말론적 유다교 예언자'로서의 예수 상을 거부한다. 이들이 보는 예수는 문맹인 농민이었으며.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으며, 그의 메시지는 전반적으로 사회정의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유다교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구약성서와 율법, 이스라엘의 회복 등(샌더스 등이 예수 메시지의 핵심으로 파악한 것들)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쯤에서 알 수 있지만, 예수 세미나의 연구는, 제3의 탐구의 트렌드라고 할 수 있는 '유다인 예수의 재발견'에 상당부분 대치된다. 이에 비판하는 학자들은 이들이 그려낸 예수가 '아주 현대적이고 미국적인 예수'라고 보고 있다. 역사적인 예수가 아니라, 진보적인 성향의 현대 미국 시민들이 기꺼이 따를 수 있는 예수 상을 그려냈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에 신학적인 의의가 없지는 않다. 신학은 끊임없이 옛 경전과 종교가 현대인의 삶에 줄 수 있는 의미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적 의의와는 별개로 '역사적' 예수라는 측면에서 봤을때, 시대착오의 오류가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대표적으로, 제임스 던은 예수 세미나의 연구자들이, 19세기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트들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자신들이 보기에 합당한 예수 상을 그려내었다는 뜻이다.




어찌되었건 이러한 논쟁들은, 1980년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성과가 매우 풍성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바탕으로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활발한 연구가 이어지게 된다.

덧글

  • Fedaykin 2016/10/29 19:26 #

    흥미로운 연재 무척 감사 드립니다.
    예수의 사상이나 행동도 흥미롭지만, 죽임을 당한 이유(유대인의 모략, 로마의 견제 등등)도 다양한 견해가 있을것 같은데 그부분이 부각되지 않는것으로 봐서는 죽음에 관해선 이미 합의된 정설이 존재하기 때문일까요?
  • Mr 스노우 2016/10/29 19:36 #

    아 제가 이전에 이 카테고리에 예수의 죽음에 대해 몇번 포스팅을 하는 바람에 이번에 그 부분을 소홀히 하고 말았네요ㅎㅎ 대체로 소수를 제외한 제3의 탐구 연구자들은 예수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은 로마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예루살렘의 사두가이파가 일조했다고 보지요. 기본적으로 종말론적 예언자가 체제에 위협이 되는게 한두번이 아니니까요. 이 카테고리에 제가 쓴 더 자세한 글들이 있습니다.
  • RuBisCO 2016/10/29 20:42 #

    요즘 중동처럼 종파 전쟁으로 서로 칼침놓는 세상이 아니라 의외로 상식적이었던 모양이군요.
  • Mr 스노우 2016/10/30 01:22 #

    엄연히 팍스 로마나 치하에서 그런 일이 있을리가요
  • 로자노프 2016/10/29 20:42 #

    이건 꽤 복잡하고 상식으로 여기던게 무너지는 기분이군요.
  • Mr 스노우 2016/10/30 01:22 #

    그게 학문발전의 묘미 아니겠습니까ㅎ
  • 해색주 2016/10/29 22:14 #

    예수님에 대한 두꺼운 책을 읽어보니, 당시에 있던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에세나파 가운에 예수님이 소속되어 있는 곳은 에세나파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사두가이파가 성전의 파괴와 더불어 사라지고 바리사이파가 이후 유대인들의 종교의 중심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에세나파는 유다항전에서 싸그리 다 죽어서 후대로 전해진게 없었구요.
  • Mr 스노우 2016/10/30 01:22 #

    글쎄요. 그 부분에 있어서 저는 확신을 못하겠습니다. 일단 율법의 해석과 규율 준수에 있어서 엣세네파는 굉장히 극단적으로 엄격합니다. 바리사이파가 매우 유연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말이지요. 게다가 엄격한 금욕주의적인 성격도 있지요. 예수에게서는 결혼을 안한다는것 외에는 엣세네 파와 딱히 공통점이 있나 모르겠습니다. 샌더스 선생의 저서에서도 '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엣세네와 예수는 큰 관련이 없다'라고 서술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이 부분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만..
  • 네리아리 2016/10/29 22:35 #

    본문에서도 나와 있지만 예수 세미나의 가장 큰 19세기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트들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한거 맞죠. 1959년에 C.S.루이스가 당시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트 깠던 걸 그대로 적용시켜도 될 정도로 말이죠.
  • Mr 스노우 2016/10/30 01:24 #

    뭐 마커스 보그 선생처럼 그리스도교를 현대의 언어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고민에는 공감합니다만,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문제가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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