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론: 사회혁명가 예수와 종말론적 예언자 예수 사이에서 (1) homo religiosus

들어가며

지난번까지 3회에 걸친 연재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사를 다루었다. 주제가 '유다인 예수의 재발견'인데다가 간략하게 방대한 연구사를 요약하다보니 아무래도 리처드 호슬리나 예수 세미나 계열에서 강조하는 '사회혁명가' 내지는 '급진적 평등주의자 예수'와, 그 외 제3의 탐구 연구자들이 강조한 '종말론적 유다교 예언자'로서의 예수 이 두 모델이 대립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 것이 사실이다. 예수 메시지의 핵심인 '하느님 나라'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전자는 '이미 온' 하느님 나라이며 따라서 현세적인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것 같고, 후자는 '곧 도래할'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는 보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모델은 사실 그렇게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현재 학계의 중론은 사회혁명가보다는 종말론적 유다교 예언자 쪽에 더 가깝고, 필자도 이쪽을 지지한다. 샌더스가 정확히 지적한대로, 예수는 사회개혁을 위한 법안을 기초한것도 아니고, 정치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을 뒤집어버릴 무장혁명을 계획한 것도 아니다. 예수 전승은 예수가 정치적이거나 군사적 함의가 있는 메시아라는 타이틀을 거부하거나 부정적으로 받아들였음에 상당한 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Bond가 지적하듯이, 그것이 예수 운동과 예수의 메시지에 사회적, 혹은 정치적 함의가 없었다는 말은 되지 않는다. 사실, 많은 이들이 '비정치적 예수' 모델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전체 맥락과 관계없이 한 구절만 뚝 떼어내서 '예수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고 말했다. 세속권력에 복종하라고 명령한거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꽤 많으며, 미국 흑인민권운동과 같은 저항운동때마다 이런 구절을 들먹이며 종교인의 사회참여를 원천봉쇄하려고 했던 시도는 무수히 많다. 1세기 사람인 예수가 현대적 의미에서의 '정교분리'를 알았을리 없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말이다.(게다가 위와 같은 주장은 제대로 된 정교분리 이해도 아니다)

그러나 1세기 사회에서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그렇게 단칼로 정의내리기에는 상당히 애매하다. 둘은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분리된 것은 더더욱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직에 입후보하거나 정계에 입문하는 것만이 정치활동이 아니다. 보다 일상적인 활동, 즉 생계유지를 위한 활동과 그것에 대한 관심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매우 쉽게 정치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종말론적인가 아닌가?

예수를 유다교 예언자, 특히 종말론적 예언자라고 하니 마치 세상과 담쌓고 먼곳만을 바라보는 지극히 종교적인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의 종교적 감수성일뿐, 당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아니다. 지난 포스팅에서 몇번씩 언급했듯이, 현대의 연구는 예수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2성전기 유다교의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예수 메시지의 독특함 역시도 동시대 유다교 내의 다양성이라는 맥락 안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학자들은 예수 메시지의 핵심이 '하느님의 나라'라는데 동의한다. 이 부분은 제임스 던이 지적하듯, 예수와 동시대 다른 유다교 사상가들을 구분지어주는, 예수만의 가장 독특한 특징이기도 하다. 단 이것은 절대로 '비유다교적 특징'이 아니다. 히브리 성서나 제2성전기 유다교 저작에서 예수가 사용한 '하느님 나라'라는 표현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동시대 유다인들은 예수가 말한 개념을 쉽게 알아들었을 것이다. 하느님을 왕으로 인식한다거나, 하느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 익숙한 개념이었다. 예수의 독특성은 이러한 인식을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으로 만들어 자신의 메시지의 핵심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다.

여기서 나라, 혹은 왕국으로 번역되는 단어의 원 표현은 그리스어 '바실레이아'다. 이건 특정한 나라를 가리키는 장소적인 표현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 혹은 왕권을 의미한다. 사실 이 역시도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 전통에 뿌리박은 개념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정의롭지 못한 통치자들과 대립각을 세웠으며, 불의한 현실과 대조되는 하느님의 정의로운 통치를 제시했다. 따라서, 헬렌 본드가 잘 정리했듯이,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정의와 자비, 그리고 평화로 다스려지는 세상을 상징하는 단어다. 이것은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천국'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다분히 현세적인 개념이다.

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예수 논쟁은 이런 배경 하에서 일어난다. 지난번 포스팅에서 보았듯이 E. P. 샌더스를 위시한 많은 제3의 탐구 연구자들은 예수가 곧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될 것이며, 자신은 그것을 알리는 예언자로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종말론적 예언자 예수' 모델이다. 반면에 예수 세미나 및 마커스 보그 등의 학자들은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here and now)" 실현된 것으로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현재의 중론은 '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예수쪽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여기'의 요소가 완전히 무시된 것은 아니다. 사실, 제임스 던 등은 예수 메시지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모두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예언자 전통-사회경제적 접근

그렇다면, 예수의 하느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는것 역시도(다시 말하면, 예수 세미나의 주장처럼 예수를 사회혁명가로 파악하지 않는다 해도) 사회적 메시지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답은 물론 '그렇다'이다. S. Adams가 지적하듯, 제2성전의 재건부터 예수 운동이 일어나게 된 맥락에 이르기까지, 사회경제적 요소는 고대 유다의 문화적 매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부분이다.

고대 사회의 생산량은 상당히 제한적이었고, 대부분의 가정과 그 구성원들의 일상은 생존을 위한 식량생산에 집중되어 있었다. 부유한 이들도 물론 있었지만, 상당수는 최저생존수준(subsistence level)에서 힘겹게 살아갔다. 고대 이스라엘도, 바빌론 유배 이후의 유다 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다. 이러한 household는 단순히 생물학적 가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와 시종 등 생산활동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는 이들을 모두 포함한다.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지시하는 대목에 나오는 아버지의 집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정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household를 뜻한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과 이후 유다 사회에서 삶의 중심이자, 생존의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household부터도 보호를 못 받는 이들이 있었다. 성서는 '고아와 과부'라는 표현으로 이들을 지칭한다. 당연히 이들은 고대 근동사회에서 최악의 취약계층이었다. 또한 household를 이룬다 하더라도 원체 주변 조건이 안좋다거나, 가장의 경영능력이 시원치않다거나 한다면 그 구성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소작인으로 떨어지거나, 최악의 경우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야 할 수도 있었다. 성서에 나오는 '가난한 자'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러한 고대 사회의 삶의 조건을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이러한 취약계층을 보호할 책임이 바로 왕에게 있었다. H. Niehr의 지적대로, 고대 근동에서 왕은 최고신의 아들이었으며, 그 신을 대신하여 지상을 통치하는 대리자였다. 예전 포스팅에서 다루었듯이, 고대 이스라엘도 엄연히 고대 근동의 일부였기 때문에, 이 점은 고대 이스라엘의 왕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스라엘의 왕은 야웨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나는 그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하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역대기 상권 7:12-13)


따라서 신의 아들이자 대리자인 왕은고대 근동 문화권에서 상당히 중요한 개념인 '신적 질서(divine order)'를 유지할 책임이 있었다. 여기에는 취약계층인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보호할 책임이 포함되었다. 구약성서의 예언서는 특히 이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사야 1:17)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이사야 58: 6)


왕, 더 나아가 사회지도층이 이러한 책임을 등한시한다고 생각될 경우, 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거침없는 비판을 퍼부었다. 이러한 구약의 예언자 전통은 이후 세례자 요한과 예수에게로 이어진다.


그들은 성문(참고: 성문은 전통적으로 재판이 열리는 장소다)에서 올바로 시비를 가리는 이를 미워하고 바른말 하는 이를 역겨워한다. 너희가 힘없는 이를 짓밟고 도조를 거두어 가니 너희가 다듬은 돌로 집을 지어도 그 안에서 살지 못하고 포도밭을 탐스럽게 가꾸어도 거기에서 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정녕 나는 너희의 죄가 얼마나 많고 너희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 너희는 의인을 괴롭히고 뇌물을 받으며 빈곤한 이들을 성문에서 밀쳐내었다. .......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정을 세워라. 어쩌면 주 하느님이 요셉의 남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도 모른다.
(아모스 5:10-15)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도 반길 수 없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하여도 받지 않고 살진 짐승들을 바치는 너희의 그 친교 제물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 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21-24)


나는 말하였다.  "야곱의 우두머리들아, 이스라엘 집안의 지도자들아, 들어라. 공정을 바로 아는 것이 너희 일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며 사람들의 살갗을 벗겨내고 뼈에서 살을 발라낸다. 그들은 내 백성들의 살을 먹고 그 살갗을 벗겨내며 그 뼈를 바순다. 내 백성을 냄비에 든 살코기처럼, 가마솥에 담긴 고기처럼 잘게 썬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겠지만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리라. 그때에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얼굴을 감추시리니 그들이 악하게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미카 3:1-4)


이러한 거친 어조의 비판은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경제적 불평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바빌로니아 유배 이후, 페르시아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사실, Adams의 지적대로, 어떤 면에서는 더 나빠졌다. 이 시기에 지중해 문화권에서 상업이 크게 발달하고, 부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회 발전이라는 면에서는 바람직한 현상일수 있지만, 발전은 언제나 양면성을 갖는다. 기회를 제대로 잡은 이들은 부유해지지만,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진다. 따라서 양극화 현상이 발생하며 부자와 빈자 사이의 사회적 갈등도 첨예해진다.




지혜문학과 묵시문학-빈부에 대한 시각

바로 이 시기에 나타나게 되는 장르가 잠언, 지혜서 등과 같은 지혜문학, 그리고 에녹서와 같은 묵시문학들이다. 이 두 장르는 성격과 목적이 다르지만, 당대 현실에 나타난 사회문제에 대한 통찰과 고민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사실 고대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부에 부정적이지 않았다. 예전 포스팅에 언급했듯이, 내세에 관심을 두지 않는 현세적인 세계관에서 부와 장수는 의인에게 주어지는 야웨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겨졌다. 지혜문학에서는 이러한 전통적 시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겸손과 주님을 경외함에 따른 보상은 부와 명예와 생명이다.
(잠언 22:4)


마치 한국 개신교 몇몇 종파에서 좋아하는 소위 '번영의 복음(prosperity gospel)'을 보는듯 하다. 그러나 지혜문학은 이와 완전히 상충되는 전승들도 전해주고 있다.


주님을 경외하며 가진 것이 적은 것이 불안 속의 많은 보화보다 낫다. 사랑 어린 푸성귀 음식이 미움 섞인 살진 황소 고기보다 낫다.
(잠언 15:16-17)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잠언의 편집자들이 다양한 지혜문학 전승들을 끌어모아 한 책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잠언은 다양한 시각에서 나온 금언들의 수집이지, 일관성 있는 목소리를 내는 책이 아니다. 그 목소리들 중에서, 위의 부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의 근원이 되고, 하느님을 가까이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시각은 특히 중요하다. 이러한 시각이 이후 예수 메시지에 상당부분 계승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예전 고대 이스라엘의 내세관 관련 글에서 언급했듯,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질수록 '착하게 살면 복받고 부유해진다'는 가르침은 도전을 받게 마련이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게 됨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점차 경제적 불평등이 개개인이 악하거나 못나서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이러한 긴장도 지혜문학에 조금씩 드러난다.


부유한 자의 재산은 그에게 견고한 성읍이 되고 빈곤한 자의 가난은 그에게 몰락을 가져온다.
(잠언 10:15)

부유하면 친구가 많아지고 빈곤하면 있던 벗도 떨어져나간다.
(잠언 19:4)

부자는 가난한 이들을 다스리고 빚진 이는 빚 준 사람의 종이 된다.
(잠언 22:7)

빈곤한 이를 강탈하지 마라. 그가 빈곤하지 않으냐? 성문에서 가난한 이를 억누르지 마라.
(잠언 22:22)


위와 같은 구절들은 잠언의 다른 많은 구절들처럼 부가 은총의 증거라든지, 아니면 가난한 이를 게으르다고 질타하는 내용이 아니다. 불평등이 지배하는 현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지혜문학과 함께, 제2성전기에 많이 쓰여진 묵시문학은 현실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주로 서술되었다. 이 시기는 페르시아와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유다교에 본격적으로 '내세'라는 개념이 들어오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묵시문학에서는 하느님이 가난한 이들을 끌어올려 높은 자리에 앉히고, 그가 겪은 고통을 보상해주리라는 희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사해문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들 수 있다.


하느님께서 너의 머리를 가난으로부터 들어올리시어 높은 이들과 함께 앉게 하시리라


에녹1서같은 경우는 아예 부유한 이를 악인으로 규정하고, 가난한 이들을 '경건한 이들'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Adams가 주장하듯, 에녹서의 일부분은 아모스를 비롯한 8세기 예언자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자들아. 너희는 부유함을 의지해왔으나, 이제 너희는 그 부를 잃을 것이다. 너희가 부유한 때에 가장 높으신 분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묵시문학의 특징은, 다름아닌 '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예수를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ps. 사실 이 글은 지난번 3회 연재분에 대한 일종의 보론으로 시작한거라 짧고 간결하게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분량조절에 실패해버렸습니다ㅠㅠ 가독성을 위해 부득이하게 둘로 나눠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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