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펠트 전투 (3)-933년의 전역과 마자르의 딜레마 History-근동, 서양사

933년의 침공

932년, 하인리히 1세는 독일 주교단에게 마자르와의 평화조약을 깨고, 지난 8년간 바쳐왔던 공물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그 이유로 그동안 뱌쳐온 막대한 공물로 인해 교회가 지는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을 들었지만, 이 묘사는 하인리히 1세를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군주로 그리고자 했던 작센 연대기 저자(저자인 비두킨트는 베네딕토회 수사였다)의 의도가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 Bachrach가 지적하듯이, 군사적 자신감을 얻은 하인리히 1세는 개전을 앞두고 지지여론을 모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얼마 뒤,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도 비슷한 의식을 치르고 하인리히의 전쟁에 동참할 것을 분명히 했다.

933년, 공물이 끊어지자 헝가리의 마자르족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 상당한 규모의 마자르군이 튀링겐과 작센을 목표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동프랑크는 예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았다. 불길한 징조는 초장부터 나타났다. 이제까지 마자르의 침공때 큰 도움이 되었던 지역 슬라브인들이 가세를 거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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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레 강을 건넌 마자르족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향했다. 서쪽의 튀링겐으로 향한 부대는 곧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주민들이 가져갈수 있는 식량과 재산과 가축들을 모조리 챙겨서 요새로 피신해버렸던 것이다. 그 지역 방어군에게도 이미 동원령이 떨어져 있었다.

마자르군을 향해 지역 방어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난번 글에 설명했듯이, 주기적으로 훈련받은 milites로 보강된 군대였다. 이들은 한데 집결하여 마자르군을 공격했고, 이미 추위와 식량부족으로 취약해져있던 마자르족은 큰 패배를 당했다. 패배 이후 마자르군은 식량과 마초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이 상태가 가장 취약한 상태였다. 각 요충지마다 지어진 요새 안에서 잘 쉬고 있던 동프랑크군이 흩어진 마자르 소부대들을 덮쳐왔다. 이들의 공격에 마자르군은 매우 쉽게 각개격파당했다. 하인리히의 종심방어 전략은 이렇게 그 가치를 완벽하게 증명했다. 서쪽으로 진군해간 마자르 군대는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리아데 전투

동쪽으로 향한 부대는 메르제부르크를 공격하려 시도하였다. 그 인근의 리아데(Riade)가 바로 하인리히 1세가 그의 군대를 집결시킨 장소였다. 서쪽에서 하인리히의 종심방어 전략이 효과를 입증했다면, 이제 군제개혁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야전군이 실력을 발휘할 차례였다.

하인리히의 군대가 접근해오는 것을 알아차리자, 마자르족은 연기를 피워올려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튀링겐 지역에 흩어져있던 마자르족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하인리히는 예상 외의 전술을 구사했다. 그의 군대 중에서 가장 빈약하게 무장한 기병들을 약간의 중무장병을 딸려서 내보냈던 것이다.

이 부대를 보자 자신감을 얻은 마자르족이 공격해왔고, 빈약하게 무장한 동프랑크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마자르군을 하인리히가 공들여 쳐놓은 함정 한복판으로 끌어들였다. 마자르족을 비롯한 스텝 군대의 주특기인 위장 후퇴 전술을, 하인리히가 다름아닌 그들을 상대로 구사했던 것이다. 이는 개혁의 결과로 재탄생한 그의 군대의 전술적 수준을 잘 말해준다.

적이 미끼를 물고 가까이 오자, 하인리히는 매복시켰던 중무장 기병을 풀어놓았다. 이 대목은 이후 역사가들이 하인리히 개혁의 핵심을 기병 양성으로 오해하게 만든 장면 중 하나이다. 그러나 Bowlus 선생이 잘 지적하듯이, 중무장 기병에만 집중하다보면 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경무장한 궁기병이 다수 포함된 스텝 기병대를 상대로, 중무장 기병이 돌격을 통해 백병전으로 국면을 끌고 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지난번 글에도 썼듯이, 중무장 기병이 예상치 못한 근거리에서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는한 정말 쉽지가 않다. 리아데 전투의 중요성은 각 부대의 유기적인 협동을 통한 위장 후퇴와 매복 전술로 그 어려운 작업을 이루어냈다는 점에 있다. 지난번 글에 언급했듯이 단순히 기병 양성이 아니라, 이러한 작전을 구사할 수 있는 군대를 만들어낸것이 하인리히가 이룬 개혁의 진정한 성과였다.

어쨌든, 근거리에서 매복해있던 동프랑크 기병이 돌격해오자 마자르군은 크게 당황했다. 어찌나 가까운 거리에서 튀어나왔던지 마자르 기병은 화살을 딱 한 번밖에 쏠 수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곧장 뒤로 돌아 도망쳐버렸다.

다만 하인리히 입장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위험을 감지한 마자르군이 재빨리 후퇴하는 바람에 함정을 통해 적을 섬멸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하인리히의 기병은 적을 추격했지만, 딱 8마일만 뒤쫓다가 정지했다. 이는 사실 현명한 결정이었다. 더 추격하다가 말이 지친다면, 재결집한 마자르군의 역습에 당할수도 있었다. 승리한 군대가 대열이 흐트러졌다가 역습에 당하는 사례는 매우 많다. 질서를 유지하면서 추격하자 적절한 시점에서 멈출수 있었다는 점도 동프랑크군의 훈련도와 규율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마자르족은 큰 사상자를 내지 않고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곳은 작센 국경지역이었기 때문에, 잘레 강만 넘어가면 무인지대였다. 따라서 서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종심방어에 걸려 섬멸된 부대와 달리, 이쪽의 마자르군은 거의 온전히 철수하였다. 그러나 스텝 군대는 물러나더라도 곧장 재집결하여 반격을 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에 마자르군이 그래도 도망쳤다는 것은 단단이 혼이 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종심방어 전략의 위력을 증명하고, 군제개혁의 결과로 탄생한 야전군의 전술적 능력을 보였으며, 궁극적으로 마자르군을 물러나게 했다는 것은, 불과 20여년 전에 루트비히의 동프랑크군이 마자르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했고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기적으로 공물을 바쳐야 했다는 점과 비교해볼때 큰 성과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마자르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어 앞으로의 침공을 단념하게 만드는 과업은 하인리히의 아들 오토에게로 넘겨졌다.





마자르의 딜레마

일단 마자르족은 그런대로 전력을 보존해서 철수했다(전멸한 서쪽 방면군은 제외하고). 덕분에 몇년 지나지도 않은 937년에 마자르족은 다시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일으켜 작센과 튀링겐을 재침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침공은 유럽을 마음대로 휩쓸던 좋은 시절은 이제 갔다는 사실만을 증명해주었다.

하인리히의 종심방어 체제는 다시 한번 굳건히 위력을 발휘했고, 철수하던 마자르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침공군이 돌아갈때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중요한 길목마다 잘 무장된 방어군으로 가득한 요새들이 들어차 있으니 피해를 입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933년과 937년의 전역은 마자르족에게 그때가지 유지해왔던 전략 기조를 수정해야 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정주민을 상대로 벌여온 약탈전쟁 방식으로는 동프랑크의 종심방어를 상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마자르족의 전략적 딜레마가 있었다.

이전의 많은 유라시아 스탭 출신 유목민들도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같은 딜레마에 부딪친 바 있다. 이들은 정주사회 인근에 자리잡고 주기적인 약탈을 통해 그들의 부를 빼앗아오는 삶의 방식을 따랐다. 이제까지의 숱한 침공에서, 마자르족은 근본적으로 정복자가 아닌 약탈자로서 나타났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방식을 계속 유지하려면 정주사회로의 통합을 피해야만 했다. 안 그러면 바로 이들을 정주민 입장에서 공포스러운 존재로 만들어준 기술들을 잃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삶의 방식을 유지하자니 더이상 침공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더욱이 이들이 스텝 지역의 전쟁 방식을 고수하려면 정복하는 지역마다 새로이 목초지를 확보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기마 전사의 수를 유지할 수가 있다. 그런데 하인리히의 축성 덕분에 이 지역을 정복하고 목초지로 만드는 것은 상당히 어려워졌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서유럽은 스텝 지역처럼 목초지를 확보하기가 힘든 지역이지만. Lindner는 바로 이 목초지의 부족때문에 아틸라의 훈족도 유럽으로 진군할수록 기마 궁수의 비율은 점점 더 줄어들고 결국에는 그의 군대에서 아주 소수가 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약탈자에서 정복자로 변신하려면 그들의 군대와 전쟁방식 자체가 변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정복전쟁을 수행하려면 예전처럼 스텝 기병 중심의 군대가 아니라, 다수의 보병과 공성부대를 포함한 복합군으로의 진화가 필요했다. 특히 이 공성기술을 확보한다는게 중요한 관건이었다. 이건 유목민에게는 삶의 방식 자체가 걸린 문제로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익숙한 생활 방식에 수정을 가한다는건 대단히 힘들고 불편한 일이다. 모든 개혁의 근본적인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맨 첫회에서 언급했듯이, 스텝 유목민의 많은 장점들 중 하나는 탁월한 적응력이다. 일단 방향을 잡으면 이들은 주변의 발달된 문명으로부터 배우거나 빌려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마자르족도 변신을 위한 노력에 들어갔다. 그들은 부유하고 선진 문명을 자랑하는 비잔티움 제국으로 눈을 돌렸다.

마침 자신들의 세력권인 이탈리아로 동프랑크가 세력을 확장하려 드는 것에 분개하던 비잔티움 제국과 마자르족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이후 마자르 침공을 지휘하게 되는 지도자는 실제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꽤 오래 체류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비잔티움으로부터 전략적 조언과, 공성에 관련된 기술을 전수받은 마자르족은 대대적인 변모에 들어간다.

이렇게 개혁을 위한 치열한 과정을 겪은 두 군대가 또다시 마주쳤을때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가 다음 글에서 살펴볼 주제이다.


덧글

  • Fedaykin 2017/01/16 19:07 #

    크...적응의 마자르족! 제2장 시작하는건가요. 기대됩니다 ㅎㅎ

    성이라는게 단순히 기사시대의 봉건영주의 나와바리가 아니라 유목민에 대항하는 전략체계중에 하나라는 관점이 상당히 신선하고 흥미롭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 Mr 스노우 2017/01/17 08:11 #

    똑같은 성이라고 해도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는거지요. 감사합니다 ^^
  • 슈타인호프 2017/01/16 19:16 #

    마자르인들이 비잔티움을 잘 공격하지 않았나요? 아니면 비잔티움답게 "지금 이 시점에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죄다 이용하고 본 것인지요.
  • Mr 스노우 2017/01/17 08:03 #

    뭐 딱히 비잔티움만의 특징이라기에는 어제까지 싸우던 적도 이해관계가 비슷하면 손을 잡을 수 있는게 국제관계니까요.
  • 위장효과 2017/01/16 19:51 #

    하여간 이이제이의 대가 비잔티움 제국 수뇌부...
  • Mr 스노우 2017/01/17 08:04 #

    대국이 되려면 그정도 외교수완은 있어야지 않겠습니까ㅎ
  • 로자노프 2017/01/16 20:04 #

    1. 근데 940년대 즈음에 비잔틴제국이 한번 마자르족에게 털린 거로 기억하는데 이건 그럼 어찌된건가요?

    2. 음. 적응이라면 940년대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 공세와도 연관이 있는 건가요?
  • Mr 스노우 2017/01/17 08:09 #

    1. 그 뒤의 일이죠.
    2. 그것까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 2017/01/17 10:2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1/17 20:0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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