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의 기원(4)-종교의 문제 History-근동, 서양사



영국 내전은 종교전쟁인가?


영국내전은 이전 세기 프랑스의 내전처럼 종교전쟁으로 흔히 분류되지는 않는다. 물론 예전 '청교도 혁명'이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던 때에는 이 시기 사회적 격변의 근간에 청교도 신앙이 있었다는 암묵의 동의가 있었으나, 그 초점은 어디까지나 시민혁명의 동력으로서의 청교도 신앙이었다. 또한 마르크스 사관을 거치면서 영국 내전에서 종교의 역할은 사실상 사회경제적 주장을 표출하는 일종의 외피 정도로 격하되기도 하였다.


수정주의의 주요 성과 중 하나는 이 시기 사람들의 망탈리테에서 종교의 중요성을 회복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 연구자들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는 부분도 영국 내전에 있어서 종교의 중요성이다. 예전에는 "설마 그래도 종교 때문에 이런 전쟁이 일어나겠어. 전쟁은 다 돈과 권력 때문이고 종교는 핑계지"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인, 세속화된 현대인의 관점을 과거에 투사하는 오류이다. 이 시기의 종교는 개인과 사회, 국가의 아이덴티티 그 자체였다. 이에 대해서는 예전에 '종파국가' 개념을 설명하며 이야기한바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적 관용은 이 시기에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관용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종파의 뿌리를 뽑을수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일시적으로 타협하는 것이었다. 보편교회의 큰 틀 안에만 머문다면 왠만한 이설은 포용하던 중세에 비해 근대 초의 관용은 분명 크게 후퇴했다. 사실 17세기에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을 가장 정확히 이해하는 방식은 바로 현대의 정치 이데올로기, 특히 냉전시대의 그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 내전을 완전히 종교전쟁이라고 규정하기에도 무리가 따른다. 종교는 분명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그 자체만으로 전쟁을 촉발시킨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종교의 문제는 지난번에 설명한 엘리자베스 체제의 재정적 문제와 결합하여 더 큰 문제를 낳았다. 그리고 이 전쟁에 참여한 이들은 자기만의 각각 다른 이유로 무기를 들었고, 그게 모두 일괄적으로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영국 내전은 종교전쟁의 성격이 대단히 강한, 복합적인 전쟁이었다.


그렇다면, 이 내전에 종교적인 성격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종교전쟁으로서의 성격일까가? '청교도 혁명'이라는 지금은 한물 갔지만 예전에 널리 통용되던 명칭과, 청교도 특유의 반가톨릭주의 레톨릭으로 인해 가끔 영국 내전도 가톨릭-개신교 대립의 일환이라고 보는 이도 있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왕당파는 친가톨릭, 의회파는 반가톨릭이라고 파악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앞으로의 연재를 통해 확실히 보겠지만, 분명한 오해다.(단 왕당파쪽이 의회파보다 가톨릭 배척이 덜 극단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일단, '잉글랜드'의 내전에서 가톨릭은 일부 개인 자격으로 참전한 이들을 제외하면 관여한 바가 거의 없다. 영국 내전은 Blair Worden 선생이 지적하듯이, 영국 국교회가 어떤 형태의 개신교가 되어야 하는가를 놓고 벌어진 개신교 간의 내전이었다.






영국 교회의 문제


17세기 초 영국 국교회 또한 엘리자베스 체제의 일부였다. 이 교회는 상당히 독특한 형태의 혼합물이었으며,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이 독특한 체제는 영국 국교회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숙명을 부여하였다. 많은 최근 연구자들이 동의하듯이 영국의 종교개혁과 개종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점진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제임스 1세 치세에 이르면 국교회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 교회의 중도 정책에 자부심을 갖는 이들도 많아졌다. 이들은 영국 교회의 중용이야말로 잉글랜드를 유럽을 휩쓰는 종교전쟁의 참화와 광신으로부터 구해낸 비결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체성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되지 않았고, 여기에 심각한 갈등 요소가 잠재해 있었다. 엘리자베스 국교회는 신학적으로는 칼뱅파의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가톨릭 교회의 교계 체제와 일부 전례적 요소를 남겨놓은 교회였다. 이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놓고, 점차 영국 교회를 놓고 두 개의 대립적인 시각이 등장하게 된다. 이 둘을 뭐라고 이름붙여야 하는가는 역시 논쟁이 분분하지만, 편의상 Worden 선생의 분류를 따라 '앵글리칸'과 '퓨리턴(청교도)'으로 부르도록 하겠다.


사실 편의상 이렇게 부르긴 하지만, '퓨리턴'은 일종의 멸칭이면서 비꼬는 이름으로 붙인 것이라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이들은 스스로를 godly, 즉 '경건한 이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후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키네 된다. 자신들이 godly라면 자신들의 믿음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이들은 ungodly가 되기 때문이다. Coward와 Gaunt 선생이 잘 설명했듯이 이들은 특별히 전투적인 강경파 칼뱅주의 개신교도였으며, 교회뿐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생활 모든 부분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경건한 방식으로 바꾸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천년왕국설을 따르는 종말론자들이었다. 이들은 어지러운 현실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확신을 가졌다. 따라서 현실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은 이 틀에 맞추어 해석되었다. 이 종말의 시기에 잉글랜드가 구원을 받으려면, 교회와 사회의 타락한 요소들을 모두 쓸어버려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동시에 이들은 예정설의 강경한 신봉자들이었다. 이에 따르면 인류 대다수는 멸망하기로 정해진 운명이었다.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은 본인의 노력이 아닌, 오직 하느님의 전적인 은혜와 자비로 구원받게 된다. 이 예정설은 사실 엘리자베스 치세 후반부터 청교도뿐 아니라, 영국 국교회 전반에 널리 수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톨릭 신학을 반박하기 위한 이론적인 차원에서 수용된 것이었다. 반면에 청교도는 이 이론을 삶의 핵심으로 삼고, 자신들이 선택받았음을 확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렇게 해서 예정설에 대한 절대적인 신봉은 청교도 아이덴티티의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제임스 1세 치세에 들어와 나타나기 시작한 '앵글리칸'과 청교도가 정면 충돌한 부분이었다. 이에 대한 Worden 선생의 설명은 경청할만 하다.




"이데올로기는 예전 믿음과의 타협할 수 없는 충돌을 통해 스스로를 정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타협을 통해 완화된다. 강경파 이론가들은 이런 현상에 좌절하면서 더욱더 본래의 이론에 매달리게 된다. 칼뱅파의 경우가 그러했다."  Blair Worden, The English Civil Wars 1640-1660 (London, 2009), p.11.




쉽게 말하면, 여기서 '앵글리칸'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본래의 강경한 칼뱅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다소 온건한 방향을 찾게 된 이들이고 '퓨리턴'은 이런 경향을 개혁의 쇠퇴라고 보며, 더욱 강경한 근본주의적 칼뱅파 신학에 매달린 이들이었다.


제임스 1세의 치세에 이르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칼뱅의 신학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부정하는 예정설은 하느님을 폭군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할수 없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을 향해 돌아설 수 있도록 하는 잠재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이 앵글리칸이었다.


예배의 형태를 두고도 앵글리칸은 청교도와 의견이 갈렸다. 청교도는 교회 내에서 옛 가톨릭의 흔적을 완전히 쓸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개혁은 여전히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가 청교도의 주장이었다. 반면에 앵글리칸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아니, 지금도 너무 나갔다"라고 주장하였다. 앵글리칸은 교회의 좋은 전통까지 파괴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앵글리칸은 교회가 가진 호소력은, 칼뱅파가 좋아하는 설교에 대한 과도한 강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영속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전례와 성사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강경 칼뱅파는 이러한 신학적 경향을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일어나던 움직임과 결부시켜 '아르미니우스주의'라고 칭하며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당시 영국 그리스도교가 퓨리턴과 앵글리칸으로 칼로 자르듯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는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퓨리턴들도 예정설과 강경한 반가톨릭주의 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집단이었고, 얼마나 강경한 성향을 띄었는가는 개개인마다 달랐다. 또한 Michael Braddick 선생이 지적하듯, 전통에 대한 강조는 잉글랜드 프로테스탄티즘의 중요한 요소였다. 강경한 퓨리턴은 소수였고, 대다수의 잉글랜드 칼뱅파는 주교제나 전통 전례를 큰 불편함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종교적 긴장과 갈등이 곧 내전의 발발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분열의 씨가 상당히 깊게 뿌려져있었으며, 양극단의 강경파가 아직까지는 소수파였으나 점점 더 강경해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퓨리턴은 앵글리칸, 혹은 '잉글랜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등장에 불안을 느끼며 더더욱 강경하게 "예정설천국 불신지옥"을 부르짖었다.







반가톨릭(?)주의


이 시기 잉글랜드의 종교갈등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것 하나가 툭하면 등장하는 반가톨릭주의 레토릭이다. 특히 청교도와 같은 강경파 칼뱅주의자들은 말끝마다 popery(당시 가톨릭에 대한 멸칭)를 달고 살았고, 이러한 레토릭은 내전기 내내 의회파 내에서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 잉글랜드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개신교 내의 갈등이라면 가만히 있는 가톨릭에 대한 공격이 주 의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Braddick 선생의 설명대로, popery가 반드시 진짜 가톨릭 신자들만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자도 다른 개신교 신자의 눈에 얼마든지 '교황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가령, 당시 가장 강경파 퓨리턴이 보는 종교지도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로마 가톨릭: 악의 축, 마귀사탄

루터파: 절반쯤 개혁하려다 만 교회

앵글리칸: 가톨릭 2중대

아르미니우스주의: 가톨릭 2중대




쉽게 말하면, 퓨리턴의 핵심적인 가치인 이중예정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가톨릭이거나, 개신교로 위장한 가톨릭이거나, 가톨릭에 물들 잠재력이 있는 개신교인 셈이었다.


바로 이 부분이 큰 문제였다. Worden 선생이 지적하듯, 퓨리턴의 종교적 비전에 공감하는 이들은 소수였으나 이들이 외치고 다니는 '가톨릭 반대'는 프로테스탄트 사이에서 넒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는 '가톨릭'의 정의가 제각각이었다. 앵글리칸에게 가톨릭이 로마 교황을 따르는 교회였다면, 강성 퓨리턴에게 가톨릭은 사실상 자기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이들 전부였다. 특히 앵글리칸과 아르미니우스파는 퓨리턴이 보기에는 가톨릭 복귀를 위해 음모를 꾸미는 세력에 불과했다.




청교도: "누가 가톨릭인지는 내가 정한다"



이런 까닭에 당시 잉글랜드의 퓨리턴들은 자신들이 적대적인 가톨릭에게 사방에서 포위당한 상태이며, 따라서 잉글랜드의 개신교는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고, 더 나아가 잉글랜드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을 잃을 위기에 놓여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물론 다시 말하지만, 이 시기 진짜 가톨릭은 비교적 얌전히 있었고, 퓨리턴과 대립하는 이들은 퓨리턴의 시각에 동감하지 못하는 '개신교'였다. 퓨리턴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심리상태는 이후의 전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덧글

  • 네비아찌 2017/07/27 07:50 #

    퓨리턴 상태가 그정도일줄은.... 거의 현대의 살라피스트 무슬림을 방불케 하는군요.... 그럼 크롬웰 정권은 다에쉬....
  • Mr 스노우 2017/07/30 12:51 #

    크롬웰은 퓨리턴 중에서 그나마 온건했다는게 함정입니다. 물론 아일랜드에서는 악마짓 했지만..
  • 2017/07/27 10:0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7/30 12:5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함부르거 2017/07/27 10:28 #

    오랫동안 역사를 읽으면서 느낀 건 동서고금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놈들은 광신도라는 겁니다. 문제는 광신도들은 지들이 광신도인 걸 모른다는 거죠. -_-;;;;;;;
  • Mr 스노우 2017/07/30 12:51 #

    그래도 뭐 시대적 한계와 특수성은 감안은 해야겠지요. 청교도는 그중에서도 유독 좀 심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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