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의 기원 (5) 제임스 1세의 성과와 한계 History-근동, 서양사

국왕 제임스 1세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제임스 1세는 상당히 오랫동안 평가가 꽤 좋지 않았던 왕이다. 이러한 혹평은, 스코틀랜드 왕으로서 그가 전통적으로 받아온 높은 평가와 대조되어 한동안 학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필자가 이 카페에서도 여러번 말해온 바이지만, 역사상의 인물(그리고 현재 우리 주변의 인물들도) 중에는 100퍼센트 암군도, 100퍼센트 명군도 찾아보기 힘들다. 100퍼센트 나쁜놈이나 국가도, 100퍼센트 착한 분이나 국가와 마찬가지로 찾아보기 참 힘들다. 인간이나 사회나 국가나 모두 마찬가지로 그런 이분법이 통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한 존재들이다. 이런 격변의 시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현재 학자들은 제임스 1세와 그의 치세를 어떻게 보는가?


제임스 1세


사실 근대 초 유럽의 군주들 중 제임스 1세는 제법 독특한 축에 들어간다. 유럽의 군주는 전통적으로 전사였고, 전사로서의 자질을 가져야지만 귀족들과 백성들의 존경심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제임스 1세는 그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제임스 1세는, Hutton 선생이 표현하듯, 브리튼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 '학자 군주'라는 명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왕이었다.


단순히 책 많이 읽고 박식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걸로 치면 헨리 8세 같은 왕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제임스 1세는 단순한 지식습득을 넘어서 진짜 '지성(intelligence)'이 있었다. 그는 역사, 신학, 고전문학 전반에 조예가 깊었을뿐 아니라 자신만의 통치 철학과 신학 이론을 세울만한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자답게 자신의 해석과 다른 해석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을 모순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책상물림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임스 1세는 타고난 정치꾼이었다. 교활할 정도로 기민하고 상황 판단이 빨랐으며, 정치적 스킬로 위기를 벗어나는 능력이 탁월했다. 인사관리 능력도 뛰어났고, 토론 실력도 좋았다.


그러나 장점만 있는 사람은 없는 법이라, 이러한 그의 장점들 못지 않은 약점들도 있었다. 우선 국왕이라면 위엄과 카리스마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에 그는 신체적으로 크게 볼품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튜더 왕가의 왕들은 자신의 초상화를 수없이 양산해서 프로파간다로 활용했지만, 제임스 1세의 경우 초상화를 그리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러한 신체적 약점으로 인해서 제임스는 군중들 앞에서 상당히 수줍음을 타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수줍음은 곧잘 짜증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그는 화가 났을 때는 상당히 더러운 성질머리를 자랑하는 왕이 되었다.


이 약점은 그가 당시 잉글랜드인들이 싫어하는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해볼때 상당히 큰 부분이었다. 더욱이 그는 신민들의 인기를 얻으려는 노력에는 별로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제임스는 정치 게임에는 탁월한 재능을 자랑했으나 일상적인 행정과 같이 지루한 업무는 아주 싫어했다. 그러나 유능한 재상과 관료들만 잘 선발해놓는다면 이는 반드시 약점이라고 볼수는 없다. 헨리 8세도 똑같이 행정업무를 싫어하면서 거의 손도 대지 않았으나 대신 울시 추기경-토머스 모어-토머스 크롬웰로 이어지는 재능있는 관리들을 연달아 기용해서 내정을 철저하게 일임했다. 한국은 왕이 모든 업무를 다 틀어쥐면 왕권이 강해지고 나라가 잘 돌아가고, 재상에게 전담하면 왕권이 약해지고 나라가 망조든다는 관념이 이상하게 강한데, 이런 고정관념은 많이 수정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상당히 많은 장점과 약점을 모두 가지고 즉위한 제임스 1세는 엘리자베스가 남겨놓은 쉽지 않은 유산과 마주하게 되었다. 과연 그는 어떻게 대처했으며 결과는 어땠을까?







제임스 1세의 대외정책


앞서 말했듯, 근대 초 유럽의 군주로서 제임스 1세가 가장 특이했던 점은 군사적 영광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신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가장 큰 요인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겁쟁이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이 시대 군주들 중 보기 드문 평화주의자로, 전쟁은 국가간의 관계에 있어 최후의 수단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스페인 선박을 상대로 한 사략선의 약탈행위를 금지함과 동시에,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계속되어온 스페인과의 긴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었다. 본인의 평화주의뿐만이 아니라 잉글랜드는 더이상 전쟁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 국가재정 시스템이 형편없이 시대에 뒤떨어진 상황에서 유럽의 초강대국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힘겹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때쯤 되면 스페인도 그다지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얻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양국의 이해관계는 비교적 쉽게 맞아떨어졌다.


영국-스페인 종전을 위한 런던 회담, 1604


1604년, 런던 조약으로 잉글랜드는 스페인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로 인해서 제임스 1세는 그동안 잉글랜드의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안겨주던 전쟁을 마침내 끝냈다. 더욱이 이 협정은 잉글랜드가 실익도 챙기고, 체면도 크게 잃지 않는 상태로 끝냈다.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이것은 제임스에게 상당히 비판적인 학자들까지도 그의 '외교적 승리'라고 평가하는 작지 않은 업적이다.


그러나 군사적 영광과 직결되는 국제적 위신이 중요한 시기에, 제임스 1세의 평화정책이 과연 존중을 받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 있어서 제임스는 잉글랜드의 위신을 세우는 방식으로 상당히 독특한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전사군주 대신, 유럽 각국의 관계를 중재하는 일종의 '피스메이커'가 됨으로서 국제적 위상을 확보하려 했다.


이를 위한 그의 안배는 상당히 흥미로운데, 그는 딸은 프로테스탄트 국가에 시집보내고, 아들은 가톨릭 국가에 장가들게 하는 방식으로 균형을 잡으려 했다. 단순한 균형을 넘어서, 이는 두 세력 모두에 인맥을 만들어서 갈등상황에서 중재 역할을 하고자 함이었다. 그의 딸 엘리자베스는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아내가 되고, 그의 아들 찰스는 처음에는 스페인 공주와 결혼시키려 하다가 협상이 결렬되자 프랑스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실제로 평화의 중재자로서 제임스 1세의 명성은 이 시기에 꽤 높아졌다. 그러나 잉글랜드 신민들이 매료될만한 대외정책은 아니었다. 그리고 애써 조정해오던 평화는 나중에 사위 덕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1618년, 제임스의 사위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반기를 든 보헤미아의 왕위를 수락하였다. 이 사건은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유럽은 이제 국제 프로테스탄티즘과 국제 가톨릭주의가 정면충돌하는 무대가 되었다. 여기에 황제가 친족인 스페인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평화의 중재자를 자처해오던 제임스 1세로서는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종파주의 시대는 국민국가 시대와 다른 점이 많다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아직 근대 민족주의 이후의 국민적 아이덴티티보다 종파적 아이덴티티가 더욱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기였다. 잉글랜드의 개신교도들, 특히 강경 칼뱅파는 자연스럽게 자신들을 국제 프로테스탄티즘의 일부로 생각하였고, 당연히 제임스 1세가 군사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사위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제임스 1세는 늘 그랬듯이 무력을 쓰지 않고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우선 스페인에 '프리드리히의 영토를 공격하지 않으면 당신들과 우호관계를 맺겠다'라는 의사를 타전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협상 결렬을 대비하여 전쟁 준비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이 전략은 대단히 기발한 것이었으나 당시에 수행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것이었고, 결국 역효과를 냈다. 스페인과의 회담이 길어지는동안, 의회는 전쟁을 할 것 같지도 않으면서 전쟁 대비하게 자금을 달라는 요청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 결과 제임스와 하원의 관계가 악화되어 의회 해산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뜻대로 안풀리는 외교와 의회와의 관계는 제임스 1세의 말년을 상당히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후 살펴보겠지만 재정개혁의 되풀이된 실패도 겹쳐서 말년의 제임스는 거의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더 주목해야 할것은 당시 잉글랜드 개신교도들의 호전적인 요구였다. 제임스 1세의 평화주의 정책의 방향은 분명 옳았으나(당시 잉글랜드는 스페인과 전쟁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는 그의 인기 감소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는 이후 찰스 1세의 치세에도 상당히 복잡한 문제를 제공하게 된다.







재정개혁 시도와 그 실패


제임스 1세는 그 성향이 앞서 언급했듯 평화주의자이기도 했지만, 당시 잉글랜드의 재정상황 자체가 전쟁이고 뭐고 할 상태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모르쇠 정책 덕분에, 당시 잉글랜드의 재정 시스템은 스코틀랜드를 제외하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축에 들었다.


예전 글에 언급했듯이, 엘리자베스는 돈 부족으로 인해 주요 귀족과 관료들에게 극단적으로 인색하게 굴었다. 이는 관료들의 부패와 탈세를 촉진하여 많은 문제를 낳았다. 제임스는 그러한 인색함을 따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안그래도 인기없는 외국인 군주로서 그건 정치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근대 초의 군주는 관대하게 후원과 유흥과 잔치를 베풀 의무가 있었고, 제임스는 정확히 그렇게 했다. 이때문에 그는 꽤 오랫동안 사치하고 방탕한 군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고, 이런 관대함 덕분에 초기 스튜어트 체제는 비교적 쉽게 안착할 수 있었다. 그가 관대하게 뿌린 돈과 토지와 관직은 많은 잉글랜드 신민들의 충성을 사는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제임스의 정책을 마냥 옳다고만 할 수도 없다. 제임스 1세의 단점 중 하나는, 분명 옳은 정책을 시행하는데 적절하게 멈추지를 못하고 너무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관대함은 분명 필요한 것이었지만, 때때로 과도한 사치와 방탕이라는 선을 넘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히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이는 그의 궁정문화가 퇴폐스러운 이미지로 알려지는데 일조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을 막 뿌려대기에는 당시 재정상황이 너무 안좋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건 이제는 낡아서 총체적인 개혁이 필요한 체제가 근본 원인이라 제임스의 탓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스페인과의 전쟁을 멈춤으로서 상당한 경비를 절약했음에도 재정상황이 나아지지 않은데에는 지출을 너무 늘린 제임스의 책임도 일정부분 있었다.


어찌되었건 재정문제가 절약으로 해결될 차원이 아니라는것도 명백했다. 제임스 1세와 관료들은 이 체제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고, 이를 손보기 위한 작업에 돌입하였다. 1608년, 잉글랜드의 관세가 대대적으로 재조정되었는데, 이게 1550년대의 개혁 이후 처음 있었던 일이니 그간 재정 시스템 업데이트가 얼마나 안되어있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제임스 1세의 개혁시도는 수많은 반발에 부딪쳤다. 지난번 연재글에서 설명했듯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재정이 시스템적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수에게 1608년의 개혁시도는 별 문제없는 잉글랜드 헌정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재무상 로버트 세실 경은 1610년에 양원을 모두 소집하여 재정문제를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 결과 시도된 것이 이른바 '대계약(the Great Contract)' 이라는 왕과 하원 간의 타협안이다. 이 제안은 국왕이 후견권, 비상징발권을 비롯한 몇몇 봉건적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의회가 왕에게 매년 일정량의 돈을 제공하는 내용으로 되어있었다.


로버트 세실 경


이 계약은 사실 왕과 의회 모두를 만족시킬수 있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협상은 비교적 용이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의회가 재소집되었을때, 갑자기 의회 의원들이 발을 빼기 시작했다. 의원들 사이에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국가 재정 시스템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로 맛이 가있었는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왕의 수입을 늘려주면, 그때부터는 의회가 필요없다고 마음대로 통치하는거 아냐?"



협상이 지지부진해지자, 제임스 1세의 눈에도 갑자기 협상안의 문제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협상이 이루어지면 왕은 몇몇 봉건적 권리를 내주고, 매년 20만 파운드를 대신 받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20만 파운드는 고정된 비용이다. 지금과 같은 인플레이션의 시대에 그 가치는 매년 떨어질게 분명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제임스 1세도 이 협상안이 예전처럼 매력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재정개혁은 물건너가고 말았다.






종교정책의 성과와 그 한계


많은 연구자들은 제임스 1세의 치세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낸 정책으로 외교와 종교정책을 흔히 꼽는다. 국제관계에서도 독특했지만, 종교 면에서도 제임스 1세는 상당히 독특한 왕이었다. 그는 신학 면에서도 상당히 박식한 학자였기 때문에, 자신만의 이론이 확고했다. 그는 17세기 종파주의 시대의 왕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종교적으로 열린 마인드를 가졌던 사람이었다.


우선 정치가로서 그는 앞서 살펴봤듯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두 세력의 평화가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었고, 그 때문에 중재자를 자처했다. 이는 종파주의 시대에 매우 찾아보기 힘든 태도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자신의 종교관에서 기인한 바가 컸다. 그는 분명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그러나 당시 개신교 신자로서는 드물게도 로마 가톨릭에 별 적대감이 없었다. 절대다수의 개신교, 특히 강성 칼뱅파가 가톨릭을 마귀사탄, 적그리스도로 보던 시기에, 제임스는 가톨릭도 오류는 있을지언정 엄연히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일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엘리자베스처럼 가톨릭을 혹심하게 탄압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점도 그의 개신교 신민들의 큰 불만을 샀다. 가톨릭을 잡아죽여야 한다는 주장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영혼이 오류에 빠졌다고 해서 그 육신을 벌할 생각은 없소."




그러나 제임스는 학자이기 이전에 현실 정치인이었다. 그는 종교탄압은 하고 싶지 않았으나, 현실 또한 무시할 수 없었고, 때로는 신민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가톨릭을 탄압을 해야만 했다. 즉, 정치적 필요성으로 인해 제임스는 종종 자신의 이상주의적 신념을 포기해야만 했다. 더욱이 그는 스페인과 평화 때문에 많은 개신교 신민들로부터 의심의 눈길을 받던 처지였다. 따라서 Coward와 Gaunt 선생이 잘 설명하듯이, 치세 초반 제임스 1세의 대가톨릭 정책은 관용과 엄격한 탄압 사이를 자주 왔다갔다 했다. 가이 포크스 사건은 초기 관용에 기대를 걸었다가 뜻밖의 탄압을 당한 잉글랜드 가톨릭 신자들의 절망감을 배경에 깔고 있다.


그래도 제임스 1세를 높이 평가해줄 수 있는 것은, 맥카시즘 당시 미국과 흡사한 17세기 종파주의 잉글랜드의 한계 속에서 나름대로 종교적 관용이라는 자세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그는 공식적으로 가톨릭 신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지는 않았지만(혹은 못했지만) 탄압은 최소한도로 그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 균형을 항상 유지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사실 가톨릭보다 더욱 잠재적으로 폭발력이 큰 것은, 지난번 글에 언급한 잉글랜드 교회의 앵글리칸-퓨리턴의 분열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제임스는 자신은 교회 내의 분파를 초월한 입장임을 견지했다. 그는 생활방식에서 여러모로 청교도와 안 어울리는 사람이었지만, 예정설을 믿는 칼뱅파임을 자처하였다. 그는 절대 한 분파의 편을 과도하게 들지 않으면서 분파간 갈등의 조정자로 행동하였다.


제임스의 치세에 청교도들이 목소리 높여 주장한 godly한 개혁 대부분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소소한 개혁들은 최대한 반영하려 하였고, 특히 킹 제임스 성경의 번역은 청교도들의 실망감을 상쇄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반면 퓨리턴 중 가장 강경한 이들에게는 좀더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교회 전례 면에서 그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전통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를 위해서 국왕은 '앵글리칸' 혹은 잉글랜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중 일부를 고위 사제로 임명하여 청교도쪽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균형정책 덕분에 제임스 치세 내내 잉글랜드 국교회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앞서 본 그의 여러 정책들처럼 마냥 긍정적인 평만 하기도 어렵다. 재정정책과 마찬가지로, 제임스는 국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손보고 좀더 잘 굴러가게 하기는 하였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하지 못하였다.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제임스가 사망하면서 물려준 국교회는 '안정적이고 번창하였지만, 속은 갈등과 긴장으로 가득한 교회'였다. 더욱이 왕이 키워준 덕분에 성장한 앵글리칸 파는 청교도 강경파와의 대립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 갈등은 찰스 1세가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소결론-제임스의 치세


우선 제임스 1세는 상당한 자질이 있었으며,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서 즉위하였음에도 볼만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는 결코 휘그 사관이나, 몇몇 교양서에서 말하는 왕권신수설만 신봉하며 사치방탕한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다. 오히려 외교와 종교 정책 면에서 그는 동시대인들보다 훨씬 더 진보적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결코 본인 잘못만은 아니지만, 그도 엘리자베스 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에는 결국 손대지 못했다. 그의 치세 중에는 본인의 능란한 정치감각 덕분에 수면에 잠자는 상태였지만, 문제는 어떤 면에서는 더욱 악화된 상태로 찰스 1세의 손에 넘어갔다.


기존 체제, 특히 재정 시스템은, 비틀비틀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유지되고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 왕실의 빚은 더욱 늘어났고, 여기에 그의 치세때 시도되다가 실패한 개혁의 부작용과 제한된 효과가 맞물려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왕과 의회와의 관계, 종교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제임스 1세는 문제가 많은 체제를 1603년에 물려받아 이를 최대한 손질하면서 유지해왔다. 그 와중에 근본적인 수술도 열심히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 이 체제는 마침내 붕괴되기 시작한다.



덧글

  • 존다리안 2017/07/30 13:00 #

    김영삼 대통령...ㅜㅜ
    과거 정권부터 이어진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데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에는...ㅜㅜ
  • Mr 스노우 2017/08/03 10:48 #

    그래도 제임스 1세는 본인 생전에는 별 문제 없이 잘 끌어온 편입니다
  • windxellos 2017/07/30 19:16 #

    외화내빈했던 1대와 방탕했다는 평의 2대와 그걸 다 뒤집어쓰고 목이 잘린 3대라고 하니
    해협 바로 건너편 나라의 14-15-16 라인이 문득 떠오르는군요. 물론 둘이 똑같지야 않겠습니다만.
  • 터프한 얼음대마왕 2017/07/30 20:30 #

    이런 영국사와 영국 내전을 다룬 책과 자료들이 어디에 있을려나요?

    볼수록 영국은 위태위태한것 같으면서도 잘 나가는(?) 역사가 있다는걸 보면 묘합니다요.


    PS. (故) 움베르토 에코의 최근에 기획한 '중세' 란 책은 반드시 구입해서 읽어야 할 책... 입니까?

    움베르토 에코처럼 그의 저서가 나오면 100% 사야만 할 책들처럼요.
  • Mr 스노우 2017/08/03 10:49 #

    주로 영국에... 있겠지요?
    말씀하신 책은 저도 안봐서 모르겠습니다.
  • 파파라치 2017/08/03 11:35 #

    일단 중세는 책이 너무 비싸서...
  • 2017/07/31 15:0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8/03 10:4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7/08/01 14:0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8/03 10:4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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