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의 기원 (7)-엘리자베스 체제의 붕괴 History-근동, 서양사

갈등의 시작: 카디스 원정


막 왕위에 오른 찰스 1세는 젊은 국왕의 패기를 담아 1624년에 어영부영 끝난 스페인과의 전쟁을 다시 추진했다. 그동안 강경파 퓨리턴을 비롯한 수많은 개신교 신민들이 주구장창 대륙의 종교전쟁에 참여하라고 제임스 1세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을 지켜봤으니만큼, 찰스 1세는 자신의 대스페인 개전이 의회와 신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Worden 선생의 지적대로, 그동안 전쟁을 강경하게 요구했으며 기꺼이 개전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이 정작 필요한 전비지출은 거부했던 것이다.


의회: 전쟁하자고 했지 돈 대주겠다고는 안했는데요?



찰스 1세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의회 입장에서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물론 의회는 공동의 목표를 가진 단일한 세력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이 돈 대주는 것을 거부한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우선 지난번 제임스 1세의 요청에 전비를 대주었으나, 제임스 1세의 방침 때문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은 1624년의 기억이 있었다. "그때 모아준 돈 다 어디다 썼냐?"가 이들의 의구심이었다. 그 다음으로 찰스 1세와 프랑스 왕실의 결혼으로 인해 개신교를 위해 싸운다는 찰스 1세의 의도를 못 믿겠다고 나온 강경파 개신교 의원들이 있었다. 그리고 전쟁에 들어가면 국왕의 행정권이 강화될테고 이것이 의회의 독립성을 약화시킬 것이라 두려워한 이들, 제임스 1세 때의 국왕과 의회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 왕 길들이기를 좀 할 필요가 있다고 본 이들 등등 매우 다양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앞의 둘이었다. 게다가 지난번에 서술했듯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재정 시스템이 심하게 맛이 가서, 의회가 화끈하게 돈을 거둬주지 않는 이상 전쟁 치를 엄두도 못낼 수준이라는걸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번째 이유가 약간 이해가 어려울수도 있는데, 찰스 1세는 평생 무늬만 개신교고 사실은 가톨릭이라는 의심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는 매우 경건하고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으며, 모든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바, 단 한번도 가톨릭에 끌렸던 적이 없었다. 사실 그는 이 시기 신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반가톨릭 법안을 나름 열심히 시행했다. 그러나 강경파 개신교도들은 의심을 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찰스 1세의 반가톨릭 정책은 벌금을 거두고 사제를 추방하는 정도였지, 잡아다 죽이는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나친 탄압은 대스페인 전쟁에 필수인 프랑스의 지원을 무효로 돌릴 수 있었다. 또한 지난번에 서술했듯이 찰스 1세는 정치적(이 시기 정치와 종교는 매우 많이 겹친다) 이유로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결심한 바 있었다. 퓨리턴을 위시한 강경파 개신교는 이 점이 불만이었다.



퓨리턴: 아니 화끈하게 잡아서 사지도 좀 찢고, 목도 자르고 좀 그래야지, 이게 뭡니까?



이 점에 있어서도 때때로 탄압을 가했던 제임스 1세보다 정치감각이 떨어졌다고 할 수는 있을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사람 더 많이 죽이자고 한 이들은 후대에 자유와 민주의 투사로 칭송받고, 죽이는 것만은 안하겠다고 한 왕은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미 제임스 1세 때부터 청교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 국교회 내의 아르미니우스파 앵글리칸을 밀어주기 시작했던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찰스 1세는 더욱 확고하게 아르미니우스 파의 편을 들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청교도가 영국 사회의 질서와 안정에 가장 큰 위협이라는 관념이 제임스 1세 말년부터 확고해진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앵글리칸이 강조하는 장엄한 전례가 찰스 1세의 예술적 취향에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신학적으로 찰스 1세는 확고한 칼뱅파 개신교였고, 앵글리칸을 밀어주면서도 이 점은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물론 청교도에게는 전부 가톨릭 2중대로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점들이 결합하여 이 시기 잉글랜드가 가톨릭에 잠식되고 있다는 편집증에 가까운 불안감이 강경파 개신교를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나중 일이지만 찰스와 프랑스인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와의 관계도 의심에 불을 질렀다. 단, Kishlansky 선생의 지적대로, 찰스 1세가 아내에게 휘둘렸다는 전통적인 설은 사실과 다르다. 찰스는 아내의 신앙은 존중했으나, 개인 차원에서 머물도록 엄격히 제한하였고, 그녀의 프랑스인 수행원들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녀의 종교로 인해 찰스 1세는 끊임없는 의심에 시달렸다. 기본적으로 둘의 사이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찰스 1세가 그녀를 정략결혼 상대로 대우하고 애인을 따로 두었다면 의심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애인도 두지 않고, 왕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 점이 찰스 1세가 사실 가톨릭이라는 의심을 부채질했다. 다른 시대 다른 왕이 그랬다면 칭찬을 받을 일이지만, 맥카시즘 시대를 방불케 하는 이 시기 잉글랜드에서는 이게 오히려 욕먹을 일이 되었으니 역시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찌되었건, 이렇게 불충분한 재정지원을 받은 상태로 원정군은 카디스를 향해 떠나갔다. 엘리자베스 시기 월터 롤리 경이 습격하여 명성을 얻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뒤로 많은 시간이 지났고, 이 시기는 유럽 각국의 경쟁이 극에 달하고 군대가 날이 갈수록 진화하던 시기였다. 그런 마당에 꽤 오랜시간 제대로 된 전쟁 경험도 없고(물론 유럽 전쟁에 개별적으로 참전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당시 잉글랜드에 매우 많았지만),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재정 시스템에 의해 지원받는 군대가, 유럽의 강국이며 전쟁으로 날을 지샌 스페인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니 결과는 안봐도 뻔한 것이었다.


카디스 방어전을 지휘하는 스페인군 지휘부


카디스는 진화하는 전쟁 양상에 맞추어 강력하게 요새화되어있었고, 잉글랜드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치욕스러운 참패를 당했다. 탄약은 규격에 맞지 않고, 머스킷은 불량품인 경우가 수두룩했다. 규율과 기강도 엉망이었다. 






균열의 심화


원정의 실패를 놓고 왕과 의회는 각기 다른 곳에 책임을 돌렸다. 의회는 찰스 1세의 베스트 프렌드이자 선왕 제임스 1세의 총신(?)이었던 버킹엄 공작의 무능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였고, 찰스는 "니들이 돈을 안줘서 그런거잖아"로 맞섰다.


새로 개회된 의회에서도 의원들은 전비지출을 거부했다. 이들은 대신 버킹엄 탄핵을 들고 나왔다. "탄핵 없이는 돈도 없다"가 의회의 입장이었다.


물론 1분만에 탄핵되지는 않았다



물론 찰스 1세 입장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일수 없는 내용이었다. 우선 친구를 버릴 수가 없었고, 둘째로 탄핵을 전제로 의회가 약속한 비용은 전쟁 치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흔히 서술되듯이 찰스가 무조건 비타협적으로 나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찰스는 버킹엄을 몇몇 관직에서 해임하고 권력을 제한하겠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의회가 타협은 없다고 강경하게 나왔다.


결국 왕은 돈을 대기 위해 강제공채(forced loan)에 의존할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일종의 전시 특별세로, 사실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Cust 선생이 지적하듯, 세금은 영국 헌정사에서 언제나 예민한 문제였다. 강제공채는 다시 갚을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세금은 아니었으나, 의무로 내야 하기 떄문에 많은 이들에게는 특별세로 느껴졌다. 의회는 '의회의 동의 없이는 과세도 없다는건 영국 커먼 로의 전통이다'라고 주장하며 반기를 들었다. 찰스 1세는 부왕 제임스 1세가 이미 편 주장인 '공익을 위해 국왕의 대권(royal prerogative)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법 전통의 일부다'라고 응수하고 나섰다. 사실 국왕 대권의 행사범위와 과세에 대해서는 이전 시대부터 해석이 분분하긴 했다. 어찌되었건 상당히 많은 이들이 납부를 거부하였고, 이들 중 가장 주도적인 이들이 투옥되었다. 이른바 '다섯 명의 기사 사건'이다.


정치적으로는 악영향이 많았지만, 일단 재정적인 면에서 공채는 성공이었다. 이는 진작 재정 시스템 개혁을 통해 과세 체제를 손봤다면 잉글랜드가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여전히 이 시대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적합한 군대를 제대로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시간을 끄는 사이 스페인과의 전쟁은 다시 평화 협상 모드로 들어섰고, 찰스 1세가 돕겠다고 맹세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은 패배해버렸다.


그러나 국제 프로테스탄티즘의 대의에 잉글랜드가 공헌할 기회는 아직 하나가 남아있었다. 찰스와 버킹엄은 라 로셸에 포위된 위그노를 구원하는 일에 나서고자 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로는 자신을 끈질기게 의심하는 강경파 개신교 신자들과 의원들의 의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함이었다. 둘째로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예상했던 도움을 주지 않은데 대한 응징이었다. 사돈을 맺었음에도, 프랑스는 딸랑 공주만 보내왔을뿐 기대했던 군사적 원조는 주지 않았다. (프랑스는 잉글랜드 가톨릭을 온전히 해방시킨다면 화끈하게 지원해주겠다는 암시를 날렸으나, 그건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찰스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공채로 모든 돈은 군대를 일으킬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충분히 '근대화'할 정도는 아니었다. 라 로셸 구원군은 여전히 자금도 부족하고, 장비도 부족하며 조직력도 별로였다. 스페인 원정과 마찬가지로, 이 원정도 막대한 피해만 내고 실패로 끝났다.






엘리자베스 체제 마침내 붕괴되다


근대 초에 패전은 군주의 위신에 치명타를 날린다. 이 두 실패의 영향은 컸다. 돈 모으느라 욕은 욕대로 먹고, 빚은 빚대로 쌓였고, 서유럽의 양대 강국인 스페인과 프랑스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돈이 떨어진 군대는 별수없이 민가에 하숙시킬수밖에 없었는데 이것 역시 대단히 큰 저항에 부딪쳤다


그러나 찰스 1세 역시 본인이 책임져야 할 실책은 분명 많았으나, 역시 나름대로 할 말은 있었다. 국왕에 대한 의회의 불만 못지 않게 국왕도 의회에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그의 심정을 정리하면 아마 다음과 같았으리라.



찰스: 니들이 그렇게 전쟁하자고 떠들더니, 막상 하려니까 돈은 못주겠다고 하고.. 재정상황 개판이라 돈 모을 방법은 몇개 없는데 반대만 해대고.. 니들이 그렇게 국제 프로테스탄티즘의 대의를 떠들어대서, 유럽의 개신교를 구하려고 나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썼는데, 가톨릭 2중대라고 음모론이나 퍼뜨리고...(ㅠㅠ)



물론 의회는 의회대로 찰스 1세의 행동이 잉글랜드의 전통적 자유를 침해하는 절대주의를 꿈꾸는 것이라고 의심하는 이들, 혹은 진짜 가톨릭 2중대라고 의심하는 이들이 가득했고, 국왕의 행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 결과가 역사적인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이다


찰스는 마지못해서긴 했지만 어쨌든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후 영국 헌장주의와 민주주의 발달사에 남긴 큰 의의에도 불구하고, 당장 큰 영향력은 없었다. 일단은 조항이 애매해서 빠져나갈 구석이 많은데다가, 균열의 근원에 있는 종교문제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사태가 일단락될 가능성은 있었다. 의회의 모든 이들이 다 강경하게 왕에게 저항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명한 의회 지도자들 중에서도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좀 심한것 아님?"이라는 의견을 표명하는 중도파들도 제법 있었다. 이들은 국왕과 의회 강경파 사이에서 나름 열심히 노력을 했다. 더욱이 의회 내 강경파에 회의를 느끼고 찰스 1세의 편으로 돌아서는 이들도 제법 있었기 때문에, 찰스 1세는 결코 고립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화해는 실패했다. 이것은 어느 한쪽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실패의 원인은 의회 강경파 의원들과 찰스 1세 양자 모두의 비타협적 자세에 있었다.


어쨌든 1628년의 세번째 의회에서 국왕은 280,000 파운드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이 역시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비용이었다. 권리청원까지 받아들였음에도 결과가 이러니, 의회에 대한 국왕의 회의는 더욱 커졌다. 그리고 라 로셸을 구원하기 위한 두번째 원정을 준비하더 버킹엄은 휘하 장교에게 암살을 당했다. 지휘관을 잃은 원정군은 완전히 혼란상태로 빠져들고, 라 로셸은 항복하고 말았다.


이제 찰스 1세와 의회의 사이는 완전히 벌어졌다. 그에 대한 저항을 주도하던 의원들이 정부의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종교정책과 재정정책을 비난하며, 국왕의 각료들 중 반역자가 있다고 주장하자 찰스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의회는 해산되었고, 이어서 영국역사에서 전례가 없었던 국왕의 개인 통치 시기가 막을 올렸다.



덧글

  • 함부르거 2017/08/04 14:26 #

    그러니까 그 시대는 일부러 죄 없는 사람들도 좀 잡아다 죽이고, 애인 만들어서 놀아나고 이래야 명군 소리를 듣는 시대였다는 거군요. -_-;;;;
  • Mr 스노우 2017/08/04 15:20 #

    종교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이 시기 영국의 특수성도 감안을 해야겠지요.
  • Fedaykin 2017/08/04 15:13 #

    이거시 민주주의인가 중우정치인가...의회따위 필요없어! 는 대부분의 권력자들이 내리는 결론인거같습니다 ㅠㅠ
  • Mr 스노우 2017/08/04 15:19 #

    사실 이 시기 의회는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집단도, 그런 시대도 아니었으니 중우정치론을 논하기는 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시기 정치는 전형적인 종파주의 정치입니다.
  • 위장효과 2017/08/04 17:40 #

    사실 하르멘센은 칼뱅파 신학자이자 목사였지만 예정론등에 회의를 품고서-사실 그 계기도 칼뱅의 신학을 옹호하려고 공부하다 보니 뭔가 이게 아닌거 같다고 의심한 게 계기가 되었다고...-아르미니우스주의의 기반을 만들었던 셈인데...그 아르미니우스 주의가 가톨릭 2중대 취급받다니 참...

    하긴 당시 골수 칼뱅주의 퓨리턴들 입장에서는 가톨릭 본진보다도 "배반자" 아르미니우스파가 더 미워보였을법도 합니다.
  • Mr 스노우 2017/08/04 23:32 #

    당시 잉글랜드의 냉전시대 비슷하게 경직된 분위기 때문이죠. 아르미니우스파의 대두로 칼뱅파가 분화되자, 위기감을 느낀 강경파들이 더욱 강경해지는것. 제가 지난번에 쓴대로 이 양반들의 기본 주장은 '예정설천국 불신지옥'이었습니다.
  • 키키 2017/08/04 23:23 #

    짧은 지식으로 제가 알기로는, 엘리자베스가 의회를 무서워하지 않은 이유가 드레이크 경을 위시한 왕실 사략선 운영으로 자금이 빵빵했기 때문으로 알고 있는데 맞는지요?

    왜 후임인 제임스 1세나, 찰스 1세는 엘리자베스 처럼 꿀단지를 쓰지 않았을까요? 당시의 신대륙 무역이 주춤했던 것인지? 네덜란드가 무섭게 치고 들어온 것인지?
  • Mr 스노우 2017/08/04 23:30 #

    http://charger07.egloos.com/4132873
    엘리자베스 시대의 현실은 흔히 생각하던 것과 매우 다릅니다. 엘리자베스 시대는 자금이 빵빵하지도 않았고, 의회와의 관계는 갈수록 험해졌습니다.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가 그렇게 못한 이유는, 엘리자베스 1세가 재정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낙후된 상태로 고정을 시켜버려서 그렇습니다. 돈이 있어야 함대고 뭐고 돌리죠.
  • 2017/08/07 09:5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8/07 11:3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7/08/07 12:4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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