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의 기원 (8)-찰스 1세의 개인통치 History-근동, 서양사


개인통치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1630년대 내내 이어진 찰스 1세의 정부는 '개인 통치(The Personal Rule)'라고 불린다. 의회 없이 11년간 이어진 이 통치에 대한 해석도 크게 엇갈려왔다. 전통적인 휘그 사관은 이 시기를 '11년의 폭정(The Eleven Years' Tyrrany)라고 해석해왔다. 비교적 근래까지도 학자들은 이 시기의 정치가 전제적이었으며, 국왕과 행정부가 신민 다수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켰다고 해석하는게 일반적이었다. 반면에 최근의 몇몇 학자들은 이 시기가 오히려 매우 효과적이면서도 온정적인 정부였다고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사실 Hutton 선생이 지적했듯이, 이 개인 통치 시대에 대한 평가는 스튜어트사 전공자들 중에서도 가장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시기이다. 영국 내전기와 관련된 모든 해석이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현재 학자들은 이 시기에 있어서도 한 줄로 요약된 평가는 불가능하다는 점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찰스 1세에게 가장 비판적인 Coward와 Gaunt 선생조차도 이 시기 찰스 1세의 통치의 한계는 명확히 지적하되, '11년의 폭정' 해석은 이후 승자가 된 의회파의 왜곡이 짙게 들어가있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평한다. 진실은 언제나 한줄 정리보다 훨씬 더 복잡하며, 해석이 갈릴 여지가 대단히 많다.


한 가지 기억할 점은, 이 시기를 단순히 전제왕권과 그 반대의 대립으로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1620년대에 붕괴된 엘리자베스 체제를 대체할 모델을 찾기 위한 첫 번째 정치적 실험이었다는데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찰스 1세가 이루고자 한 목표는 무엇이었으며, 그의 11년의 성취와 한계는 무엇이었을까?





찰스 1세의 행정부


개인 통치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11년은 무엇보다도 통치의 제일 중심에 찰스 1세가 서있었던 시기다. 그러나 당연히 왕 혼자서 모든걸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의 의지를 실천에 옮길 조력자들이 필요했다. 바로 그의 행정부를 운영할 대신들이었다.


찰스 1세는 그의 행정부를 다양한 사람들로 채웠다. 이들은 정치적 신념도, 관점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특히 가장 최근에 왕의 측근으로 합류한 토머스 웬트워스(훗날의 스트래퍼드 백작)는 정작 이전 시기에 의회에서 격렬하게 왕과 대립하던 의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찰스 1세가 권리청원을 받아들인 후에 찰스 1세 편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었다면, Hutton 선생이 잘 서술하였듯이, 모두 유능하고 근면한 행정가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찰스 1세는 자신의 정부를 제대로 된 이들로 채웠다. 그러나 퓨리턴이 보기에는 이 인적구성에 매우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이들이 퓨리턴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을 이끌고 찰스 1세는 어떤 정책을 실현하려 했을까? 다시 한번 Hutton 선생을 인용하면, 찰스 1세는 1620년대의 재앙으로부터 확실히 배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정부의 구조와 재정 시스템을 완전히 개혁하기 전에는 대외전쟁도, 의회소집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것은 제임스 1세도 시도했다 실패한 대단히 어려운 과제임이 분명했다. 어찌되었건, 찰스 1세가 절대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개인 통치를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Coward와 Gaunt 선생도 인정하는 바, 찰스가 의회를 영구히 폐지하려 했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정부와 재정을 다 뜯어고치는 개혁을 위해서는 당분간 의회가 조용해야만 한다는 판단을 내렸을 뿐이었다.





재정정책


그렇다면 여러모로 문제의 근원이었던 재정의 개혁은 어떻게 추진되었을까? 찰스 1세와 그의 각료들은 이제는 완전히 시대에 뒤쳐진 유물이 되버린 재정 시스템에 마침내 손을 댔다. 우선 수입을 늘리고 지출을 줄이는게 급선무였고, 과세 체제를 업데이트해야만 했다. 이는 상당한 수준의 행정 개혁을 필요로 하였다.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했듯이, 이 개혁 시도는 제임스 1세때와 마찬가지로 막강한 장애에 부딪쳤다. 이 연재를 처음 시작하면서, 이 당시 잉글랜드에 재정 시스템을 일신하는게 매우 긴급한 과제였다는걸 깨달은 이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바 있다. 의회를 해산시켰으니 왕이 마음만 먹으면 개혁을 할수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도 소위 개혁군주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왕이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것 같으나, 현실적으로 왕은 초인이 아니다. 개혁은 기본적으로 옛 체제에 막강한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수많은 사회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다. 의회가 소집되지 않는다고 해서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집단들이 사라진것도 아니고, 이해관계로 얽힌 집단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도 없는 일이다.


재정과 그에 관련된 행정을 모두 손보는 것은, 돈과 관련된 모든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왕의 후원을 받는 대상자, 관직의 수, 궁정의 규모 등등 수많은 것들이 연결되어있다. 당연히 여기에는 복잡하면서도 강력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한 집단도 아니고 여러 집단들의 서로 다른 반발들을 억누르면서 개혁을 추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통치기 첫해에 찰스 1세와 각료들은 상당히 지출을 줄이는데 성공했으나,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로 보아 개혁에 대한 반발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기 절약은 가능했으나 구조적으로 지출을 줄이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따라서 엘리자베스 체제를 완전히 대체하는 개혁된 행정체제의 수립이라는 목표는 제한된 성과밖에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재정개혁이 완전히 실패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지출 삭감은 뜻대로 안되었으나, 대신 수입은 상당한 증대를 이루었다. 더욱 대단한 것은 이 부분에서는 큰 반발 없이 수입을 늘렸다는 점이다. 예전에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특별세들에 대한 저항도 잠잠해졌고, 관세 수입도 크게 늘어났으며, 해안지방에 대한 선박세도 성공적으로 징수되었다. 특히 후자는 이 때 잉글랜드 남부 해안이 해적의 위협을 받으면서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후 이 세금을 내륙에까지 확대시키자 그때는 반발이 일어났다.


이 부분은,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대성공이었다. 수입도 크게 늘었을뿐 아니라 해군의 질도 크게 향상되었다. 이에 따라 지난 패전으로 실추되었던 국제적 위상도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다. 네덜란드 어선들은 이제 북해에서 조업하기 위해 찰스에게 돈 내고 허가를 받기로 동의하였고, 프랑스도 대서양의 영국 근해에서 함대를 철수시켰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왕실의 빚은, 여전히 많긴 했지만, 상당히 줄어들었고, 재정적자는 고작 18,000 파운드 남짓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옛 체제를 완전히 일신한 것이 아니라는 한계는 분명히 있었으나, 충분히 큰 성과였다.





지방통치


찰스 1세 입장에서는 재앙이던 1620년대는 잉글랜드 전체 입장에서도 좋지 않던 시기였다. Braddick 선생이 잘 설명했듯이, 지난 130년간 인구는 급격히 성장했으나, 잉글랜드 경제는 그 인구에 모두 일자리를 줄만큼 따라서 성장하지 못했다. 노동 공급 과잉으로 실질임금은 하락했다. 게다가 일련의 흉년으로 곡물가는 올라갔다. 개인통치 시대를 시작한 찰스 1세는 의회의 도움 없이 이러한 문제와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Braddick 선생의 연구는 이 시기 국왕의 행정부와 각 지방은 놀랄만큼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전에도 서술한 적이 있지만, 이 시기는 효과적인 통신수단과 지리적 정보의 부재로 인해 현대와 같은 의미에서의 중앙집권은 불가능한 시기였다. 국왕의 개인통치라고 해서 찰스가 지방행정까지 일일히 감독할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시기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지방 행정이 무리없이 굴러가고, 또 행정의 효율화를 어느정도 이뤄낸 것은 그만큼 지방에 적정한 선에서 자치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 시기 널리 퍼져있던 잉글랜드의 공화주의 관념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영국 내전 이후 성립된 공화국이 커먼웰스(Commonwealth)라는 이름을 취했기 때문에, 이 개념이 청교도의 전유물로 아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커먼웰스 개념은 잉글랜드 정치관념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개념이며, 왕정과 반드시 대립하는 개념도 아니다.


예전에 중세 잉글랜드의 정치사상에 대해 서술한 바 있지만, 잉글랜드의 정치사상은 중세나 근대 초나 근본적으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사상을 물려받았다. 여기서 말하는 공화주의는 말 그대로 공공의 것, 즉 res pubulica 혹은 커먼웰스에 대한, 덕성을 갖춘 능동시민의 적극적 참여와 헌신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체제적인 면으로 가면 폴뤼비오스가 주장한 것과 같은 '혼합 정체' 혹은 균형 헌정(balanced constitution)을 강조하는 것이 이 시기 공화주의 이론이다. Braddick 선생이 강조하듯, 그 어떤 것도 직접적으로 군주정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Cust 선생이 지적하듯이, 찰스 1세 본인이 혼합 정체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의회가 이 시기에 소집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공화주의의 이상과 충돌하는 것도 아니다. 이 시기 의회는 영국 헌정주의 이론에 따라도 반드시 주기적으로 소집되어야만 하는 상설기관이 아니었다. 대신 공화주의적 참여정치의 이상은 지방 엘리트들이 적극적으로 지역 행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실현되었다. 고전 교육을 통해 이러한 이상에 익숙한 이 엘리트들은 자발적으로 지방 정부를 참여하였고, 지역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를 단순히 봉사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를 통해 이들은 지역에서 명망을 얻어 지배층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런면에서 Braddick 선생은 찰스 1세 개인통치기의 잉글랜드는 관직보유자들의 공화국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역설한 바 있다.


물론 온전히 지방 정부에 맡겨둔 것은 아니었다. 정말 급한 위기시에는 중앙정부가 개입했다. 그 결과가 이른바 Book of Orders라고 불리는 것으로, 1629-30년에 발생한 경제위기때 만들어졌다. 이는 지방정부가 나아가야 할 개혁방안을 제시한 일종의 청사진이었다. 이 개혁의 징기적 성과가 어느정도였는가는 학자들 간의 논의가 분분하지만,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1629-30년에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는데에는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심각한 위기를 제외하면 대체로 지방 행정은 지방에 일임하는 것이 찰스 1세의 정책 기조였다.


어쨌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조는 대체로 잘 이루어졌고, 찰스 1세로서는 큰 비용 들이지 않고 경제위기와 인플레이션의 시대에 지방행정을 원활하게 유지시킬 수 있었다. 앞서 말한 1629-30년의 위기를 비롯하여, 이 시기에 몇 차례의 흉작과 전염병이 발생했지만 큰 타격 없이 잘 극복할 수 있었다. Braddick 선생이 서술했듯이, 이는 이 시기 잉글랜드 정부가 상당히 건강한 상태였음을 잘 보여준다.




군제개혁 시도


앞서 찰스 1세가 선박세 등을 통해 해군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바 있다. 그러나 이 당시 육군의 상태도 엉망이었다. 근대 초 잉글랜드의 육군은 기본적으로 각 카운티 별로 할당된 민병대 체제였다. 이 체제는 메리 1세가 중세적인 가신단 군대 체제를 끝내면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기존 체제에 아무런 업데이트를 안한게 엘리자베스 1세의 특징이니만큼, 이 시기에 이르기까지 메리 1세 당시의 체제 그대로 머물러있었다. 찰스 1세는 여기에도 메스를 들이댔다.

당시 민병대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하여, 이미 제임스 1세 시절에 부분적으로 개혁을 시도한 바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개혁과 마찬가지로 저항이 상당하여 결국 실패하였다. 찰스 1세는 다시 개혁을 시도하면서 'exact militia', 혹은 'perfect militia' 창설을 목표로 하였다.


일단 찰스 1세에게 비판적인 학자들도 인정하듯. 개혁안 자체는 상당히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제임스 1세때처럼 각 지역에서 맹렬한 반발에 부딪쳤다. 특히 찰스 1세가 지역 민병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내려보낸 직업군인들이 문제였다. 이들은 국왕의 대권에 의해 해당 지역에서 봉급을 지불하도록 되었는데, 이것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반발의 이론적 근거였다.


물론 자기 지역 민병대를 타지에서 온 직업군인이 훈련시킨다는 것에 대한 심리적 반발도 컸다. 사실 따지고보면 군대와 전쟁이 점점 더 전문화되어가는 이 시기에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기억 속의 황금시대인 엘리자베스 시대만을 기억하면서 "엘리자베스 때는 안그랬는데!"라고 외쳤다.


그래도 추밀원이 작정하고 밀어붙였다면 보다 목표에 근접한 결과가 나왔겠지만, 1630년대 내내 평화가 이어지자 이들도 반발을 무릅쓰며 군제개혁을 밀어붙일 이유에 대해 점점 회의적으로 변해갔다. 결국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찰스 1세의 군제개혁안은 본래 의도에 한참 못 미치는 성과밖에 거두지 못했다.





종교문제


마지막으로 언제나 재정과 함께 모든 문제의 양대 근원이었던 잉글랜드 교회 문제가 있다. Hutton 선생이 잘 지적했듯이, 찰스 1세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유럽에서 가장 정체성이 애매모호하고, 가장 행정이 느슨하게 이루어졌으며, 가장 깊게 분열된 교회의 수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찰스 1세의 목표는 좀더 잘 관리되고, 원활하게 돌아가는 잉글랜드 국교회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여기에 있어서 찰스는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와 의견이 일치했다. 그리고 이 둘의 성향은 분명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이었다. 찰스 1세와 로드의 개혁은 잉글랜드 국교회의 전례를 좀더 장엄한 방향으로 일원화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퓨리턴과 강경파 개신교의 격렬한 반대를 낳았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듯이, 이 정책 때문에 찰스 1세의 정부가 신민들과 완전히 괴리된 것은 아니었다. Braddick 선생이 지적하듯, 사실 이 정책에 찬성하는 사람도 많았다. 당시 잉글랜드 개신교 내에는 퓨리턴 못지 않게 반퓨리턴파도 많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찰스와 로드의 앵글리카니즘은 찰스 1세가 사실은 가톨릭이라는 음모론 및 가톨릭 왕비의 존재와 결합하여 제법 많은 개신교도들을 불편하게 한 것은 사실이다. 이들 중에는 결코 퓨리턴에게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로드의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퓨리턴과 제휴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 덕분에 소수파였던 퓨리턴은 조금씩 세를 불려갔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은 아직까지는 잠복해있었다. 전쟁도 없고, 의회가 안 열린 탓에 과열된 논쟁도 없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분위기가 차분했다. 이 시기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있던 반가톨릭 음모론과 군제개혁에 대한 반발은 분란의 씨앗이 될 수는 있었지만 반드시 분란이 터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또한 찰스와 로드는 생각보다 종교정책을 온건하게 추진하였다. Hutton 선생이 지적했듯이, 반발하는 이들은 화형도 교수형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1637년 세 명의 가장 격렬한 반대자들이 모욕적인 글을 출판하자, 마침내 본보기를 보이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들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단두대에 올랐다. 다만 단두대에서 머리 대신에 귀를 베었다. 어찌되었건, 정치적 이유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겠다는게 찰스 1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물론 신체형은 잔인한 형벌임에 틀림이 없고, 퓨리턴은 이를 폭정의 표본으로 몰아갔지만,튜더 군주들이었다면 귀가 아니라 머리를 자르거나 사지절단형을 내렸을 수도 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Hutton 선생의 표현대로, 이때까지 찰스 1세의 통치 16년은 그때까지 영국사에서 정치적 이유로 사형당한 사람이 없는 유일한 시대였다.


사실 1620년대의 혼란상에 비하면 아직까지 잉글랜드에서 종교정책에 대한 반발은 생각보다는 적은 편이었다. 오히려 제임스 1세 때보다 순응하는 성직자들이 더 많았다. 이 정책에 찬성하는 이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 맞춰 더욱 격렬해진 불만세력은 어찌되었건 불안요소였다.






소결론-찰스 1세의 개인통치기


찰스 1세의 개인통치 11년은 성과도 많았고 한계도 많았다. 분명 그는 목표한 바를 모두 이루지는 못했다.(그런데 사실 워낙 이루기 어려운 목표임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11년이 마냥 태평시대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어려운 상황에서 상당히 볼만한 성과를 올렸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는 명백한 결점에도 불구하고(그리고 그의 시대의 많은 문제점들이 거기서 온 것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무능한 군주는 아니었다. 사실 Cust 선생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찰스 1세가 정말 대책없이 무능한 군주였다면 진작에 폐위당했거나 허수아비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행정력도, 자기 세력을 구축하고 그들의 충성을 확보하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


그의 개인 통치 11년은 Braddick 선생이 지적하듯, 17세기 잉글랜드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내외적으로 평온했던 11년이었다. 여러 악조건을 생각해볼때, 평온하게 11년을 끌어온 것은 상당부분 찰스 1세와 그가 선택한 대신들의 업적이었다. 그러나 여러 볼만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파탄난 엘리자베스 체제의 근본적인 면까지 일신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 1620년대의 여러 문제점들은 여전히 수면 아래 잠복해 있었고, 언제라도 상황이 맞으면 폭발할 여지가 있었다.



덧글

  • 파파라치 2017/08/07 13:29 #

    다모클레스의 칼이 대변해주듯, 군주란 자리는 겉에서 보는 것처럼 무사태평한 자리가 결코 아니죠.
  • 슈타인호프 2017/08/07 14:28 #

    참 옛날에 출간된 타임 라이프 세계사에서도 이 시기의 찰스1세에 대해

    "찰스는 어떻게든 해 나갔다. 만약 전쟁만 벌어지지 않았다면 언제까지라도 그럭저럭 해 나갔을지도 모른다"

    라고 비교적 호의적으로 쓰긴 했더군요.
  • Mr 스노우 2017/08/10 12:32 #

    그런면에서 실력에 비해 운이 더럽게 없고,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전형적인 왕이지요.
  • 위장효과 2017/09/28 21:55 #

    본인이 가진 능력-이라기보단 캐릭터?-에서도 몇 가지 결점이 있었죠. 지난 번에 언급하셨던 그런 문제들...

    하지만 그렇다고 암군이니 폭군이니 하고 불러대기에는 기본 자질은 갖추고 있었는데 그노무 시대가...

    이러고 보니 찰스 2세의 정치력이 누구의 유산인지 대략 짐작이 갑니다. 과여 알고 있었던 것처럼 견부호자가 아니라 호조호부호자였네요...^^
  • Mr 스노우 2017/09/29 00:08 #

    스튜어트 왕가의 왕들이 대체로 기본 능력치는 갖춘 편이죠. 심지어 제임스 2세도 상당부분 재평가받고 있으니까요. 하필이면 그 단점이 잉글랜드 특유의 상황과 맞물려버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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