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의 기원 (10)-개인통치의 붕괴 History-근동, 서양사

주교 전쟁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 이상, 찰스 1세는 이제 군대를 모아야만 했다. 게다가 의회의 협조 없이, 국왕의 대권(royal prerogative)에만 의지하여 모아야만 했다. 교과서적인 서술로는 찰스 1세와 로드 주교의 국교회 정책 때문에 잉글랜드의 여론이 대스코틀랜드 전쟁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다고 나오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사실 찰스 1세의 정책은 나름대로 지지자들이 많았다. Braddick 선생이 잘 지적했듯이,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개인통치를 잘 끌고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찰스 1세의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이 없었다는게 아니라, 대스코틀랜드 전쟁으로 인해 잉글랜드의 여론이 극심하게 분열되었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퓨리턴들은 잉글랜드 국교회보다 스코틀랜드 교회와 그들의 대의에 더 공감했기 때문에 찰스 1세의 정책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또한 스코틀랜드 맹약파의 종교적 견해와 주장에는 공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전쟁에 나서고 싶어하지는 않는 중도파들이 있었다. 잉글랜드의 여론은 이렇게 분열된 반면, 스코틀랜드는 맹약파를 중심으로 훨씬 더 잘 연합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스 1세는 나름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모으는데 성공했다. 물론 엘리자베스 시대 이래 잉글랜드 민병대 체제의 고질적인 문제는 많은 개혁 노력에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무기 생산과 공급은 일원화되어있지 않았으며, 장교단은 경험이 부족했다. 그러나 Cust 선생이 지적하듯, 국왕군은 맹약파 군대보다 잘 무장되어 있었고, 수도 많았다. 찰스 1세가 대담하게 나갔다면 맹약파 군대를 격파하고, 왕의 위신도 회복되고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스코틀랜드군을 지휘하던 알렉산더 레슬리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유럽 대륙에서 경험을 쌓은 노련한 군인이었던 그는 일부러 군세를 과시하면서 허세를 부렸다. 그와 마주하던 잉글랜드군 지휘관인 홀랜드 백작은 스코틀랜드군의 수가 실제보다 훨씬 더 많다고 착각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이에 찰스와 잉글랜드 지휘부는 모두 전의를 상실했다. 찰스 1세는 신중한 성격이지만, 결코 겁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전경험의 부재와 역시 경험이 부족한 장교단의 보좌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 뼈아프게 작용하였다.


기세가 꺾인 국왕군은 협정을 맺고 물러섰다. 그러나 이 협정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협상 조건과 달리 맹약파 군대는 해산하지 않았으며, 스코틀랜드 의회는 주교제를 비롯해서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종교정책을 모조리 폐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국왕의 권위에 대한 심대한 타격이었다. 물론 찰스도 두번째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돈을 제공할 수 있는 기구는 의회뿐이었다. 현재 재정 시스템으로는 또다른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무리였다. 이에 1640년 4월 13일, 찰스는 의회를 소집하였고, 이렇게 해서 국왕의 개인통치기는 막을 내렸다.




단기의회(Short Parliament)


물론 찰스 입장에서 의회 소집의 목적은 군비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지난 1630년대에 쌓인 모든 불만들을 일제히 터뜨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찰스를 상대로 일치단결해서 맞선 것은 아니었다. Coward와 Gaunt 선생의 지적대로 그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각 지역별로 선출된 의원들은 자기 지역의 문제들을 해결하는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국왕을 상대로 한 공동전선을 구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세력도 분명히 있었다. 특히 대다수의 귀족원 의원들은 군비 제공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하원 의원들 중에도 기꺼이 국왕과 화해하려는 의원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에 비하면 타협의 여지는 상당히 있었던 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의회 내의 친스코틀랜드 파였다. Cust 선생이 잘 지적했듯이, 리더격인 존 핌(John Pym)을 비롯한 친스코틀랜드(즉 친퓨리턴) 파벌은 이렇게 생각했다.


"국왕과의 화해→전비제공→스코틀랜드 문제 해결→왕의 권력강화→퓨리턴들의 인생이 피곤해진다"


따라서 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국왕과 의회의 화해를 막아야 한다고 단단히 결심하고 있었다.


존 핌


실제로 의회가 열리고, 스코틀랜드 문제의 심각성이 거론되자, 이들은 "스코틀랜드 문제보다 국내문제가 더 시급하다"며 국왕측의 입을 막아버렸다. 존 핌은 아예 대놓고 "우리 나라를 교황에게 팔아먹으려는 음모가 있다"는 근거없는 전제를 들이대면서 1630년대 아르미니우스주의 종교정책을 비롯한 불만사항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장광설을 폈다. 그러면서 왕의 군비 요청에 응하기 이전에, 이런 문제점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콘라드 러셀 선생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이것은 애초에 타협을 바라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물론 하원에는 여전히 진지하게 국왕과의 화해를 바라는 의원들이 상당수 있었기 떄문에 핌의 음모론과 주장이 전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여론몰이 덕분에 우선 국내의 문제점들에 대한 논의가 군비 문제에 선행되어 이루어어져야 한다는 결론은 받아들여졌다.


이때부터 의회의 논의는, 의회측의 "우리 불만을 들어주면 돈을 주겠다"와 국왕 측의 "돈을 주면 불만을 들어주겠다"가 팽팽히 맞서는 상황이 되었다. 의회는 지난 일들을 보건대, 왕의 약속을 믿을수 없으니 먼저 불만사항을 들어달라고 주장했고, 이들의 불만은 크게 선박세와 종교문제로 압축되었다.


그러는 사이 국왕과 의회 내 온건파 사이에 막후교섭이 이어졌다. 온건파 의원들은 일단 '선박세를 포기하는 것으로 왕의 선의를 보여달라'고 이야기했고, 국왕측은 여기에 긍정적인 답을 주었다. 그러자 똥줄이 탄 것은 핌을 비롯한 친스코틀랜드 퓨리턴 의원들이었다. Cust 선생의 표현대로, 이들은 타협을 결렬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선박세만 가지고는 안돼. ~~도 포함시켜야 돼!"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논제를 추가시켜 협상을 질질 끄는 방식이었다.


한참의 교착 상태 끝에 찰스 1세가 약간의 타협안을 제시했다. 일정량의 보조금을 지급받는 조건에서 선박세를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계산을 해보니 폐지되는 선박세보다 찰스 1세에게 지급해야 하는 보조금의 총량이 훨씬 더 많았다. 찰스는 의회의 말대로 선의를 보여줬으니 큰 양보를 한 것이라고 믿었지만, 모든 의원들이 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Cust 선생의 말대로 찰스도 그것을 다 받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의 입장을 대표하는 대신은 일단 큰 액수를 부른 다음에 타협을 통해 조금씩 깎아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이 추가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퓨리턴파는 계속해서 새로운 불만사항을 추가하면서 어떻게든 타협을 저지하려 들었다.


찰스는 더 이상의 지연은 거절로 받아들이겠다고 통보했고, 의회 내 퓨리턴파는 안건을 다시 투표에 붙이자고 주장함으로서 지연전술에 성공했다. 결국 더이상의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었던 찰스는 의회를 해산시켰다. 짧은 시간에 해산된 이 의회는 그때부터 '단기의회(Short Parliament)'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소결론


사실 단기의회는 실패가 예정된 의회는 아니었다. 앞서 보았듯 귀족원은 찰스에게 동정적이었고, 하원에서도 왕과의 화해를 바라는 세력은 여전히 많았다. 찰스의 입지는 적어도 스코틀랜드에서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런 면에서 이 의회는 왕과 의회가 화해를 이룰 수 있었던 사실상 마지막 기회일수도 있었다.


결국 실패의 근원은 종교 문제와 돈 문제였다. 존 핌을 비롯한 퓨리턴 세력은 어찌되었건 퓨리턴에 적대적인 찰스가 성공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선박세든 보조금이든 찰스는 다량의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은 대다수 의원들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았다.(다시 말하지만, 이 시기 대다수의 잉글랜드인들은 엘리자베스 이래로 재정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망가져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협상이 결국 무너진데 있어서 찰스 1세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는 흔히 말하는 것처럼 일체 타협을 하려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늘 지나치게 오래 고민하다가 뒤늦게 결단을 내렸다. 그가 선박세 폐지를 일찍 결심했다면 의회 내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더이상 지연시키면 거절로 받아들이겠다'는 통보도 실수였다. 사실 선박세 폐지를 환영하는 의원들도 많았기 때문에 토론이 벌어졌다면 존 핌 일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협이 성사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단, Cust 선생의 지적대로, 당면한 군사작전을 눈앞에 두고 찰스가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는 점과 이때문에 의회 내 지연전술에 격분할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감안해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존 핌을 비롯한 친스코틀랜드 파벌 퓨리턴 의원들의 방해공작도 대단히 큰 요소였다는 점은 말할 나위가 없다. 찰스 1세가 협상에 있어서 매끄럽지 못한 태도를 보였다면, 이들은 아예 초장부터 협상의 결렬을 목표로 하고 나왔다. 과거 친퓨리턴 사관이 지배하던 역사서술은 이들을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결국 협상이 무너진데 있어서 이들의 책임은 상당히 크다.


어찌되었건, 이렇게 해서 단기의회는 성과없이 막을 내렸고, 이제 잉글랜드에서도 극단적인 갈등의 막이 오르게 된다.



덧글

  • 터프한 얼음대마왕 2017/10/04 18:41 #

    읽을수록 찰스 1세-스코틀랜드-종교와 돈 문제-친스파 의원들... 찰스 1세는 뭘 해도 햄보칼수 없군요.

    국가의 통치자들의 역사가 개인이 통치하는 비중이 크지만 사회-문화-제도-지방-지역 등. 사회와 시스템을 뒤섞어서 평가가 달라진건 많죠. 찰스 1세는 뛰어나고 유능한 '개인' 이 통치하기엔 잉글랜드 자체가 독특하고 복합적으로 뒤섞인 칵테일인것 같아요. 찰스 1세까지 곁들인 칵테일을 마신건 누굴련지....

    ps. 제 개인적으로 엘리자베스 1세 평전도 구매해야 겠네요. 무적함대와의 전투의 실상과 잉글랜드의 이익도 다시 봐야할지도?
  • Mr 스노우 2017/10/05 05:48 #

    근데 한국에 최신 연구결과가 반영이 된 엘리자베스 평전이 나와있는지 모르겠네요
  • 존다리안 2017/10/05 17:51 #

    중앙집권 국가라는 조선조차도 왕이 뭐 하려고 해도 맘놓고 할 수 없었지요. ㅜㅜ
    이건 세계 정치 공통인 듯....
  • 슈타인호프 2017/10/08 07:11 #

    스노우님 이 시리즈 덕분에 결국 십여 년을 읽지 않던 타임라이프 인간세계사 왕정시대 편을 펼쳤습니다.

    확실히 옛날 책이다 보니 찰스의 무능과 비타협성을 강조하고 있네요. 의회 쪽의 비타협적인 태도 같은 건 아예 없는...
  • Mr 스노우 2017/10/09 04:48 #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찰스 1세도 실책이 있었지만, 옜날 책들의 의회파 미화는 솔직히 심각한 수준인 경우가 많죠
  • 2017/10/10 11:5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10/11 07:0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유사역사아웃

원시림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