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의 기원 (11)-파국의 시작 History-근동, 서양사

제2차 주교전쟁과 왕권의 붕괴


물론 찰스 1세도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이 무렵 국왕의 최고 측근은 로드 주교에서 토머스 웬트워스로 옮겨가있었다. 본래 찰스 1세에게 대항하던 의원이었던 그는 왕이 권리청원을 받아들인 뒤 국왕의 편이 되었다. 그 뒤로 그는 찰스를 대신하여 아일랜드를 통치하다 1639년에 잉글랜드로 돌아와 핵심 측근이 되었다. 찰스 1세는 그를 새로이 스트래퍼드 백작에 봉하였다.

토머스 웬트워스, 1대 스트래퍼드 백작


그는 아일랜드에서 국왕의 권한을 확대하기 위해 상당히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펼쳤으며, 잉글랜드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국왕의 권위를 재건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스코틀랜드군의 침공으로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다시 한번 찰스는 의회의 도움 없이 군대를 모아야 했다. 잉글랜드의 여론은 전례없이 양극화되고 있었다. 이는 징집된 병사들의 형편없는 규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단 부족한 자금에서 비롯된 봉급과 빈약한 보급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종교적으로 과열된 상황이 가장 컸다. 한 장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퓨리턴 불한당들이 병사들에게 우리 연대의 모든 지휘관들이 다 교황주의자들이라고 선동하고 있다."


반가톨릭주의는 퓨리턴이 아니더라도 잉글랜드 개신교도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선동은 그 근거없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쉽게 먹혀들어갔다. 이는 심각한 폭력과 하극상으로 이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두 장교가 병사들에게 처참하게 맞아죽은 사례로, 병사들은 이들이 교황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하며 살해했다.


반달리즘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퓨리턴의 영향을 받은 병사들은 행군중에 교회를 습격하여 성찬식 테이블과 스테인드 글라스를 부수고 성상을 모욕한뒤 파괴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습격과 약탈이 아니라 조직적인 '의식'이었다. 이들은 성상과 기물을 형틀에 매달거나 재판을 치른 뒤 화형에 처하듯 불태웠다.


군대의 기강이 이 모양이 됬으니, 싸움이 잘 될리가 없었다. 스코틀랜드가 2차 침공을 감행한 것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상 그때까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은 대부분 홈그라운드에서 싸웠을때였다.(스털링 브릿지, 배녹번 등) 그러나 단기의회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분열상을 제대로 파악했고 때문에 자신있게 침공해올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어진 뉴번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찰스의 위신은 가장 낮은 지경으로 추락했다. 이 시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이 지상의 일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고 믿던 시기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전투의 승패는 그 대표적인 예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찰스가 패했다는 사실은 국왕의 정책이 하느님의 뜻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투가 벌어진 바로 그 날, 열두 명의 귀족들이 의회를 열어야 한다는 청원서를 올렸다. 국왕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북부로 진주한 상태였고, 배상금 지불을 위해서는 의회 외에 방법이 없었다.




장기의회(The Long Parliament)


새로 소집된 의회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있었다. 찰스 1세 정부에 반대하는 이유도 다양했다. 철저한 퓨리턴 모델의 개혁을 이룰때까지는 그만둘수 없다는 강성 퓨리턴들, 왕의 권한이 의회의 권한을 위협하려 든다는 위기감을 가진 이들, 왕의 종교정책에는 동의하지만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이들 등등 다양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이들은 아직까지는 공동의 목표로 묶여있었기 때문에 그 차이점이 크게 드러나질 않았고, 그 덕분에 퓨리턴들이 주도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일단 가장 목소리가 크고 행동력이 있는 집단인데다가,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동의하지 않는 의원들에게도 퓨리턴은 왕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유용한 동맹자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뭉친 의회가 주된 타겟으로 삼은 이는 국왕의 최측근인 스트래퍼드 백작, 로드 주교, 그리고 기타 1630년대 찰스 1세의 정책을 상징하는 몇몇 대신들이었다. 또한 핌을 비롯한 퓨리턴들의 주도로 주교제 폐지를 비롯한 강경하고 급진적인 종교정책을 밀어붙였다.


문제는 제대로 된 대안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의회 내의 대부분의 세력들은 로드의 국교회에서 가장 가톨릭적으로 보이는 부분들을 수정하다는데까지는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이를 대체할 모델에 대해서는 합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핌을 비롯한 강경파 퓨리턴은 목소리는 높았으나, 이들의 주교없는 교회 모델에 동의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더욱이 흔히 과소평가되지만 사실 영향력이 막강했던 귀족원들의 구성원들은 더더욱 주교제 폐지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스코틀랜드라는 변수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꼬아놓았다. 잉글랜드 내로 진주해있던 스코틀랜드군도 주교제를 폐지하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개신교의 안정된 미래를 위해서는 잉글랜드 교회를 스코틀랜드 교회 비슷하게 만들어놔야 안심이 되겠다" 라는게 이들의 계산이었다. 애초에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교회 전례를 잉글랜드 교회와 유사하게 만들려는 시도에 반발해서 봉기한 양반들이, 잉글랜드에 교회를 자기들처럼 바꾸라는 요구를 해온다는게 어불성설이지만,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종교'라고 굳게 믿고 있던 강경파 칼뱅주의자 입장에서는 전혀 모순이 아니었을 것이다. 훗날의 일이지만, 이후 내전기에 스코틀랜드는 의회와 참전을 교섭하면서 줄기차게 '잉글랜드 국교회의 스코틀랜드화'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Cust 선생의 지적대로, 삼왕국의 관계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일단 종교가 단일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찰스와 스코틀랜드 맹약파가 똑같았다. 그리고 잉글랜드 내 퓨리턴은 여기서 자기들과 믿음이 비슷한 스코틀랜드의 손을 들어주었을 뿐이다. 이룰 놓고 친 퓨리턴 성향의 후대 역사가들은 종종 찰스를 폭군으로, 퓨리턴을 자유의 투사로 그려냈지만, 제3자 입장에서 보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표현이 떠오를 뿐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의회가 일치단결해서 스코틀랜드와 퓨리턴의 편을 든 것은 아니었다. 그중 제법 비중이 있는 중도파가 있었고, 이들은 이번에도 왕과 강경파 의원들 사이에서 중재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

프랜시스 러셀, 4대 베드포드 백작


그중 대표격인 인물은 베드포드 백작이었다. 그는 여러 면에서 중재 역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일단, 그는 정책 면에서 찰스 1세와 대립각을 세워왔다. 그러나 퓨리턴의 급진적인 주장(특히 주교제 폐지)에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는 주교제를 지지하는 칼뱅주의자였다. 사실 이런 경우는 모든 세력에게 미움 받을 수도 있지만, 그는 다방면에 걸친 인맥 덕분에 그러지도 않았다. 그는 국왕 주변의 궁정인들 가운데에도 연줄이 있었으며, 동시에 하원의 대표적인 급진파 존 핌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국왕의 주변인물들과 관계가 있으면서 동시에 하원과 귀족원 모두에게 폭넓게 존경받는 중도파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의 주도 하에 타협안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었고, 1641년 1월에서 3월 사이에 상당한 전진을 보였다. 실제로 스코틀랜드측의 주교제 폐지 요구에 상당히 많은 의원들이 불쾌감을 보였고, 반스코틀랜드 감정이 뒤늦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귀족원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는 "로드 주교의 고교회파 모델도, 퓨리턴의 난동도 모두 문제가 있다" 라는 양비론 비슷한 성명을 내놓았다.




스트래퍼드 탄핵 사건


그러나 타협이 이루어지려면 한가지 결정적인 난관이 있었다. 의회는 타협의 조건으로 스트래퍼드 백작과 로드 주교를 비롯한 몇몇 인사들의 탄핵을 내걸었다. 1630년대식의 정책과 아르미니우스적 교회개혁이 복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대신들이 왕 주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베드포드와 핌이 의견을 같이했다. 특히 탄핵은 현재 실세인 스트래퍼드에게 집중되었다. 무엇보다도 스트래퍼드는 아일랜드 주둔군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 편에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사였기 때문이었다.


찰스 1세는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대로 여기서 찰스 1세가 양보하고 스트래퍼드를 내쳤다면, 타협은 성사되고 결과적으로 스트래퍼드의 목숨까지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면에서 왕의 비타협성이 또 한번 문제를 악화시켰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찰스 입장에서 이는 원칙과 명예의 문제였다. Cust 선생이 지적하듯, 찰스는 자신에게 충성한 죄밖에 없는 스트래퍼드를 버릴 수 없었다. 그는 당당히 법정 투쟁으로 나가 스트래퍼드의 무죄가 입증되기를 원했다.


실제로,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이어진 재판에서 스트래퍼드의 탄핵자들은 백작의 반역죄를 입증할만한 명백한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스트래퍼드의 군사력에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법리적 상황이야 어떻듯, 의회파 지도자들은 그를 제거해야만 했다. 결국 의회파는 사권 박탈법(bill of attainer)을 동원했다. 이는 반역자로 규정된 이를 재판 없이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뜻한다.


쉽게 표현해서, 이들은 스트래퍼드 백작의 유죄 여부를 입증하지 못한 채,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반역자이므로 재판 없이 처벌하겠다'라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물론 이게 실효성을 가지려면 국왕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의회 지도자들은 전방위로 찰스를 압박했다. 이 시기의 특징인 온갖 루머를 동원한 대중선동이 이어졌다. 찰스가 사실 가톨릭 교도라 그의 치세중에 교황주의자와 예수회가 잉글랜드에서 번영했다는 헛소문부터, '프랑스군이 스트래퍼드를 구하러 온다'는 소문들이 런던을 휩쓸었다.

스트래퍼드의 처형


급기야 무장한 이들까지 포함한 수천 명의 군중들이 궁전까지 쳐들어와 데모를 벌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추밀원은 사태를 진정시키려면 스트래퍼드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고 조언했다. 결국 왕은 마지못해 법안에 서명하고 말았다. 그는 죽는 날까지 이로 인해 괴로워했다. 스트래퍼드는 런던탑 앞에서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타협의 붕괴


애초에 의회 내 급진파는 타협의 전제조건으로 스트래퍼드의 제거를 요구했다. 그러나 Braddick 선생의 지적대로, 스트래퍼드의 처형은 타협 가능성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베드포드 백작의 계획은 여기서 관속에 들어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사법살인에 지나지 않았다. 국왕 편에서 무력을 쓸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유죄 입증도 하지 않은채 서둘러 대신을 사형시킨 것의 정당성에 대해서 의회 내에서도 의구심을 품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로 인해 영국의 정계와 여론은 극단적으로 분열하기 시작한다.


두번째로, 이는 찰스 1세에게 큰 원한을 심어주었다. Hutton 선생의 지적대로, 즉위 이래 그때까지 단 한번도 정치적 이유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자랑스러운 기록이 깨지고 말았다. 더욱이 그 희생자는 자신의 충신이었다. 그는 스트래퍼드의 죽음을 용인한 자기 자신을 죽을때까지 용서하지 못하였고, 그를 죽이도록 몰아간 이들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왕과 의회 내 급진파들의 관계는 이로서 돌아가지 못할 강을 건넜다.


게다가 그 직후, 베드포드 백작이 사망해버렸다. 이로서 관속에 들어간 타협 가능성에 대해 못질까지 끝난 셈이 되었다. 이제 중재 역할을 할 사람도, 모두가 만족할만한 중재안을 만들 사람도 없었다.


찰스 1세는 위신도 깎이고, 정치적으로는 고립무원이었으며, 대중들의 여론도 좋지 않았으며, 자신을 위해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측근 신하까지 잃었다. 이렇게 되니 한가지 의문이 들게 된다. 찰스 1세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고립되고, 모든 면에서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면, 대체 내전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내전이 일어나려면 적어도 나라를 양분할 정도의 자기 세력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닐까? 게다가 잉글랜드는 국왕이 통제할수 있는 상비군을 갖춘 나라도 아니지 않은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번 글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해보도록 할 것이다.



덧글

  • 2017/10/16 09:4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10/17 06:4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진냥 2017/10/16 14:11 #

    오오..... 점점 더 재미있어집니다...(팝콘을 우걱우걱)
  • Mr 스노우 2017/10/17 06:43 #

    감사합니다ㅎㅎ
  • 2017/10/17 20:5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10/17 06:4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위장효과 2017/10/16 19:16 #

    스트래포드 백작의 처형 과정에 대해서 의구심이 있었는데...이렇게도 볼 수 있군요. 하긴, 그 의구심이란 게 고집불통에 정치력 제로인 찰스 1세가 자기 권력 지켜줄 중요한 대신을 희생양으로 너무 쉽게 내 준 게 아니냐...이정도 였지만 이번 연작포스팅을 읽고 나니까 대충 이해가 갑니다.

    결론: 하여간 전 유럽급 어그로꾼 칼뱅파...
  • Mr 스노우 2017/10/17 06:45 #

    오히려 찰스 1세에게 비판적인 입장은 스트래퍼드를 더 일찍 포기하지 못했다고 까지요. 뭐 어쩌란거지...싶은 생각도 듭니다.
  • 터프한 얼음대마왕 2017/10/17 00:13 #

    이래저래 찰스 1세의 수난사인지, 찰스의 단점인건지, 찰스의 입장도 이해가 가면서도 왜 그랬을까? 란 의문도 들었는데 그럴만한 사유가 있었네요.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문제-경제, 세금, 의회 구성원 문제-선전선동-같은 편은 없고-종교 분쟁.... 내전이 벌어진 사유와 크롬웰의 등장과 크롬웰의 군대. 잉글랜드는 당시 유럽에서 진행된 칵테일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복잡한 칵테일이네요. 맛은 죽여주도록 독하지만요.
  • Mr 스노우 2017/10/17 06:45 #

    사실 이유 없이 터지는 일은 없으니까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유사역사아웃

원시림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