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의 기원 (13)-막이 열리다 History-근동, 서양사

퓨리턴의 불안

중도파들이 급격하게 국왕 쪽으로 기울자 퓨리턴들은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기들이 다시 소수파가 되고 왕국 전체가 왕을 중심으로 연합할 판국이었다. 이에 이들은 다시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퓨리턴들은 여론 확보에 있어서는 자신들이 제시하는 미래에 대한 비전과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에 대한 선전보다도, '교황주의자들의 음모'를 들고 나오는게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존 핌은 하원에서 지난 여름 발병한 역병을 교황주의자들의 음모의 예로 들며 선동연설을 시작했다. 사실 Braddick 선생의 지적대로,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역병을 퍼뜨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영국 정치사에서 칮아보기 쉽지 않은 예였다. 그러나 어쨌든, 17세기 사람들의 마인드에서 역병은 신의 분노와 깊게 연관된 질병이었다. 따라서 핌은 신의 분노를 외치면서 가톨릭을 더 강경하게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핌은 자신이 진리를 전하고 있지, '선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은 퓨리턴들이 그랬지만, 그는 골수 반가톨릭주의자였다. 심지어 그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특수한 표식이 된 옷을 항상 입도록 강제하여 언제든 차별대우가 가능하도록 하자는 주장(.....)을 편 적도 있었다.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별을 달게 한 것의 선구자같은 주장이지만, 이는 당시 강경파 퓨리턴의 마인드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역병 주장은 생각보다 많은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여전히 '퓨리턴 포퓰리즘'이 더 위험하다는 생각은 적어도 왕국의 절반쯤 되는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찰스 1세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졌다.

그러나 그해 말, 퓨리턴에게 구원의 손길은 다른 곳에서 왔다. 이제까지 벌어진 많은 일들이 그랬듯이, 이 역시 근본적으로 엘리자베스의 유산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생긴 일

16세기에 잉글랜드의 대아일랜드 정책은 기본적으로 아일랜드 토착 귀족들을 잉글랜드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실패했다. 이 실패는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아일랜드에는 두 종류의 엘리트가 있었다. 하나는 토착 아일랜드인 귀족들이었고, 두번째는 '올드 잉글리쉬'라고 불리운 중세 때 이주해온 앵글로-노르만 귀족들의 후손들이었다. 튜더 정부는 당연히 이 '올드 잉글리쉬'를 대아일랜드 정책에 있어서 잉글랜드의 동맹자로 보았다. 그러나 그 기대는 어긋났다. '올드 잉글리쉬'들은 대부분 개신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아일랜드인 편에 섰다.

아일랜드의 잉글랜드화와 개신교화를 모두 이루겠다는 목표는 실패하였고, 튜더 정부의 통치는 점점 더 적대적인 수탈로 변해갔다. 이는 1590년대에 정점을 찍었고, 결국 이 시기는 수차례에 걸친 아일랜드인들의 봉기로 점철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이에 더욱 가혹한 탄압으로 답했다.

아일랜드의 전쟁은 당시 유럽식 전쟁과는 달랐다. 아일랜드의 전통적인 전투방식은 게릴라전이었다. 이에 분노하고, 이들을 야만인이라고 더욱 멸시하게 된 엘리자베스의 병사들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학살로 답했다. 더욱이 이들은 '아일랜드 가톨릭'을 근절하는게 신의 뜻이라고 믿고 더더욱 거리낌없이 학살을 자행했으며, 특히 아일랜드 가톨릭 수도사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아일랜드인들에게 어떠한 원한이 심어졌을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쟁에서 표출된 잔인성은 스페인의 중남미 정복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튜더 정부의 또다른 해결방식은 조직적인 식민정책이었다. 현지 귀족을 개신교화하는데 실패한 튜더 정부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개신교도들을 대대적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은 이후 '뉴 잉글리쉬'라고 불리게 된다. 이들은 토착 엘리트들의 땅을 상당부분 강탈하고, 플랜테이션 형태의 농장을 경영하며 살았다. 튜더 정부는 이들이 아일랜드에 소위 '제대로 된 법과 종교'를 심는 수단이 되리라 기대하였다. 즉, 16세기 튜더 왕조의 아일랜드 정복은 이후 근대 식민주의 정책의 전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종교적으로는 훨씬 관용적인 자세를 유지했던 스튜어트 왕가의 왕들은 아일랜드에 대해서도 유화적인 태도로 나왔으며, 불만에 찬 아일랜드 토착민과 '올드 잉글리쉬'의 목소리에도 나름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였다. 특히 새로 이주한 '뉴 잉글리쉬'는 대부분 강경 칼뱅파였고, 얼스터에 정착한 스코틀랜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톨릭 민중들을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앞서 핌의 반가톨릭주의를 생각해본다면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1630년대, 찰스 1세의 대리로 아일랜드에 파견된 토머스 웬트워스(스트래퍼드)가 로드 주교의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정책을 실현하자, 자연스럽게 아일랜드의 칼뱅파도 삼왕국의 다른 칼뱅파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국왕의 정책과 맞섰다. 마찬가지로, 찰스 1세는 아일랜드의 '올드 잉글리쉬' 지도자들에게 관용책을 쓰면서 협조를 얻어내려 하였다. 그러나 스트래퍼드의 처형 와중에 런던의 분위기가 급격히 달아오르자, 찰스는 관용책을 철수해야 했고, 이에 실망한 아일랜드 지도자들은 반란으로 응수했다.









아일랜드 봉기와 그 여파

사실 아일랜드 지도자들이 생각한 봉기는 자신들의 요구(아일랜드 의회의 독립, 종교의 자유, 토지보유권 등)가 받아들여지면 바로 취소할 수 있는 가벼운 것으로, 중세 이래 흔한 항의 형태였다. 그러나 문제는 16세기 이래 억눌리며 원한을 쌓아온 아일랜드 민중들이었다. 이 봉기는 그들에게 제대로 불을 질렀고, 지도자들의 예상과 다르게 대단히 거세게 일어났으며, 유혈사태로 번졌다.

민중들은 그동안 쌓여온 원한의 진원지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칼뱅파의 플랜테이션을 공격했다. 잔인한 학살이 이어졌으며, 물론 칼뱅파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아서 곧바로 보복 학살이 벌어졌다. 상황은 아일랜드 내의 내전에 가까운 양상이 되었다.

이는 잉글랜드 하원의 존 핌과 퓨리턴에게 기가 막힌 선전거리를 제공해주었다. 이들은 연설과 팜플렛 등 모든 수단을 통해서, 자신들이 할수 있는 가장 자극적인 용어를 동원해 이 사건을 최대한 왜곡해서 보도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이 개신교도들을 향해 저지른 잔혹행위가, Braddick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무지막지하게 과장된 형태'로 보도되어 잉글랜드 전역에 퍼져나갔다. 게다가 그 글들 대부분은 사실 실제 있었던 일보다는 저자들의 상상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특히,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이 당시 아일랜드의 잔혹행위는 쌍방에서 일어났다고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퓨리턴들은 칼뱅파의 잔혹행위는 쏙 빼놓고 이들을 철저히 무고한 희생자인것처럼 보도했다. 이 당시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 봉기가 크게 왜곡되어 보도되었다는 점은, Coward와 Gaunt 선생같이 비교적 의회파에 우호적인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당시 떠돌던 팜플렛
찰스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었다. 그의 반대파들은 잉글랜드 개신교도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본능적인 반가톨릭주의를 자극하기 위해 아일랜드 사건을 아주 효과적으로 써먹고 있었다.


"거 봐봐. '교황주의자들의 음모' 진짜 있잖아. 괴담 아니잖아"


하는 식이었다. 많은 이들은 찰스 1세의 측근에 '교황주의자'들이 포진해있다는 예전 소문을 떠올렸고,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봉기 지도자인 오닐 경은 자신이 국왕의 위임장을 받았다고 주장한 바 있기 때문에(사실 중세 이래 왕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불만사항을 토로하기 위한 목적의 봉기때 흔히 쓰던 수법이다) 더욱 그러했다. 찰스 1세는 그 위임장이 위조라고 해명했으나, 의회는 이를 무시했다.(훗날 정말 위조였다고 밝혀졌다 -_-)

여기에 더해서,


"아일랜드놈들이 곧 잉글랜드로 상륙해서 개신교도들을 몰살하러 온다더라"


는 의도적으로 조장된 헛소문까지 떠돌았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두려움이 다시 한번 잉글랜드 사회 전역을 휩쓸었다. 가만히 있던 잉글랜드 가톨릭 신자들이 체포되고, '아일랜드인들이 우리 목을 따러온다'며 자경단을 조직하는 지역까지 나타났다.

찰스 1세는 자신이 직접 진압군을 이끌고 아일랜드로 가겠다고 했지만, 이미 패닉 상태에 빠진 많은 이들은 비밀 가톨릭이거나 가톨릭에 휘둘리는 왕이라 믿을 수 없다고 나섰다.


아일랜드 봉기 이후 두달만에 잉글랜드의 의회정치 체제는 사실상 붕괴했다. 이제 내전의 첫 탄이 울리는것만 남은 상황이 되었다.


덧글

  • 터프한 얼음대마왕 2018/01/04 19:25 #

    아일랜드... 이후 3백년도 안되서 영국이란 인재 + 학살 + 자연을 합친 대규모 기근과 독립전쟁.

    영국 내전에서 아일랜드가 큰 비중을 차지했을줄은 몰랐습니다. 읽으면서 눈이 커졌습니다.

    프로파간다 + 음모론 + 두려움 + 누적된 폭탄들이 터진 게 영국 내전이군요. 찰스 1세가 가련할 지경입니다....
  • Mr 스노우 2018/01/05 18:08 #

    뭐 찰스 1세도 잘못이 없진 않지만, 본인 책임 이상으로 상황이 너무 심하게 꼬였죠.
  • 존다리안 2018/01/04 22:16 #

    영국의 기묘한 점 : 정복자라는 놈들이 현지민과 거의 동화되어 나중에 종주국이 이래라 저래라 하
    면 정복자,현지민이 같이 들고 일어난다. (백년전쟁, 당시에는 노르망디에서 시작해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 후예들인 영국 왕이 프랑스 왕의 신하였다든가....)

    여기도 비슷했군요. 아일랜드 토착세력+영국에서 건너온 세력이 손잡고 본국에 저항하다니...
  • Mr 스노우 2018/01/05 18:08 #

    당시는 국민국가 시대가 아니었으니까요. 당장의 이해관계나 종교적 신념이 더 큰 영향을 미치지요.
  • 2018/01/05 09:14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1/05 18:1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키키 2018/01/06 13:39 #

    외부의 사태가 내부의 정치 문제를 심화 발전.. 어찌되면 당연한 수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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