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의 기원 (14)-내전 시작되다 History-근동, 서양사


대간주(Grand Remonstrance) 사건 

정부의 기능이 마비된 상황에서, 아일랜드 프로파간다 덕분에 힘을 회복한 존 핌을 주축으로 한 강경파 의원들은 이후 '대간주(Grand Remonstrance)라고 명명된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는 이 강경파 의원들이 생각하기에 찰스 1세의 즉위부터 현 시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실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이에 대한 시정을 '겸손하게' 촉구하는 문서였다...고는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내용이 픽션에 가까운 반가톨릭주의 음모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 기본 내용인즉, "왕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휘둘리고 있고, 우리는 이런 왕이 이끄는 정부를 믿을 수 없다. 더욱이 아일랜드 반란같은 중차대한 현실 앞에서, 가톨릭에 휘둘리는 왕이 이를 제대로 해결하리라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왕 주변의 가톨릭부터 제거해야 한다."인데, 기본 전제부터가 틀렸으니 찰스 1세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문서였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그는 평생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으며 가톨릭 신자들을 잡아다 죽이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특별히 가톨릭에 특혜를 준 적도 없었다.(물론 퓨리턴들은 그 '잡아죽이지 않은 것'이 문제며, 이 때문에 왕을 믿을 수 없다고 비난하였지만)

Braddick 선생이 지적했듯, 이 문서는 사실상 찰스 1세 본인을 바티칸과 예수회가 주도하는 거대한 음모의 꼭두각시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 문서의 목적은 어떤 면에서 봐도 국왕의 위신과 정당성을 치명적으로 손상시키기 위함이었다. 

물론 아일랜드 덕분에 퓨리턴이 세력을 회복했다지만, 일전에 그들의 깽판짓 덕분에 국왕 편으로 돌아선 세력들도 만만치 않았다. '대간주'는 결코 의회의 일치된 뜻이 아니었다. 이 문서는 찬성 159표 반대 148표로 간신히 하원을 통과했다. 이 역시 영국 정계의 양극화를 잘 보여준다. 의회 내에서 생각만큼 동조세력을 확보하지 못하자, 강경파는 이 문서를 아예 출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런던 시민들 중 자신들의 동조자를 규합해서 압박을 넣으려는 생각이었다. 문서 공개 여부도 124대 101로 쉽지 않게 통과되었다.

어찌되었건 찰스 1세는 대간주를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지금까지 그는 의회가 내민 문서에 버티거나 시간 끈적은 있었어도, 대체로 잘 서명해왔다. 하지만 이것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여기에 있어서는 찰스 1세를 비난하기 어렵다. 문서 자체도 허수아비치기에 가까운데다가 찰스에게 가장 비판적인 Coward와 Gaunt 선생도 인정하듯, 이런 류의 문서에 서명할 17세기 국왕은 없다.






정면충돌

동시에 런던의 분위기는 한층 더 혼돈의 카오스로 빠져들고 있었다. 런던은 다양한 정치적, 종교적 의견을 가진 수많은 집단들이 거주하던 국제적 대도시였으며, 이들은 대단히 정치적으로 능동적이었다. 그리고 의회 강경파는 이들을 자신들의 자산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대간주를 공개하였다. 이는 말 그대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셈이 되었다.

의회의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런던의 여론도(그리고 전국적인 여론도 함께) 양분되어버렸고, 점점 더 극단적으로 변해갔다. 아직 폭력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뿐 이미 상황은 내전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Braddick 선생의 말대로, 냉정히 따져보면 상황은 왕에게 더 유리했다. '대간주'의 내용이 억지라고 생각하며, '퓨리턴 포퓰리즘'이 '교황주의자의 음모'보다 더 위험하다고 믿는 이들이 여론의 절반은 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난해에 의회가 일치단결해서 왕과 맞서던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러나 이 냉정하게 따져보는 것 자체가 후대 역사가들만이 누릴수 있는 사치다. 당대 사람들 입장에서는(특히 찰스 1세 본인은 더더욱) 런던의 분위기가 나날이 혼란스러워지는 마당에 냉정히 따져볼만한 여유 따위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국왕을 분노하게 했던 것은 강경파의 타겟이 왕비에게 집중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왕비 측근의 가톨릭 신자들을 제거하고 이들을 프로테스탄트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이어서, 이제는 아예 대놓고 왕비의 종교의 자유 자체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분노를 넘어서, 찰스 1세 입장에서는 불안할수밖에 없었다. 스트래퍼드 백작을 처형으로 몰고 갔던 탄핵사건이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해도해도 너무한 강경파의 공격과 왕비의 안전에 대한 불안이 찰스 1세가 의회를 향해 무모한 공격을 시작한 배경이 되었다. 1642년 1월 4일, 찰스 1세는 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의회에 진입하여 존 핌을 비롯한 강경파 지도자 다섯 명을 체포하려 하였다. 그러나 다섯 의원들은 이미 의회를 빠져나가 런던 시티로 탈출한 뒤였다. 찰스 1세의 이 시도는 정치적으로 큰 타격만 남긴채 실패로 끝났다. 


다섯 의원을 체포하려 시도하는 찰스 1세

다음날 찰스 1세는 시티로 가서 다섯 의원의 신병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미 런던이 통제불가의 상황에 빠졌으며, 여론이 극단적으로 양분되었다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을뿐이었다. 시티의 시의원들이 찰스 1세의 요구를 거부하는 가운데, 길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두 패로 갈라져서 각각 "의회의 특권! 의회의 특권!""불한당 존 핌! 하느님, 국왕을 보호하소서!"를 외쳐댔다.








내전의 막이 열리다

시티에서의 소동을 겪은 찰스는 런던에서는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왕은 일가를 피신시키고 자신도 런던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영국의 의회정치 체제가 붕괴했다는 것이 만방에 알려졌다. 이후 여름이 오기까지 왕과 의회 강경파는 몇 차례 의미없는 타협시도를 했으나 말 그대로 의미없는 시도였다. Coward와 Gaunt 선생의 지적대로, 이때 의회가 보낸 타협 조건들 자체가 이미 강경파가 주도하는 의회는 타협할 생각 자체가 없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 시기동안 양자는 전쟁준비를 하는 동시에, 치열한 여론전에 돌입했다. 의회 강경파들은 계속해서 가톨릭 음모론을 논하면서 동조자들을 규합했다. 퓨리턴에 반대하던 의원들은 이미 국왕 측으로 달려갔기 때문에, 의회에 남은 이들은 사실상 퓨리턴이거나 친퓨리턴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이 음모론은 매우 잘 먹혔다. 동시에 런던을 떠난 국왕측 역시 '퓨리턴 포퓰리즘'을 강조하면서 맞섰다.

양측은 서로 자신들이 '진정한 종교(True Religion)'와 질서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면서 맞섰고, 지역과 계층을 불문하고 '교황주의자들의 음모'를 더 겁내는 이들은 의회파 측으로 달려가고, '퓨리턴 포퓰리즘'을 더 겁내는 이들은 국왕 측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여름이 오자 마침내 대전쟁의 막이 올랐다.


내전의 시작-노팅엄 성에 국왕의 깃발을 세우는 찰스 1세






다음번에는 연재의 총정리 겸 에필로그가 올라갑니다.

덧글

  • 키키 2018/01/06 13:47 #

    이쯤되면, 찰스가 불쌍할 지경이군요. 어째 일이 점차 꼬여만 갔군요
  • Mr 스노우 2018/01/09 07:05 #

    사실 찰스가 옛날부터 동정표는 꽤 받아왔습니다. 그럴만한 면이 충분히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지요.
  • 연성재거사 2018/01/06 15:58 #

    시리즈 잘 읽고 있습니다. 덕분에 기존에 잘 이야기되지 않았던 많은 부분을 배우고 있습니다. 굽신굽신
  • Mr 스노우 2018/01/09 07:05 #

    감사합니다
  • 2018/01/08 09:0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1/09 07:0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터프한 얼음대마왕 2018/01/09 23:09 #

    모두가 광기에 휩싸이는 영국을 보고 있습니다. 의회의 민주주의는 무슨... 프로파간다 파워가 무섭습니다.

    종교는 예나 지금이나... 인류가 종교가 없으면 세상은 진보했을지도 의문입니다. 있어도 많이 문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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